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
48장 - 호밀밭의 파수꾼 (2)
“……손가 녀석이, 그 고등학생들을 보며 감동했다고?”
한효준은 흰 수염을 문지르며 잠깐 고민했다.
그 이후에 환하게 웃었다.
“허허. 디프로그래밍이 얼추 잘된 듯하구만.”
디프로그래밍.
종교적 세뇌 상태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의미한다.
무당 조모에 의해 이니시에이션(종교적 성인식)을 앞두고 있었던 것이 손바울의 과거라고 한다면, 그 억압된 사고에서 벗어나게 해준 일을 디프로그래밍이라 말해도 무방할 듯했다.
프로그래머였던 내게는 어감이 미묘하지만.
프로그램이란 것은 알고리즘의 코딩으로 완성되는 결과물.
인간의 정신은 그와 비슷하면서 또 다르다.
인지도식과 방어기제라는 무수한 코드에 의해 새로운 정보를 처리한다는 점에서는 프로그램 그 자체이되……
우리 마음은, 컴퓨터가 모르는 힘을 갖고 있다.
감정.
가장 진보한 AI도 흉내 낼 수 없는, 생동하는 심리역동을.
그렇기에 디프로그래밍은 내외의 호응을 요한다.
천재 심리학자가 바깥에서 디코딩하고 디버깅한다 해도, 부정적인 감정이 그림자를 드리우면 백약이 무효하다.
중요한 것은 내담자.
그 마음속에 싹틔운 긍정적인 감정이야말로, 왜곡된 정신의 프로그램을 내면에서부터 갈아엎을 수 있다.
손바울은 그 과정 중에 있었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던 우주에 씨앗을 심고.
그 마음을 소중히 돌보며, 행복한 상담사를 꿈꾸고 있다.
“허나, 아직은 부족해. 염려되는 점이 몇 가지 있네.”
“예. 아직은 감정이 미약하기만 합니다.”
“그야 별수 있나. 시간만이 해결해줄 수 있는 일이겠지.”
“……만약 별수가 있다면요?”
“뭐? 자네, 뭘 할 셈인가?”
대번에 눈이 커진다.
한효준은 내가 또 해괴한 짓을 저지를까 염려하고 있었다.
그 마음을 알기에 느긋한 척 웃어 보였다.
“만약이라 말씀드렸잖습니까. 이상론을 여쭙는 것입니다.”
“만약……이란 말인가. 좋네. 보강을 땡땡이치고 찾아온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터. 사고실험에 어울려주지.”
“예. 이를테면 세뇌되어 있던 아이의 마음속에 어떤 감정을 싹틔울 수 있다고 합시다. 그때 무엇이 우선일까요?”
“상담사라면, 신뢰가 최우선이겠지. 라포 없이는 쉬이 치료가 중단될 테니. 허나 손가 녀석 케이스에서 이미 자네는 극단적인 라포의 대상. 그 이후의 감정을 묻는 게지?”
“그렇습니다. 제가 바울이에게 줘야 할 감정은 무엇일까요? 땡땡이를 쳐서라도 꼭 교수님께 여쭤보고 싶었습니다.”
한효준의 말대로, 상담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감정은 신뢰다.
그 점에서 손바울은 이미 마음을 열었다.
이후로도 나를 통해 많은 감정들을 배워나가겠지.
하지만 그늘을 걷어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으리라.
긍정적인 감정도 배우겠지만, 그보다는 사회의 어두운 부분들을 목격하며 눈살을 찌푸리는 일이 더 많을 터였다.
그때도 나만을 의지하며 버텨내려 한다면, 손바울은 언젠가 세상에 절망한 광신도가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이제……
그 아이의 마음에 따스한 빛을 비춰줄 수 있다.
[암시 구조화]라는 기술을 통해서.
구조화란, 상담 과정에서 몇 안 되는 상담사 주도의 활동.
회기의 첫머리에 상담 과정을 설명하는 업무다.
그럼으로써 내담자가 자신이 겪게 될 상담을 이해하고 그에 참여할 준비를 갖추도록 돕는다.
명시적 구조화라 해서, 상담시간을 결정하고 비밀보호의 한계를 적시하는 등, 실제 상담과는 무관해 보이는 사전작업.
그렇지만 상담이란 개념에는 접수 면접조차도 포함된다.
한순간 보여주는 내담자의 태도도 소중한 준거이기에.
따라서 접수자조차 비전문가를 써서는 안 된다고 했다.
당연하게도 구조화 역시 그 자체가 상담의 일부.
명시적 구조화 이면에, 진짜 구조화가 존재한다.
심리와 전혀 무관해 보이는 구조화 작업에서는 가장 방어적인 내담자조차 큰 거부감을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상담자에게는 중대한 기회.
서로가 처해 있는 상황과 이미지를 통해서, 비언어적으로 내담자의 마음에 작은 씨앗을 심어야 한다.
향후 상담 과정에 도움이 될 인지도식을.
그 과정을 암시적 구조화라 칭하는 것이다.
그리고 NBSC의 [암시 구조화]는……
100exp에 걸맞게, 일반적인 상담스킬을 초월한 기술이었다.
「 기술 [암시 구조화]
내담자마다 1회에 한해 특정 감정을 촉발할 수 있습니다. 상담사가 느끼는 감정이 1/100 스케일로 전달됩니다. 」
……스케일이라고 하면 좀 이과스럽긴 한데.
문과적으로 생각해도 결정적인 기술은 못 된다.
극히 미약한 수준의 감정만이 전달될 테니, 그저 상담 초기에 윤활유 정도로나 사용할 듯했다.
다만 모든 일은 케이스 바이 케이스인 법.
손바울에 한해, 이 기술은 신의 영역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기적이기에.
나는, 이 기술로 내 제자에게 마음을 줄 수 있을 터였다.
문제는 100exp에 걸맞지 않게 일회성이라는 점.
가장 시급하고 절실한 씨앗을 심어줘야 한다.
그를 위해서 보강까지 빠지고 한효준을 찾아온 것이다.
그랬는데, 스승의 대답이 기괴했다.
“신뢰 이후의 우선순위라. 그야 슬픔이겠지.”
“슬픔…… 말씀이십니까? 그게 먼저라고요?”
“그래.”
“저는…… 즐거움이나 사랑 쪽을 생각했습니다.”
“흥. 박 로저스 같으니. 내면의 역동하는 생명력으로 왜곡된 인지구조를 무찌르도록 돕고 싶다 이거지? 이렇게 뭘 모른단 말이야. 박 군. 자네의 인터넷방송이 왜 그토록 인기를 끄는 것 같나? 스스로도 분석을 해봤을 거 아냐?”
“화제성과 의외성 덕분이겠지요? 화제가 되니 찾아왔다가, 마음의 지도로 의표를 찌르는 모습에 놀라게 됐을 겁니다.”
“허. 이러니 바보 같다고 말할 밖에. 자네의 상담은 말이야…… 울며 웃고 있어. 네 시간 내내.”
“예. 제가 좀 우는 상이지요.”
“우는 심상이지. 보인단 말이야, 자네 얼굴은. 그 안에서 나이아가라 저리가라 할 정도로 폭포수 같은 눈물이 쏟아지고 있음이. 그렇기에 보는 이들은 얼이 빠지고 마는 게야. 남의 일에 저토록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다니…… 하고.”
조명기가 좋아할 ‘나이아가라 저리가라’ 라임은 차치하고.
사토라레 같은 내 얼굴이 큰 공감대를 불렀다는 이야기다.
대수 역시 그런 식으로 묘사하곤 했었지.
해서 딴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여전히 답이 기이했다.
“그것이 바울이 케이스와 어떻게 연관되는 것입니까?”
“어떻게 연관되긴. 나는 이렇게 생각하네. 긍정적인 감정이 태양이라면, 부정적 감정은 빗줄기라고. 눈부신 태양만이 드리운 초원을 생각해보게. 그 따사로움이 얼마나 가겠나? 수분이 말라붙어 금세 땅이 쩍쩍 갈라지지 않겠는가?”
“아……”
“손가 녀석이 염려되는 게 그 지점이야. 자네로부터 지나치게 밝은 빛만을 받고 있어. 당장은 그것으로 족하겠지. 그간 지나치게 볕이 들지 않았을 테니. 허나 몇 달 몇 년을 이어진다면…… 오히려 간신히 싹 튼 꽃들을 말려 죽일 수 있을 터. 최초 그 녀석을 자네로부터 떼어놓으려 했던 것이 그런 까닭이었는데, 본인이 아직도 모르고 있으니 원.”
그제야 한효준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동시에 마음이 한없이 답답해졌다.
손바울에게 있어서 슬픔이란, 양날의 검이기에.
성폭행과 살인과 자살을 무감정하게 말하던 아이다.
남들이라면 단 하나로도 정신이 붕괴됐을 만한 비극들을.
그 진실을 알고서도 그럭저럭 견뎌왔던 것은, 감정이 극단적으로 희미했던 까닭.
무관심한 조모에게 유일하게 덕을 본 부분이었다.
그런 슬픔을 그 아이에게 돌려주라니.
시지프스의 바위보다도 무거운 고통을 내리꽂는 일이다.
사정을 잘 모르는 한효준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교수님. 내담자의 비밀이기에 말씀을 아꼈지만, 그 아이의 과거가 결코 평이하지 않습니다. 슬픔은 곤란할 듯합니다.”
“허. 누가 그걸 몰라서 하는 소린가? 20대 코찔찔이가 어떻게 성장했을지 정도는 얼굴만 봐도 알아.”
정말 아는 게 맞나 싶어서 뚱하게 쳐다봤다.
그런 나를 향해, 내 스승은 구름처럼 말했다.
“그 아이, 울어본 적도 없지 않나.”
“……음.”
“보면 안다니까. 아니까 하는 말이야. 나라고 달랐을 것 같나? 지옥의 주민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낄낄거리며 웃거나 볼 빨개져서 설레는 것이 아닐세. 울어 마땅한 현실에 제대로 슬퍼해봐야 해. 그것만이 마음의 열쇠일 터…….”
한효준은 어땠을까.
PTSD로 인해 폭력을 일삼는 부친과 단둘이 지내며, 그를 존경하는 동시에 증오하는 유년기를 지나며.
그는 어떤 얼굴로 울었을까.
어떤 결의로 위대한 상담사의 길을 걷게 됐을까.
나는 한참 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20초쯤이 지나서야,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닥터 프로스틀이라고 합니다.”
“응? 그게 무슨 소린가?”
“교수님 별명입니다. 어느 웹툰의 주인공과 머리 색은 같은데, 워낙 외모가 중후하셔서요. ‘틀니’와 조합해서…….”
“이, 못된! 어떤 못된 녀석이 그따위 별명을 지었나?”
“장난스럽되 존경의 표현일 겁니다, 프로스틀 교수님.”
“에잉, 시끄러워! 답이 됐거든 썩 나가!”
고개를 숙이고 교수실을 나서며 생각했다.
흰머리의 교수는 아니지만……
내 퓨플 프로스트에게도, 슬픔은 필요할 것 같다고.
다시금 호밀밭의 파수꾼을 떠올려본다.
홀든은 끝내 파수꾼이 되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를 돕고자 다가온 교사와 상담사마저 내쳤다.
세상 모두를 적으로 돌린 채 파수꾼이 아닌 은둔자로서 살아가게 된 아이의 유일한 행복은, 순수한 동생 앞에서 눈물을 보인 한순간이었다…….
*
무표정한 얼굴로 라면을 주문하며, 손바울은 말했다.
“맞다. 차량은 어떤 거 좋아하세요? 역시 블랙 세단?”
“차량? 그건 왜 묻니?”
“저 차 바꾸려고요. 보통 선생님 차량으로 이동하시겠지만, 가끔씩 제 차로 모실 일도 있을 테니까. 지금 모는 차는 경차라서 선생님께 어울리지 않거든요. 어떤 색이 좋을까요?”
“……일단, 차를 바꾸다니? 네가 무슨 돈이 있어서.”
“좀 있어요. 아, 나쁜 돈 아닙니다. 알바로 벌었죠.”
“알바로 차를 바꿀 돈을 벌었다고?”
“그냥, 부적 좀 팔았어요. 할머니가 나이 들고 오락가락 했거든요. 그럴 때 몇 개씩 빼돌렸다가, 돈 많아 보이는 손님들한테 좀 싸게 줬죠. 불법 아닙니다. 정당한 거래였어요.”
“음…… 그래. 비난하려는 건 아니었다.”
“네. 세금도 안 떼는 현찰장사라, 꽤 모았습니다.”
세금을 안 뗀 시점에서 불법에 해당할 텐데.
하지만 지나간 일을 추궁할 때는 아니었다.
그 외에도 지적할 것이 많으니.
“네가 왜 차까지 바꿔가면서 수행을 해? 제자는 그러는 거 아니다.”
“흠. 제자기도 하지만, 수행비서도 하겠습니다. 디렉터 포기하는 것까지가 최대한의 양보예요.”
“그게 무슨 양보니. 바울아, 상담사가 되겠다면서? 그러려면 대학원에서 센터에서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할 텐데, 내 옆에만 있으려고 하면 그게 잘 되겠어?”
“학교는 그냥 관둘까요?”
“이 녀석아.”
“왜, 민간자격증 다른 거 많잖아요? 상담심리사 자격증은 학력이 필수지만, ‘심리상담사’ 자격증은 그냥 독학으로 필기 보고 직무연수만 받으면 되던데요. 아 다르고 어 다른 느낌이라 보통 내담자들은 어차피 모를 텐데.”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면 화낼 거다.”
“죄송합니다. 웃으실 줄 알았는데, 이게 아니었군요.”
농담도 잘 못하는 아이.
상담사를 꿈꾸고 있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석사와 수련 과정은 홀로 헤매는 머나먼 여행이 되리라.
모든 것이 낯설고 신비로운 사람의 길.
그렇기에, 그는 B612의 어린 군주다.
나는 손바울이 사막에서 조우한 여우.
여우는 어린왕자에게 한 송이 장미의 진실을 알려준다.
그것은 결코 즐겁거나 설레지 않는 후회가 되었지만, 그 슬픔이야말로 어린왕자에게 꼭 필요한 진실이었다.
주문한 음식을 받아와 테이블에 앉은 뒤.
나는 손바울의 라면을 바라보며 물었다.
“일기를, 발견했다고 했지?”
“아, 네. 보여드릴까요? 찍어놨는데.”
“혹시 읽어줄 수 있을까? 편히 먹으면서, 중간중간.”
토요일의 학생식당은 썩 붐비지 않았다.
내 얼굴을 알아본 몇몇이 카메라를 들이밀고는 있으나, 대부분 10m 밖.
사적인 시간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배려심이리라.
대화를 엿들을 수 있는 거리는 못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쉬운 요청은 아니었지만……
손바울은 별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드시면서 들으세요. 앞쪽은 로마서 구절인데……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리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사도 바울의 말씀입니다, 아멘. 이 모든 일에 넉넉히 이긴다고 한다.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한다. 모든 일과 모든 피조물조차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한다. 미친놈 지랄하네…….”
문득, 손바울이 눈살을 찌푸렸다.
눈물이 솟구치거나 해서는 아니었다.
잘 보이지 않는 문자를 해석하기 위함일 뿐.
“여긴 욕이 잔뜩 적혀 있어요. 덧쓰고 지우고 해서 씨발 개좆 죽여버려…… 이 정도만 보이네요. 그 뒤부터 읽을까요?”
“……그래. 그래주렴.”
“네. 여기부터는 즐거우실 거예요. 역시 선생님 말씀이 정답이었거든요. 복수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어. 자…… 성부 성자 성령이여, 내가 이 아이를 세상에 내놓는 것은 무엇을 위함이리까. 비밀스러운 죄악 속에서 잉태된 아이로 하여금, 어떤 세상을 보길 바라는 까닭이리까. 오른뺨을 때린 이에게 왼뺨마저 내어주는 용서이리까. 아니, 저는 용서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을 죽이고 저도 죽겠습니다. 아니야. 제발. 제발 죽이지 마. 용서해. 용서해. 이 불쌍한 아이를 죽이지 마. 작은 아이가 살인자 어미를 두게 하지 마. 주여. 나의 주여. 이 빌어먹을 시련을 안겨주신 나의 주여. 주를 향해 헐벗은 몸으로 외치노니, 개잡놈아, 내 아이를 괴롭히지 말아라. 내 아이만큼은 영원토록 세세 무궁토록 행복하게 놔두어라. 네가 그토록 사랑했던 이방인 사도의 이름을 내릴 테니, 제발, 제게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주세요. 제가 제 아이를 죽이지 않게 해주세요. 이 아이만큼은 어미처럼 시험에 빠뜨리지 마세요.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그저 남은 생을 어미로서 살겠나이다.”
아아……
그랬구나.
그녀에게 손바울은, 절망인 동시에 희망이었구나.
“선생님? 괜찮으세요? 일단 이름 짓는 파트는 끝인데요.”
“……그래. 그 이후에 벌어진 일들은……”
“아마 예상하신 것과 같을 겁니다. 제가 곱슬머리잖아요? 그 당시에는 곱슬 유전자가 우성이라 직모끼리 만나면 무조건 직모만 나온다는 게 상식이었다면서요? 2004년쯤 돼서야 안 그럴 수도 있다는 이론이 나왔다던데. 뭐, 그걸 알았다고 하더라도 이성적인 사고가 가능한 상황은 아니었겠지만요. 제 머리카락 꼬부라지는 거 보고는 반쯤 미쳤던 것 같습니다. 이런저런 추동이 있었겠죠. 아이가 아비 모르는 자식 소리 들으리란 예상도, 자길 의심할 남편의 시선도, 어느 하나도 감내하기 힘들었을 테니까. 그래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대요. 그놈들 다 죽이고 자기도 자살할 생각으로. 그런 걸 남편이 알아차렸고, 결국 다 털어놓은 뒤에 공범이 됐고.”
“그래…… 그랬구나.”
“맨 뒤에 또 재밌는 게 있어요. 저한테 쓴 편지 느낌인데.”
전혀 재미있지 않은 이야기를, 손바울은 무표정하게 전했다.
“바울아. 혹시 이걸 본다면 넌 많이 슬퍼하겠지. 많이 울 거야. 그리고 오랫동안 괴로워할 거야. 그러니까 숨기려고 해. 언젠가 나이가 많이 들어서, 진실을 견뎌낼 수 있을 때쯤에 발견하도록. 바울아. 너는 지금쯤 몇 살이니? 너만 두고 가버린 우리를, 얼마나 오랜 세월 원망해왔니? 정말 미안해. 이렇게 돼버려서 정말 미안해. 사랑해, 바울아……. 되게 웃기죠? 저는 안 슬픈데. 사실 더 어렸을 때 발견했어도 아무 문제 없었을 텐데. 이런 거 보면 세상 참 재밌다니까요. 아이러니합니다. 아 물론…… 슬퍼해야 되겠죠. 알아요. 언젠가는 저도 이 일기 보면서 울 수 있는 날이 오겠죠.”
“그렇게…… 될 수 있을 거야.”
“그렇죠? 저한텐 선생님이 계시니까. 아무튼…… 선생님? 티슈 좀 뽑아올까요? 드시는 데 불편할 것 같습니다.”
“바울아.”
“네, 선생님.”
“사랑한다.”
“오. 저도 노력해보겠습니다. 조만간 할 수 있을 거예요.”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고인의 슬픔을 생각했다.
용서하기 위한 이름.
박해를 강요하는 머리카락.
신에게 선포했던, 한 어미의 협박 같은 소원.
이제야 알 것 같다.
네 번째 에픽퀘스트의 보상이 [암시 구조화]인 이유를.
아니, 그 이전에, 내게 NBSC라는 신비가 주어진 이유를.
이것은 어느 개잡놈의 눈물.
누구 하나 구원해줄 수 없었던 파수꾼이, 홀로 남은 비극의 아이에게 전해주고 싶었던 기적.
「 [암시 구조화]를 사용합니다 > 손바울
99의 ‘슬픔’과 1의 ‘기쁨’이 스며듭니다…… 」
파수꾼은……
신은, 이 아이를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바울아. 부디 용서해다오. 빌어먹을, 개잡놈들을.”
“아…… 네? 헤헤. 어어. 음…… 와. 뭐지? 하하. 어라? 이상하네. 선생님, 저 좀 이상한데요? 이런 거 처음인데. 이건 뭐죠? 이게 뭘까요? 왜 이렇게…… 눈물이 나죠?”
“멍청한 제자야. 슬프고도 기뻐서…… 그런 거잖니.”
“아…… 그래요? 하하하. 와…… 좀, 쩌네요……. 흐, 흑…….”
손바울은 울며 웃었다.
고불고불하던 라면이 퉁퉁 불어, 길게 늘어설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