# 158
57장 - 유서 깊은 용서 (1)
[무슨 얘기를 하셨던 겁니까?]
일요일 따위 속세의 것에 불과하다며 편집에 돌입했던 유종찬 PD는, 30분도 못 되어 전화해서는 억울한 투로 물었다.
그 태도가 조금 귀엽게 느껴졌다.
그렇게 말하면 본인은 분노하겠지만.
“뭘 물어보는 건지 모르겠네요.”
[16시 52분…… 그러니까, 저희가 3단계 상담 촬영 준비하면서 평상 앞쪽에 카메라 세팅할 때 말입니다. 예정보다 일찍 오셔서 가족들 데려다가 일장연설을 하셨죠? 마이크 충전 중이라 소리는 없었지만, 관찰카메라에는 다 찍혔습니다.]
“그렇군요. 예, 딱 그 정도 얘기였습니다. 소리가 들어갈 필요 없는…… 별로 대수롭지 않은 얘기요.”
[……선생님. 정말 죄송한데,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어떤 면에서요?”
[그 대화 직후부터 가족들이 달라졌잖습니까? 장남만 싸고돌던 부모가, 차남을 위해 스스로 바뀌려는 의지를 보이게 됐습니다. 동생을 남보다 못하게 대하던 장남은 그 녀석한테 싫은 소리 못 하게 됐고요. 무엇보다 그 차남…… 이준영은 아예 다른 애가 됐죠. 짜증만 내고 으르렁거리던 그 문제아가, 갑자기 고개 푹 숙이고 네 네 알았어요 이랬잖습니까? 직면이라는 걸 하셨던 거죠? 그래서 바뀐 거 아닙니까?]
“글쎄요. 만약 그랬다면요?”
[그렇게…… 그렇게 내담자들이 바뀌는 과정이 프로그램의 핵심입니다. 시청자들은 그걸 보려고 고구마 같은 문제행동들을 감내하는 겁니다. 그런데 아무 계기도 없이 갑자기 멀쩡한 집안이 돼버린다? 이러면 예능도 다큐도 안 돼요.]
예능도 다큐도 안 된다라.
그것참 마음에 드는 이야기였다.
가족상담은, 예능도 다큐도 아닌, 일상이니까.
“유 PD. 그 부분은 염려할 필요 없습니다. 21일에 후일담 촬영하면, 그때 그 가족이 직접 계기에 대해 말할 거예요.”
[……그렇습니까? 아니, 그래도 극적 구성이 안 되는데요.]
“극적인 가족이 흔합니까? 감정이 극적으로 변한다는 것은…… 이를테면 미워하던 사람을 사랑하게 되거나, 사랑하던 사람을 미워하는 경우지요. 그 집안은 그렇지 않았어요.”
[예? 완전히 차남을 개차반 취급했었는데요?]
“행위와 감정을 동일시하지 말아요. 그 집안은 정말로 양호했어요. 단 한 명, 상담사가 있었거든요. 그 아이 덕분에 모든 악감정이 가라앉은 채였습니다. 애초에 누구도 누구를 미워하지 않았어요. 그저 서로 사랑하는 가족이었습니다.”
[그게 무슨…… 이준영이, 구박데기를 자처했다고요?]
이해가 빠른 친구다.
감정적인 면에서는 그렇지 못했지만.
[말이 안 돼요. 그럴 리 없어요. 중3짜리…… 아니, 소급해서 보면 문제행동 때는 중2였던 애가, 자기가 원해서 문제아가 됐다고요??말도 안…… 아니. 일단은, 대체 왜요? 설마 자기가 구박데기 되는 걸로 가족들이 품고 있는 정서적인 문제들을 해소해주려 했다고요? 지 앞가림도 못 하는 꼬마가요?]
“그렇게 말하면 좀 거창하군요. 희생을 의식적으로 선택했다고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무의식적인 기작이 컸겠지요.”
무의식에 한정해도 상당히 거창하긴 하지만……
실제로 그랬다.
이준영은, 그 가정을 지켜온 성자였다.
강박처럼 기강을 말하면서도 장남의 치부를 덮어줬던 부.
장남의 일탈에 대한 불안을 학력지상주의로 지워냈던 모.
이상과 현실의 괴리로 일그러질 미래만이 남았던 형.
이준영은 그들의 엘릭서가 됐다.
장남과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문제아로서.
부모는 차남을 보며 그래도 장남이 더 낫다며 위안했다.
자랑스러운 장남의 범죄라는 인지부조화에서 달아났다.
형은 동생에게 호통치며 그래도 쟤보단 낫다며 위안했다.
부적응적 대처로 이어질 자괴감을 회피했다.
만약 이준영이 비밀을 참아내지 못했다면.
늘 자신만을 향하는 가족의 공격이 밉고 미워서, 저 범죄자보다는 내가 더 낫잖아요, 그런 말을 외쳤다면.
NPD의 이준일은 높은 확률로 자멸했을 것이다.
장남의 끝을 목격한 부모는 술에 찌들었을 것이다.
손바울 식으로 표현하자면, 100%의 확률로.
이준영이 가족 대신 자기 얼굴만을 물들였던 것은, 그런 심리학적 역동을 이해하고 대비한 까닭은 아니었을 터.
그저 무의식적인 배려였으리라.
그렇지만 그 무의식에 중대한 감정이 숨어 있었다.
“준영이는, 가족을 사랑했습니다. 자길 천덕꾸러기 취급하고 애정 어린 말 한마디 해주지 않았지만…… 그런 대우를 감내했습니다. 형 역시 같았어요. 부모답지 못한 부모 때문에 범죄에까지 이르게 됐지만, 그러면서도 좋은 장남이고자 애썼습니다. 모친은 불안감에 찌든 채로도 아이들을 방치하지 않았습니다. 부친은 왜곡된 인지도식을 품었음에도 회초리 선에서 체벌을 끝마쳤습니다. 그들 역시, 가족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정은 무너지지 않아요. 제가 마이크 끄고 일장연설 떠들지 않았더라도, 회복했을 겁니다.”
[아니…… 그러면 안 된다니까요? 선생님께서 심리학적으로 딱 간파를 하고, 명언도 해주고, 그런 그림이 필요한데.]
“그런 그림은 없어도 됩니다. 21일이 되면 아실 거예요.”
[어떻게 그렇게 자신하시는 겁니까?]
“미움은 쉽지만, 사랑은 숭고하거든요. 어렵고 또 어렵지만, 그 하나로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거든요.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편집에 집중해요. 나도 바쁜 사람입니다.”
[하…… 예. 일단 알겠습니다.]
조금 까칠하게 대꾸한 것은, 유종찬을 위해서였다.
스스로 고민할 필요가 있는 인물이다.
‘나사없’의 PD로서 이후 나와 보조를 맞추려면.
솔직히 말하면 그의 의견 역시 틀리지 않았다.
내가 개입하지 않았을 경우, 회복의 확률은 반반.
NPD라는 질환 자체가 최소 5년의 심리치료를 요한다.
아무리 바보 같은 이준영이라도, 그토록 긴 시간 구박데기 신세를 참아낼 수 있었을지는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렇기에 제3자의 개입이 필요했다.
독심술사 소리를 들을 법한 대리폭로가.
결과야 그 스스로 비밀을 폭로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과정 면에서 차이가 발생한다.
내부의 공격이 아닌 외부의 침략이기에.
마술사의 공격 속에서 자신들이 사랑으로 서로를 지켜온 가정임을 깨닫게 되면, 자연히 공동대응 전선이 펼쳐진다.
그 안에서는 부적응적 행동이 줄어든다.
쉬운 미움은 외부로 돌리고 어려운 사랑에 집중하게 되니.
김지연의 상담을 꾸준히 받는다면, 이준일의 NPD조차 1년 안에는 해소되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모든 염려가 지워진 것은 아니다.
실은 NPD라는 것 역시도 원인보다는 결과 쪽이기에.
부 이신웅은 이기자부대- 27사단 출신.
내가 잘 아는 부대다.
97년에 입소한 신교대가 바로 그곳이었으니.
어쩌면 몇 달 정도는 시기가 겹쳤을 수도 있겠다.
유격장 빗돌에 ‘훈련은 무자비하게’가 음각된 부대.
유명 스타들이 줄줄이 입소한 뒤로는 좀 나아진 모양이지만, 나 때까지만 해도 훈련만 무자비한 게 아니었다.
동기끼리 간디도 여기 다녀가면 미친개 될 거라 떠들었다.
그런 곳에서 26개월을 보냈을 이신웅이 문제부모가 된 것은, 생각해보면 그리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뜬소문으로 자살률 1위라는 말이 있는 사단.
뇌를 바꾼다는 면에서는 게임보다 더했으리라.
아마도 전역자의 대다수가 트라우마를 경험했을 터였다.
그때야 어느 부대인들 안 그랬겠냐만.
그렇기에 나는, <용서받지 못한 자>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감독 윤종빈과 배우 하정우의 시작점인 독립영화.
사실적인 가혹행위 묘사가 군필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했다.
내 경우에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영화였다.
히어로무비 위주의 취향 때문은 아니다.
군인의 자살을 다룬 작품인 까닭이었다.
내가 전역한 지 6년이나 지나 나온 작품이고, 하정우가 스타덤에 오른 뒤로 인터넷에 영상도 많이 올라오게 됐지만.
호기심으로도 재생 버튼을 클릭해본 적 없다.
간신히 지워낸 미움들이 다시금 넘실댈 것만 같아서.
그런 영화를 DVD로 구입해둔 것은……
아마도, 이런 날을 위해서였겠지.
“아, 안녕하쇼…….”
이신웅은 그야말로 복잡한 표정으로 인사했다.
손에 들린 것은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저가 와인.
남의 집에 방문하는 것이 참 오랜만인 듯했다.
나이를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나 같은 야매 상담사가 아닌 바에야, 우리 동년배들은 집에 놀러갈 만한 베프가 거의 안 남았을 확률이 높으니.
“어서 오세요. 들어오시죠.”
“예…… 가족 분들은?”
“아내는 일 때문에 사무실에 나가 있고, 딸은 학원에 갔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서재에 들어선 이신웅은, 척 보기에도 주눅이 들어 있었다.
형편의 차이가 큰 탓이리라.
만년부장이라 해도 업계 1위 기업의 실세였다.
누적 연봉만 13억은 될 내 세간살이가, 살펴보는 것만으로 위압감을 줄 법도 했다.
저 상태로는 어떤 대화도 피상적이겠지.
분위기를 풀어줄 필요가 있을 듯했다.
“이기자.”
“……뭐요?”
“97군번입니다. 79연대 2대대 박격포.”
“어어? 진짜로? 허허. 나, 95군번, 1대대인데? 허허허. 이게 무슨 일이야 ?옆 대대 후임이었네? 얼굴 봤으려나?”
“얼굴은 못 보셨을 겁니다. 가을군번이라서요. 이기자.”
“……하핫. 그래, 많이 이겨라!”
호통 같은 목소리로 짬 찬 구호를 외친다.
볼이 빨갛게 된 것이, 같은 연대 사람이 무척 반가운 눈치.
나로서는 그 얼굴이 참 안타까웠다.
이신웅이 꿈꾼 가정은, 아마 군대 같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군생활도 꽤나 잘했겠지.
군생활을 잘 버티지 못한 사람이라면, ‘기강’이란 어휘 자체를 불편하게 느꼈을 테니까.
사회 역시 자신을 대우해줬던 군대 같길 바랐으리라.
그렇지만 그의 직업은 택시운전사.
직업에 귀천은 없다지만, 우리 사회에선 천대받는 직종이다.
개인택시가 아닌 이상 수입 역시 불안정.
그래서야 가정에서도 충분한 존경을 받기 힘들 터였다.
그렇기에 더더욱 사고방식이 경직되었을 것이다.
사회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그래서 자신 같은 A급이 폐급 취급을 받게 된 것이라고, 그렇게만 믿으며 가족들을 닦달했으리라.
과거의 추억에 매달리는 것도 당연했다.
그게 아니면 힘든 세상에 낙이 없었을 테니까.
“하하, 거참. 아, 신기하네. 왜 말 안 했어요? 이렇게 만나기 쉬운 인연이 아닌데. 어제 얘기를 해주지 그랬어요?”
그렇기에, 그 인연만으로 숫제 친구처럼 대하고 있다.
내게는 그런 그가 참 안타깝고……
싫었다.
“전역하신 뒤겠지만, 98년에 저희 대대에서 이등병 자살 사건이 있었습니다. 알고 계십니까?”
“어, 어…… 그랬나. 후임들한테 들어본 것 같긴 한데.”
“그래서 군대 얘기는 즐기지 않습니다.”
“아…… 그럴 수 있겠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기 앉으세요.”
내 의자에 이신웅을 앉히고, 딸의 의자를 가져와 앉는다.
그 뒤에 빔프로젝터를 가동했다.
2500안시 시네빔에 또 살짝 주눅이 들었던 이신웅이지만, 영화를 재생하기 전에는 조심스레 질문을 입에 담았다.
“근데…… 영화를 보자는 건 뭐요? 촬영은 아닌 것 같고.”
“그저 영화를 보는 겁니다.”
“왜……?”
“방송 외적인 상담입니다.”
“영화를 보는 게?”
“예.”
“무슨 영화길래…… 어. 그거, 군대 얘기 아뇨?”
“맞습니다. 하정우는 아시겠지요.”
“그렇긴 한데…… 군대 얘기 싫어한다면서?”
“이이제이(以夷制夷)입니다. 일단 보시지요.”
싫은 사람과 함께이기에 싫은 영화를 본다는 그 함의를, 이신웅은 쉬이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그저 거북이 같은 얼굴로 스크린을 바라봤다.
<용서받지 못한 자>는, 절대적이고 상대적인 이야기다.
상명하복을 강제하는 군대 이야기.
2000년 무렵의 내무반 등을 배경으로 하며,?부대 안팎에서 발생한 두 건의 자살이 주된 갈등을 이룬다.
하정우가 분한 유태정은 A급 병장.
고참들의 입맛에 맞게 후임들을 갈구면서도, 그 후임 개개인에게는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렇지만 전역 후에는 그 시절을 잊으려 애쓴다.
억지로 따랐을 뿐 그것을 즐기지는 못했던 까닭에.
윤종빈 감독이 분한 허지훈은, 유태정에게 갈굼당하는 장면이 영화의 백미라고 평가되는 고문관 캐릭터다.
선량한 엘리트인 이승영 상병의 부사수.
그는 이승영에게도 배척당한 뒤에 자살한다.
이승영은, 그 죄책감으로 인해 탈영한 뒤 자살한다…….
군필자들에게 크게 공감받은 작품이랬지.
아마, 미필자들에겐 짜증과 공포만 불러일으켰을 것 같다.
경험자라면 그 상대성을 쉽게 이해하리라.
그러나 사실은 절대적으로 부조리한 일들만이 플롯 전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것을 시청하며……
상담사로서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나는 이신웅의 반응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
오랜 과거의 악몽 때문에.
괴물처럼 변한 김 이병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나는 사실, 이승영보다 더 ‘용서받지 못할 자’였다.
막을 수 있는 죽음을 막지 못했으니.
유태정처럼 A급으로 군생활을 마치는 게 아니라, 이승영처럼 엉망으로 무너졌어야 마땅한 캐릭터였다.
자살자의 얼굴을 직접 마주한 사람의 끝은 그래야만 했다.
그렇지만 나는……
용서받지 못한 자는 아니었다.
저 이신웅이 그렇듯이.
“신웅 씨.”
“……예.”
“영화는 어떠셨습니까?”
“……찝찝하네. 이런 걸 왜 보자고 한 거요?”
“왜 보자고 했을 것 같습니까?”
“그…… 상담이라고 했으니까, 뭔 의미가 있겠지.”
“다시 여쭙죠. 자살한 허지훈이 이승영의 꿈에 나온 씬이 있었습니다. 이승영의 커피를 받으며, 고맙습니다, 이승영 상병님은 정말 좋은 고참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하죠. 마치 용서 같은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왜 자살했을까요.”
“좀 애가 약하고, 그런 애여서 그랬겠죠.”
“신웅 씨라면 자살하지 않으셨을까요?”
“나야…… 나야 안 죽죠. 내가 왜 죽어요.”
“그렇군요. 준영이가 괜한 배려를 했던 모양이네요.”
빔프로젝터의 작동이 끝난다.
암막 속에서, 푸른 스크린만이 빛나는 서재.
그 안의 이신웅이 두려운 표정으로 물었다.
“진짜…… 비밀 지키실 거죠? 그래야 돼요. 진짜로.”
“지킵니다. 그럴 수밖에 없어요. 준영이를 위해서라도.”
“……진짜로 준영이가 얘기한 거 아뇨?”
“아닙니다. 저는, 아는 것만큼은 잘 아는 사람이에요. 예를 들면 지금 신웅 씨가…… 저랬으면 나라도 자살했을지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신 것까지도 알고 있지요.”
95군번의 운전사는 찔끔한 표정을 감추려 노력했다.
그 얼굴을 굳이 바라보진 않았다.
그저 조용히 용서에 대해 이야기했다.
“신웅 씨는, 훌륭한 군인이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훌륭한 아버지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운이 참 좋으세요. 과도한 기대 속에서 인격장애를 앓던 장남은, 자신의 범죄로 인해 자칫하면 자살을 기도할 수도 있었습니다. 과도한 비난 속에서 간신히 하루하루 버티던 차남이, 그럼에도 가족을 사랑하지 않았다면요. 준영이는 가족의 비밀을 가슴에 묻은 채 혼자 고통받으려 했습니다. 신웅 씨 가족을 지킨 건 내가 아니에요. 당신의 허지훈은 죽지 않았고, 당신의 이승영은 당신을 용서했습니다.”
“……뭔 소린지 모르겠네.”
“알아들었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집에 돌아가면, 차남을 한번 꼭 끌어안아주세요. 용서받은 자의 의무입니다.”
그런 대화 중에 현관문이 열렸다.
콧노래를 부르며 들어선 딸이, 서재 문을 열더니 기함했다.
낯선 아저씨의 존재 때문은 아니었다.
“아 뭐야! 왜 내 의자 앉았어!”
“하하. 지수야, 인사해. 아빠 군대 선임이야.”
“아 몰라, 짜증나! 의자 내놔.”
“그래 그래. 신웅 씨, 미안합니다.”
“안녕하세요! 아빠, 방송 가기 전에 나 좀 봐!”
박지수가 폭풍처럼 의자를 끌고 사라진 뒤.
이신웅은, 몹시 못마땅한 투로 물었다.
“딸이, 너무 버릇없는 거 아뇨? 기강이 영 없네.”
“이게 정상입니다.”
“……이게 어떻게 정상이요?”
“신웅 씨나 나한테는, 이게 정상적인 대접입니다. 뭘 얼마나 해줬다고 기강을 바랍니까? 재계 서열을 다투는 회장님도 자식에게는 꼼짝 못 한다는데. 노벨상 받은 석학들도 자기 자식은 대하기 어렵다는데. 일하느라 애들 내팽개쳐야 했던 당신이나 내가 대체 뭐라고, 아이에게 기강을 바란단 말입니까? 이 지옥 같은 세상에 충분한 준비도 없이 낳아놓은 것이 이미 죄인데. 미안해하기만도 남은 날이 모자란데.”
“아니, 그거는, 너무 이상한 논리 아뇨?”
“전혀 이상하지 않아요. 우리는 간신히 용서받은 사람들입니다. 아이가 아빠라고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기뻐해야 하는 사람들이에요. 그건 조금도 억울하거나 슬픈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직 기회가 있으니까. 어떤 부모들처럼 다시는 아이를 보지 못하게 되지는 않았으니까. 그 기회에 감사하며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죽기 전에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아이들이 그 마음을 알아주든 말든, 용서하고 또 용서해야, 우리 스스로가 행복하게 눈을 감을 수 있을 겁니다.”
“그…… 너무 그…… 불공평하잖아요.”
“불공평이요? 애들은 부모를 보고 배우는 법입니다. 마음을 받으시려거든, 신웅 씨가 먼저 아이들에게 마음을 주셔야지요. 물질적인 생활비는 애들한테는 체감이 안……지수야?”
살짝 열려 있는 문으로, 딸이 빼꼼 얼굴을 내민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표정이었다.
낯선 아저씨와 논쟁하는 것이 자기 때문인가 싶었던 모양.
“……아빠, 나 너무 소리쳤어?”
“하하. 찔렸어?”
“응…… 미안. 아저씨, 죄송합니다.”
“괜찮으시대. 괜찮아. 사랑한다, 딸.”
“아, 뭐래!”
사과하러 와서는 또 소리치고 가는 딸.
그 등을 바라보며, 이신웅이 중얼거렸다.
“……딸이 참 귀여워요.”
“아드님들도 참 귀엽습니다. 보고 배운 게 없어서 표현하지 못하고 있을 뿐. 받고 나서 베풀려고 하지 마세요. 용서하고, 남김없이 사랑하세요. 그래도 행복합니다. 아빠니까요.”
“음…… 거, 노력은 해볼게요. 아무튼…… 나 갑니다.”
연대 선임을 떠나보내고, 나는 중대 후임을 생각했다.
삶을 놓는 순간에마저 선량했던 아이.
나를 용서했던 김 이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