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진없는 상담사-126화 (126/200)

# 126

45장 - 개 같은 날의 오전

「 서브퀘스트 “크리몽을 살려봐요” 완료!

5exp를 지급해드렸어요! 」

또 하나의 서브퀘스트가 완수됐다.

보기 드문 거액의 후원금과 함께.

[크리몽님 별사탕 10000개. 고마워요. 상담 이런거 쓸데없다고생각했는데.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르실거야.]

「와우;; 오늘 별 제대로터지네;;」

「이정도면 신기록아님 」

「ㄴㄴ 저번에 16만개터짐」

「그날은 마구니형님이 10만개쏴서」

「회장님 오늘은 안쏨 」

「마구니 : 쿨돌리는중」

「형 대체 직업이머임 」

「마구니 : 관심ㄴㄴ」

「ㅋㅋㅋㅋㅋ 오늘은 13만정도 나왔나 」

「리액션도안해주는데 왜케쏘는거야ㅋㅋㅋㅋㅋ」

왜냐하면, 죽을 만큼 힘들었으니까.

친구들에게 배신자라는 오명를 쓰고 남자친구에게도 버림받은 크리몽이, 진심으로 죽음을 바라고 있었으니까.

그런 와중에 내 몇 마디로 살아갈 힘을 얻게 됐다.

목숨값이라기엔 좀 그렇지만, 100만원이 아까울 리 없지.

NBSC의 상담사인 나만이 알 수 있는 일이지만.

일요일 저녁의 방송에는, 평소보다도 한참 더 무거운 사연들이 올라왔다.

그 결과가 무려 세 개의 서브퀘스트.

급류 속에서 지푸라기라도 잡듯 올린 사연들을 최선을 다해 마주하자, 하루 만에 15exp를 벌게 되었다.

그들이 직접적으로 죽음을 언급한 것은 아니었다.

퀘스트로 명시되었기에 위기임이 명확해졌다.

하지만 그 사연들은, 110의 ‘진단’과 [내담자 평가]을 가진 나라면 위급상황임을 모를 수 없는 내용.

서브퀘스트가 해금되지 않았어도 내 행동은 같았을 것이다.

달라진 것은 시청자들의 행동 쪽이다.

그토록 심각한 사연이 평소에도 넘쳐나는 것은 아니니.

면대면조차 아닌 인터넷 고민상담소.

죽음을 생각할 정도로 가슴 찢어지는 사연을 인방에서 고백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못 되었다.

그렇기에 지금껏 그런 낌새를 내비쳤던 것은 이아리와 도세나와 히포꼬리 단 세 명.

한 달 반 동안 세 명이 전부였다.

그런데 하루 방송으로 같은 수의 사연을 만났다.

그 변화가 무엇 때문일지는 자명한 일.

‘외모’가 90에서 110으로 향상된 까닭이리라.

그로써 평소 꺼내지 못하던 사연이 촉발된 것이다.

내가 좀 더 좋은 상담사가 되었기에.

NBSC의 ‘외모’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제 알 것 같다.

조미소는 단지 잘생긴 오빠라 생각해서 날 불렀다고 말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스스로를 속이는 의식의 논리.

자신을 죽어 마땅하다고 확신하는 이들에게는, 살기 위해서 고민을 토로하는 일조차 죄악으로 여겨지고 만다.

무의식이 외치는 생명의 목소리는 너무도 작다.

자살사별자(suicide survivor)들이 자살 고위험군으로 분류되는 이유가 바로 그 지점이다.

그들이라고 방치하고 싶어서 방치한 것일 리 없으니.

말해줬다면 도와줬을 텐데-

그토록 힘들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더 잘해줬을 텐데-

그 자책과 후회가 남은 이들을 끝없는 고통으로 몰아간다.

나 역시 그랬다.

김 이병이 죽고 싶을 만큼 괴롭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날 소대장 앞에서 멍청하게 쭈뼛거리지는 않았을 텐데.

그 생각 때문에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

사실은 당연한 일이었는데.

제대로 말 한번 걸어보지 않은 내게 고백할 일이 아니었다.

나로서는 그를 구할 수 없었다.

우리는 죽어가는 영혼을 구원할 수 없다.

그 한계를 극복할 힘을 NBSC가 내게 쥐어줬다.

‘외모’라는, 오해의 소지 가득한 어휘를 통해서.

그걸 경국지색 따위와 엮었던 것은……

국어영역에 약한 건지 오해를 안겨주길 즐기는 건지 모를 NBSC 때문이긴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참 어리석었다.

상담사의 ‘외모’가 그런 가치일 리 없는 것을.

처음 김지연을 만났을 때를 떠올려본다.

딱 좋은 온도와 딱 좋은 조명과 딱 좋은 습도.

그리고 편안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청자.

생전 처음 만난 상담사 앞에서, 나는 어느새 내 처연한 감정들을 부끄러움도 없이 털어놓게 되었다.

김지연이 대단한 언변으로 설득했기 때문이 아니다.

궁지에 몰린 이들에게 언어란 그저 감언이설일 뿐.

내담자가 마음을 열고 다가오는 과정은, 비언어적이며 비상식적이다.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는 끌림과 안정감 속에서야말로, 비로소 자신도 모르던 마음의 곤경을 드러낼 수 있다.

나는 마침내 그것을 완성했다.

110의 ‘외모’는 미어지는 괴로움들을 사연으로 끌어낸다.

그 마음들을 마음으로 바라보고 다가선다면, 나는……

이제 김 이병을 구할 수 있다.

그 깨달음으로, 방송을 마치자마자 얼굴을 감싸쥐었다.

왜 이제야.

왜 이토록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할 수 있게 됐을까.

“형님? 형님…… 왜 그러세요? 아, 진짜 왜?”

진대수가 어쩔 줄 모르고 내 어깨를 흔드는 사이.

문자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한효준 교수님 : 탈을 완성했구만. 내일은 일찍 나오게.」

눈썰미가 예리한 스승이, 내 변화를 알아챘다.

*

“어제 일 때문인가? 무언가 깨달음이 있었던 게야?”

뭐라 답하지 못하고 뒤통수를 긁었다.

조미소를 보육원에 데려간 건 계기가 아니라 결과 쪽인데.

하지만 한효준으로서는 그렇게밖에 해석이 안 될 터였다.

“좋은 일이야. 어제는 내가 고양이 좀 그만 들이라고 타박을 했네만, 우리 상담사들 역시 그런 관계 속에서 성장하는 인간이지. 잘했어. 그 탈은 여러모로 도움이 될 거야.”

“그렇습니까.”

“그래. 기존에도 썩 괜찮았기에 굳이 그쪽으로는 언급을 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격이 달라. 생판 처음 본 아이들조차 쉽게 고민을 털어놓을 것만 같아. 인터넷방송이나마 매일같이 마주하던 녀석들이라면, 순식간에 마음을 열겠지.”

“그렇군요.”

탈을 영어로 번역하면, mask가 된다.

이목구비를 가리는 복색을 총칭하는 용어.

그 단어는 또 얼굴 자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그래서 ‘마스크가 좋다’라는 관용어가 통용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탈 역시 중의적이다.

‘탈이 좋다’라고 하면 의도적으로 표정을 잘 꾸며낸다는 뜻.

얼굴을 기준으로 삼으면 실재하는 가면이 탈이겠지만, 마음이 기준일 경우 얼굴 자체가 탈이 되기도 하는 까닭이다.

그렇기에 상담사 역시 탈을 단련한다.

마음에 공감이 넘친다 한들 드러내지 못하면 무의미하기에.

그뿐만이 아니라, 때때로 공감을 품기조차 어려운 가해자들까지 마주해야 하는 직종이다.

포커 플레이어만큼이나 탈이 중요할 터였다.

그것이야말로 ‘외모’.

상담사가 갖춰야 할 내면의 3박자를 의미하는 ‘관계’ ‘진단’ ‘화술’에 대비되는, 외적인 모든 가치를 의미한다.

초면의 조미소가 울음을 삼키며 다가왔던 것은……

그 감사한 내담(來談)은, 내 겉이 바뀐 까닭이었다.

“그래서 고양이는 어떻게 됐나? 생선을 맡겼잖아.”

“생선……. 예. 고맙다고 했습니다.”

“그게 다였나? 아닐 것 같은데.”

거기에 가벼운 신체적 접촉이 더해지긴 했다.

그리고 그것은, 조미소에겐 결코 가볍지 않은 한걸음.

다만 스승에게도 말하기 민망한 일이었다.

“행복해하더군요. 정말 고맙게도요.”

“그랬군. 그랬겠지.”

“짐작하고 계셨습니까?”

“가자마자 영아가 있는 곳으로 데려가니, 어찌 몰랐겠나. 수호 그 녀석이 제 동생 얘기를 입버릇처럼 떠든단 말이지. 여자애를 수영이에게 데려간 걸 보면…… 미혼모였겠지?”

“내담자의 개인정보입니다.”

“이, 못된…… 훌륭한 상담사를 봤나. 그래, 그리 해. 그건 그렇고, 그 아이와는 정말 어떻게 만났던 겐가?”

“……탈을 보고, 제게 와줬습니다. 그게 아니었다면 놓치고 말았겠지요. 자칫 제가 보지 못하는 어딘가에서 홀로 시름하며 죽어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어찌할 도리 없이 고맙습니다. 제가 도울 수 있도록 허락해줘서요.”

“그래, 그랬겠구만. 그런 표정을 보면 마음을 열지 않을 도리가 없지. 반반하게 생긴 것도 한몫을 했겠지만 말이야.”

“제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 겁니까?”

“세상 모든 슬픔을 끌어안은 채 웃는 얼굴. 스스로는 행복하지 않음에도, 그럼에도 행복하다고, 그럼에도 살 가치가 있는 세상이라고 확신하는 얼굴이야. 그러니 위로가 안 되겠나.”

대체 어떤 얼굴인지 모르겠다.

상담사의 극한에 다다른 외양을 필설로 형언한다는 것이 쉬운 노릇은 아니겠지만.

그의 말대로, 이 ‘외모’에는 커다란 가치가 있었다.

조미소의 무의식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비견할 수 없이 잘생긴 사람과 잠자리를 가진다 한들, 그녀의 비애는 여전히 공고할 것이란 사실을.

그럼에도 그녀는 막 차에서 내린 나를 불렀다.

술을 사달라고 작업을 걸며, 살려달라고 울부짖었다.

그건 아마……

손가락 하나의 진리.

태어나자마자 손을 잡고야 마는, 인간의 본능일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끌어안으며 삶을 긍정한다.

그 아름다운 깨달음 속에서, 황당한 이야기를 듣게 됐다.

“아! 그래, 개 같다고 하면 말이 맞겠구만.”

“……예?”

“개는 어감이 좀 그런가? 강아지라고 하세. AAT(Animal Assisted Teraphy : 동물매개치료)가 무엇인지는 알지?”

“아, 예. 훈련받은 치료도우미동물과의 교감을 통해서, 사람 대 사람으로는 어려운 과정을 보조하는 보완대체의학입니다. 주로 대인기피 증상을 보이는 환자들에게 활용합니다.”

“겉핥기로구만. 본질을 논하자면, 실은 반쪽짜리야.”

“반쪽이요?”

“그래. 결국 짐승은 짐승일 뿐이니까.”

“고양이 보호자께서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그래서 하는 말이야. 인간의 죄악으로 인한 짐을 자의적으로 떠넘기는 꼴이 아닌가. 사람의 일을 사람이 해소하지 못해서 미물들에게 기대다니…… 너무 잔혹해. 짐승들이라고 상처받은 인간들만 상대하고 싶겠나. 그런 것을 감동의 시대니 뭐니 포장하는 것은, 인간만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믿는 어리석은 언론의 폐해지. 그 맥락을 잘못 받아들인 문제가정에서는 생각 없이 애완동물을 분양받기도 한단 말이야. 그래놓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며 쉽게도 내다 버리지. 문제를 만들고 있는 저희들이 바뀔 생각은 않고서.”

동물에 대한 편견인가 했더니, 거꾸로였다.

한효준은 동물에게마저 폐를 끼치고 마는 현대 인류를 비판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사람만으로 사람을 치유하기에는…… 쉽지 않은 경우도 있지 않겠습니까.”

“알아. 사람 자체를 거부하게 된 이들에게는, AAT야말로 유일한 방책일 수도 있지. 보통 상담사라면 말이야.”

“보통……이란 말씀은……”

“말했잖나. 자네, 개 같아.”

“아.”

“그런 느낌이 들어. 덩치는 큰데 도무지 화낼 줄 모르는 골든리트리버. 아이고 노인이고 할 것 없이, 다가가고 싶어서 안달이 날 인상이야. 이 사람이라면 모든 슬픔을 토로해도 괜찮으리라 믿게 되겠지. 실제로 그렇지 않았나? 어제 방송 말이야. 내 볼 때는 꽤 위험했어.”

“……예. 그랬습니다.”

“그게 자네라서 정말 다행이었던 게야. 충분히 준비된 상담사가 아니었다면, 그 마지막 기대는 배신당하고 말았겠지. 다행이야. 개 같은 게 자네라서, 정말 다행이야.”

욕처럼 칭찬을 건네는 한효준은……

강아지 같은 인상은 아니다.

분명 턱없이 인자해 존경을 부르는 탈이지만, 평생을 살아온 외모의 미세표현을 교정하는 것이 어찌 쉬울까.

그 얼굴에는 한효준 본연의 슬픔이 남아 있었다.

그에 비해, 나는 시스템으로 탈을 완성했다.

말 그대로 환골탈태라고 할 만한 과정이 거듭됐다.

불안에서 비롯된 그늘이 남아 있을 리 없었다.

그리하여 강아지가 되고 만 것이다.

어떤 삿된 의심도 생겨나지 않아 누구라도 먼저 손을 내밀 법한, 완벽한 상담사의 ‘피지컬’이.

“……정말, 다행이네요.”

“허. 울지 말아. 개 같다는데 뭘 그리 감동해서는……. 흠. 그렇지만 그 마음을 견지하게. 내담자란 그런 존재야. 눈물 나도록 고맙고 다행스러운 존재. 우리의 역할이 딱 그 정도임을 결코 잊어선 안 되네. 본분을 넘어 내가 무언가를 해냈네 하며 뻐기는 때에는, 딱 그 수준에 그치고 말 게야.”

“그러지 않겠습니다. 이 마음을 잊지 않겠습니다.”

“좋아. 준비가 잘 된 듯해. 사실은 준비라고 말하기도 뭣하긴 하지만…… 자네는 참…… 우일신(又日新)이란 말이지. 처음엔 그저 마음만 앞서는 풋내기 같았으나, 이제는 내가 본받고 싶을 정도야. 마치 아이처럼 배우기를 그치지 않으니.”

“정말 아이의 수준이니까요. 이제 첫걸음을 떼었습니다. 저는 더욱 멀리 가고자 합니다. 세상 모든 이들이 제게 다가와 마음을 토로하기를 바랍니다. 더 배우고 더 익히겠습니다.”

“그래…… 좋은 마음가짐이야. 그러면, 이제 수련을 시작할 때가 된 셈이로군.”

“수련 말씀이십니까? 저는 아직-”

“아직은 무슨. 이제 됐어. 합격자 발표는 6월이네만, 자네는 구술 만점이야. 내 입김이 아니라도 안 뽑을 수 없는 인재라는 게야. 해서 공식적으로 석사 과정이 시작된 셈이니, 바로 수련에 들어가야지. 원래도 그럴 셈이지 않았나?”

수련이란, 상담심리사 자격의 필수조건.

석사로 시작한 경우, 1급 자격증 취득을 위해 보통 1~3년의 슈퍼바이지(supervisee : 피감독자) 과정을 거치게 된다.

당연히 시작은 빠를수록 좋을 터였다.

마음만 넘친다고 될 일이 아닌 게 문제지만.

“합격이야 내부적으로 결정되었다 쳐도, 학기가 멀었지 않습니까? 등록도 하기 전에 수련을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 노릇을 자네가 정하나? 학회에서 정할 문제야.”

“……상담심리학회장님. 권력 남용은 안 됩니다.”

“남용이 아니라, 써야 할 일에 쓰는 거야. 우리 꼰대들도 좀 바뀌어야 할 때가 되었어. 진짜 꼰대가 등장했으니.”

“혹시 절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꼰대 중의 꼰대 아니신가? 허허.”

웃자고 하는 말이겠지만, 재밌지 않다.

도대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짐작이 안 되어서.

“그렇다고 제가 학적도 없이 센터에 갈 수는 없습니다.”

“그래, 자네야 학사 학위도 비전공이니까. 다만…… 흠. 자네 지금 준비 중인 프로그램이 둘이지? 가정에 방문해 행동교정을 하고, 각지를 돌며 집단상담 강연을 하는.”

“예? 예, 그렇습니다. 아마도 목요일에는 행동교정 프로의 녹화를, 금요일에는 강연 생방송을 하게 될 듯합니다. 그리고 토요일에는 VR로 상담을 진행하게 됩니다.”

“일요일에는 하던 대로 보육원을 찾겠지. 그러면 일주일 중 3일이 남는구만. 칠주야를 일만 할 수는 없으니 이틀로 잡지. 그게 사례연구에 토의모임에 심리평가에 지도감독에 학술연구를 포함하는데…… 하루에 한두 회기나 잡겠나? 통상적인 수련의 반에도 미치지 못하니, 자격 취득은 기약 없는 일이 될 게야. 참으로 개 같은 일 아닌가? 인생을 바쳐서 내담자들을 만나는 학도가, 도리어 자격을 인정받을 수 없다니.”

거기까지 듣고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한효준이 정말 말도 안 되는 편법을 논하려 함을.

“교수님. 그건 안 됩니다.”

“안 되긴? 행동교정 프로, 누가 슈퍼바이저인가? 나야. 상담심리학회장인 내가 직접 자네를 지도할 거야. 거기에 강연은 또 어떠한가? 세상천지 어디서 수천 명을 집단상담하는 경험을 쌓을 수 있겠어? VR상담은? 그것이야말로 미래사회에 적합한 상담의 새 갈래에 해당해. 그것들을 수련 과정에 포함하지 않는다면, 어찌 바람직한 학회겠나? 순천자존 역천자망(順天者存逆天者亡)이라 했네. 천리가 자네를 시대의 상담사로 인정하고 있어. 나는 그 바른 이치를 따르려는 게야.”

공인 수련기관은 상담심리학회 자격검정위원회가 인준한다.

학교나 공공기관의 상담실, 슈퍼바이저가 재직 중인 상담센터, 정신병원 상담실 등이 그 면면.

방송이나 VR상담 등은 거기에 해당한 적이 없다.

상담심리학회의 장이자 학계 최고의 권위자인 한효준이, 나를 위해 유구한 전통을 갈아엎으려 하고 있었다.

“교수님…… 반발이 적지 않을 겁니다.”

“실력으로 극복하게. 할 수 있잖아?”

“저야, 저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교수님께서는……”

“허. 고양이 쥐 걱정하나? 빨리 클 생각이나 해.”

“교수님.”

“나는 말이야, 박 군. 나는, 이 개 같은 세상이 참 싫어. 인간이 인간답지 못하고, 가정이 가정답지 못한 세상. 그리하여 말 못 하는 미물에게마저 기대어 구원을 바라지. 그 세상 속에서 부끄럽지 않게 살고 싶네. 그러기 위해 자네에게 기대는 거야. 자네라면 할 수 있으니까. 수천 명의 상담사와 수천 마리의 강아지들보다도 더…… 더 많은 이들을 안아줄 수 있으니까. 그런 이를 학회에서 인준해주지 않는다면, 그 학회란 도대체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인가? 됐어. 얘기는 끝났으니, 이만 나가봐. 나도 일이 많은 사람이야.”

교수실을 나서며, 나는 한효준의 미래를 생각했다.

지탄받을지도 모른다.

제자를 위해 사사로이 학회의 기준을 무너뜨렸다며.

당장은 아니더라도, 순백의 커리어에 오점이 될 수 있었다.

그깟 자격증이 뭐라고.

그런 것 없이도 지금까지 잘해왔는데.

그것 하나 때문에 저 사람이 리스크를 질 이유가 없는데.

그렇지만 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격 없는 상담사의 한계를.

꼰마를 모르는 조미소와 마주하며 절감했다.

만약 그때 수중에 스마트폰이 없어, 그녀에게 내가 꽤 인정받는 상담사라는 사실을 입증할 수 없었다면.

그때는 어떤 말도 무게를 갖지 못했을 터였다.

공인된 자격이 갖는 가치는 바로 그 지점이었다.

결코 신은 아니지만.

고작 인간들이 인정한 인간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담자는 그 자격을 신봉해, 때로는 무자격인 내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지도 몰랐다.

미디어에 무관심한 이들에게는 믿음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모내기 철에는 고양이 손이라도 빌린다는 말처럼, 고고하게 살아온 한효준의 손을 더럽힐 수밖에.

이제는 스승과의 2인3각을 시작할 때다.

창가의 아침 하늘에는 서광이 비치고 있었다.

그 햇살을 보며 다짐했다.

결코 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다고.

반드시 누구나가 인정하는 상담사가 되겠다고.

모든 노력을 경주해, 개 같은 상담사가 되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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