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6
56장 - 상담사와 가족 (2)
“이건 참, 예상도 못 한 전개네요.”
유종찬은 흐뭇하게 웃고 있다.
초반부터 흥미진진한 장면이 나와 기분이 좋은 모양이지.
현장감 넘치는 가정의 갈등이란 어떤 시청자라도 채널을 고정할 수밖에 없는 요인이다.
그러면서도 내가 집안 분위기를 휘어잡아 이렇다 할 문제행동이 안 나왔으니, 지금이야말로 웃을 때다 싶었을 터였다.
그러나 내 기분은 그와는 반대다.
110의 ‘진단’으로 [암시 구조화]의 감정이 사라져감을 느낄 수 있었기에.
간신히 전해놓은 그리움마저 잦아들고 나면, 더는 이준영의 문제행동을 억제할 수 없게 된다.
“유 PD. 웃을 상황이 아닙니다.”
“아닙니까? 방송적으로는 괜찮게 흘러갔는데.”
“결론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스릴 넘치는 직면은 불가피한 업무였을 뿐입니다. 그래서야 긍정적인 라포가 안 쌓여요.”
“그래도…… 부모가 잘못을 인정하게 됐잖아요?”
“아닙니다. 그저 부인할 수 없는 증거 앞에서 움츠러들었을 뿐이고, 이내 불편한 반응들이 나올 겁니다. 그때부터가 전쟁이에요. 자정 안에 퇴근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거야…… 첫날이고 하니까, 다들 각오는 하고 있지만요.”
그렇지만 유종찬의 각오는 조금 부족했던 듯했다.
이후 개별상담을 진행하는 동안 그가 지은 표정을 보면.
“애들끼리, 서로 갈등도 있는 게 당연한 거 아뇨? 댁들은 애들 안 키워봤어요? 형제간에 그렇게 자기 거 안 뺏기려고도 하는 거지. 그런 걸로 삐쳐서 학교에 숨어들고 그러는 게 잘못인 걸, 뭘 가정에 문제가 있니 없니 하는 거요?”
한숨 소리가 카페 2층의 상황실을 채운다.
고개를 젓고 있는 스탭들의 반응이다.
마음에는 공감하지만, 이번 촬영이 끝나면 내담자를 앞에 뒀을 때의 태도에 대해서 교육을 진행해야 할 듯했다.
“예, 신웅 씨 말씀도 옳습니다. 차남의 행동이 훌륭했다고 말씀드리는 게 아니에요. 다만, 가족이니까요. 구성원의 실수는 곁에서 위로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조건 잘못했다고만 비난해버리면, 역효과가 날 수 있습니다.”
“그럼 잘못한 걸 잘했다고 해요? 들어보니까, 준일이가 아주 잘했더만. 댁들은 둘째놈이 얼마나 게임만 하고 공부를 안 했는지 몰라서 그렇게 쉽게 말을 하는 거지. 게임 하라고 노트북 빌려주고 그랬으면, 지금보다 더 심했어. 학교에서 유급하고 그랬을 거요. 장남이 장남 역할을 한 거지.”
요즘 학교는 그리 쉽게 유급되지 않는다는 말은, 패스.
팩트로 폭행하는 일은 빈번해선 안 된다.
공격받는다고 느끼면 반발심만 커질 테니까.
“예, 장남으로서 역할을 한 게 맞습니다. 그렇지만 그 역할이 꼭 좋은 결과만을 낳을까요?”
“당연하지. 집안에는 그렇게 기강이 있어야 해요. 내가 운전을 하니까 집에 잘 못 들어오는데, 훌륭한 장남이라도 있어서 다행이요. 준일이가 진짜 난놈이거든. 어떻게 내 밑에 그런 아들놈이 나왔는지 참…… 신기하고 기뻐요. 걔는 크게 될 거야. 그러니 준영이 놈도 더 엇나가지 않고 저 정도인 거지. 지난번에는 걔가 학원에 가 있어서 못난 놈의 새끼가 어미를…… 흥. 그러지 않았으면 기강을 잘 잡았을 거요.”
기강.
중요한 키워드가 하나 나온 것 같다.
그 준거와 [내담자 정보]의 기술을 비교하며, 돌려 말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다만, 지금 준영 군은 부모님께서 편애를 한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두 분께는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으시겠지요. 하지만 아이들은 쉽게 오해를 합니다. 팔아봤자 5만 원도 받기 힘들 데스크탑과 지금도 100만 원 넘게 거래되는 고급 노트북. 준영 군 입장에서는 차별받는다고 생각했을 법해요. 그에 더해서, 그 편애의 대상인 형까지도 자길 규제의 대상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이러면 준영 군은 어디에도 마음 기댈 데가 없어져요.”
“그런 거야 행복한 고민이지. 밥 세 끼 잘 먹고 지 혼자 쓸 수 있는 컴퓨터까지 있는데, 뭐가 불만이요? 나 때는 그런 건 상상도 못 했어. 여기 선생님들은 다 알 거요. 댁은 몰라도.”
“잘 압니다. 저도 마흔일곱이라서요.”
“……뭐요?”
“신웅 씨보다 두 살 연하입니다.”
“……뭔, 희한하네. 연예인이라 그런가. 아무튼 그 문제는 그만 얘기해요. 게임중독 막내한테 기강 잡은 게 뭔 문제라고.”
기강이라는 것은, 좋게 말하면 질서다.
그렇지만 본질적으로는 상명하복.
누군가 명령하고 누군가 복종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현대의 일상에서는 결코 자연스럽지 않은 어휘였다.
“혹시 신웅 씨는, 복무를 어디서 하셨는지요?”
“나요? 이기자부대요. 그건 왜?”
“……아닙니다. 이쯤 하지요.”
고집불통 이신웅에게 자기보고검사 페이퍼를 쥐어주고 옆방으로 보낸 뒤, 조명기가 고개를 흔들며 투덜거렸다.
“아유, 참, 돌겠네. 애들이 왜 그렇게 까탈스러운지 알 법해요. 아빠 닮은 거지. 저렇게 사람이 불통이니 무슨 얘기인들 공유를 하겠냐고. 탤런트 공유가 와도 공유가 안 되겠네.”
“선배님, 지금도 카메라 돌고 있습니다.”
“아니 뭐, 이거야 편집해주시겠지. 그렇죠, PD양반?”
“하…… 답답하네 정말.”
조명기의 너스레를 이어받은 건 이용덕.
그 역시 심적으로 불쾌감이 큰 눈치였다.
“몇 살이나 먹었다고 ‘나 때는’ 운운하는 건지. 나 때와 달라진 상황인 걸 알면 거기에 맞출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을, 끝내 자식 탓만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형한테까지 구박받으면서 부모한테 뭐라 한 마디 하소연도 못 한 차남 입장을 생각해보면…… 저 옥탑방은 그냥 감옥이었겠어요. 거실이고 방이고 비난을 피해 도망갈 곳이 없는……. 여기 출연자로서 할 말은 아니지만, 나쁜 사람은 있습니다. 자기 애가 어쩌다 망가졌는지도 모르는 부모라면, 흥. 나쁘다는 말밖에 더 해줄 수가 없습니다. PPD(편집성 인격장애)로 진단하고 싶을 정도예요.”
“교수님. 그런 말씀은 너무 잔인합니다.”
“……PD양반. 이것도 편집하세요.”
멋대로 떠들고는 PD만 찾는 교수들에게 유종찬이 울상을 지어 보일 무렵, 김지연이 조심스레 내 소매를 쥐었다.
“선생님…… 이거, 괜찮을까요? 갈등 양상이 너무 넓은 것 같아요. 자칫하면 오늘 안에 아무것도 해결 안 될지도……”
“그럴 일은 없습니다.”
“그래도, 교수님도 계속 표정 안 좋으신데…….”
투덜대는 말은 없지만, 한효준 역시 불편한 기색.
전반적인 상담의 기대치가 낮아진 까닭일 터였다.
그런 분위기가 다음 면담 이후 급격히 가속화됐다.
“그 자식이 공부는 하나도 안 하고 게임만 하니까요. 그니까 당연히 비번 걸어놔야죠. 그게 뭐 잘못됐어요?”
장남 이준일의 토로.
얼굴에는 부끄러울 것 하나 없다는 당당함이 가득하다.
절로 한숨이 나오는 광경이었다.
“자, 준일 군. 무슨 말인지 우리도 알아요. 준일 군은 형으로서 동생이 잘되길 바랐던 모양이네요. 그렇지요?”
“아뇨. 잘되길 안 바라는데요? 저렇게 살면 인생 망하죠.”
“예, 그러니까 형으로서 챙겨주고 싶었겠지요.”
“아닌데요. 어디 가서 엄마 욕먹일까봐 그런 건데요.”
그 말에서 묘한 감정이 느껴졌다.
엄마 욕먹일까봐……
110의 ‘진단’이 그 말 아래의 처연함을 발견했다.
“준영 군이, 모친을 욕먹인 일이 있었나요?”
“학교 기어들어가서 게임하고 그러면, 엄마가 욕먹죠.”
“예, 물론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그건 준일 군이 노트북에 비밀번호를 걸어둔 이후의 일이지요. 그 전에도 그런 일이-”
“많았죠. 원래 공부 못했으니까요.”
“그렇군요. 형으로서 마음고생이 많았겠네요. 그렇지만 공부를 원래 못했던 거면, 낮은 성적이 게임 탓은 아닌 셈인데-”
“공부도 못하는데, 게임까지 중독되니까, 별로인 건데요. 엄마까지 패는 패륜아 새…… 당연히 욕먹어야죠.”
이준일은 첫인상과 무척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가족상담 때의 반응과 개별상담 때의 반응이 정반대인 것은, 보편적으로는 억압된 내면을 드러내는 징후.
그 준거로 [내담자 평가]가 뚜렷해졌다.
반면 양숙자는, 고집 면에서는 앞선 남자들보다 나았다.
다른 측면에서 염려스러운 점이 많긴 했지만.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남편이랑 애들이 워낙, 이렇게 잘, 그런 표현들을 안 하는 성격이다보니까, 괜히 선생님들 보시는 앞에서 못 볼 꼴을 보여드린 것 같고요…….”
“괜찮습니다. 저희에게 미안해하실 필요 없어요. 어디까지나 여러분의 대화를 도와드리기 위해 왔을 뿐이니까요.”
“네, 그렇게 도와주시러 오셨는데, 준일이가 그걸 숨겨서…… 저희가 그걸 몰라서, 너무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드렸어요. 걔가 원래 그런 애가 아닌데, 왜 그랬을까? 정말 똘똘하게 동생 잘 보살피는 애거든요. 그런데 좀…… 실수를 한 거예요.”
좋게 말해 배려심이 많고, 나쁘게 말해 자존감이 낮은 편.
이때 좋고 나쁨을 결정하는 것은 환경이다.
위태위태한 가정 속에서라면 괴로움이 클 인물이었다.
“저희가 더 죄송하지요. 불편한 기억을 떠올려주시길 부탁드려야 하니까요. 준영 학생의 게임을 말리다가 갈비뼈가 부러진 적이 있으시다고요. 당시 상황이 어땠습니까?”
“네, 저기, 준영이는 잘못한 게 없어요. 제가 못나서-”
“괜찮습니다. 평가하고 비난하려는 게 아니에요. 그저 가족 사이의 감정 양상에 대해 분석하는 절차입니다.”
“네……. 그날, 준일이는 학원에 가 있었고요, 준영이가 남편한테 크게 혼이 났어요. 게임 너무 많이 한다고 화내면서 이제 매도 때리고……. 그게 안쓰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방에 가봤는데, 매 맞은 손으로 또 게임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너무 답답하고 화가 나서, 코드를 뽑아버렸어요.”
“……그래서 폭행이 발생한 거군요.”
“아뇨, 그런 게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애가 다 필요 없다고, 엄마도 필요 없다고 하면서 소리를 쳤어요. 그게 남편한테 들리면, 또 혼나고 맞을까봐, 그래서 말리려고 제가 이렇게 끌어안았는데, 준영이가 몸부림을 치다가 절 밀쳐서…….”
“아. 밀려서, 책상에 부딪치셨던 거군요.”
“네, 네. 준영이는 나쁜 애 아니에요. 그냥 저, 게임 때문이에요. 게임에 중독이 돼서, 애가 이상해진 거예요.”
그렇게 단순화할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게임 과몰입은 원인이 아닌 결과 쪽인데.
인간의 정서적 마약이 게임이라면, 반려견에겐 산책이 있다.
그렇지만 산책을 아무리 반복적으로 시켜본들 그것이 광증 같은 정형행동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중독적인 맴돌이를 반복하는 것은, 목줄에 매인 개들이다.
그 관점에서 문제를 다시 봐야 한다.
특정 게임으로 즐거움을 느끼고 스트레스를 해소하며 적당 시간의 플레이에 만족하는 A가 있다.
반면, 해당 게임을 하려는 충동을 참지 못하고, 플레이를 하고 있는 순간순간조차 불안을 보이는 B가 있다.
그때 그 게임은 문제의 근원일 수 있을까.
B는 그 게임만 없었다면 정서적으로 건강한 사람이었을까.
그저 스스로도 몰랐을 뿐, 이미 다른 문제로 일그러져 있던 건 아니었을까.
국내 게임중독 의심자 900명을 대상으로 한 게임과몰입힐링센터의 연구에서, 약 800명의 의심자들이 ADHD, 우울증, 조울증, 아스퍼거증후군 등의 질환으로 진단됐다.
그것들이 전부 게임 때문에 생겨난 질환일까.
역으로, 게임 과몰입 증상이야말로 다른 정신질환을 조기에 발견하게 도와주는 신뢰도 90%짜리 진단키트는 아닐까.
……이런 얘기도 패스해야 되겠지.
양숙자의 상태는 척 보기에도 좋지 않다.
자책을 부를 직면은 결정적 순간까지 미뤄둬야 할 터였다.
“다른 얘깁니다만, 숙자 씨. 준영 군 때문에 어떤 창피를 당하셨던 일이 있었습니까? 게임 문제가 불거지기 전에요.”
“네? 아, 아뇨. 전에는 그런 일은 없었어요.”
“준일 군은 그런 인상을 받은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요.”
“아니…… 그런 적은 없는데. 준영이는 모범생은 아니지만요, 재작년까지만 해도 속은 안 썩였어요. 공부는 못해도 착했고요, 친구들도 많았고, 그랬어요. 비교 많이 되는 형이랑도 크게 싸우는 일이 없었고……. 이상하네요. 왜 그렇게 생각했지? 그냥…… 말실수를 했나봐요. 걔도 참, 평소엔 똘똘하면서.”
“예. 그럼 다르게 여쭤보겠습니다. 준일 군 때문에 심한 창피를 당하셨던 적은 있습니까?”
떠보는 질문에, 양숙자가 덜컥 굳는다.
옆자리에선 한효준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이준일의 반응에서 그도 뭔가를 눈치채고 있었던 모양.
“숙자 씨. 준일 학생에겐 그게 트라우마였을 겁니다. 그래서 직접 물어보지 못했습니다. 숙자 씨께서 말씀해주세요.”
“아뇨, 아뇨! 준일인, 아니에요! 저희는 그냥, 준영이 게임만 못 하게 해주시면 되는데요? 그런 건, 묻지 마시고요…….”
갑자기 남편 이상으로 강경해진 태도.
도저히 더는 질문할 수 없어서, 가만히 검사지를 건넸다.
그녀를 보낸 뒤에야 한효준이 입을 열었다.
“의도적으로 감추고 있다는 느낌, 받았나?”
“예. 장남 쪽도 뭔가가 있군요.”
“그럴 만도 하지. 집안 자체가 좀…… 자네한테는 어떻게 보였을지 모르겠으나, 내 경우엔 공기가 무겁게 느껴졌어.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보며 안달복달하는 그런 분위기. 그 안에서는 편애의 수혜자 쪽도 마냥 편안하지는 못했을 게야. 그런 사례를 많이 봤기에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어.”
“……그 부분을 숨기는 건, 촬영 때문이겠지요?”
“그래. 차남의 게임 집착이나 탈선 쪽이야, 애초에 학교에서 발각돼서 문제가 불거진 부분이지. 하지만 올해 고등학교 들어간 장남 쪽은 달라. 과거의 문제가 방영됐을 때 현실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곤란해질 거라 판단했을 수 있네. 그런 공감대가 내외 사이에는 있었겠지. 그래서 장남 쪽은 최대한 배제한 채로, 차남의 문제만을 말하자고 합의했을 게야. 반복되는 부적절한 반응은 그 약속으로 인한 일일 터.”
“그렇군요. 숨겨진 이야기는 어떤 내용이었을까요?”
“……구태여 알 필요 있겠나. 저렇듯 말하기 싫어하는데. PD양반, 이것도 잘라내시게. 방송보다 내담자가 우선이야.”
한효준은 그렇게 말하고 눈을 감아버렸다.
더 이상 파고들었다가는 치료가 아닌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그 나름의 선.
그가 그렇게 말한다면 따라야 마땅할 것이다.
결코 말하고 싶지 않은 과거를 품고 살아온 세월은, 한효준 쪽이 선배일 테니까.
“예. 촬영 도중에는 모른 척하겠습니다.”
“그래. 그 뒤에는 알아서 하게나.”
“아니, 잠시만요.”
이것저것 편집하라는 지시만을 받고 있던 유종찬.
그가 불쾌감을 감추지 않고 끼어들었다.
“죄송한데, 제가 맞게 들은 겁니까? 어중간하게 상담을 끝내시겠다는 말처럼 들리는데요. 그건 좀 곤란합니다. 뭔가를 아셨으면 방송에서도 그걸 말씀을 해주셔야 되지 않을까요?”
“……PD양반. 사연 내용과 무관한 얘기일 수도 있잖나. 상담사란 아무 사생활이나 이것저것 캐는 탐정이 아닐세.”
“그렇지만 지금 보면…… 그런데도 부모는 차남만 말종 취급하고 있잖습니까? 장남을 무조건 싸고돌고 그러고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 뭐라고 시원하게 얘길 해주셔야 나아지죠.”
이런 반응을 보면, 아주 사악한 계략가는 또 아니다.
나름대로 차남의 입장에 감정이입해 염려하고 있는 것.
다만 젊은 나이만큼 섣부른 확신이었다.
“유 PD. 만약 장남의 숨겨진 문제가 도둑질이면 어떨까요?”
“예? 그야, 셜록꼰즈가 되셔서 그걸 밝혀내신 뒤에, 장남도 차남도 다 어리고 실수할 수 있는 애들이란 걸 전달해주시면 되겠죠. 그러면 편애는 좀 줄어들지 않겠습니까?”
“예. 그렇게 그럴싸한 그림을 만들어낼 수는 있겠는데…… 이후 준일 군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첫방이긴 하지만 화제의 공중파 예능입니다. 거기에 어린 시절의 도둑질 얘기가 나온다라. 이후 학교생활이 어떻게 될까요? 교실에서 뭔가가 사라질 때마다 아무 근거 없이 의심받게 되지 않을까요? 이 방송에 출연한 일을 평생 후회하게 되지 않을까요? 가족 모두가 우리 제작진을 증오하게 되지는 않을까요?”
“아…… 그건…… 죄송합니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렇게 PD를 포기시킨 뒤, 마지막으로 이준영을 맞이했다.
눈을 잔뜩 내리깔고 입술을 짓씹는 모습.
노트북 이야기를 꺼낸 일로 인해 가족들에게 한소리를 들었는지, 도무지 차분한 대화가 안 될 듯했다.
하지만 굳이 말을 시킬 필요는 없겠지.
나야 말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도 소통할 수 있으니.
유종찬에게는 이준일의 입장을 위주로 설명했으나, 사실 감춰진 문제를 유리시킨 채로는 상담이 곤란해진다.
가족역동은 결코 개별적인 사건의 집합이 아니다.
모든 사건의 역사들이 감정으로 쌓여 가정을 이룬다.
이준영이 네티즌에게 미움받지 않게 하려면, 단회기의 상담으로 적절한 환경의 변화를 이뤄야만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핵심적인 비밀 속으로 침략해야만 할 터였다.
그 침략이 또 다른 미움을 만들 수도 있기에 보통 상담사라면 딜레마에 빠질 상황이지만……
NBSC의 상담사인 나는, 좀 다르다.
“준영 군. 대답하지 말고 들어요. 준영 군의 가정은, 부친은 운수업으로 오후부터 새벽까지 집을 비우고, 모친은 식당 일로 아침부터 밤까지 집을 비우죠. 그들이 없는 시간 동안에는 장남인 준일 군이 가장 역할을 해왔을 겁니다. 연년생인데도 불구하고 준영 군에게 형의 의미는 컸을 거예요. 그런데…… 혹시 그 준일 군이 어떤 실수를 저질렀다면. 그래서 그 일로 인해 어머니께서 고초를 겪으셨다면. 참, 힘들었겠네요.”
“……예? 뭔-”
“대답할 필요 없어요. 그저 생각해보는 겁니다. 생각만.”
「[완전한 공감]을 사용합니다 > 이준영」
뭐야, 이 아저씨? 알고 말하는 거 아냐? 누가 말했나? 엄마가? 아빠가? 설마 형새끼가 말한 건 아닐 거 아냐? 아니 근데 엄마아빠도 절대 말 안 했을 텐데? 존나 이기적인 그 인간들은, 남의 집 딸한테는 트라우마가 생기든 말든 지 새끼만 행복하게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인데? 형새끼가 사람 죽여도 숨겨줄 인간들이니까, 방송 찍는 이 아저씨한테 얘기했을 리가 없는데? 진짜 이상하네. 작년에 형새끼가 여자 팬티 찍다가 걸려서, 제발 한 번만 봐달라고 엄마가 무릎 꿇고 빈 건, 나도 우연히 전화통화 들어서 알게 된 건데
……5초의 공감.
그 뒤에, 나는 얼굴을 감싸쥐었다.
집의 기강을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이기자 부대 출신의 ‘라떼남’은, 장남에게 동생의 기강을 잡으라고 명령해왔다.
선량하지만 어딘지 안정감이 없는 모친은, 틈만 나면 똘똘한 장남이라며 학업성적을 칭찬해왔다.
과도한 역할 기대와 결과론적인 칭찬의 결합.
동생과 연년생인 모범생이 버텨낼 법한 무게가 아니다.
직접적인 인과는 아닐 수도 있겠지만, 결과론적으로, 그들의 자랑스러운 장남은 빨간줄만 없는 범죄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 장남과 비교를 당하던 차남은……
진실을 알고 친형을 경멸하게 되었다.
범죄자인 장남을 애지중지하는 부모를 무시하게 되었다.
그로써 옥탑방을 감옥처럼 여기고, 게임으로 도피했다.
한효준이 느꼈다는 무거운 공기가 무엇인지 알 것 같다.
그들 부모의 바람은 온통 허무맹랑할 뿐.
유종찬이 고르고 고른 이 가정은, 총체적 난국이었다.
구성원 하나하나 정상이라 할 만한 인물이 없다.
그리고……
그렇기에 나는 99의 슬픔과 1의 기쁨을 느낀다.
모든 고민과 탈선과 범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가족이었다.
비밀 속의 가족.
가족을 위해 스스로를 병들이는,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