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
43장 - 이상형인 상담사 (2)
이상형이란, 보통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성상을 말한다.
이런 사람이라면 사귀어도 좋겠다는 조건들.
성격, 외모, 직업, 학력, 재력 등이 주로 포함된다.
그런 관념이 ‘이상형월드컵’ 등을 통해서 세간에 확립됐다.
국가와 인종을 초월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이상적인 이성이란 관념은 세계 창작물의 고전.
인류만의 특징도 아니어서, 무리를 이루는 동물들 역시 패권을 쥔 일부 이상적인 개체가 이성을 독차지하곤 한다.
이상형에 열광하는 청춘남녀가 이상할 건 없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에는, 그것이 좀 과열 양상을 띤다.
남과의 비교가 사회에 만연한 까닭이리라.
사회가 원하는 인간상을 체화해 욕먹지 않는 사람이 되고자, 남들이 누굴 이상형으로 꼽는지에 비대한 관심을 가진다.
방송에서 툭하면 이상형을 묻는 것이 그래서다.
시청자의 관심을 집중시키기 좋은 방편이니.
방송 이후의 화제성까지 생각하면, 어떻게든 뚜렷한 답을 끌어내려 애쓰는 제작진의 노력을 이해할 법도 했다.
<형님들>의 천수연은 훌륭하게 대처한 셈이지.
빼지 않고 그럴싸한 유명인을 제시함으로써 제작진에게 만족감을 선사한 동시에, 그 대상으로 유부남을 꼽아 미혼 팬들에게 박탈감을 안겨주지도 않았다.
그보다 더 적절한 대답은 없었으리라.
내게도 어쨌든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하게 됐고.
날짜가 바뀌기도 전에 인터넷 기사가 양산됐다.
‘천수연 이상형’과 ‘꼰마’가 실시간검색어에 오른 탓.
기본적으로 포털의 검색창은 뉴스 페이지를 상단에 띄우는 경우가 많고, 그 이슈를 선점하면 평소보다 한참 더 많은 조회수를 얻을 수 있다.
인터넷신문 기자들이 열을 올릴 법도 한 일이었다.
그렇게 대중에게 다시 한번 ‘꼰마’가 각인됐다.
비약적으로 유명세가 커지는 상황.
이튿날이 되자, 뉴스 초대석에서 언론의 행태를 지적했던 날보다도 더 큰 관심이 쏟아졌다.
관련해서 미디어팀 유보원 차장이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예능 섭외도 여럿이고요, ‘천수연의 이상형’이란 헤드라인으로 단독인터뷰 요청한 곳이 많아요. 괜찮은 기회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일단 전달하겠다고 했는데…… 어떠세요?]
“보원아. 미안하다. 미디어팀에서 날 위해 많이 신경 써주고 있는 건 알지만, 그런 방향으로는 하고 싶지 않아.”
[아, 역시.]
“짐작하고 있었어?”
[후후. 부장님은 이상형에도 관심 없으신 분이니까요.]
“그야…… 그런 쪽으로 이야기 꺼낸 적은 없었지.”
[응? 이야기 꺼내신 적 있었는데요?]
“어? 내가?”
[네. 현수가 좋아하던 가수가 평범한 인디 가수를 이상형으로 꼽았을 때였죠. 그때 왜 저런 놈 좋아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구시렁거리는 현수한테, 부장님이 그러셨어요. ‘저런 놈’이란 건 세상에 없다고. 남들에게 빛나 보이지 않는 사람을 눈여겨볼 줄 아는 사람이, 정말 훌륭한 사람인 거라고.]
“아…… 그런 일이 있었지.”
[그래서 알았어요. 부장님이 남의 이상형에 관심 없는 분이시란 거. 그보다는 제일 관심 못 받는 사람들한테서도 장점을 발견해주는 분이시란 거.]
그렇게까지 좋은 사람은 못 되지만.
유보원의 말대로 나는 누군가의 이상형이 되는 것이 싫다.
사실을 말하자면 쏟아지는 인터넷 기사들도 보기가 좀 껄끄러운 심경이었다.
그런 기사들은 사실 사회적인 해악에 해당한다.
매력적인 유명인의 이상형을 안 팬들이 개인적으로 거기에 부합하고자 노력한다면야, 정말 긍정적인 케이스겠지.
그렇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잘 어울린다는 둥 누가 아깝다는 둥 인물의 ‘이상형 티어’를 비교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바로 그런 유형의 관심에 피해를 입었던 인물이, 유보원에 이어 내게 전화를 걸었다.
[아, 안녕하세요, 선생님! 저 저, 김소란인데요!]
“예, 소란 씨. 반갑습니다. 방금 유 팀장에게 들었어요. 내게 할 말이 있어서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하셨다고요.”
[네, 네! 저, 저…… 퀸즈 랜드 캐스팅 들어왔는데요.]
“그래요? 축하합니다.”
[아니, 아…… 그거, 선생님이 꽂아주신 거라던데!]
“글쎄요? 난 모르는 일인데요.”
[아, 진짜. 은진 언니가 벌써 얘기해주셨거든요? 선생님 덕분에 대본 방향 바뀌어서 새로 배역이 생긴 거고, 거기에 선생님이 저 강력추천! 하셨다면서요?]
“……거참, 괜한 말씀을. 그런데 언니라고 불러요?”
[헤헤. 가끔요. 처음엔 싫어하셨는데, 요즘은 좋아하세요.]
나 역시 26년 늦게 태어난 대학생들에게 형님 소리를 듣고 있긴 하지만, 그거야 같은 학생 입장이라서 가능한 일.
그에 비해 장은진은 드라마판의 퀸이라 불리는 작가다.
김소란의 넉살은 참 대단한 수준인 듯했다.
[아무튼 그래서요…… 진짜 감사합니다. 꼰마님 사랑해요!]
“사랑은 남친한테나 주세요.”
[헤헤. 선생님, 그리고요, 축하드려요. 수연 언니한테 이상형으로 꼽히셨다면서요? 저 오늘 그거 다시보기 하려고요.]
“축하받을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용당했을 뿐이지요.”
[아닐걸요? 그 언니 마음에 없는 소리 절대 안 하잖아. 아시죠? 데뷔해서 지금까지 이상형 말한 거 처음인 거요.]
“그건 몰랐지만, 아마 대상이 미혼인 경우에는 방송에서 말하기가 어려웠던 게 아닐까 싶네요.”
[그런가? 아닐걸요? 저도 선생님이 이상형인데! 다음에 저도 예능 나가서 선생님 언급할게요. 그럼 좋으시겠죠? 수연 언니한테는 고맙다고 얘기하셨어요? 전번 알려드릴까요?]
정말이지 넉살 좋은 친구다.
호의로 하는 이야기임을 알기에, 최대한 정중히 거절했다.
다만 마음만이 호수의 숲을 바라봤다.
이상형을 공유하며 이성에 등급을 매기는 대중.
‘호불호’나 ‘마지노선’을 논하며 웃는 네티즌.
이해할 수 없는 마음들은 아니지만……
그 이상형에 들지 못해 서류전형에서 탈락하는 이들에게는, 그만큼이나 잔인한 풍토가 또 있을까.
이상형은 사실 편견의 다른 말이다.
받아들이려는 노력에 앞서 커트라인을 세우는 행위.
특정한 외모와 학력과 재력과 나이를 고집하며, 그에 해당하지 않는 이들에게서는 인연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심지어 누군가가 보편적인 이상형에 해당하지 않는 이성과 교제하려 하면,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기까지 한다.
예능에서도 쉽게 논할 수 있을 만큼 흔한 이야기지만……
이상형의 언급이 정말 감사할 만한 일일까.
천수연에게 사적으로 연락하기엔,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그런 고민 속에서 학식으로 이동하던 때였다.
함께 걷던 김지연이 문득 말했다.
“아, 맞다. 어제 방송 말인데요, 혈액형이요.”
“아…… 예. 혹시 고견이 있으시다면 듣겠습니다.”
“에이, 고견은 무슨요. 그냥 저…… 혈액형이랑 성격이랑 관련이 있다고 믿긴 하거든요? 근데 전남친이랑 그걸로 많이 싸워서 생각이 좀 달라졌어요.”
“그 뒤로 안 믿게 된 건가요?”
“그건 아니고, 반박할 논리를 좀 찾아봤어요.”
김지연은, 말하자면 외강내유의 성격이다.
상처 많고 여린 마음에도 불구하고 겉으로는 강경해지는.
나나 한효준에게는 그럴 일이 없을 뿐, 전남친과는 삿대질을 하며 싸우기도 많이 했던 모양이었다.
“알아보니까, 페루 원주민들이랑 마야인들은 O형이 거의 100%라고 하더라고요. 유럽 쪽은 A형이 많고, 아시아에는 B형이 많고요.”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건 혈액형별 성격을 부정하려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논지 아니던가요? ‘그럼 페루에는 성격 똑같은 사람밖에 없었겠네?’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후후. 비전공자들의 상식으로는 그렇게도 말할 수 있겠지만, 우리 전공자들에게는 아니죠. 쥐 여섯 마리, 아시잖아요?”
디디에 드조르의 실험 얘기다.
쥐 여섯 마리를 수조와 연결된 우리에 넣었더니, 스스로 먹이를 구해서 섭취하려는 쥐, 기다렸다가 먹이를 빼앗는 쥐, 구경만 하다가 부스러기나 얻어먹는 쥐로 나뉘었다고 한다.
거기까진 자연스러운 위계의 형성.
그렇지만 각각의 성향을 보인 쥐들을 그들끼리 모아 다른 우리에 집어넣자, 놀랍게도 그 안에서 다시 위계가 나뉘었다.
빼앗던 쥐들이 더 강한 쥐에게 빼앗기기 시작했다.
빼앗기던 쥐들이 일하지 않고 빼앗기 시작했다.
무기력하던 쥐들이 빼앗거나 빼앗기기 시작했다.
결국은 어느 우리에서나 빼앗는 쥐와 빼앗기는 쥐와 무기력한 쥐가 혼재하게 되었다.
“시스템이 환경에 의해 강제됨을 알려준 인지행동학의 발견이었지요. 유사한 성격이라 할지라도 환경조건의 유불리에 따라서 다른 표현을 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이를테면…… 왕따 피해자가, 다른 곳에선 가해자가 될 수도 있겠지요. 즉 성격이란 것은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단적으로 말해, 세계에서 가장 선량한 사람들만 모아서 우주선에 태운다 해도, 그 안에서 범죄가 발생하지 않으리라 확신할 순 없지요.”
“그렇죠. 그러니까 ‘네 분류의 성격’이란 걸 맹신하는 것부터가 전공자들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인데. 16분할 MBTI도 유형론이라면서 무시하는 우리잖아요? 그러니까 성격이란 건, 정확하게는 성향이죠. 미약하게나마 다른 선택을 내릴 경향성.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만, 그걸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요. ‘혈액형이 성격을 결정한다’라고 단순하게 믿어버린 비전공 기자들이 문제를 키운 측면이 크긴 한데…… 그래도 저는 그게 있을 수 있다고 믿거든요. 다시 페루 얘기로 돌아오면-”
“어? 꼰마다!”
“와! 안녕하세요!”
식당에 들어서자, 줄 서 있던 학생들이 인사를 건넸다.
천수연의 파급력이 과연 크긴 큰 모양.
한참 고개를 꾸벅여준 뒤에야 배식을 받을 수 있었다.
“아유, 하여튼 인기 많으셔.”
“김 선생님도 그렇지 않습니까? 다들 알아보는데요.”
“저야 뭐, 조금? 지난주에 못 나와서 인기 떨어졌어요.”
“……다음 주 초대석에 심혈을 기울이겠습니다.”
“후후, 농담이에요. 아무튼 페루 말인데요. 왜 전부 O형이었을까요? 왜 유럽엔 A형이 많고, 아시아는 다른 지역들에 비해 B형이 많을까요? 그게 단지 우연일까요? 확률론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잖아요? 우리가 정말 같은 종일까요?”
“혈액형이 종의 기원을 나타낼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군요.”
“네. 침팬지는 A형이 90%래요. 고릴라는 B형이 90%. 발견이 최근일 뿐이지, ABO 혈액형은 현생인류만의 것이 아닌 거죠. 어쩌면 다지역 발생설이 옳을지도 몰라요. 각기 다른 지역에서 오랫동안 각자의 혈액형으로 진화한 인류가, 전쟁과 이주 등 다양한 변화 속에서도 아직 충분히 섞이지 못한 걸지도. 그렇게 생각하면 혈액형 분류도 이해가 돼요. 피가 뇌에 영향을 미친다는 유사과학이 아니라, 그 장대한 유전의 역사와 링크되어 있다고 한다면 말이죠.”
“……이거, 교수님께는 말씀드린 적 없지요?”
“네. 당장 이면지 던지면서 혼내실 거 아니까요. 인간을 멋대로 분류하는 네가, 신이냐 심리학자냐! 하시면서요.”
“아시니 됐습니다. 그런 것보다는 지역의 전염병 등에서 특정 혈액형이 취약했다고 보는 쪽이 더 합리적일 거예요.”
“네. 그렇겠죠. 그냥…… 전 좀 그래요.”
장광설을 토해놓은 김지연은, 후련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마음이 무척 무거워 보였다.
해선 안 될 말을 하고 있다는 자책이 느껴졌다.
“정말 같은 종일까…… 저들이, 진짜 인간인 걸까. 그런 생각 들 때 없으세요?”
“……그런 생각이 우생학의 시발점이었지요.”
“알아요. 알아서, 부끄러워요. 그렇지만 어쩔 수 없네요. 매일같이 끔찍한 이야기들을 들어요. 히틀러는 죽었지만, 히틀러보다 심한 사람들이 널려 있어요. 아시잖아요.”
“그야, 때로는 저게 인간인가 싶은 이들도 있지요.”
“네. 그래서 자꾸 나누게 돼요. BIG5(5개의 요인을 수치화해 성향을 해석하는 심리학 이론)보다 혈액형이나 사주를 더 생각하게 돼요. 그래서, 선천적인 괴물이 있다고 믿게 돼요.”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아니다.
상담소에 찾아오는 내담자는 아무래도 피해자가 많겠지만, 그들의 이야기 속에는 무시무시한 몬스터가 등장한다.
혐오, 폭언, 폭행, 악마화, 가스라이팅……
한 겹의 가면 뒤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겉으로만 강해 보이는 김지연은 또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었을까.
그렇지만 나는 연민을 누를 수밖에 없다.
그녀는 상담사니까.
아무렇게나 생각해도 되는 사람이 아니니까.
“알고 계시겠지만, 옳지 않은 생각입니다. 현생인류는 전적으로 유사한 동종이에요. 선천적으로 같은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지적 체계를 갖고 있습니다. 어떤 사악한 행동도, 그 행위자의 특성을 비난할 당위성이 될 수는 없습니다.”
“……후후. 이래서 박 선생님이 좋아요. 언제나 중심을 잡고 계시니까. 덕분에 흔들리다가도 안도하게 돼요.”
“멋대로 이용하고 계시군요.”
“음…… 하나만 더 이용할게요. 선생님은 혈액형 뭐예요?”
혈액형과 성격을 관련짓는 것은 한국과 일본뿐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지점에서 두 나라를 미개하다 욕한다면, 그 역시 우생학의 신봉자와 다름없을 것이다.
대중의 보편적 사고에는 분명한 이유가 존재한다.
아마도 꽤나 슬픈 이유가.
그렇게라도 해야 했던 게 아닐까.
폭력적인 사회 속에서 너무나 많은 상처를 받아왔기에.
더 많은 상처를 받을 것이 두려워,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유형론에라도 기대 상극을 피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저는…… 이상형입니다.”
“하핫. 네. 맞아요. 선생님, 제 이상형이세요.”
“어…… 유우머였는데요.”
“천수연 씨가 참 보는 눈이 있단 말이죠. 어떤 방송을 본 걸까? 이상형 말 안 하던 사람이 뜸도 안 들이고…….”
이상형 역시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혈액형이라도 분류해 맞지 않는 성격을 피하려 노력하는 것처럼, 조건에 안 맞는 사람들을 미리 배제하는 행위.
상처받고 또 상처받는 나날이 이어질 때, 사람은 본능적으로 가해자와 유사한 대상을 회피하려 애쓰게 된다.
그러다보면 그 반대 유형에게 애착을 느끼기 쉬워지겠지.
처음부터 이상형만 찾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아픈 사랑의 경험 뒤에야 떠올리게 됐을 것이다.
무엇이 안 맞았을까, 무엇이 날 괴롭혔을까.
그 생각 속에서 점점 더 많은 조건을 붙이게 되는 것이다.
결국은 상처가 상처를 만드는 일이다.
혐오도 폭력도, 행복한 사람은 잘 하지 못한다.
대부분은 피해자가 가해자로 자라나 차별을 만들어낸다.
“지연 씨. 미워해선 안 됩니다.”
“네? 천수연이요? 아, 미워하진 않죠.”
“사람 말입니다. 사람을 미워해선 안 됩니다. 김 선생님은 그런 삶을 견디지 못하실 테니까요. 불행해지실 거예요.”
“와…… 격찬인데요?”
“……그런가요?”
“네. 선생님 같은 사람이라고, 인정해주신 거잖아요.”
그렇게 되나.
내 경우엔, 미워하지 못하는 인간일 뿐인데.
“음. 실은…… O형입니다.”
“아. 그렇구나. 역시. 참…… 다행이에요.”
“뭐가 말입니까?”
“제 전남친들이요, 다 O형이었거든요.”
“……다행이라는 말씀은?”
“걔들한테 몇 대씩 다 맞았거든요. 제가 나쁜 것도 있었죠. 툭하면 고집부리고 제 생각만 강요하고, 그러다가 먼저 언어폭력도 많이 했으니까요. 지금 생각하면 맞을 만도 했어요. 혈액형이랑은 상관없을 거야. 근데, 알면서도 괜히 무서워하게 됐어요. O형이라고 하면 그냥 다…… 괴물처럼 보였어요.”
“그랬군요. 그건, 전혀 다행인 것 같지 않은 부분인데요.”
“다행이죠. 선생님이 O형이시니까. 선생님 같은 분도 계시단 거 알았으니까, 이제는 좀 덜 무서워질 것 같아요.”
……그렇게 강한 척하며 말하고 있지만.
110의 ‘진단’에 그 속내가 빤히 보여서, 못내 슬퍼졌다.
“많이 노력하셨군요. 극복하려고요.”
“네? 제가요? 에이.”
“계속 O형 남자들을 만난 것 말입니다. 그런 트라우마가 있으니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을 텐데, 그럼에도 계속 같은 혈액형을 만났지요. 자신의 무의식에 형성되려는 왜곡적인 인지를 극복하기 위해서였을 겁니다. 이번엔 괜찮을 거야. 상관없을 거야. 미신에 빠져서 아무나 미워해선 안 돼. 난 상담사니까, 그런 인간이 돼선 안 돼…… 그렇게 생각하셨을 겁니다.”
“……와. 셜록꼰즈.”
울적한 목소리로 웅얼거리던 김지연은, 곧 밝게 웃었다.
“중민 씨 혈액형은, 모르기로 할게요.”
“어. 동생이랑, 계속 연락하고 계십니까?”
“그건 선생님이 모르기로 하세요.”
“예?”
“청춘남녀 연애사에 꼰대가 끼시면 안 되죠? 후후.”
벌써 연애사를 논할 만큼 진전됐을 것 같진 않은데.
그러지만 촉촉한 눈망울로 미래를 말하는 김지연에게, 구태여 꼬치꼬치 캐묻지는 않았다.
그 점심 이후로도 종종 이상형에 대해 생각했다.
우리에게 이상형이란 무엇일까.
성별과 나이를 떠나, 왜 사람에게 비인간적인 마지노선을 두고 마는 걸까.
그 문제를 질문했을 때, 한효준은 이면지를 던지며 말했다.
“그딴 걸 질문이라고 하고 있어! 그야 당연히, 멍청하니까지! 멍청해빠진 인간들에겐 마음의 지도가 없으니까! 그래서 외적으로 드러나는 지표 따위나 비교하면서 억지 안심을 할 수밖에 없는 게 아니겠냔 말이야!”
“……예. 그런 말씀을, 왜 그렇게 화내면서 하십니까?”
“부러워서! 자네는…… 다르잖나.”
“그렇게 크게 다르지는 않은데요.”
“스승이란 자가 제 성에 못 이겨서 이렇게 종이를 집어던져도, 방금 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잖아. 그런 사람이 흔하겠냔 말이야. 정말이지, 믿을 수가 없단 말이지. 혈액형 따위로 치고받는 댓글 달리고 있는데 눈살 하나 안 찌푸리질 않나. 이러니 여자들이 그리 좋아하는 걸까.”
일종의 테스트였던 모양이다.
내가 대체 어디까지 참아내는지 궁금했을까.
그 마음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웃으며 또 물었다.
“임 여사님과는 좀 어떠십니까?”
“뭐? 그런…… 그런 건 물어보지 말아. 좀 비켜, 종이 줍게.”
“제가 주울 테니 답해주시지요. 다시 만나셨습니까?”
허리를 숙이고 이면지들을 줍는 동안, 한효준은 여러 차례 혀를 찼다.
그리고 조약돌 굴러가는 소리로 말했다.
“그냥, 차 한 잔 했어.”
“그러셨군요. 즐거우셨을 것 같습니다.”
“그걸 자네가 어떻게 아나!”
“제가 좀, 셜록꼰즈라서요.”
“……흥. 그런 건 모르겠지만…… 수아를 보고 싶다고 하긴 하더군. 같이 쇼핑도 하고, 영화도 보고, 많이 아껴주고 싶다고. 사람이 참 밝아. 나 같은 어두운 이와는 안 어울려.”
“그래도, 이상형이시지요? 참 잘 어울리실 것 같은데.”
“허, 참, 거, 오지랖 그만 떨고 나가!”
스승에게 꼰대질을 하고 나자 기분이 좀 나아졌다.
이상형이고 마지노선이고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저들이 좋다.
고민하고 흔들리면서도 끝끝내 한발 더 나아가는, 저 전진하는 인간들이.
그 사람 냄새가 하릴없이 기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