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
52장 - 바람직한 상담사 (3)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
이분법으로 구별하기엔 다양성이 큰 종이지만……
이 부분만큼은 분명하게 말해도 되리라.
현세의 인류는, 목숨을 걸어 이루고픈 사명이 있는 이와, 어떤 일에도 목숨까지는 걸지 않는 이들로 나뉜다.
두 부류는 서로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자아를 움직이는 근본적인 추동이 다른 까닭.
그렇기에 상호간에 위선자라거나 이기주의자라고 욕하는 경우도 왕왕 생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양쪽 모두 평범한 인간이다.
어느 쪽도 선하거나 악하지 않다.
그저 보아온 세상의 궤적이 다를 뿐이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보다 ‘정상적’인 것은 후자다.
인간이란 본디 이기적으로 태어나는 존재.
집단을 위해 자기 몸을 던지는 개체라는 것은, 벌이나 개미 같은 군체(群體)에서나 자연스러운 특성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삶을 바치는가.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내가 아닌 나를 위함이다.
인간은 DNA를 물려받은 자식에게 강한 동질감을 느낀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부모들은, 출산 이후에 처음으로 타인을 위해 스스로를 버릴 각오를 마치게 된다.
그러나 그런 것도 아니라고 한다면.
자기와 완전히 무관한 타인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려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비정상적’인 존재는, 과연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영주는, 헌신적인 애야.]
보훈요양원으로 이동하는 동안 전화를 걸어, 주영주에 대해 넌지시 질문했을 때.
대학 동기 신경미는 그렇게 운을 떼었다.
뒷말은 잠깐의 침묵 뒤에 이어졌다.
[좀 과하다 싶을 때도 있었지.]
“과하다 싶을 때라면?”
[그날 백골단에 쫓겼던 것도 좀 그랬잖아? 분위기 이상해질 때 바로 빠졌으면 그럴 일 없었어. 그런데 영주는…… 인정할 수가 없었던 거야. 폭력시위나 반정부 투쟁이 아닌데, 그냥 대선자금 투명하게 공개하길 요구했던 건데, 그 시위를 폭동 취급한 거니까. 난 사실 별로 상관없었다? 어차피 세상에 오해 없는 진실이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다들 빨리 빠져나가서 왜곡보도에 대응하는 게 맞다고 봤어. 하지만 영주한테는 달랐던 거야. 걔는 그냥…… 모든 부조리가 없어져야 한다고 믿는 애였어. 그걸 위해서라면 맨몸으로 곤봉에 맞서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항상 염려스러운 친구였지.]
“그래. ‘권’ 중에서도 특별했던 거구나.”
[그럼. 권이라고 뭐 다 눈 충혈돼서 달려들겠니? 그때나 지금이나, 정치 생각하고 꼼수 쓰는 애들도 인맥 때문에 휩쓸린 애들도 적지 않지. 하지만 영주는 달랐던 거야. 걔는…… 중추적인 역할은 아니었지만, 가장 헌신적인 운동권이었어.]
그 말에 마음이 복잡해졌다.
헌신적이라는 말은, 보통 찬사지만, 상담사에게는 아니기에.
일반적인 궤적에서 벗어난 삶에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영주 씨가 왜 그렇게 됐는지, 혹시 알고 있니?”
[……글쎄. 언젠가 술 마시면서 들었던 것도 같은데,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나네. 워낙 오래된 일이잖아. 음…… 그냥 어렴풋이…… 많이 울었던 게 생각나. 참, 안타까웠어.]
25년쯤 전의 일이다.
하루하루가 최루탄과 사복경찰의 추적 속에 도망치던 처지였다면, 사소한 대화를 다 기억할 수는 없을 터.
신경미에게 들을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별 소득 없었던 그 이야기를 되새기는 것은……
대권을 이야기하는 주영주가, 작은 욕심도 없었던 탓이다.
그 눈에는 권력욕의 파편조차 없었다.
흔하디흔한 ‘국민의 일꾼’이란 말을 고스란히 형상화하면 딱 저 모습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나는 그녀의 말을 듣는 내내 괴로웠다.
지난 20년이 어떤 고통이었을지 알 법해서.
대학생 시절의 사회운동이야 흔한 경험이다.
그러나 서른을 넘어서면, 그들 중 절반이 정치에 무관심해지고, 그보다 좀 적은 수가 과거의 뜻을 ‘손절’한다.
이른바 ‘먹고사니즘’이 이념을 우습게 만드는 까닭이다.
그런 이들에게 검사에 국회의원이라고 하면 꿈이겠지.
대권주자까지 가면 선망이 극에 달할 것이다.
화려한 현실 속에 화려한 미래를 말하며 주영주가 보인 표정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당장이라도 불구덩이에 뛰어들 것 같은 그 표정을.
그녀의 얼굴은 지금도 그렇다.
대놓고 한심한 비전이라고 비난했으니, 이상론자라면 화를 냈을 것이고, 위선자라면 불만을 숨기고 웃었겠지만.
주영주의 무의식은 오히려 기대에 차 있었다.
“될 리가 없다고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굶어죽는 사람은 없게. 생활고로 자살하는 사람은 없게. 계획대로 대통령이 되신다면, 그 공약은 이행하시겠지요. 가난 구제는 나라님도 못 한다는 말은 수 세기 전의 것. 행정력의 격이 달라진 이 시대에 개혁 성향의 보수당 후보가 당선된다면, 분명 과거와 다른 미래가 펼쳐질 겁니다.”
“그렇죠. 언론의 역성으로 힘 잃고 표류하던 진보당 정권들하고도, 대기업 등쌀에 복지정책 다 뒤집었던 보수당 정권들하고도 다를 거예요. 대민 씨가 말씀하셨던 하향식 개혁을 이뤄낼 자신이 있어요. 그런데도 될 리 없다고 하셨던 걸 보면…… 제가 대권주자가 될 수 없다고 보시는 거군요?”
“아뇨, 될 수도 있겠지요. 나야 정치공학은 잘 모르고요.”
“그렇다면 대체 왜……?”
“그 결과가 바람직한 세상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주영주는 아주 느리게 고개를 기울였다.
분노도 불만도 없이, 여전히 호기심만으로.
“바람직한 세상이 아니라고요? 그게요? 2015년 이후로 매년 3천 명씩 생활고로 자살하는 나라에서 조금이라도 복지 사각지대를 줄일 수 있다면, 바람직한 방향 아닐까요?”
“그야 훌륭한 변화라고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종점이 바람직한 세상일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유가 뭐죠?”
“단순합니다. 그건 대통령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게요? 이게 어떻게 대통령이 아니죠?”
그때쯤에 아내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주영주에게는 안 들렸을 정도로 작게.
하지만 내게는, 한탄하듯 동의하는 그 마음이 잘 들렸다.
이러니 부부라는 거겠지.
“영주 씨. 좀 더 본질적인 이야기를 해봅시다. 복지라는 제도는 원래…… 단지 갖지 못한 자가 불쌍해서 나눠주는 동정심과는 무관했을 겁니다. 이를테면 원시 사회에서 노인복지는 그 노인들이 가진 세월의 지혜를 계승하기 위해 필수적이었지요. 아동복지는 사냥에 나설 전사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사회적 안전망이었고, 또 노동력을 양성하는 의미도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원시의 복지란 극히 자연스러웠을 겁니다. 그러던 것이 현대사회에서는…… 3천 명씩 자살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포퓰리즘 소리를 듣고 있지요. 왜일까요?”
“……그야, 인간이 자본에 물들었기 때문이겠죠. 힘으로 빼앗아 나눠야 해요. 그러려면 대권을 잡아야 하고요. 그래서 대민 씨한테는 감사하고 있어요. 현실을 보게 해주셔서.”
내 한마디로, 주영주는 현실을 향해 나아갔다.
가장 정의감이 투철했을 나이에 자기 인생을 재검토해, 이후 검사로서 부정을 돕고, 국회의원으로서 부패를 도왔다.
그렇게 이상을 숨기고 위를 바라봤다.
세상을 바꿀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
그것이 더없이 슬프게 느껴졌다.
그래서는 무엇도 바꿀 수 없을 것이기에.
“홍길동 같군요. 의적 홍길동. 나중에 율도국을 세웠다지만…… 그는 유토피아를 만들지 못했을 겁니다.”
“왜죠? 그 시대에 바른 뜻을 가진 전제군주가 등극하면, 그때는 분명 고복격양(鼓腹擊壤)의 치세가 되곤 했는데요?”
“예. 전제군주 시대니 한 세대는 괜찮았겠네요.”
“5년 단임제 대통령이라면 다를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개혁 파라 3년쯤이면 레임덕 맞을 거라고? 그래도 제도를 잘 정비해 좋은 선례를 만들면, 지금보다는 나아질 수 있어요.”
“서로 다르다고 보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의적 홍길동은 의적일 때 칭송받았습니다. 그러나 병조판서 홍길동은 어땠을까요? 그가 율도국으로 떠나고 난 뒤에는 어땠을까요? 저자는 그것을 에필로그로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그런 이야기는 바라지 않는 까닭이겠지요.”
“제 생각과 다르시네요. 정말 홍길동 같은 의적이 존재했고, 군주가 그 앞에 병판을 제수할 정도로 강성했다면, 이후로 요순 임금조차 필요 없었을 거예요. 언제나 처음이 어려운 법이니까. 마중물이 필요한 거죠. 저도 그런 역할을 하려는 거예요. 5년이지만…… 레임덕까지 생각하면 4년도 안 될지 모르지만, 그 기간 동안에 물을 길을 거예요. 지반으로 흘러들어 더러운 돼지들의 금고를 부식시킬 물을.”
“예. 그게 대통령의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게 왜 대통령의 일이 아니죠?”
“음. 하던 얘기부터 정리하자면, 홍길동이 없어진 뒤 그 나라는 수백 년 동안 암흑기를 맞았을 겁니다. 당신의 나라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주영주라는 대통령이 거쳐간 나라는, 잠시 밝겠지만, 오래 어두울 겁니다.”
“왜죠?”
“당신이 인간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주영주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두 번 저었다.
“전부 다는 아니에요.”
“다는 아니겠지요. 하지만 어느 누구도 주영주에게 사랑받는 사람이라 자부하지는 못할 겁니다. 당신을 찍어줄 유권자들은 물론이고, 당신 덕분에 복지혜택을 누리게 될 저소득층조차도 그렇습니다. 체제 속에서 행복을 누리는 인간인 이상, 아나코 생디칼리스트에게 사랑받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라이브 방송은 불편하다고 하셨지요? 대통령직은 라이브 인터뷰를 하루에도 몇 차례씩 수행해야 되는 직종입니다. 당신이 싫어하는 체제의 순응자들 앞에 담화를 읊고 질의를 받아야 하지요. 잘 숨기고 잘 참는다 해도 마음은 전달됩니다. 표정이 아니라 정책을 통해서도 전해질 겁니다. 아파트값 오르길 바라는 게 싫은 거구나. 최저임금 안 오르길 바라는 게 싫은 거구나. 아, 저 사람은 우리가 싫은 거구나.”
“……반성할 기회가 되겠네요.”
“반대지요. 인간을 개돼지라 부르는 분이, 미움 받는 경험으로 반성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까? 절대 안 됩니다. 주영주는 악마화될 겁니다. 재앙이라 불리고, 당적 다른 대통령과 엮여서 잃어버린 10년이라 불릴 겁니다. 그리고 보수당에서 다시는 개혁파 대권 후보가 나타나지 못하게 될 겁니다. 그게 어떻게 바람직한 대통령이겠습니까?”
“그러면 대체…… 뭘 어떡하라는 거죠? 체제에 순응하지 못한 저 같은 사람은, 위에도 아래에도 서지 말라는 건가요? 대체 대민 씨가 말씀하시는 바람직한 대통령은 뭐예요?”
그 질문 앞에서, 스스로 자문해본다.
바람직한 대통령은 누구일까.
어떤 사람이 현대사회의 진정한 리더일 수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덜떨어진 말씀을 하실 줄은 몰랐는데요. 누굴요? 자기 배나 불리는 정치인들의 나팔수를 신봉하며, 선진국이 되려면 복지 포퓰리즘을 경계해야 된다고 외치는 소시민들이요? 자기들 도와주려는 정책인 줄도 모르고 가짜뉴스에 현혹돼서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족속들이요?”
“예. 그에 더불어 가짜뉴스를 만드는 사람들도, 복지 과잉이라는 신조어를 만들며 진보적인 정책을 욕하는 나팔수들까지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들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물질문명을 향유하고 눈앞에 보이지 않는 고통쯤은 쉽게 외면하는 그들이, 인간입니다. 착취당하던 노동자들도 생활이 편해지면 똑같아집니다. 의적이라면 돼지라고 욕하며 재물 훔쳐 나눠줘도 괜찮겠지만, 대통령이라면 그래선 안 됩니다. 인간의 본질을 미워해선 안 됩니다. 우리가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것을 믿고, 그들과 함께 상생하며 나아가야-”
“궤변이에요!”
주영주가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찔끔한 아내가 또 팔목을 잡지만, 개의치 않는다.
이제부터는 상담의 시간.
상담사에게는 정치 얘기보다 이쪽이 훨씬 편안하다.
“보세요. 본인이 못 견디지 않습니까.”
“……무슨 의미죠?”
“비정상적인 헌신은 얼마 못 가 무너집니다. 인간은 그렇게 강하지 않습니다. 영주 씨도 그렇습니다.”
“난, 괜찮아요. 난 자살하지 않아요.”
“그럴 수 없을 겁니다. 모든 이상을 양보하고 딱 하나 완수하고 싶었던 개혁조차 실패했을 때, 이상만을 사랑했던 사람은 갈 곳이 없습니다. 난…… 그래서 후회하고 있습니다. 영주 씨에게 섣부른 말로 하향식 개혁을 이야기했던 자신을요.”
“난, 달라요. 할 수 있어요. 어떻게든 해낼 거예요.”
“그렇게 믿고 싶겠지요. 잊을 수 없을 테니까.”
“……누굴요?”
“당신을 그렇게 만든 사람 말입니다. 누구였습니까? 누가 그렇게 마음속에서 당신을 찌르고 있습니까?”
콧잔등을 찡그린 주영주는, 투덜대듯 내뱉었다.
“이래서, 꼰마 꼰마 하는 모양이죠. 독심술사 같네요.”
“독심술은 모릅니다. 그저 일반론이지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인정한 게 억울하잖아요.”
억울할 것까지야 있겠는가.
인간이 헌신적으로 행동하는 이유는, 거의 모든 경우에 자신의 과오를 바로잡기 위함인 것을.
나 자신이 그 준거인 것을.
세상을 바꾸는 일에 기꺼이 목숨을 내줄 사람.
그 목록에는, 나 역시 있을 터였다.
아내와 딸을 생각하면 물론 생각조차 미안한 일.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내게는 나 자신보다 세상이 먼저니까.
나와 함께 증오 가득한 세상을 사는 것보다는, 나 없이 용서가 넘치는 세상을 사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그야 어디까지나 사고실험이다.
정말로 나와 세상을 맞바꿀 기회가 주어지지는 않으리라.
다만 그 사고 자체가 비정상인 것은 분명했다.
주영주의 삶이 그런 것처럼.
내 시작점은 김 이병이었다.
이제는 이름이 떠오른 그 아이가 나를 바꿨다.
조명기의 진단에 따르면, PTG(외상 후 성장)였다.
아마 대부분이 그렇지 않을까 싶다.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비범한 이들에게는, 이유가 있다.
결코 평범하지 않은 추동이.
세간에서 칭송받는 선인도, 만인이 증오하는 악인도, 근원은 자신이 아닌 환경일 가능성이 높다.
주영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비록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이긴 했지만.
“제가 살던 동네에, 테이프 노점상이 있었어요. 친구들은 피했어요. 없는 게 많은 사람이었거든요. 부모도 없고, 다리 한 쪽도 없고. 저도 별로 친해지고 싶은 생각은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친해졌어요. 그랬는데, 분신했어요. 눈앞에서.”
“……예.”
“과잉 단속으로 다리가 부러졌는데, 구청에서는 고소하지 않으면 편의를 봐주겠다고 했대요. 그래서 고소를 안 했대요. 그랬는데 다시 단속이 왔고, 같이 죽자는 생각으로 경찰서에 찾아갔대요. 그것까지도 외면당했고요. 다시 단속 나와서 스피커도 뺏기고……. 전 그때쯤 쇼핑 중이었을 거예요. 머드팩 화장품을 샀어요. 엄마가 한번 같이 해보자고 해서요. 그래서 그걸 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불이 확. 소사(燒死) 통증이 제일 아프다잖아요? 그런데도 눈 마주치니까 웃데요. 죽어가면서도, 나 만나서 반갑다는 듯이…….”
다리 없는 고아 노점상과 공부 잘하는 여학생.
그들은 어떤 인연이었을까.
머드팩을 손에 들고 타들어가는 시체를 바라봤던 아이는, 그때 무엇을 생각했을까.
“울면서 집에 들어갔어요. 아빠가 왜 우냐고 물어봐서, 노점상 아저씨 얘길 했어요. 그랬더니 비웃더군요. 노력을 안 해서 그런 거라고. 국민소득 1만 달러 시대에, 자랑스러운 선진국 대한민국에, 자살하는 것들은 노력하기 싫어하는 것들뿐이라고. 그런 쪽에 신경 쓰지 말고 더 노력해서 학점을 잘 받으라고……. 집에서도 군복 입고 경례 받는 그 돼지한테는 너무 어려운 얘기였던 거죠.”
“……그랬군요.”
“자. 이게 내 이유예요. 이래도 사랑하라는 말씀이 나오실까요? 1급 1호 장애인, 고아였어요. 아무리 노력해도 무엇 하나 가질 수 없는…… 이 사회의 불가촉천민이었어요. 그런데 인간들은 참 대단하죠. 1만 달러만 외쳐대더군요.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신나 부어야 불 붙는 인간한테는 관심도 없으면서, 성냥만 갖다 대도 활활 타오르는 지폐에는 열광을 해요. 그런 인간을 대체 어떻게 사랑하죠? 어떻게 그들을 기대하죠? 모조리 무너뜨릴 수 없다면, 진심을 감춘 채 조종하는 방법밖에는 없잖아요? 미워할 수밖에 없는 족속이잖아요?”
“아뇨. 그렇지는 않습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주영주의 볼 위로 눈물이 흐른다.
그리고 두 줄의 메시지가 떠오른다.
그녀는, 내 마음에 담겼다.
“당신은 달랐습니까? 그의 죽음을 보기 전까지, 돈 따위 없어도 되고 머드팩 따위 없어도 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까?”
“……그야, 아니죠. 제 얼굴에 침 뱉는 짓이라는 건-”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우리를 바꾸는 것이 경험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영주 씨는 고인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한 일로 이기적인 자신을 반성한 모양입니다만, 상황이 달랐어도 그랬을까요? 이를테면…… 화염 속의 고인께서 영주 씨를 보고 살인자라고 소리쳤다면요? 그때도 달라지실 수 있었을까요? 오히려 반발심리가 강해지지 않았을까요?”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릴 하세요?”
“영주 씨가 그러고 있지 않습니까? 인간은 왜 그리 이기적이냐며 비난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이 대통령이라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요. 안 그렇습니까?”
PTSD로 고통받는 리더가 곤란한 것은, 그의 신념이 잘못됐기 때문이 아니다.
역으로 어떤 것도 잘못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회란 서로를 용서하지 않으면 진보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겁해요. 비겁합니다. 그 자신은 죽음 앞에서도 웃었던 고인으로 인해 구원받은 주제에, 인상만 쓰고 있는 사람이라니. 웃어주면 안 되겠습니까? 누군가가 영주 씨처럼…… 영주 씨만큼은 좀 무리겠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타인에게 마음을 열 수 있도록. 그럴 수 있도록…… 불타면서도 웃어주면 안 되겠습니까? 고인이, 신경미가 그랬던 것처럼요.”
“……경미요?”
“예. 좀 뒤늦은 얘긴데, 난 영주 씨 구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남들이야 얻어맞건 잡혀가건 상관없었어요. 그런데 신경미가…… 영주 씨를 몸으로 감싼 채 대신 맞고 있던 그 아이가, 날 보고 웃어줬어요. 우린 괜찮다고, 저리 가라고…… 최루액 냄새 가득한 그 골목에서 손을 내저었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이 대통령이길 바랍니다. 곤봉을 빼앗아 휘두르는 대신, 몇 대를 맞든 몇 번을 넘어지든 사랑할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습니다.”
오디션 심사위원처럼 내뱉은 말.
그걸 듣고, 주영주는 또 고개를 기울였다.
“그거, 바람직한 상담사 얘기 아니에요?”
“……대통령은 5천만의 상담사인 셈이니까요.”
“진부하네요. 참 진부하고…….”
그녀는 말을 맺지 않고 오래 침묵했다.
그리고 나는 마음속으로 사죄했다.
바람직한 상담사가 아니었다.
그저 겁 많고 편견에 가득 찬 대학생이었다.
그렇기에, 바람직한 세상을 논하는 시위대에게 개혁을 원한다면 아웅다웅하지 말고 위로 올라가라 말했다.
그런 유치한 한마디로 인해 국회의원이 된 주영주……
그녀는, 30초쯤이 지나서 말했다.
“참, 바람직해 보이네요.”
“그렇지요?”
“5천만의 상담사…… 한번 돼보죠.”
“영명하신 말씀이십니다.”
헤벌쭉 웃으며 답하자, 아내가 못 참고 옆구리를 꼬집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우라노스를 내려놓은 주영주가, 환하게 웃고 있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