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
42장 - 상담사의 드라마 (5)
“이제 된 것 같죠? 끊죠.”
장은진이 PD에게 하는 말이다.
보통 작가들은 촬영장까지 나오는 일조차 드물다고 하던데.
아까 PD가 당황했던 게 그녀 때문이었을까.
장은진처럼 입지전적인 작가라면, 촬영장 총책임자가 오히려 벌벌 떨 법도 했다.
“아, 예. 컷! 하하, 역시 수연이네요. 바로 그냥 이연이 돼서는…… 저까지 찡할 정도였습니다. 눈물연기가 아주 좋았어요. 그런데…… 이번엔 좀 애드립이 과했지요, 선생님?”
“좋았어요.”
“예? 그래요? 이러면, 대본이 많이 바뀔 텐데요?”
“이걸로 가세요. 대본이야 적당히 손보면 돼요.”
“아니 그러면, 저기 뭐야, 동생 역을 넣어야 되는데요?”
“하나 넣죠. 저 외사촌이랑 같이 유학 갔던 여동생으로…… 김소란 어때요? 지금 잡힌 작품 없다던데. 잘 어울릴 거예요. 박대민 씨도 한 번쯤은 더 촬영해주셔야 할 것 같고요.”
“아이고…… 갑작스럽긴 한데, 저야 이거 살리면 좋지요. 도입부부터 화제가 될 겁니다. 리얼리티가 그냥…….”
남의 사정을 고려치 않는 결정에 바로 개입하지 못한 건, 컷 소리를 듣자마자 내 품에 안긴 천수연 때문이었다.
득달같이 손수건을 들고 온 매니저가 처량해 보인다.
이들을 위해서라도 뭔가 말을 하긴 해야 되겠지.
“저, 수연 씨가 너무 깊이 몰입하셨던 모양입니다. 대본에 없는 이야기를 애드립으로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심적으로 힘드셨을 거예요. 잠깐 대기실로 모시는 게 어떨까요?”
“아, 그래요. 매니저, 뭐 해? 데리고 가. 그리고 박 선생님은 이제 나랑 얘기를 좀…… 선생님?”
PD의 끝맺음을 기다리지 않고, 장은진이 내게 다가온다.
그리고 얼음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고마워요. 이연을 완성해줘서. 소란이가 좋아하겠네.”
“……괜찮은 겁니까? 저 때문에 괜히, 원작파괴가…….”
“원작파괴는 무슨. 원작 그린 친구가 가장 아쉬워했던 대목이었어요. 좀 더 깊이 있는 인물을 그리고 싶었는데, 자기가 이연 같은 성격이 아니라서 그게 잘 안 됐대. 작가들끼리 하는 얘기지만요. 그리고 드라마는 웹툰과는 다르죠.”
“달라도 되는 겁니까? 팬들이 싫어할 텐데요.”
“원작 팬들은 중요치 않아요. 내 팬들이 더 많은데 뭐. 미주알고주알 간섭받을 거면 이 작품 각색 안 맡았어요.”
“그렇군요. 작가님 뜻이 그러시다면야…….”
“후후. 옹고집 같아요? 드라마는 웹툰과 다르다니까요?”
뜻 모를 말을 반복하는 희대의 작가.
그녀는, 여전히 차가운 얼굴로, 따뜻한 말을 했다.
“드라마가 작가놀음이라고들 하지만, 아니에요. 내가 아는 세상은 한정돼 있어요. 너무 주관적이죠. 그래서는 대중의 공감을 못 사요. 배우들이 직접 인물을 완성해줘야 해요. 애드립 같은 얘기가 아니라, 행동의 습관부터 스타일에 내면의 동기까지, 진짜 인물이 나와야 한다는 뜻이에요. 캐릭터 하나하나가 살아 움직이는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서. 웹툰은 판타지지만, 드라마는 현실이에요. 또 하나의 세상이죠.”
드라마는 현실이다……
그 한마디에,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냉막한 가면 속의 작가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때때로 드라마 역시 판타지를 담보한다.
도깨비가 나타나거나, 21세기 한국에 황실이 현존하는 등.
그렇지만 그것은 현실을 지워내기 위한 설정이 아니다.
세상이 만든 가면들을 벗겨 진짜 마음을 드러내기 위한 일.
작가란 그 가상의 세계를 수백 명의 제작진을 통해서 세상에 끌어내는 직종이다.
개중에서도 장은진은 가슴을 울리는 명작들을 양산한 인물.
사람의 속내를 읽는 데에는 도가 텄으리라.
그러니,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천수연이 <퀸즈 랜드>의 주인공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뜬금없이 진짜 상담사를 출연시키자고 한 김소란의 청탁을 받아들인 것이, 단지 그녀를 위한 일만은 아니었을지도.
그 외에, 나는 현실 속의 드라마에 대해서도 듣게 됐다.
배우의 오열과 탈진으로 일찍 맞게 된 점심 식사 때였다.
수화기 너머의 이혁권이 수줍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그, 다섯 시부터 인방 하나 하게 됐어요. 걔 방이요.]
“혁권 씨? 걔는 누구고, 방송은 무슨 얘깁니까?”
[그러니까…… 오른팔 걔요. 걔 오늘 프리TV 방송 첫날이라서, 선호가 이벤트매치 해주기로 했거든요. 지 나름대로 연습생들 꼬드겨서 스케줄도 맞췄더라고요. 그런데 양학이나 하면 재미없을 거고…… 제가 상대해주면 어떨까 해서요.]
“애들 상대하면 민망하다더니, 별일이시군요.”
[……그냥 뭐, 좀…… 미안하기도 해서요.]
“그렇군요. 그러면 팀은 누구와 짜실 겁니까?”
[그, 어제 말씀하신, 전에 같이 했던 형들이랑요.]
‘게임의 신’ 뉴겜과 2012년의 영광을 함께 누렸던 팀원들.
넌지시 건넨 제안을 이혁권이 따라준 모양이었다.
그렇게 두 개의 태양이 맞붙게 된 것이다.
암을 이겨낸 소년을 위해서.
“영광의 12시즌 테이크가 모두 뭉쳐 출연한다라. 이거야 원, 긴장해야 되겠는데요? 도준이가 신인BJ의 전설로 등극하겠어요. 전략은 어떻게 가실 겁니까? 양선호 선수 팀 쪽이요.”
[예, 그, 서포팅 미드 전략이요.]
“하하. 팬들이 원하는 그림은 아니겠는데요?”
[그래도 뭐, 본인이 하고 싶다고 하니까요.]
“그렇군요. 흥미롭겠는데요. 동료들은 어땠습니까? 사적으로 통화한 건 오랜만이었을 것 같은데.”
[예 뭐…… 사적으로는 처음이었죠.]
“처음일 줄은 몰랐네요. 예전과는 많이 다르던가요?”
[그냥 비슷했어요. 처음 전화 받을 땐 아저씨들이었는데, 제 목소리 듣더니 예전으로 돌아오더라고요. 장난도 치고…… 감독으로 만날 때랑은 또 다르게…… 그 시절처럼요.]
이제 서른 언저리인 OB들이니 대부분 감독 코치들이 되어 있겠지만, 사람은 8년 정도로는 크게 바뀌지 않는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것은 사실 단편.
그 감투를 벗고 옛 인연과 마주하면, 그때는 또 자연스럽게 과거의 마음들이 드러나곤 한다.
이혁권 역시 그랬던 모양이었다.
[옛날 생각 많이 나더라고요. 우리 팀이 최고고, 누구도 앞길을 가로막지 못할 거라 믿었죠. 제 부상만 아니었으면 실제로 그렇게 됐을 거예요. 그때 전 진짜 세체미였으니까.]
“그랬지요.”
[예. 근데…… 운이 좋았다는 생각도 들긴 했어요.]
“운이 좋았다고요.”
[예. 사실은 제가…… 그렇게 좋은 동료는 아니었으니까. 선호처럼 착해빠진 성격은 아니죠, 제가. 전승으로 이긴 날에도 플레이 별로였던 형들한테는 한마디씩 했어요. 당연히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어요. 질 게임 제가 멱살 잡고 캐리한 거니까. 그래서 딱히 착한 말 고르지도 않았죠. 그랬는데…… 크리 형이, 롤드컵 세미파이널 끝나고 울었대요.]
“그랬습니까? 대체 뭐라고 했길래요?”
[형 그따위로 하면 내년엔 후보 가야 돼…… 그랬대요, 제가. 잘 기억 안 나는데, 매트 형이 한 말이니까 맞겠죠 뭐. 맘 약한 형은 아니라 괜찮을 줄 알았나봐요.]
“그렇지만 오열하고 말았던 거군요.”
[예. 그날…… 동생이 수술받았다고 하데요. 아프다는 것까진 알았는데, 수술 날짜는 몰랐거든요. 그거 때문에 집중력이 흐트러진 게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동생이랑 동갑인 저한테 깨지고 속상했을 만도 하죠. 그땐 어쨌든 제가 구단주 같은 위치였으니까, 짤릴까봐 걱정되기도 했을 거예요. 동생 병원비도 보태야 되는 처지였다나. 그렇게 꾸역꾸역 결승에서 8킬 한 다음에, 그 형이 저 안고 울었거든요. 그건 기억나요. 그냥 승리에 취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그렇군요. 그 크리 선수와도 통화했지요?”
[예. 좀 쫄아서 전화 걸었는데…… 싫은 소리 안 하데요. 옷 좀 다려 입으라는 말이나 하고…….]
변한 듯 변하지 않은 인연들과 재회했을 때, 사람은 때로 스스로도 모르던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보다 넓은 시야로 자신을 관조해 성장에 이르는 것.
물론 끝끝내 반성하지 않는 옹고집도 없진 않겠지만……
내 상담 방송을 보며 수천만 원의 후원을 했던 ‘마구니’ 이혁권은,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 얘기 듣고,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만약에 그 형이 동생 아파서 그랬다고 악다구니 쓰고 그랬으면 어땠을까. 저도 멘탈이 막 튼튼한 편은 아니라서, 컨디션 박살 났을지도 몰라요. 꼭 그게 아니더라도…… 앰버 형이 여친이랑 싸운 스트레스를 팀에서 풀었으면 어땠을까. 렙 형이 말 막 하는 저한테 빡쳐서 인터뷰에다 제 욕을 했으면 어땠을까. 못 버텼을 거예요. 롤드컵은 무슨…… 손목 아픈 김에 그냥 게임 접었겠죠.]
“그랬을 수도 있겠네요.”
[그래서, 그니까 좀…… 감독이 된 지금은 알 것 같기도 해요. 꼰마님이 얘기한 역체롤이요.]
“그렇습니까? 누굴까요?”
[생각해봤어요. 잘난 척만 하는 막내 미드 귀엽다고 잘한다고 응원해준 앰버 형일까. 뒤에서 매니저처럼 밥하고 빨래하고 다 해준 크리 형일까. 저랑 대립각 세우면서도 중요한 포인트에선 져준 렙 형일까. 맨날 실실 웃으면서 분위기 풀어준 매트 형일까. 한국팀 첫 롤드컵 우승은, 누구의 작품이었을까. 정답은…… 12 테이크. 그게 역체였어요. 그렇죠?]
“나야 모르지요. 문외한 아닙니까? 그런데 개인이 아닌 팀을 역체라고 부르다니, 신박하네요.”
[에이. 이젠 퀴즈까지 주작하시네. 꼰주작, 흐.]
본인의 평가와 달리, 이혁권은 강한 사람이다.
통증마저 잊고 롤드컵을 향해 달렸을 정도로.
상처받은 위악(僞惡)의 천수연과는 전혀 다를 터였다.
그렇지만 두 사람의 드라마는 꽤나 닮아 있다.
내게는 그 사실이 잘 보였다.
“혁권 씨. 당신은 잘해왔습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경기에 임했던 그 열정은, 분명 감동적이었어요. 동료들도 그 마음을 알기에 비난하지 않았을 겁니다. 잘했습니다.”
[……감동을 줄 만한 일은 없었는데요.]
“있었을걸요. 나는 알아요. 그러니까, 크리 선수가 자기 듀오 말고 욕쟁이 혁권 씨를 먼저 끌어안았겠지요.”
[어, 그런가……?]
“마음 쪽은 내가 전문이니까, 믿어도 돼요. 당신은 사랑받는 팀원이었습니다. 이제는 죄책감을 내려놓아도 돼요.”
[죄……책감이요?]
이혁권과는 한두 번 대화하는 사이도 아닌 처지.
그가 가진 마음의 빛깔을 모를 수 없었다.
“털어버려요. 몸 관리를 못한 탓에 테이크를 긴 수렁에 빠뜨렸다는 자책에서 벗어나도 됩니다. 당신 입장에서는 최선을 다한 거니까. 누군가는 반짝스타였다며 까겠지만, 그런 건 무의미해요. 우리 모두에겐 지금 이 순간이 세계 최고고 역대 최고예요. 그렇게 만들어나가면 됩니다. 제자 투썬과의 경기에서 보여주세요. 게임의 신이 누구인지.”
[하하…… 그게 되겠어요? 피지컬이 다른데.]
“12 테이크와 함께라면 가능할 겁니다. 미드가 왜 황족이라 불리는지, 왜 팀원들의 희생을 강요하면서까지 가장 강해져야 하는 건지. 그걸 제대로 보여주도록 해요.”
[와우. 전엔 선호 응원하시는 것 같더니?]
“응원이야 양쪽 다 하지요. 이기는 편 우리 편.”
[하하하…… 예, 그래요. 영혼의 한타를 보여드리죠. 다섯 시 10분에 시작해서 단판으로 끝낼 거니까, 꼭 봐주세요.]
통화를 마치고, 나는 사제의 차이를 생각했다.
역대 최고가 되기 위해 동료들을 몰아붙였던 스승.
자기는 욕먹어도 좋으니 동료들이 편안해지길 바랐던 제자.
정반대 같지만, 그들은 사실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게 인간이지.
누군가에게는 공감을 받고, 누군가에게는 부정을 당하는.
그런 우리의 세상에는 선인도 악인도 없다.
드라마야 대부분 선역과 악역이 구분되지만, 현실의 상담사에게는 그저 슬픈 장벽들만이 존재할 뿐.
사실은 나 자신이야말로 가장 못된 악역이리라.
잘 살던 주인공들의 마음을 마구 흔들어대는 배역이니.
식사를 마칠 무렵에는, 참견쟁이 상담사의 가장 큰 피해자인 천수연이 조심스럽게 내게 다가왔다.
평소와는 다른 풋풋한 미소에 스탭들의 시선이 쏠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접근하는 이들은 없었지만.
“저, 박 선생님?”
“예, 수연 씨. 시원하게 울었습니까?”
“네……. 저, 선생님. 저 있잖아요……? 저, 실은-”
“잠깐. 매니저님도 듣고 계신데, 괜찮아요?”
하려는 말을 짐작하고 제지하자, 배시시 웃더라.
벌써 많은 것들을 내려놓은 듯했다.
“괜찮아요. 매일 제 일 도와주시는 분인데.”
어색하게 뒷짐 지고 있던 매니저가, 그 말에 얼이 빠졌다.
촛농처럼 흘러내리는 느낌이다.
그를 일별한 뒤에, 천수연은 볼을 붉히며 말을 이었다.
“아까, 촬영하면서 했던 얘기들, 사실 지어낸 얘기 아니었어요. 제 얘기였어요. 제 이야기, 제 아빠 이야기였어요. 그래서, 연기가 아니었어요. 아마…… 아셨던 것 같지만요.”
“예. 실은 내가 유도한 거였어요. 이연이 아닌 천수연과 상담하고 싶었습니다.”
“아…… 정말요?”
“장 작가님은, 내가 그럴 거라고 예상하셨던 것 같고요.”
“저, 정말요? 어떡해…….”
“아저씨 아줌마 오지랖이 이렇게 무섭답니다. 둔한 듯하면서도 꽤나 많은 걸 보고 있지요. 그래서 실은, 미안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려야 할 것 같네요. 과한 참견을 사과합니다.”
“아, 아뇨. 아뇨…… 고맙습니다. 전…… 고맙습니다.”
거기까지였다.
부끄러운 듯 웃은 천수연은, 뒤돌아 분장실로 향했다.
식사도 거르고 다음 촬영을 준비하려는 모양.
그 뒤를 황급히 따르는 매니저는, 당혹감의 한편으로 뒤통수마저 웃고 있는 듯했다.
내 뒤통수 역시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오아시스 앞의 순례자는 무릇 온몸으로 웃는 법이니.
「 내담자 명 : 천수연
평가 결과 : 가면의 숲에서 길을 찾은 나무꾼. 약점을 들키지 않고자 연신 도끼를 휘둘렀다. 미약하고 삐뚤빼뚤하지만, 숲 사이로 오솔길이 나 있다. 그 끝에는…… 」
……실제 보고서를 이따위로 쓴다면, 슈퍼바이저에게 크게 혼날 텐데.
그렇지만 야매 상담사에게는 문제 될 것이 없다.
말줄임표 뒤의 미래를, 110의 ‘진단’으로 읽고 있으니.
황제 이연과 달리 천수연의 부친은 생존해 있다.
최악의 기억을 해소할 시간이 남았다.
이 촬영분이 방송되고 나면, 수십 년이 흘러 한참 더 어른스러운 아빠가 된 부친이, 조금은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리라.
둘째까지 성인이 되도록 키워낸 사람이니.
그런 남의 가정을 생각하다, 하릴없이 딸을 떠올리게 됐다.
뭐 하나 해준 것 없는 내 소중한 미래를.
맏이들은 보통 불우하다.
아빠도 엄마도 다 그 위치를 처음 경험하는 탓에, 온갖 잘못된 조언과 인내 없는 감정에 휘둘리게 되는 것이다.
내 딸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번 생은 처음인 나라서, 아빠다운 아빠가 돼주지 못했다.
그렇기에 딸은 내게 진짜 속마음을 말하지 못한다.
내 방송을 보며 울었다는 이야기도, 무수한 사연들을 보며 느꼈을 감상도, 엄마하고만 주고받을 따름.
그 아이에게 나는 아직도 멀고 먼 사람이었다.
이제는 나도 더 어른스러운 아빠가 돼야지.
내 딸이 천수연처럼 슬픈 위기를 겪지 않도록.
그저 행복만 가득한 가운데, 해피엔딩에 이를 수 있도록.
촬영을 마치고 곧장 딸의 학교로 향했다.
오늘도 대장군처럼 어깨를 펴고 걷다가, 날 보고 놀라더라.
“어, 아빠! 촬영 벌써 끝났어?”
“촬영? 어? 뭔 촬영?”
“뭐야 뭐야? 꼰저씨 뭐 찍으셨는데?”
그리곤 친구들에게 내 드라마 출연을 떠벌리는 것이다.
그저 1화에 잠깐 나오는 까메오일 뿐인데.
그렇게 의기양양해진 딸을 뒷좌석에 태운 내 마음도, 천수연의 매니저처럼 촛농 같은 모양이 됐다.
“우리 딸, 학교는 재밌었어?”
“아 뭐래. 학교가 어떻게 재밌어? 아빤 학교 재밌었어?”
“어…… 나름대로 즐거웠지?”
“말도 안 돼. 하여튼 서울대. 다 미쳤어.”
“하하. 아빠도 엄마도 서울대라서, 부담감 느껴지니?”
“아니거든요? 난 공부 관심도 없거든요?”
“그래? 그래도 되고.”
“……뭐라고 안 해? 공부하라고 잔소리해야지.”
“괜찮아. 지수 너는 하고 싶은 거 해. 그래도 돼. 아빠가 너 평생 행복하게 살 돈 정도는 모아놓고 갈 테니까.”
“……뭐래. 드라마 찍는 줄?”
집으로 돌아와서는, 함께 오른팔의 데뷔방송을 기다렸다.
학교에서 남자아이들이 떠드는 빅뉴스를 듣고 이미 솔깃해져 있었던 모양.
“아빠 아빠. 오른팔 걔 진짜 프로게이머 될까? 그래서 나중에 투썬이랑 같은 팀 하고 그럴까?”
“글쎄? 모를 일이지만, 그렇게 되면 좋겠네.”
“아항. 근데 아빠. 나도 프로게이머 할까?”
“그래도 되지.”
“진짜? 근데 여자 프로게이머는 아마추어한테도 발린대.”
“발린다는 표현은 좋지 않아, 지수야.”
“뭐래. 애들 다 쓰거든? 암튼 난…… 아, 시작했다…… 아.”
화면에 드러난 BJ오른팔은, 안대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보통 인방에서는 보기 힘든 복색.
안면에서 드러나는 것이라곤 오른쪽 눈밖에 없다.
그렇지만 그 마음의 창이 밝게 웃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유입되는 시청자들에게 숫기 없는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며, 소년은 애써 어깨를 폈다.
그리고 그 곁에 투썬이 나타났다.
[반가워요. 투썬입니다. 요새 제가 프리TV에 자주 나와서 놀라셨을 것 같아요. 오늘은 제 팬인 른팔이 초대로 왔어요.]
「아니 투형 쟤 진성 투까자나 ㅋㅋㅋㅋㅋㅋ」
[그래? 른팔이 너 투까야?]
[아, 아닌데요. 저…… 리젠됐는데요.]
[그렇대요. 다시 태어난 른팔이예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리젠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닠ㅋㅋㅋㅋ 대놓고 물타기넼ㅋㅋㅋㅋ」
딸애가 티 안 나게 손을 모아쥐더라.
다시 태어난 두 사람의 우정을 응원하는 것처럼.
이후 11만 명의 관전 속에 치러진 천재들의 매치는……
결론적으로 말해서, 각본 없는 드라마였다.
딸애가 비명을 지르다 아내에게 혼나기도 했을 정도로.
제자 투썬의 전략은 단순했다.
본인은 적당량만 성장하며 상대 미드 견제에 올인하고, 루트 상당량을 스킵하고 돌아온 정글러에게 CS를 몰아주는 것.
그야말로 근본 없는 서포팅 미드 전략이었다.
그런데도 그게 참, 어마어마했다.
이미 초인적인 피지컬로 세계를 정복한 청년.
그가 잡념을 떨쳐내고 정글러 키우기에 매진하자, 그 움직임 하나하나가 유튜브 레전드 각을 찍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게임은 패배하게 됐지만.
평균연령 29세에도 불구하고 녹슬지 않은 피지컬을 선보인 뉴겜의 OB팀은, 말하자면 신화의 재림이었다.
움직임 자체는 더뎌졌기에 초반에는 꽤나 밀렸지만.
라인이 털리건 정글이 털리건 성장과 용에 집착한 게임의 신은, 마침내 제자인 투썬까지 격살하며 펜타킬을 달성했다.
그 ‘한타’로 게임은 역전됐다.
해설을 맡은 오른팔이 억울한 듯 키보드를 내리치더라.
[이, 씨! 아, 말도 안 돼! 어떻게 우리 형이 져!]
「야잌ㅋㅋㅋㅋ 투썬이 왜 느그형인뎈ㅋㅋㅋㅋ」
「양심 ㅇㄷ」
[형, 괜찮아요! 이거 연습생들이 못해서 그래!]
「와우 이자식 투독됐네 ;;」
[그만해, 도준아. 이거 내가 잘못한 거야. 내가 이상한 전략 써서 그래. 감독님이 절대 안 된댔는데…… 내 잘못이야.]
[아냐! 형은 잘못 없어!]
「이틀만에 투까 개종시킨 투썬니뮤ㅠㅠ 리젠갓ㅜㅠㅠ」
사실 게임의 리젠이란 몬스터가 죽고 나서 다시 태어나는 일을 뜻하지만, 현실의 사람은 죽지 않아도 리젠될 수 있다.
도망치고 또 도망치던 진짜 내면과 마주선다면.
가면을 벗어던지고 나 자신의 마음을 이해한다면.
그때는, 누구든 해피엔딩을 향한 오솔길을 낼 수 있다.
「뉴겜님이 접속하셨습니다.」
[뉴겜님 별사탕 1000개. 꼬맹아 방송열심히해라. 글고 선호너는 그전략더연구해봐. 잘하면 쓸수도있겠다. 괜찮았어.]
[……어? 감독님? 진짜예요?]
[그렇다니까! 형, 잘했다니까요 진짜! 나 소름 돋았다니까!]
나 역시 저들처럼 되어야 한다.
더 좋은 아빠가, 더 좋은 남편이, 더 좋은 상담사가 되자.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얼음의 가면을 녹여주자.
이 아름다운 드라마들과 함께.
‘현시창’이라고들 하지만, 현실에도 해피엔딩은 있다.
우리의 드라마는 미니시리즈가 아니니까.
삶이라는 긴 드라마는, 발단-전개-위기x9999 같은 끔찍한 난이도를 자랑하지만, 언젠가는 절정-결말에 이르게 된다.
가면의 숲을 삐뚤빼뚤 배회하는 오솔길의 엔딩.
살아만 있다면, 그곳에 닿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