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
47장 - 상담사와 스승 (1)
“BPD라…… 참 까다로운 장애지. 인격장애 계통의 박대민이라고나 할까. 아주 피곤하고 곤란한 게 공통점이야.”
그렇게 말하고, 한효준은 눈살을 찌푸려 보였다.
피곤하고 곤란한 제자가 꼴 보기 싫다는 듯.
그렇지만 잠깐의 투정일 뿐, 금세 자세를 바로 했다.
“지연이 그 녀석, 며칠 표정이 안 좋더니 그런 케이스를 떠안고 있었던 거로군. 하지만 진단한 것은 자네였겠지? 그 아이 성격에 한두 번 보고 인격장애를 단정 짓진 않았을 테니.”
“……예, 자의적으로 판단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긴 뭘. 자네야 그럴 만도 하지.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고 하는 장금이한테, 내가 뭐라 비난하겠는가.”
“장금이라니…… 과분한 신뢰 같습니다.”
“자넬 신뢰하는 게 아냐. 자네를 알아본 내 눈을 신뢰하는 것이지. 어찌됐건 BPD라. 까다로운 문제야. 정도가 다를 뿐 누구나 가지고 있는 성향이기도 하니. 대인관계는 어땠나?”
“문제행동이 뚜렷하지는 않았습니다. 놀랍도록 잘 적응하고 있는 케이스여서, 교사들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바람직한 학생으로만 여겨지고 있더군요.”
“그래, 그런 케이스도 있지. 그토록 충동을 잘 조절하는 타입이라고 하면…… 참, 불쌍한 아이겠구만.”
“그게 짐작되십니까?”
“그래. 문제행동이 적다는 것이 때로 청신호처럼 보이지만, 그 속은 얼마나 문드러지고 있겠나. 가식적으로 유지하던 우호적 관계가 무너지고 말 것이라는 공포는…… 애초에 사이가 나빴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비극일 게야. 그런 상황에서는 악순환이 되기 쉽지. 하마터면 일이 커질 뻔했구만.”
“예. 슬픈 케이스였습니다.”
BPD 환자에게 불특정다수의 호의란 언제고 돌변할 것이 분명한 불신의 대상.
그래서 몇몇 단짝에게 깊은 사랑을 받으려 애쓰는데, 그 선별된 친구들에게는 도리어 미움받을 짓만 하게 된다.
그 경험이 다시금 세상에 대한 불신을 키운다.
마치 무간지옥(無間地獄) 같은 악순환이었다.
근원을 해소하지 못하는 한 평생 그 상태.
약물치료와 행동치료는 임시방편밖에 안 된다.
그 아이는 평생 진정한 행복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런 게야. 스스로를 조절하는 강인한 정신력에도 불구하고 자기 문제를 해소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뜻이 아닌가. 그 근원은 또 얼마나 무거웠을지……. 그래서, 어떻게 했나? 제멋대로 주먹질을 당해버린 뒤에 말이야.”
“……최초의 악순환을 끊었습니다.”
“허. 그것이 잘 되던가?”
“솔직히 말씀드리면, 운이 좋았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일주일 정도는 두 사람을 번갈아 만나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만나본 피해자가, 참 괜찮은 아이더군요.”
“그건 또 별일이로군. 아주 드라마틱해. 보통 상담 케이스에서는 보기 드문 일……. 적극적인 꼰대질이 불러온 행운일까. 이번에도 사례발표에 적합하지는 않은 케이스로구만. 본디 벌여서는 안 되는 저돌적인 상담이었으니. 이 친구야. 자네는 대체 언제쯤 상식적이고 정석적인 상담을 해보려나?”
BPD는 숙련된 상담사도 극히 주의해야 하는 장애다.
애초에 진단부터가 쉽지 않은 증세.
거기에 쉬이 상담관계가 무너져 치료중단으로 이어진다.
고작 두 번째 회기에서 내담자의 약점을 헤집는 짓은 금기 중의 금기였다.
결과가 좋았다고 해서 긍정적인 사례랍시고 떠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BPD에 있어서 ‘상식적 상담’의 세션은 지나치게 길다.
초기 회기에서는, 남들과 현저히 다르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지하고 문제행동만을 조절하도록 지도한다.
문드러진 마음의 치유를 멀찍이 미뤄둔 채로.
조심스러운 접근이 어찌 나쁜 것이겠냐만……
그늘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내던 육성주 앞에서, 나는 나를 상담사의 상식에 가둘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수님. 제게는…… 보입니다. 내담자가 어떤 괴로움 속에 있는지가요. 그렇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알고 있어. 나무라려는 것이 아니야. 고기에 깃든 것이 설당이 아니라 홍시임을 단박에 알아차렸다면, 그것을 모른 척하는 것은 또 무의미한 일이 될 수 있겠지. 다만…… 박 군. 지연이라고 해서 몰랐겠나? 그 아이라고 해서 불쌍한 아이의 상처를 치유해주고 싶지 않았겠어? 그럼에도 하지 않은 일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는 법이야.”
“그렇지만 교수님. 그렇게 조심스레 접근하다가 중요한 순간을 놓치게 됐을지도 모릅니다. 그 아이가 제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홀로 괴로워하다 무너지고 말았다면…… 안정성을 위한 일이었다며 변명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 친구가 참…… 무슨 말인지 안다지 않나.”
“교수님. 저는 할 수 있는 일을 피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이 잘못입니까? 그저 사례보고를 위해 보편적인 기준에 맞춰야만 하는 것입니까?”
한효준을 비난하기 위한 질문은 아니었다.
그의 눈에 담긴 감정이 무엇인지는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내 스승은 제자를 염려하고 있다.
혹여 남들과 다른 급진적인 방법으로 야매 상담을 진행하다가, 그것이 불운하게도 비극적인 전개로 이어졌을 때.
그때는 어떤 변명도 못 하고 자책하게 될 테니까.
한효준은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아내를 위해, 딸을 위해, 이아리와 도세나와 주민성과 김서현을 위해, 나는 결코 무너져선 안 된다.
모든 상담에서 안정성을 추구해야 마땅했다.
그렇지만, 그들만큼이나 육성주가 소중하다.
내 눈앞에서 마음을 속이는 아이로부터 눈을 뗄 수 없었다.
분명히 보이는 지름길을 두고, 한참을 돌아서 가는 방법을 선택하기가 힘들었다.
내 안심을 위해 내담자를 수렁에 버려두는 꼴이기에.
하지만 그런 내게, 한효준은 더욱 크고 곧은 길을 논했다.
“다시 말하지만, 자네라면 그렇게 해도 돼. 눈에 보이는 증세를 무시하고 신중하게 굴지 않아도 되네. 바보같이 허허 웃으면서 내담자에게 주먹질을 당해도 돼. 참 끔찍한 노릇이지만, 자네라면 극복할 수 있을 테니. 분명 내담자를 생각하는 그 마음으로 자신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단 말이야. 허나, 박 군. 그런 식으로 몇 명을 만날 것인가? 자네가 아무리 온 삶을 기울여 내담자만을 생각한다 해도, 기껏해야 10만밖에 더 만나겠는가? 자네 말마따나 어딘가 자네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는, 불행한 아이들이 설당인지 홍시인지 감도 잡지 못한 채로 무너져가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제가 더욱 자신을 갈고닦아-”
“그래봐야! 그래봐야 100만을 만나겠나? 그래봐야 1000만을 만나겠어? 더 넓게 봐야 할 것이 아닌가. 왜 그리 생각이 짧나? 왜 그 마음의 지도를 홀로 안고 침몰하려 해?”
“……예?”
“우리 학자들이 가설을 임상과 연구로 검증하고 또 검증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단지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아는 바보들이라서 그러한가? 그렇게 검증한 이론을 학회에 발표하는 것이 무엇 때문인가? 단지 내가 천재입네 하며 남들에게 뻐기기 위함인가? 그것이 아니지 않나!”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멍한 마음으로 조심스레 되물었다.
“제가…… 등불이 될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당연하지! 내가 자네에게 기대한 것이 고작 10만이라고 생각했나? 그 정도라면 지연이라도 할 수 있어! 당장 그 녀석이 방송을 시작하면, 마흔일곱 아저씨보다 팬이 적겠는가? 물론…… 자네보다 더 잘나가지는 못할 수도 있겠지만, 어찌됐건 그런 업무 자체는 불가능하지 않다는 말이야. 다만…… 자네에게는 마음의 지도가 있지 않은가. 그것을 어찌 개인의 상담에만 활용하려는 게야. 왜 야맹증을 앓는 다른 상담사들에게 등불을 비춰주려는 생각은 않는 게야. 자네라면 할 수 있지 않은가. 누구나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수단으로, 더 정밀하고 조심스러운 방식으로도 내담자를 안아줄 수 있지 않은가. 그리하여 수천 수만의 상담사들이 자네의 길을 배우게 할 수 있지 않느냔 말이야. 왜 코앞의 내담자에 매몰되어 더 많은 기회를 놓치는가? 왜 수천 수만의 박대민을 만들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야?”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나는 나라는 상담사에 매몰되어 있었다.
내 눈앞의 오아시스가 너무도 풍요로워 보여서, 손을 잡은 아이들과 당장 목을 축이는 일만을 즐겼다.
그 오아시스를 지도로 남겨 후인들을 초대하지 않고.
내가 이룰 수 있는 더 커다란 호수에서 눈을 떼고.
그저 한두 사람의 행복만을 좇았다.
그 한계를, 나의 스승이 통렬히 지적하고 있었다.
“제가…… 제가, 할 수 있겠습니까?”
“그걸 어찌 내게 묻나? 코흘리개 아이도 아니고 말이야.”
“그렇지만 저는…… 이제 막 입문한 초심자입니다.”
“배우게. 선인들의 연구와 임상에서 상담사들을 설득하는 기법을 배워. 그를 통해서 새 시대의 칼 로저스가 되게. 그로써 지도 없는 아이들에게 길을 열어주게.”
새 시대의 칼 로저스……
그 말을 중얼거리며, 돌아서서 교수실을 나섰다.
복도를 서성거리던 김지연이 손을 모으고 다가오더라.
“저, 큰소리 나던데…… 저…… 혹시, 혼나셨어요?”
“예. 크게 혼났습니다.”
“죄, 죄송해요! 저 때문에…….”
“아뇨. 선생님 때문이 아닙니다. 제가, 놓치고 있었어요.”
“네? 뭘요? 놓치신 게 뭐가 있었죠?”
“많은 것들입니다. 비정상적인 애착을 보이는 소년을 인계하며, 김 선생님이 제게 BPD의 가능성을 말하지 않았던 이유. 때로 어떤 상담이론보다도 더 효과적인 것으로 보고되는 기법이 등장해도, 그것이 당장 무수한 상담사들에게 전파되지는 않는 이유. 그런 것들을 놓치고 있었어요.”
“어……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어요.”
아마 김지연이라면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부연설명을 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다음 수업까지 남은 시간이 길지 않았기에.
“선생님. 온진고 상담교사에게 연락해주실 수 있을까요?”
“네? 갑자기 왜요?”
“지금 좀 만나뵙고자 합니다. 꼭 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그…… 성주 때문이에요? 그러면, 같이 가요.”
차를 몰아 온진고등학교로 향하는 동안, 김지연은 추가적인 질문 없이 상담교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쪽도 갑작스런 연락에 꽤 당황한 눈치였다.
“네. 아녜요, 그런 건 아니고요. 성주 학생 관련해서 여쭤보고 싶은 것도 있고 해서요. 네, 지금 바로요. 네, 네. 알겠습니다. 그러면 도착해서 상담실로 갈게요.”
통화를 마친 선배가 내 옆모습을 뚫어져라 관찰한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부담스러웠다.
“김 선생님. 식사하셔야 할 시간을 빼앗아 죄송합니다.”
“아녜요. 애초에 제가 했어야 되는 일인데요.”
“……눈치채셨습니까?”
“네. 그런데 의외긴 하네요. 선생님은 안 그러실 줄…….”
“예. 저로서는 생각지 못했던 일이지요. 호구라서, 뭔가 사정이 있었겠거니 생각해버리니까요. 하지만 한 교수님이라면 다르셨을 것 같습니다.”
“아, 하하. 그러셨을 거예요. 상대가 누구건 한달음에 달려가서, 삿대질을 하면서 당신이 상담사야 신이야 외치셨겠죠.”
“저는 그렇게까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조금쯤은 스승을 닮아보려 합니다. 더는 혼나고 싶지 않거든요.”
“아, 그거였구나…….”
“김 선생님 평판에 좋지 않게 작용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음…… 그거 좋은데요?”
“좋다고요?”
“네. 보람찰 것 같아요. 저도, 스승님 닮아보죠 뭐.”
샐쭉 웃는 김지연과 담소를 나누길 20분.
온진고등학교에 도착하자, 점심시간을 맞아 교정을 거닐던 학생들이 우리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그중에 마침 심준호가 있었다.
반 친구들과 농구공을 튀기다가, 날 발견하고 뛰어오더라.
“아, 아, 꼰마 쌤! 아 뭔데요! 혼자 가버리고!”
“미안하게 됐다, 준호야. 아저씨 바쁘니까 농구 계속 해.”
“아니…… 헤헤. 이따 한 겜 안 하실래요?”
“흠. 자신 있니?”
“잉? 쌤, 저 농구 개잘해요. 글고, 성주도요.”
“그렇다면 좀 무서운걸.”
“쌤 상대도 안 될걸요? 헤헤.”
“꼰마다!”
“와! 꼰마랑…… 세이클럽이다!”
아이들의 육탄돌격을 피해 교사로 향하며, 김지연은 무척이나 민망해했다.
“아…… 닉네임 잘못 정했어. 바꿔야 되겠어요.”
“그러면 프리챗은 어때요?”
“프리챗이요? 아, 그 망한…… 어…… 프리…… 혹시?”
“예. 프리월드의 초창기 커뮤니티입니다.”
“우와. 와. 그렇게 들으니까 진짜…… 신기하네요. 저 대학생 되기도 전에 사라졌던 것 같은데.”
“예. 선생님이 저 아이들 또래였을 때겠네요. 저는 그 커뮤니티가 망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웠지요. 시기를 놓친다면 될 일도 안 된다는 것을. 그렇기에 이후로는 문제를 인지한 즉시 대표에게 찾아갔습니다. 사무실에선 호인처럼 굴었지만, 대표실에서는 싸움개처럼도 보였던 모양입니다.”
“어…… 정말요? 상상이 안 돼요.”
“꼰마!”
“세이클럽!”
“아, 빨리 가야 되겠어요.”
황급히 상담실 쪽으로 향하던 도중.
김지연이 문득 창밖의 농구코트를 바라봤다.
“준호……? 심준호? 아까 걔가 혹시?”
“예. 성주와 싸웠던 첫 번째 친구입니다.”
“그 애가, 성주랑 같이 농구를 한다는 거예요? 어떻게?”
“어떻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나머지는 성주한테 허락을 받으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본인이 설명할지도 모르지요.”
“와, 어떻게? 진짜 어떻게? 말도 안 돼. 그렇게…… 그렇게 싫어했는데. 아무리 양가감정이라 해도…… 그게 돼요?”
“얼굴의 멍을 보여주니 설득이 되더군요.”
“하핫! 그게 뭐예요? 아, 여기예요. 상담실이요.”
정확하게는, Wee클래스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세계 최정상급의 자살률을 자랑하는 교육현장의 문제를 개선하기 위한 Wee프로젝트의 최전선.
그곳에서 전문상담교사인 이덕자를 만났다.
“어머? 혼자 오시는 게 아니었네? 이리 오세요. 이쪽 분은…… 어? 어머? 혹시, 드라마 나오신 분 아니에요?”
“맞습니다. 박대민이라고 합니다.”
“어머! 어머! 어떡해? 어머…… 싸인 받아야 되겠네요.”
그렇게 말하는 50대 여성은, 참 사람이 좋아 보였다.
내담자의 비밀을 함부로 떠벌릴 것 같지는 않은.
컴퓨터를 만지며 놀고 있던 학생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덕자와 비슷하게 무척 느긋한 태도였다.
“쌤 쌤, 이 아저씨 누군데요?”
“어? 어, 꼰마다!”
“뭐? 꼰마가 뭔데?”
“야, 너 몰라? 꼰마 몰라? 아, 문찐이냐?”
“뭐래? 꼰마가 뭔데? 검색하면 나와?”
“당근이지, 문찐아!”
‘문화찐따’ 소리를 하며 투닥거리는 아이들.
아마도 또래상담부 활동을 하는 부원들일 것이다.
또래들에게 심리적인 안정감을 주겠다는 소명감이 있을지, 봉사활동 시간을 받으려는 목적의식이 있을지, 단지 딱히 할 게 없어서 시간 때우려 들어왔을지 모를……
그런 아이들의 책상 위에 종이들이 굴러다녔다.
상담기록부.
상담자와 슈퍼바이저만이 볼 수 있어야 마땅할 기록들이, 내 눈앞에서 바람에 팔랑거리고 있다.
고개만 끄덕여 인사해주고 이덕자를 따라 이동했다.
실질적인 상담이 진행될 내실(內室).
그곳은, 그저 파티션으로 분리되어 있을 뿐이다.
어디에도 학생의 비밀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는 없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허술하기만 하다.
외부 상담사의 방문에도 실실 웃기만 하는 이덕자처럼.
그런 그녀에게,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덕자 선생님. 당신은 상담사입니까?”
“예? 무슨 소리예요? 상담사…… 상담교사 맞는데요?”
“그러시군요. 그렇다면 그 기준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신은 최악의 상담사입니다. 앞으로 몇이나 되는 학생이 당신의 상담을 통해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는 문제.
어떤 사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덕자 본인은 격렬히 반대했지만, 학교장의 성화에 어쩔 수 없이 학부모와 통화하게 됐을지도 모른다.
박대민은 그런 미지의 사정에 언성을 높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나는, 내 스승을 닮고자 한다.
내담자에게는 다시없이 인자하지만……
상담자에게는 서릿발처럼 차갑기만 한.
Wee클래스가, 뒤안길로 사라진 프리챗처럼 되지 않도록.
문제가 발견된 지금, 지체없이 칼을 들이대고자 한다.
“상담 내용을 성주의 부친에게 전파하셨다고요. 그것도 자의적으로 왜곡하셔서는. 여기가 동네 사랑방입니까? 대체 무슨 권리로 상담사의 윤리를 쓰레기통에 처박았습니까?”
“저, 저기요? 이봐요! 난 필요성이 있어서-”
“댁 필요성 따위 궁금하지 않습니다. 상담사라고 하셨잖습니까? 당신 사정 봐달라는 말을 하실 거였으면, 이 길로 들어서지 마셨어야지요. 이 문제는 좌시하지 않겠습니다. 저희 지도교수께서 상담심리학회장이신 것 정도는 알고 계시겠지요?”
“아니, 당신 뭐야 진짜! 우린, 그쪽이랑 상관없어요!”
“그렇습니까? 어디 학교현장과 상담심리학회가 얼마나 무관한지 확인해보지요. 더 하실 말씀은 없으시지요?”
이덕자의 얼굴은 분노로 달아오르고 있다.
당연한 일이었다.
자기 안마당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파티션 너머로 아이들이 빤히 다 듣고 있는 상황에서, 나이도 한참 어려 보이는 남자에게 폭력적인 이야기들을 듣고 있으니.
그렇지만 거기서 끝날 리 없는 문제였다.
이덕자는, 조금씩 파랗게 질려갔다.
그 역시 당연한 일.
상담심리사는 아닐지언정, 이 업계에서 한효준이란 이름이 얼마나 무거운지 정도는 그녀도 알고 있을 터였다.
“……저, 저기요? 왜 이러시는지…… 제가, 사과할게요.”
“사과요?”
“네, 네. 저기, 좀 진정하시고요. 성주가 선생님한테 이상한 소리를 한 모양인데, 제가 다 해명을 할게요.”
“그걸로 될까요? 제가 그 정도에 만족할 것 같습니까?”
“그럼…… 대체 뭘 원하는 건데요!”
“뻔한 일 아닙니까? 연수 받으러 오십시오.”
“여, 연수요?”
“예. 서울대 상담심리 랩으로 오세요. 당장 내일 저녁부터.”
이덕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110의 ‘진단’이 협박의 성사를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시원하게 자리를 떠날 타이밍이었다.
“……아, 뭐야. 연수라니. 교수님이랑 얘기 다 된 거였어요?”
Wee클래스를 나서며, 김지연은 그렇게 물었다.
하릴없이 얼굴이 붉어졌다.
“아닙니다. 돌아가서 설득해야지요.”
“앗. 그렇게 막…… ‘노빠꾸’로 하셔도 돼요?”
“괜찮지 않겠습니까? 한 교수님이시니까요.”
“음. 괜찮을지도? 한 교수님이시니까…….”
그렇게 맹한 소리를 중얼거리며 나선 운동장.
육성주와 심준호는, 내 농구 실력에 크게 놀랐다.
“아…… 뭐예요! 잘하시는 줄 알았더니!”
“쌤 가세요. 우리끼리 할래. 완전 운동 못하네!”
한 몸이 된 듯 날 놀리며 즐거워하는 아이들.
그 둘을 보며, 나와 김지연 역시 즐거워졌다.
상처와 갈등 속, 믿고 의지할 만한 어른이 없는 학교.
그 안에서도 이 아이들은 인간다움을 지켰다.
그리고 마침내 다시 함께 웃을 수 있게 됐다.
그 사실이 못내 고마워서, 웃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