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진없는 상담사-122화 (122/200)

# 122

43장 - 이상형인 상담사 (3)

갤러리에 찾아갔을 때, 동생은 퍽 바빠 보였다.

노년의 남녀 몇 명에게 둘러싸여 있는 상태.

아마도 명망 있는 예술가들이 찾아준 듯했다.

왠지 방해해선 안 될 듯한 아우라가 느껴졌다.

“잠깐 기다려야 할 것 같은데. 그림 좀 보고 있을까?”

“그러지 뭐. 지수야, 너 삼촌 알아보겠어?”

“어. 아빠 닮았어.”

“하하. 그래?”

“근데 좀 더 못생겼어. 천수연 이상형은 아닐 듯?”

“저런.”

“박지수, 너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돼. 너 어렸을 때 삼촌이 얼마나 예뻐해줬는데. 너한테는 하나뿐인 삼촌이야.”

“왜? 외삼촌들 많은데.”

“하하. 그래, 외삼촌들도 소중한 삼촌이지. 우리 지수는 삼촌이 많아서 참 좋겠다.”

아내와 딸을 데리고 친동생의 첫 개인전을 관람한다.

지난 8년간은 상상해본 적 없는 일.

중학생인 지수가 삼촌 얼굴이 가물가물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내가 기대한 이상적인 동생상에서 벗어난 박중민과, 나는 그렇게 오랫동안 연락을 끊고 지냈다.

남 욕할 처지가 아니지.

기대하고 실망하고 배제하는 일은, 인간의 흔한 본능이다.

그런 생각 속에 1분쯤 갤러리를 돌았을 때였다.

허겁지겁 다가온 동생이, 아내 앞에서 허리를 꾸벅 숙였다.

“형수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죠?”

“덕분에요. 그리고 형수님, 말씀 편하게 하세요.”

“됐어요. 나 시집살이를 못 해봐서 이런 거 좀 재밌거든요. 도련님한테라도 잘해야지. 시부모님께 해드린 게 없으니까.”

아내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듯했다.

보편적인 시집살이가 일생의 로망이라는 양.

남들이 들으면 배가 불렀다며 혀를 찰 일이었다.

그야, 우리 부모님은 그 세대에 걸맞지 않게 며느리를 퍽 공경하셨다.

명절조차 당일에 얼굴만 비추라고 신신당부하셨지.

그렇게 마주한 잠깐 동안에도, 아내가 뭔가 일을 거들라치면 허겁지겁 제지하셨던 것이다.

아마 재력가 집안 소생으로 서울대 대학원까지 나온 며느리가 대하기 어려우신 모양이라고, 당시엔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진단이 110에 이른 지금은 좀 다른 부분이 보인다.

아내만이 아니라 나 역시 불편하셨으리라.

밖에서는 좋은 사람 노릇 다 하고 돌아다니는 주제에, 고향집에만 가면 괜스레 퉁명스러워지곤 했으니.

내가 이렇게 잘살게 된 데에 당신들이 해준 게 뭐냐……

내 아내와 딸에게 관심 보일 계제나 되냐……

의식적인 것은 아니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 그런 불만이 내재되어 있었던 까닭이리라.

아들의 그런 마음을 부모님께서 설마 알아채지 못하셨을까.

자연히 며느리 대하기가 조심스러워지셨을 것이다.

혹시라도 작은 실수로 미움 살까 걱정하셨겠지.

장남과 하나뿐인 손주 얼굴이 그립고 그리우셨을 텐데도, 지수 데리고 놀러 오라는 전화 한번 제대로 못 하셨던 이유.

당시의 나는 잘 몰랐던 마음들이다.

그렇지만 내 아내라면 달랐을 것 같다.

기꺼우면서도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는 시부모에게, 약간의 연민을 품고 있었을지도.

“자. 지수야, 인사해. 삼촌 기억나지? 보고 싶었지?”

기억나지 않아도 기억난다고 말하라는 투의 소개.

엄마의 어조에, 눈치 빠른 지수가 영민하게 반응했다.

“삼촌, 안녕! 잘 있었어?”

“……지수야. 우리 지수, 진짜 오랜만이네? 이렇게 많이 컸구나. 사진으로 봤을 때는 잘 몰랐는데…… 정말 많이 컸어.”

“내 사진 봤어? 별로 잘 안 나왔지? 아빠가 사진 너무 못 찍어서 그래. 삼촌은 예술가니까 사진 잘 찍지?”

“하하. 그럼, 당연하지. 삼촌이 이따 저기서 예쁘게 찍어줄게. 오늘 인생사진 하나 남기자.”

“어? 중민아, 여기 촬영 안 된다면서?”

“괜찮아. 작가가 조카 찍어주는 건데 뭐 어때?”

그렇게 대꾸한 동생은, 날 알아본 관람객들이 몰려들 때쯤에 딸을 데리고 한산한 곳을 돌기 시작했다.

덕분에 나와 아내만 세계명화 신세가 됐다.

20분쯤 지나 점심이 가까워질 무렵에야 간신히 오붓한 시간을 회복할 수 있었다.

“진짜 인기 많네. 촬영 금지된 갤러리라 참 다행이야. 안 그랬으면 동영상 찍으면서 따라다니는 애들 많았겠어.”

“하하. 그러기야 했겠어? 자, 이쪽이야. 전에 말한 그림.”

우리 내외를 모델로 한 작품 앞에 선다.

다정한 부부의 얼굴 위로 따스한 색깔들이 흐드러지는……

“예쁘네, 나. 미화가 심각한데?”

“전혀. 실물이 훨씬 낫지. 중민이가 아직 실력이 부족해.”

“그래? 흠, 흠흠. 당신도 실물이 나아.”

“그건 좀…….”

“왜? 젊고 예쁜 배우가 이상형으로 꼽을 정도잖아?”

“아니, 그 방송은 실물 보기 전에 찍었을 거야.”

“아, 그러네? 실물 보고선 난리 났겠네. 상사병 걸렸겠어.”

……생각해보면, 아내는 종종 이런 말들을 하곤 했다.

NBSC의 힘으로 멋진 외모를 얻기 전에도.

회사에서 여직원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해준 날에는 특히 어리광이 심해졌다.

당시엔 그런 태도가 답답하고 황당해서, 내 쪽에서 먼저 대화를 피한 일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

어리석은 일이지.

그 내면을 좀 더 진지하게 마주했다면, 훨씬 나았을 텐데.

“주희야. 내 이상형은, 너야.”

“알고 있네요.”

“어, 정말?”

“그래. 계속 그렇게 보이려고 노력하고 있고. 당신한테 미움받으면, 나 아마 못 견딜 거야. 예뻐 보이고 싶어. 평생.”

“……고마워. 그렇게 생각해줘서.”

“어쩔 수 없잖아. 당신은 아무나 다 예뻐하니까. 일 망치고 뒤처리 떠넘기는 부하직원들도, 아저씨 아저씨 하면서 귀찮게 구는 애들도, 세상 제일 답답해 보이는 시청자들도. 그러니까 별수 있어? 죽어라 노력해야지. 흥. 돌아보고 올래.”

퉁명스레 말한 뒤, 아내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멀어졌다.

벌써 인생사진을 건진 듯한 딸이 그 뒤를 따른다.

대신 동생이 내 옆에 와서 섰다.

“형. 이 그림, 전시 끝나면 가져가.”

“어? 그래도 되겠어? 사려는 사람 많을 듯한데.”

“하하. 그렇긴 해. 친동생이 그린 꼰마님 그림이니까. 그래도 이런 거라도 드리고 싶었어. 내가 형수님한테 죄송한 게 많잖아. 다음엔 지수 초상화도 그려줄게.”

“……그래, 고맙다. 나중에 지연 씨도 그려주고 그래.”

“윽.”

“하하. 잘되고 있는 거지? 응원한다.”

“하지 마…… 아, 맞다.”

쭈뼛대며 손을 만지작대던 동생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을 돌렸다.

속이 빤히 보이는 연기력이었다.

“전에, 방송에서 야수파 입체파 얘기 했었잖아?”

“아. 그랬었지. 문외한이 함부로 말한 거였지만.”

“아냐. 재밌었어. 적절한 비유 같았어. 생각해보면…… 나도 형을 좀 야수파처럼 보고 있었던 것 같더라고.”

“네가? 그랬어?”

“그래. 형은 왜 엄마아빠한테 저렇게 무심한 걸까. 돈만 달랑 보내주면 단가, 그런 거 말고 얼굴을 비춰야지.”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네.”

“주제넘는 생각이었지. 형이 보내준 그 돈 덕분에 학교 무사히 마친 내가 하면 안 되는 생각. 그리고 형이란 사람을 입체파로 파악하지 못한 채로 해서는 안 되는 생각. 몰랐어. 형이 무뚝뚝한 엄마아빠 때문에 힘들어했다는 거. 두 분이 둘째한테만 살갑게 구는…… 너무 편애를 했었다는 거.”

“그 정도는 아니었어. 내 착각이 컸지.”

“하하. 서로 조금씩 오해했던 걸까. 지금이 참 좋다. 형이랑 형 가족들 초대해서, 이렇게 내 그림 보여주는 게.”

야수파와 입체파.

단면과 복합체.

우리는 가면과 진심 사이에서 살아간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라난 타인은, 가족이라고 할지라도 이해하기 쉬운 대상이 아닌 까닭에.

나는 부모조차 야수파의 강렬한 왜곡으로 바라봤다.

지금은 생판 남들까지도 입체파로 바라보려 애쓰고 있고.

그 변화를 만들어준 것은, NBSC.

악마의 계약일지도 모르는 초능력이지만, 그럼에도 도저히 미워할 수 없게 되는 이유였다.

네 가족이 함께 점심식사를 마친 뒤.

마지막 VR 방송을 위해 판교로 향하는 길에는, 예상치 못한 단면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게 됐다.

[저, 안녕하세요? 저, 천수연인데요.]

“어. 이런. 제 번호는 어떻게 아셨습니까?”

[장 작가님께 여쭤봤어요. 무례한 행동 해서 죄송해요.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요.]

“그건 괜찮습니다만…… 이거 설마 개인폰입니까?”

[네, 네. 저, 다른 분들한테 번호 알려주시면 안 돼요…….]

“그야 물론이지요. 그러면, 말씀하시지요. 듣겠습니다.”

천수연은 한참 말이 없었다.

아마 심호흡이라도 하는 모양이지.

5초쯤이 지나서야 시냇물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저 진짜 몰랐어요. 그거 방송될 줄이요. 왜냐하면 그때는 꼰마님이 아직 뉴스도 나오시기 전이고, 막 그렇게 유명하신 시기는 아니어가지고요, 당연히 편집될 줄 알았어요. 방송 나갈 줄 알았으면 미리 괜찮으시냐고 여쭤봤을 텐데. 저 때문에 불편하셨죠? 왜, 사모님이나 따님 보시기에……]

아내야 장난스레 응석부리는 정도고, 딸 쪽은 오히려 신이 난 것 같던데.

내게도 압도적인 홍보효과를 안겨준 일이다.

고맙다곤 못 할망정 사과를 받을 일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미처 답하기도 전에 이야기가 이어졌다.

[저, 제가 이상형이라고 한 건, 그런 건 아니었어요!]

“……예. 그런 건 아니고, 어떤 의미였는지요?”

[저, 저, 처음 본 하이라이트가 그거였거든요. 초대석이요.]

“초대석이면…… 혹시 케바케 내담자였나요?”

[아뇨, 도나쓰님이요. 저 그 웹툰 진짜 재밌게 봤거든요.]

그 하이라이트라면 대수의 손에 의해 「‘인싸부심’ 도나쓰가 꼰마 상담소에서 오열한 사연!?」이라는 타이틀이 붙었다.

웹툰 팬이라면 안 볼 수 없는 워딩이지.

신작이 화제가 된 지금은, 초기의 정보람 합방이나 김용식이 출연한 대만편에 육박하는 조회수가 나오고 있다고 했다.

“그렇군요. 그 방송이 이상형의 이유였던 건가요?”

[네, 네. 그때 도나쓰님…… 도세나님? 아무튼 작가님 얘기 들으시면서…… 엄청 약하셨잖아요. 아니 그러니까 그게, 나쁜 뜻이 아니라요, 진짜 당장 같이 울어버리실 것 같았거든요. 세상에 저렇게 약한 상담사가 어디 있어 싶을 정도로……. 그런데 그게요, 참 좋았어요. 저도 도나쓰님처럼 웃게 됐어요.]

“예. 좀 우스운 꼴이었지요?”

[아뇨! 그런 뜻이 아니라…… 그래도 되는구나, 생각하게 됐어요. 따뜻해도 괜찮구나. 약해도 괜찮구나. 내가 잘못한 건, 그게 아니라 다른 부분이었겠구나. 나도 저런 사람…… 저렇게 따뜻하면서도 강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였나.

어쩐지 생각보다 쉽게 속마음을 듣게 됐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때 이미 조금씩 변화하는 단계였던 모양이다.

나라는 방송인의 단면으로 인해서.

[그러니까, 이상형이란 말은 좀…… 방송용이었던 것 같아요. 그보다는…… 롤모델이었어요. 저는 꼰마님처럼 되고 싶었던 거예요. 그래서 자꾸 생각하고 그리워하고……. 그러니까 오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남자로 생각하고, 막 불륜, 이런 거 아니니까요. 사모님께 꼭 전해주세요…….]

“하하. 그렇게 하지요. 전혀 신경 안 쓰지만요.”

[정말요? 아, 하긴. 완전 사랑꾼이시니까. 아, 저 몰랐는데요, 소란이도 선생님 추천했다면서요? 사실은 저도 그랬거든요. 상담사 배역으로 선생님 어떠냐고 작가님한테…….]

이건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아마도 함께 촬영할 사이라서 말해주지 않은 듯했다.

장은진 작가 입장에서는, 내가 천수연에게 사적인 고마움을 품으면 상담에 집중하기 어려워지리라 생각했겠지.

다만 그런 사정들보다는 다른 이야기에 집중하게 됐다.

이상형이 아니라 롤모델.

그 얘기가 왠지 진하게 다가왔다.

어쩌면 모든 이상형과 이어지는 마음이 아닐까 싶어서.

이상형이란, 이상향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누구나 내가 아닌 누군가가 되길 바란다.

더욱 강한 사람이, 상처받지 않고 사랑받는 사람이, 어디에서나 빛나는 당당한 존재가 되기를 꿈꾼다.

그렇지만 그건 정말 머나먼 꿈.

노력이 배신당하는 여러 차례의 실망 속에서, 점차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이상향을 투사하게 된다.

소망강처녀의 사연이 떠오르는 지점이었다.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잘해주던 남친이 시들해졌다 했던.

어떻게 해야 그가 예전으로 돌아올까 하는 질의였다.

그때는 대수의 컨셉 탓에 명언들을 외우던 시기라, 벤자민 프랭클린의 ‘사랑받고 싶다면 사랑하라’는 말로 갈음했었지.

이상형과 사귀고 싶다는 질문에도 그런 답이 달리곤 한다.

이상형이 이상형으로 느낄 만한 사람이 되라고.

그러지 않으면, 비슷한 이상형을 가진 다른 사람이 금세 채가고 말 거라고.

유치한 이야기지만 그 안에 진리가 숨어 있다.

우리는 변하지 않고 주변을 바꾸려 한다.

스스로 이상향이 되지 않고, 가면을 뒤집어써 대중의 이상형에만 부합하려고 애쓴다.

그래서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음을 알면서도.

그날 VR상담에는, 뭇 여성들의 이상형으로 손꼽히는 미남배우 오균헌이 내담자로 찾아왔다.

프로모션의 대미를 장식하기 위해 미디어팀이 애쓴 결과.

원래는 부르기 힘든 급이었지만, 주민성이나 김소란 상담으로 프리VR의 인지도가 높아진 덕에 얘기가 쉬웠다고 했다.

저쪽도 <퀸즈 랜드> 홍보에 매진해야 하는 처지인지라.

사적으로는 같은 드라마에 출연한 인연이다.

상담의 주제는 최근 심해졌다는 불면증.

문득 이상향이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더니, 재밌다고 웃더라.

“하하. 이상형 질문은 많이 들었는데, 이상향 질문은 난생처음이네요.”

“이상적인 자아와 현실의 괴리가 불면증을 일으키는 원인일 수도 있습니다. 저보다는 이용덕 교수님께서 진단해주셔야 할 부분이지만, 제가 말을 끌어내는 역할이어서요.”

“아, 그런 거구나. 제 이상향은…… 글쎄요. 어렵네요. 남자들한테 사랑받는 배우?”

“그렇습니까? 여성팬들의 사랑만으론 부족하신 모양이군요.”

“하핫. 그런 건 아니지만요. 왜 남자들은 진짜, 진짜 무지하게 연기 잘하는 사람 아니면 남자 배우한테는 관심 없잖아요. 사실은 저도 그러니까요. 미남이란 부담스러운 타이틀 말고, 연기 잘하는 형…… 그렇게 불리고 싶어요.”

“이상형이 아니라 연잘형이 되고 싶으신 거군요. 조만간 그렇게 되실 것 같습니다. 이런 말씀 드리면 싫어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지금도 연기란 걸 알아보기 힘들 정도예요.”

“예? 어, 예?”

“말씀하기 싫으시면 안 하셔도 괜찮습니다. 넘어가지요.”

“어? 에이, 이거 진심이었는데요?”

“예. 넘어가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와. 뭐지? 진짜 보여요? 연기 같았어요?”

그렇게 말하고 한동안 뜸을 들인 오균헌은, 이내 손사래를 치며 설명했다.

“사실은, 연기 말고, 다른 이상향이 있긴 한데요.”

“말씀하셔도 괜찮겠습니까? 이 방송 끝나고 따로 상담하시는 방법도 있습니다. 벌써…… 10만 명이 보고 계세요.”

“음…… 그러게요. 사실은 드라마 홍보나 하려고 나온 자린데. 저도 이 얘기까지 할 줄은 몰랐는데요. 근데…… 그래도 혹하네요. 선생님이라면 괜찮을 것도 같고. 제가 실은 학창시절에…… 친구 중에 왕따가 있었어요.”

“……예. 그러셨군요.”

“그랬는데, 제가…… 절교했어요. 철없던 시절에, 저까지 따돌림 당할까봐 무서웠거든요. 가끔…… 꿈에서 걔를 봐요. 자세히 기억은 안 나는데, 그래요. 참…… 부끄럽네요. 안 그러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불의에 저항할 줄 아는…….”

이상향은 인간이 사회적으로 성숙하도록 이끌어준다.

그렇지만 때때로, 현실과 괴리된 목적지가 자괴감을 강제하기도 한다.

자책과 자기혐오 속에서는 행복을 누릴 수 없다.

무수한 팬들의 사랑을 받는 스타라고 할지라도.

“균헌 씨. 균헌 씨 초기작 중에, 고등학생 배역이 있었지요. 따돌림을 당하는 친구에게 도움을 주는…… 그런 역이었어요.”

“와, 그걸 기억하세요? 감사합니다.”

“상담 준비하며 검색해봤을 뿐입니다.”

“앗. 감사 취소합니다, 하하.”

“그 작품 오디션 이후, 연출자 인터뷰가 하나 나왔지요. 오균헌이라는 배우가 뇌리에 새겨진 날이었다. 오디션장에서 자기 머리를 쥐어뜯으며 제발 좀 사람답게 살자고 외치는 어린 배우에게서, 걷잡을 수 없는 감동을 느꼈다……. 시청자들도 그러셨을 겁니다. 많은 위로가 됐을 거예요.”

“……그랬을까요? 그랬으면, 좋겠네요.”

“현실에서도 친구를 구해주실 수 있었다면 더할 나위 없었겠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닐 겁니다. 그러나 배우라면 다른 일을 할 수 있지요. 희망을 잃고 괴로워하는 아이들에게, 어떤 위로보다 큰 힘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런 배우가 되신다면 참 좋겠어요. 불면증? 마침 잘됐네요. 잠 안 오면 운명이라 생각하고 대본이나 연구하세요.”

“하하핫! 근데, 진짜 그런 배우가 된다면…… 불면증은 없어질 것 같네요. 약 안 먹어도 잠이 잘 올 것 같아요.”

이후 나와 교대하며 조명기가 속삭였다.

“왜 매번 혼자서 얘기를 끝내버리는 거예요? 진짜 못된 후배님이야. 선배님 몫도 좀 남겨줘야 되는 거 아닙니까? 아주 못됐어. 이상형이 아니라 이하형이야.”

“……이하형은 또 뭡니까?”

“이하생략형. 자기 혼자 다 해먹는다는 뜻이올시다.”

여전히 장난스런 조명기와, 잘했다며 어깨를 두드려주는 이용덕과, 최고였다며 손을 잡고 흔드는 명현수 과장.

그런 환경 속에서 또 생각하게 됐다.

내 이상형은 누구일까.

내 이상향은, 무엇일까.

그날 저녁의 인방에는 순식간에 15만 명이 몰렸다.

마침내 <트립크루> 대만편의 1화가 방영된 까닭.

김용식의 공황발작이라는 실제상황이 지상파를 탔으니, 마치 그를 단숨에 치료해낸 듯한 내게 관심이 쏠릴 법도 했다.

또 천수연 이슈 역시 아직 유효해, 많은 이들이 물었다.

천수연의 이상형이 됐는데 기분이 어떠냐고.

그저 좋다고만 답하고 웃었더니 또 묻더라.

[소망강처녀님 별사탕 100개. 그럼여 그럼여 꼰마님은 이상형 누구에여. 아 꼰마눌님 빼구여. 가족끼리 그럼안대여.]

“음…… 아내를 빼면, 참 어려워지네요. 2순위기는 하지만 솔직하게 한번 말해보겠습니다.”

「천수연 ㄱ 」

「아무래도 이런때는 보답을 가야져」

「수연언니 사랑해용!!! 보고있죵 」

[마구니님 별사탕 100개. 제 이상형은 도세나님입니다.]

[dosena님 별사탕 1000개. 저리가세요.]

「마구니 : 헉..광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두사람잘됐으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러게.

두 사람, 잘됐으면 좋겠다.

우리 모두, 잘됐으면 좋겠다.

“이제 답하겠습니다. 이상형을 물어보셨지요? 제 이상형은…… 바로, 여러분.”

「 」

「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않이 임재범이나고ㅋㅋㅋㅋㅋㅋㅋㅋㅋ」

솔직히 말해줘도 믿지 않더라.

그들이 정말 내 이상향인데.

내가 평생을 들여 길을 닦을, 내 미래인데.

미래들과 함께 흥겨운 소통을 나누던 무렵, 문자 하나가 도착했다.

「진주희 : ㅎㅎ 여보는 참 솔직하고 당당한 것 같아. 그래도 끝까지 나라고 했으면 좋았을 텐데. 난 누가 아무리 조건 붙여서 몇 번씩 물어봐도 무조건 당신이라고만 했을 텐데 ㅎㅎ 동무는.. 어느 쪽으로 가겠소..?」

“……여러분. 생각해보니 잘못 말한 것 같습니다. 제 이상형은 아내죠. 백골이 진토되어도 아내만이 이상형이지요. 여보, 사랑해. 당신밖에 없어. 몇 번을 태어나도 난 당신이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신종중립국임 」

「아재욬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문자받았네」

「문자보기전에했어야죸ㅋㅋㅋㅋㅋㅋㅋㅋ」

즐겁다는 듯 ㅋㅋ거리는 이상향들이 조금 미워졌다.

미리 말해주지.

나쁜 사람들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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