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진없는 상담사-149화 (149/200)

# 149

53장 - 지도하는 상담사 (2)

“참…… 재밌네요. 방송…… 즐거운 것 같아요.”

유하늘은 즐겁다는 얘길 전혀 즐겁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방송이 끝난 뒤부터 쭉 저 상태다.

나로서는 모를 수 없는 마음이었다.

“하늘아. 내 방송 시청자들이 마음에 들었니?”

“아, 네! 저기…… 선생님 방송 시청자들이라 그런지, 다들 착해 보였어요. 순수하고, 유쾌하고, 따뜻한…….”

“그랬구나. 그런데 왜 마음이 무거워 보이지?”

“아. 그게, 저, 조금 그러네요.”

“이유를 명시해볼래?”

“……저는, 그러면 안 되니까요.”

죄인의 심리다.

비록 속죄의 방법을 찾았다곤 하지만, 그건 긴고아.

유하늘의 세상은 여전히 정글 속이었다.

형체 없는 죄업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방금 순수한 시청자들이라고 했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 하지만 그 사람들도 항상 순수할 수는 없다. 누군가는 가족한테 욕을 하며 스트레스를 풀 수도 있고, 누군가는 질투로 친구를 모함하며 피해자 코스프레를 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아무 죄책감 없이 악플을 달며 낄낄거리기도 할 거야.”

“어…… 안 그럴 것 같았는데요?”

“그랬어. 어느 강연장에서, 내 방송 시청자라며 손을 든 열두 명 중 아홉 명이 악플 경험이 있다고 고백했어. 왜일까? 그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왜 따뜻하고 유쾌한 이들이 타인을 괴롭히는 걸까?”

“그건…… 변한 거 아니에요? 선생님 덕분에…….”

“그렇다고 한다면 기쁜 일이겠지만, 사실과는 달라. 방송을 보고 새로운 행동양식을 만든다는 건 판타지야. 간단한 재해석 정도는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사람의 본질이 변하려면 그에 합당한 계기가 필요해. 수십 년의 삶을 몇 시간 방송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건, 어불성설 아니겠니?”

“아…… 네. 그렇긴 한 것 같아요.”

“그렇다면 다시 묻자. 왜 그 사람들은 내 방송에서 선량할 수 있는 걸까? 왜 물어뜯고 비하하기보다 함께 웃으려고 애쓸 수 있는 걸까?”

유하늘은 확신하지 못한 채로 대답했다.

“저, 혹시, 원래 그럴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뜻이에요?”

“반은 정답이구나.”

나머지 절반은, NBSC 덕분이다.

110의 ‘관계’는 내담자가 상담관계를 망치는 일을 방지한다.

나에 대한 신뢰와 더불어 집단상담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해내려는 의욕을 고취하기에, 내 방송에선 어지간한 일로는 분란이 발생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누구도 알 수 없는 신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판타지가 아니다.

NBSC가 안겨준 힘이 아니라, 그 힘으로 목도한 진실이야말로, 상담사가 알아야 할 진리일 터였다.

“사회적으로 존경받으면서 가정에서는 폭력적인 사람이 있어. 가족에게는 간도 쓸개도 내주되 불우이웃에게 한 푼도 주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지. 더 나아가서, 연쇄살인마조차 자기 애인에게는 지극정성인 사례가 나오곤 했던 거야.”

“……이중성을 말씀하시려는 거죠?”

“잘 생각해보렴, 하늘아. 이중성이라는 어휘조차 인간이 만 든 것일 뿐이지. 도덕이라는 후천적인 인식을 빼놓고 보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다면적이야. 그리고 그 도덕성은 대부분의 경우에 악화되기만 해. 왜, 흔한 얘기잖니?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비혼주의가 됐다거나, 폭력 범죄를 막아주려다가 도리어 가해자로 몰리고 남을 돕지 않게 됐다거나. 물에 빠진 사람 건져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 한다는 말은, 괜히 생긴 속담은 아닐 거야.”

“아, 네. 그러니까…… 로크의 백지설이군요?”

“굳이 말하자면 성무선악설이겠지. 윤리학 자체가 악할 수도 있다는 뜻이니. 하늘이 너를 생각해보렴. 동생들을 위해 돈을 벌려는 선의로 누군가에게는 슬픔을 안겨줬지? 그건 과연 선행일까 악행일까? 그 구분은 유의미할까? 너를 악인으로 만든 건 뭘까? 악플러를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그 지점에서 유하늘의 눈빛이 흐려졌다.

내 진의를 빨리도 알아챈 듯했다.

“……환경이군요. 선생님 방송은, 착해도 괜찮은 환경이었어요. 그래서 유쾌하고 따뜻한 시청자들이 많았던 거예요. 그에 비해서 제 기사들은…… 악해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어요.”

“정답. 어떤 이들은 나쁜 환경 속에서도 선인이 나온다고 주장하겠지만, 그건 희망사항에 불과해. 그들이 말하는 나쁜 환경이란 가난이나 불행 같은 편린뿐이니까.”

“저는…… 나쁜 환경을 조성한 거네요. 심리적으로.”

“기자로서는 나쁘지 않았다. 독자들이 흥미를 가질 만한 포인트를 잘 캐치했고, 그 흥미로운 정보의 단면을 빠르게 송고했으니. 그렇지만 의도가 분명한 악의를 전염시키고 있었던 거야. 읽는 이가 짜증을 느끼고 악플을 달게끔…….”

“맞아요. 그랬어요. 저는, 그 사람들의 악의를 활용해서 돈을 벌었어요. 진짜 못된……”

“스톱. 그 구분이 무의미하다고 했잖니? 다시 말해보자. 내 방송을 본 사람들이 착해질 수 있었던 건, 왜였을까?”

“그건…… 선생님의 의도가 선했으니까?”

“그럴 리가. 의도는 결과를 담보하지 못해. 선의의 악행과 악의의 선행이 혼재하는 세상이야. 다시 생각해보렴. 나는 왜 그 시청자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걸까?”

유하늘은 오랫동안 고민했다.

그리고 차량이 집 앞에 정차하기 직전에야 입을 열었다.

“저, 선생님은, 좋은 면을 보려고 애쓰셨어요.”

“그랬니?”

“네. 바람피운 여친을 받아주고 싶다는 솔방귀님한테, 고맙다고 하셨어요. 여친이 또 언젠가 바람을 피우고 솔방귀님을 괴롭힐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다시 배신감을 느끼고 괴로워질지도 모르지만, 반성하는 마음으로 쓴 서약을 믿어준 그 경험은 분명 두 사람의 미래에 힘이 될 거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래, 그랬지.”

“그건…… 프레임이에요. 미디어의 프레임, 심리학의 프레임. 제가 쓴 기사들은 언제나 악의에 집중했어요. 순수하게 아름다운 화보를 촬영한 것뿐인데도 그 안에서 로리 성향이나 강간 문화 같은…… 그런 자극적인 걸,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수면 위로 띄우려고 했어요. 그래야 사람들이 읽어줄 테니까. 누군가가 불쾌해져서 좌표 찍고 조회수 올려줄 테니까…….”

“그래. 그런 메커니즘이지.”

“그런데 선생님은, 그 반대를 보셨어요. 악의를 찾아내고 욕할 수 있는 상황인데도, 그게 너무 당연하게 보이는 상황인데도, 그 안에서 선의를 보려고 애쓰셨어요. 그 마음이…… 자극적이고 흥미진진하지는 않지만, 보고 있으면 편안했어요.”

“그래. 누군가는 희망사항일 뿐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곳을 보고 싶었어. 밋밋하고 흥미롭지 않은…… 어쩌면 허무맹랑할지도 모를 프레임을 짜고 싶었다.”

프레임에 관련된 유명한 클립아트가 있다.

위에는, 도망치는 이와 칼을 들고 쫓는 이가 있는 ‘진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쫓기는 이의 신발이 마치 칼처럼 보이게 프레임을 잡고 관계를 역전시켜버리는 ‘언론’.

미디어의 네거티브 속에서 진실이 열화되는 현실을 보여주는 풍자였다.

한국사회의 언론은 그쪽 방면의 스페셜리스트다.

보수 언론은 정부 정책을 포퓰리즘이라 부르며, ‘표를 얻기 위해 황당한 정책을 선전하는’ 악의를 프레이밍한다.

진보 언론은 그것을 왜곡보도라고 부르며, ‘정의로운 행정을 사리사욕으로 틀어막으려는’ 악의를 프레이밍한다.

개중 옳고 그름을 가리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의도만큼은 모두 그르다.

그들은 자신의 스키마에 합당한 이야기들을 머릿속에서 짜맞춰, 그럴싸한 프레임 속으로 독자들을 끌어들인다.

그로써 증오와 경멸이 가득한 세상을 만들어낸다.

유하늘의 죄가 그와 유사했다.

사실만을 기고했지만, 사실은 진실이 아니다.

프레임 속에서는 어떤 진위도 가려낼 수 없다.

“저도…… 그랬어야 했어요. 선의를 생각했어야 됐어요. 악플 보면서 눈물 흘린 걸 ‘피해자 코스프레’로 프레이밍하지 말았어야 했어요. 돈에 혈안이 돼서…… 제가 그 애를 죽였어요.”

“……거기까지 가면 오답.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이겠니? 악의가 있었다면 반성해야 옳겠지만, 말했다시피 의도는 결과를 담보하지 않는단다. 기자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거든. 개인이니까. 악의가 있건 없건, 돈에 혈안이 되건 안 되건, 기자는 진실을 볼 수 없어. 너무 가까우니까. 인터넷기자 역시 마찬가지야. 자기 스키마 속의 개인은 진실보다는 눈앞의 프레임에 현혹되기 마련이야.”

“그건…… 근데…… 선생님은 하고 계시잖아요? 개인이신데, 진실을 보시잖아요? 엄마를 괴롭힌 이모들을 미워하던 세이유이님한테, 입장 바꿔놓고 생각하면 엄마도 똑같았을지 모른다고 하셨잖아요? 내 자식이 자매보다 소중한 건 당연하다고, 얄밉고 억울해도 화를 내긴 힘들겠다고 하셨잖아요?”

“그래, 난 그렇게 했어. 그런데 하늘아. 역으로 물어보마. 그건 진실이니? 취준생인 조카 앞에서 자기 자식 자랑을 하는 마음이 정말 악의가 아니었겠어? 그럴 리가. 도덕을 생각하면 그건 악행이 맞아. 비열하고 치사한 짓이야.”

“그런데…… 선생님은 그렇게 생각 안 하시잖아요?”

혼란스러워하는 제자를 바라본다.

총명한 아이다.

그 총명함이 지나쳐 많은 이들에게 고통을 안겨줬고, 이제는 나를 향해 일방적인 선망을 품으려 하고 있다.

그래선 안 되지.

손바울도 유하늘도, 선망해야 할 대상은 내가 아니다.

“본질을 이야기해볼까. 미움이란 건 참 쉬운 감정이다. 저놈 개자식! 외치면 여기저기서 저놈 개자식! 소리가 메아리로 돌아와. 그러니 네거티브 프레임이 매력적인 거야. 언론을 떠나, 방송을 떠나, 개인 간에도 그 진리는 적용돼. 이해하는 데에는 너무나도 큰 에너지가 필요해. 하지만 미워하는 일은? 쉬워. 정말 쉽고 편리해. 바람피운 여친은 나쁜 애니까 미워해도 된다. 엄마를 슬프게 한 이모들은 죄인이니 미워해도 된다. 이렇게만 생각하면, 그때는 모든 고민이 사라지는 거야. 마치 멈춘 어플리케이션을 강제종료한 것처럼 말끔해지지. 그래서 인간은 미움을 놓지 못해.”

“……맞아요. 미워하는 건, 편해요. 헤어진 남친 욕하는 애들은 진짜 많은데, 좋은 사람이었다고 말하는 애들은 되게 적었어요. 어떤 애들은 그게 한국 남자들이 하나같이 다 나빠서 그런 거라고 말하지만……”

“그럴 리가 있나. 개중에는 당연히 좋은 남친들이 더 많았을 거야. 다만, 그 좋은 남친에게 사랑받지 못하게 된 자신의 현실을 인정하는 것보다, 그 전남친이 개자식이었다고 왜곡하는 쪽이 훨씬 더 편한 거지. 그게 바로 강제종료야.”

“네, 그런 것 같아요. 그런데 선생님은 아니잖아요?”

“나도 똑같아. 황당한 일을 당하면 울컥 짜증도 나지. 회사에서 잘렸을 때 특히 그랬어. 대표이사를 미워하고 싶었지. 그렇지만 난, 강제종료를 하지 못하는 기종이야.”

“강제종료를…… 미워하지 못하세요?”

김 이병의 죽음을 본 이후로 그렇게 됐다.

나는 미움이라는 감정에서 해리되어 있었다.

유하늘과 만나고 김 이병의 이름을 떠올린 뒤, 되돌아온 미움이 거대하게 자라나기도 했지만.

이번에는 의식의 노력으로써 지워냈다.

“설명하기 복잡하다만, 일종의 편집증 정도로 생각해두렴. 나는 미움으로 생각을 마무리하지 못해. 대체 왜 그랬을까를 궁리하게 되고 말아. 그 사람은 왜 그렇게 미워 보이는 짓을 했을까……? 그걸 이해하지 못하면 답답해서 참을 수가 없어.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공통점을 찾아내는 거야. 나와 그가 같을 수 있다는 걸 억지로라도 인정해버리는 거야. 그래서 미워하지 않을 수 있다. 그것뿐이야. 그러다보니 내 방송 시청자들도 악의에 휘둘리지 않고 의논에 참여하게 됐지만, 내가 무슨 대단한 성인군자라서 그런 게 아니야.”

“……그게 성인군자 아니에요?”

“아니지. 내가 정말 성인군자였다면, 하늘이 너한테 이렇게 힘든 속죄를 시켰겠니? 그냥 허허 웃고 용서하고 말았겠지.”

“헤헤…… 그래도 전, 이런 게 좋아요. 선생님하고 이렇게 이야기 나누면서…… 음.”

살포시 웃던 유하늘이 또 표정을 굳힌다.

아직도 저러고 있는 것이다.

직면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웃어도 돼, 하늘아.”

“저, 저는 그러면 안 돼요. 살인자니까요. 선생님하고 있으면서 행복해하고 그러면…… 안 돼요.”

“그래도 돼. 너도 행복해져도 돼.”

“……왜요? 왜…… 저, 용서받을 수 없는 거잖아요? 자살보다 힘들고 고된 길이라고…… 하셨잖아요?”

“그야 힘들고 고된 길이어야지. 하지만 말했잖니? 용서받을 수 없는 건 나 역시 마찬가지란다. 그럼에도 이렇게 웃고 있잖아? 웃어야 하기 때문이야. 내가 행복해야, 그 아이들을 괴롭혔던 세상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야. 너도 그래. 멀리서 바라봐달라고 했잖니? 마음이 몰려 있는 사람은 그걸 할 수 없어. 어디서든 자기 나름의 프레임으로 정보를 재해석하고 말아. 기자는 몰라도, 편집자는 그래선 안 돼. 그러니 행복해지렴. 죄의식을 버리고 쾌락을 향유하라는 말이 아니야. 기준을 세워. 그리고 너의 사명을 위해 한 걸음 더 나아갔다고 생각했을 때,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해져. 자. 이렇게 선생님한테 꼰대질을 당했을 때는 어떻게 해야 되겠어?”

“아…….”

유하늘은 그제야 밝게 웃었다.

푸른 하늘 같은 미소였다.

물론, 프레임을 벗어나 멀리서 보자면, 손바울은 뚱했다.

차를 몰고 관악구로 이동하는 동안에도.

“그 녀석, 너무 신경 써주시는 거 아닙니까?”

“질투가 나니?”

“흠. 이 불쾌함이 질투일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하하. 아마 아닐 것 같구나. 일종의 소유욕처럼 느껴진다.”

“그렇습니까? 소유욕이야 감정이라기보단 본능이니…… 별거 아니군요. 아무튼 싫습니다. 죄책감도 아니고 정신질환으로 강물에 뛰어든 주제에, 어딜 감히 선생님한테 안기는 건지.”

“……안기지는 않았잖니?”

“표정을 보면 그랬습니다. 거의 옷 다 벗고 폭 안길 것 같앗어요. 100% 확률입니다.”

표현이 선정적이고 계산적이긴 하지만……

‘100%’를 듣는 마음이 못내 행복했다.

그 말을 꺼낸 것이, 나 이외의 누군가에게 안겨본 일 없는 아이이기에.

“바울아. 너, 집이 마포구 근처라고 말했었지? 그랬는데 알고보니 관악구 자취였고 말이야.”

“……죄송합니다. 그땐 그냥, 부담스럽다고 생각되면 절 밀어내실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어요. 전략적인 거짓말이었죠.”

“그래. 그 마음이야. 우리는 그렇게 복합적인 사고의 연속으로 살아간단다. 하늘이 역시 마찬가지야. 그 아이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추동한 것은 어린 시절의 강압으로 인한 죄업망상인 것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트리거인 죄책감이 가짜가 되는 건 아니야. 강한 죄책감을 품는 사람들은 모두 그에 합당한 다른 이유를 갖고 있어. 절대적인 선이 아니라고 해서 절대적인 악이 되는 건 아니다. 오해가 풀렸니?”

“흠. 네. 역시 선생님은 뭐든지 아시네요.”

“뭐든지 아는 건 아니란다. 아는 것만 알지.”

“하네카와……?”

“응?”

“아, 아닙니다.”

관련된 인터넷 밈이 있는 듯한데, 나로서는 모를 일이었다.

어디까지나 아는 것만 아는 사람인지라.

그리고 내가 아는 것 중에는, 손바울의 마음이 있다.

“바울아. 네가 구해낸 아이는, 좋은 사람이다.”

“……별로 상관없습니다. 제가 구한 것도 아니고요.”

“네가 구했어, 바울아. 그리고 그 유하늘은…… 좋은 언론인이 될 거다. 괴로워하는 사람들에게 힘을 줄 수 있는.”

“진짜 상관없습니다.”

“끔찍한 일을 당했는데도 하소연할 데가 없는 사람들. 그래서 자기 손으로 복수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 그런 곤경조차도 펜의 힘으로 무너뜨릴 거야. 너는 그런 사람을 살린 거다.”

“상관없는데…… 뭐…… 그랬으면 좋겠다 싶네요.”

관악구의 원룸촌에 손바울을 내려주고, 운전석에 앉으며.

나는 손바울을 남기고 떠난 모친을 생각했다.

살고 싶었을 것이다.

트라우마 같은 성범죄로부터 차라리 해리되어, 모든 것을 잊고 가정의 행복을 이루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미움이 아니고서는 벗어날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웠기에.

미움은 쉬운 해결책.

그리고 몰리고 몰려 벼랑 끝에 선 이들의 마지막 해결책.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사이의 어떤 것이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을 당한 사람들에게는……

상담사의 허울 좋은 사명감도 무력해지고 만다.

그렇기에 언론이 필요한 거지.

상담사가 막을 수 없는 프레임을 막기 위해서.

손바울의 집안을 피로 물들였던 곱슬머리 유전 같은 오류의 재생산을.

그리고 범죄를 저질러도 입막음만 잘하면 넘어갈 수 있다고 믿는, 그 어리석고 슬픈 악의의 전염을.

유하늘에게도 주영주에게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새 대안언론의 가장 중점적인 역할은, 그 지점이다.

그곳은 가장 완벽하고 가장 거대한 폭로의 장이 될 것이다.

누구나 댓글로 영상에 참여할 수 있는 언론.

주영주의 네임밸류로 수백만이 시청하게 될 미디어.

그곳에서는, 댓글 하나가 전 국민에게 전달될 수 있다.

청와대 청원보다도 훨씬 쉽고 빠르게.

그런 것이 이전에도 있었다면 어땠을까.

슬픈 살인자는, 손을 피에 물들이지 않을 수 있지 않았을까.

복수가 아닌 법률로 죄인들을 벌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이상향으로 가는 길은 멀고 멀 것이다.

폭로를 가장한 모함을 제지하고, 사실이 아닌 진실을 지키기 위해서는, 편집자들의 노력이 그 무엇보다 중요할 터.

분명 자살보다 힘들고 고된 길이리라.

그러나 그녀는 해낼 것이다.

손바울이 구해낸 유하늘이니까.

그 두 아이가, 내 제자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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