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
42장 - 상담사의 드라마 (4)
[천수연 배역이요? 어, 그러네? 보면 약간 이중적인 캐릭터가 많긴 했죠. <어르신>에선 돈에 미친 도둑 같다가 반전매력 보여줬고, <6월>에선 시위대 얘기 쌩까다가 막판에 전방 최루탄! 해버렸고. 뭐 영화에선 흔한 클리셰긴 하지만요.]
진대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배역보다는 천수연의 실물 쪽에 관심이 많은 듯, 이후 한참 동안 왜 자길 빼놓고 갔냐며 칭얼거리더라.
밤새 편집하고 피곤할 것 같아 배려해줬더니만.
어쨌든 흔한 클리셰라는 건 틀린 말이 아니다.
CG가 주요한 마케팅포인트인 히어로무비에서도, 초능력을 얻게 된 주인공의 내적 고뇌가 자주 조명되곤 했다.
그만큼 공감대가 넓은 이야기라서 그럴 것이다.
비밀 없이 사는 현대인은 극히 드물 테니.
그 지점에서, 천수연의 연기력에 대해 재고해보게 됐다.
20년차 이상의 대배우들과도 비견되는 신인이다.
자기 자신과 전혀 다른 배역이라면 그렇게는 안 됐으리라.
분명 어떤 접점이 있었기에 나온 성과.
그런 관점에서 그녀의 배역들을 분석해보자면, <퀸즈 랜드>의 황제 이연까지도 하나의 키워드로 묶여 있다.
가면.
세상 모든 이가 공감할 수밖에 없을 갈등의 요인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만인에게 NBSC를 숨기고 있는 나 역시 마찬가지.
그 누구도 몰라야 하는 톱 시크릿이었다.
그렇지만 그런 나조차 때로는 다 들켜버리고 싶다는 욕구에 사로잡히곤 한다.
홀로 짊어진 세상과의 싸움이 견디기 힘든 짐이기에.
고백해도 믿기 힘들 일이기에 참고 있을 뿐, 가족이나 한효준에게는 언젠가 털어놓고 싶었다.
감춰왔던 내면을 공감받고 나면, 부정적 추동이 정화된다.
그 정화 속에서 서로의 유대감이 강화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가면 속을 공유하며 교류한다.
지식IN에 흔한 친구 만들기 질문의 답변에는, ‘공동의 비밀 만들기’가 빠지지 않고 들어가곤 했다.
우울증 삽화의 환자들이 주변을 괴롭히는 것도 마찬가지.
가까운 사람들을 힘들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의식이 끊임없이 아픔을 토로하게 만든다.
단 한 번의 진짜 공감을 위해서.
그것이 쉽게 받아줄 수 없는 이기심이 되는 것은, 잦은 거절과 무시 속에 냉소적인 태도와 결부되어 버린 까닭이리라.
어쩌면 천수연 역시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거절과 무시를 피하고자 ‘여왕님’이라는 캐릭터로 자신을 보호할 뿐, 진짜는 내 대기실에 찾아온 그 아이일지도 모른다.
이번 상담에서 특히 주의해야 할 포인트였다.
분장을 받는 내내 그 생각에 골몰했다.
세트장으로 이동해 프레임을 확인하는 동안에도.
“예, 그렇게 앉으시고……. 진짜 페이스 좋으시네. 아우라라고 할까, 그런 게…… 오히려 화면발을 못 받으세요. 아깝다.”
PD의 과찬에는 고개만 꾸벅여 보였다.
그보다는 마주 앉은 천수연을 유심히 관찰해야 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정보를 획득하기 위해서.
“오빠. 나 여기 모자 연결 아니야? 어디 있어요?”
“어? 어, 야, 잠깐만. 그랬나? 아니었지 않나?”
“오빠. 생각하지 말고, 가져와요. 그냥 가져오면 되잖아. 생각은 내가 하잖아. 내가 할 연기를 나보다 잘 알아요?”
“어? 아, 아니지. 미안. 바로 가져올게. 야 수민아!”
황제의 예복을 입은 그녀는 정말 여왕님이 되어 있었다.
내 대기실에 찾아왔던 건 본인이 아니었다는 듯이.
진행팀 막내가 공공연히 비난했을 정도니, 하루이틀 일조차 아닐 것이다.
그 가시를 만들어낸 건 어떤 아픔이었을까……
고민을 계속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PD는 준비가 갖춰지자 저돌적으로 움직였다.
“자, 촬영 길어질 수 있으니까 빨리 가볼게요. 리허설 없이 바로 시작합니다. 시작은 양쪽 클로즈업부터 딸 건데, 주 대사들만 따라가시면서 진짜 상담처럼 진행해주시면 돼요. 편집 때 그림 자연스럽게 이어붙일 거니까. 준비됐어?”
“카메라 롤!”
“갑니다. 씬 0에 1에 1!”
“자, 됐지? 하이…… 큐!”
그렇게 리허설도 없이 상담이 시작됐다.
그 순간이, 내게는 정말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눈앞의 까칠한 여왕님이 사라졌다.
앞에 남은 건, 황제 이연이었다.
“……왜 묻지 않지요? 궁금한 게 많다고 하시더니.”
“예. 그랬지요. 최근에…… 식사는 제대로 하고 계신지요?”
“‘제대로’라는 말이 의아하군요. 제국의 황제는 뷔페를 즐기지 않아요. 정해진 식단이 정해진 시간에 나옵니다.”
“죄송합니다. 제 말씀은, 소화에는 이상이 없으십니까?”
“저를 병자로 몰고 싶으신 눈치로군요. 괜찮아요. 조금 바쁜 것뿐이에요. 그러니 더는 시간을 허비하지 마세요.”
“……최근에 옥루(玉淚)를 흘리신 것은 언제쯤입니까?”
“눈물이요. 별난 걸 질문하시는군요. 그게 중요한가요?”
“상담사에게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런가요. 간명합니다. 없어요. 저는 울지 않아요.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위정자는 사람답게 살지 못해야 하는 법입니다.”
대본 속 황제로서의 대답.
웹툰의 이연은, 가장 힘들 때조차 울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도 후반부 오열의 감동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였겠지.
그래서 여기까지는 미리 정해져 있던 대사다.
다만 이제부터는 내 상담.
나는, 이 순간 이연에게 무엇을 물을 것인가.
「 내담자 명 : 천수연
평가 결과 : 가면의 숲에서 길을 잃은 나무꾼. 약점을 들키지 않고자 연신 도끼를 휘두르고 있다. 」
……손바울 케이스 이후 점점 서술이 센치해지는 것 같은데.
어찌됐건, 이해할 수 없는 보고는 아니었다.
배우란 가면 사이를 배회하는 직업이니.
어린 세손을 귀여워했던 외척이 아닌 나는, 그 정보에 의지해야 한다.
“어린 시절엔 좀 더 밝으셨던 것 같은데. 아닌가요?”
“그런 말씀만 하실 거면 돌아가겠어요.”
“가끔은 소소하게 담소를 나누는 것도 좋지 않습니까.”
“어린 시절이라면 그렇게 했겠지요. 그러나 이제 제 어깨에는 오천만의 신민이 있습니다. 하고자 했던 말씀만 하세요.”
심리학의 관점에서는, 리플리 증후군이나 조현병처럼 인격을 꾸며내는 질환조차도, 근원은 무의식의 추동으로 본다.
천재적인 배우라고 해서 다를까.
천수연의 연기도 본질은 내면의 발현일 것이다.
동일시가 너무도 심해 쉽게 알아보기 힘들 뿐, 연기 속에서 그녀 역시 자기 자신을 표출하고 있을 터였다.
그렇기에 자문해보게 된다.
천수연에게 이 배역은 어떤 존재일까.
울지 않는 황제는, 그녀 마음의 어떤 가시에 해당할까.
“연. 함자(銜字)가 그렇게 되시지요?”
“……무엄하시군요. 황실을 모욕하고자 부르셨나요?”
“부른 적 없습니다. 제가 찾아가려 했지요. 어쨌든, 황제 이연은 흥미로운 사람입니다. 첫 여황으로서 즉위 이전부터 논란이 많았지요. 단상에서 계란을 맞고도 기계처럼 웃으셨던 날은, 정신병자가 아닌가 하는 찌라시까지 돌았다고요. 이 1년간 바람 잘 날이 없었어요. 황조의 가장 권위 없는 황제셨습니다. 이연이란 황제는 그렇게 1년을 보냈습니다. 그럼으로써 제국을 지켜내셨지요. 참…… 어리석은 사람이에요.”
“여보세요.”
“연. 못 연(淵)입니다. 이연이란 사람의 호수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비가 와도 넘치지 않아요. 세손 시절과 달리, 세상이란 무대에 태자로 데뷔하신 뒤에는 늘 그랬어요. 당신은 대체 누구입니까? 황제라는 직함 말고, 황실의 외자 이름 말고, 진짜 당신의 이름은 뭡니까?”
“언동에 주의하세요. 나는 황제 이연입니다.”
천수연은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있다.
단지 불쾌함을 표현한다기보다는……
매일같이 자문하던 이야기를 들은 사람 같은 표정이었다.
그 태도에서, 이연과 천수연의 분기점이 보였다.
내 배역이야 이연을 상담하는 외척이다.
[직면 선택지]도 나오지 않은, 첫 회기의 도입부.
철벽처럼 마음을 숨기는 제국의 황제를 끌어내기는 어렵다.
하지만 천수연이라면 어떨까.
어차피 지금의 촬영은 리허설이나 다름없는 첫 테이크.
그리고 나는, 숲을 우회하는 비밀을 가지고 있다.
「 [정문의 일침]을 사용합니다 > 천수연
주제 ‘이름’에 대응하는 키워드는 다음과 같습니다.
> ‘도망자’ 」
……역시 그랬구나.
마침내 안개 속 천수연의 연못이 보였다.
“계란 세례에도 웃을 수 있었던 이유는…… 남들이 비난하는 것보다도 더 스스로를 비난하는 까닭이겠지요. 스스로가 싫으니까. 다른 누군가가 되는 편이 훨씬 당당하니까. 그렇기에 자신을 부정하고 또 부정합니다. 롤모델 같은 누군가를 흉내 내어, 철인의 가면으로 겉모습만을 꾸며냈습니다.”
“허무맹랑한 소리를……”
“허무맹랑하지 않아요. 잘못된 것도 아니에요. 사람은 다들 그렇습니다. 누구 하나 스스로에게 만족하지 못해요. 그렇기에 미워하며 살아갑니다. 마음에 안 드는 반찬 하나에 짜증을 내고, 대수롭지 않은 장난에도 얼굴을 붉혀요. 그래야 내가 정당해지니까. 그래야 살아갈 수 있으니까. 하지만 당신은…… 자신을 죽여가며 가면을 위해 사는 듯해요. 왜 그런 겁니까? 왜 마주하지 못하고 피하는, 도망자가 된 겁니까?”
별다를 것 없는 단어가 크게 다가올 때가 있다.
[정문의 일침]이 제시해주는 것은, 바로 그 하나의 역린.
이연 속의 천수연이 ‘도망자’라는 말에 반응했다.
“제가…… 도망자라고요? 제가요? 저는 언제나, 맞섰어요.”
“맞섰습니까? 당당하게 당신을 보여주고 마주 섰습니까? 마음속으로 도피해 새로운 가면을 고안해내신 것이 아니라?”
“사람은 누구나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법이에요.”
“예, 모두 그렇지요. 그렇지만 당신처럼 지독한 경우는 드물어요. 왜였습니까? 왜 자꾸만 가면 속으로 도망쳤습니까?”
원작 웹툰에서는, 첫 여황으로서 부딪친 장벽 때문이었다.
드라마 시놉시스에도 그 맥락이 이어져 있다.
그렇지만 꼭 그런 판타지를 적용할 필요가 있을까.
현실 속에도, 이연 같은 도망자는 많고 많은데.
당장 천수연 본인의 가면이 거기에 맞닿는다.
대본을 연구하지도 않는 주제에 작가의 경탄을 불러일으켰던 것은, 필연코 배역 그 자체를 동일시했던 까닭.
[정문의 일침]은 그 접점을 공략하는 키였다.
문득, 천수연의 얼굴에서 이연이 사라졌다.
예정에 없던 변화를 느꼈는지 PD도 움찔한 느낌.
그러나 그쪽에서는 신경을 껐다.
지금이야말로 호수의 안개를 걷어낼 적기이기에.
“말해봐요. 듣고 있어요. 전 오늘의 대화를 무덤까지 가져갈 겁니다. 여기서는 말해도 됩니다. 왜, 도망쳤습니까?”
“……당연하잖아요. 절, 좋아하는 사람은 없는데. 진짜 모습을 보여주면 안 되는 거예요. 가면을 벗으면, 모두 다 절 무시할 거예요. 어떻게 그렇게 한심한 생각만 하냐고…… 어떻게 그렇게 멍청하고, 못나고, 낯이 두껍냐고, 그렇게…….”
“누구였습니까? 누가 그렇게 말했지요?”
“아빠- 아, 아바마마께서…….”
마지막에 ‘아바마마’로 고친 호칭.
그 기지로, 아마 제작진은 이 모든 이야기가 연기천재의 애드립이라고 생각하리라.
그렇지만 나만큼은 알 수 있었다.
순간의 말실수가 시놉시스 바깥의 스토리를 암시했기에.
천수연이다.
그녀의 심상세계가 섞이고 있다.
가장 중요한 지지자 중 하나인 부친의 부정.
그 앞에서 아이는 무너져내릴 수밖에 없다.
몰랐으면 좋았을 진심을 알고, 스스로를 저주하게 됐으리라.
아픈 기억 속으로 한발 더 나아갈 때였다.
“선황께서 왜 그런 말씀을 하셨지요?”
“제가, 잘못했어요.”
“아이의 잘못이야 당연한 일인데요. 마음이 아팠겠군요.”
“저는 그냥…… 괜찮을 줄 알았어요. 동생이 때려서, 도망쳤어요. 그래서,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어요. 받아주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렇게…… 절 한심하게 보셨어요. 동생한테 맞은 게 자랑이냐고…… 애 하나 못 보냐고…… 저를 남의 집 아이처럼 보셨어요. 울었더니, 저를, 때리셨어요…….”
원작에서도 시놉시스에서도, 황제 이연은 외동딸.
여기까지 오면 재해석 수준을 넘어간다.
그렇지만 드라마의 사정은 생각지 않기로 했다.
눈물을 머금은 내담자를, 이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으니.
“부모는 맏이에게 가혹해지곤 합니다. ‘사랑의 매’라면서.”
“맞아요. 저는…… 잘못했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안 그러려고 했어요. 더 강하게 말하고, 더 단호하게 거절하고, 더…… 저는 더 강한 사람이 돼야 해요.”
“아뇨, 수긍하라고 말씀드린 이야기가 아니에요. 사랑의 매? 헛소리. 세상에 그딴 게 어디 있습니까.”
“……당신, 지금, 선황께 감히……!”
이 와중에도 선황이라니.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배우다.
그렇다면, 내용만큼은 오직 천수연을 위한 이야기지만, 나 역시 이연의 상담사라는 가면을 써줘야지.
“송구하지만, 상담에는 성역이 없어요. 선황이 됐건 태후가 됐건 할 말을 하겠습니다. 부모가 돼서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어떻게 우는 아이를 때릴 수 있어요? 울린 건 자기들이면서. 우는 아이로 만든 건 그들이면서.”
“저는, 저는 맏이니까…… 태자니까!”
“그러면 뭐? 없던 잘못이 생겨납니까? 그저 동생과 싸우고 싶지 않았을 뿐이잖아요? 맏이라고 해서, 태자라고 해서, 항상 강해야 할 이유가 뭐가 있습니까? 황제라고 해서 늘 감내하기만 해야 할 이유가 뭐란 말입니까? 그런 거면, 다 갖고 꺼지라고 해요. 다 필요 없으니 막내딸 시켜달라고 해요. 그래도 되잖아요. 마음이 여린 게 뭐가 나쁩니까? 카리스마만 있으면, 남의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폭군이라도 괜찮다는 겁니까? 그건 정말 멍청해요. 멍청한 생각이에요.”
“감히 그런 망언을-”
“폐하. 괜찮아요. 제 앞에선 괜찮아요. 망언을 합시다. 나라를 망하게 만들 법한 소리들도 합시다. 여기서만큼은, 황제가 아닌 내담자니까. 당신은 내게 착한 아이일 뿐이에요.”
“이, 이……!”
분노를 연기하는 천수연의 눈에서, 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거기에 스스로도 당황한 듯했다.
눈가를 닦는 손이 바들바들 떨린다.
그리고, [직면 선택지]가 발동했다.
하지만 그걸 굳이 참고할 이유는 없겠지.
내 호수에 이미 그녀가 담겨 있으니.
“……고생했어. 많이 힘들었지? 난 그렇게 안 살아봐서…… 내키는 대로만 살아온 사람이라, 네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이 안 된다. 그래도 감히 말하고 싶어. 잘했다. 바보같이 평생 가면 속으로 도망쳤지만, 그래서 널 아껴주는 사람들한테 오히려 상처만 줬겠지만, 그래도 잘했어. 네가 그렇게 혼자 마음고생을 한 덕분에 많은 사람이 행복해졌어. 이제는 괜찮아. 너도 울어도 돼. 동생도 잊고, 부모도 잊고, 사람답게 살아도 돼. 그동안 고생한 만큼, 행복해지자.”
안개가 걷히고 둑이 터져, 마음이 넘쳐흐른다.
천수연은 카메라도 잊은 채 오열하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얼굴을 투명하게 물들인 채, 그녀는 웃었다.
“흑, 하핫…… 무엄해요. 감히, 누구한테…… 이래라저래라야. 저는, 그냥…… 불행해져야 되는, 사람인데. 그게 맞는 건데.”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당신은 행복해져야 하는 사람이에요. 안 그럼 안 되지. 선황께서 저승에서 땅을 치고 계실 겁니다. 내가 괜한 소릴 해서 딸을 괴롭혔다면서. 그러니까 이제 놓아줘요. 가면을 놓고, 행복을 찾아가요. 가장 미안했던 사람이 누구지요? 그 사람에게 말해요. 같이 행복하자고.”
“아, 하하하…… 진짜, 그게, 뭐야. 인소도 아니고.”
인터넷소설을 좋아하는 모양이지.
무심결에 내뱉은 말에서 취향이 드러났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는 노릇이겠지만.
모든 뛰어난 배우가 부정적인 유년기를 보낸 것은 아니다.
그와 무관하게 공감의 연기를 펼치는 이도 있으리라.
다만, 모든 인간은 고통의 경험에서 가면을 만든다.
이른바 사회적인 가면- 페르소나다.
상처받은 가면의 아이들은 마음을 표출할 곳을 찾는다.
대체로 사람이 아닌 픽션 쪽으로.
황당무계한 설정으로 가득한 연재소설이 청소년들에게 인기를 끄는 것은, 일그러진 시대상을 반영하는 일일 것이다.
드라마 역시 교류가 줄어든 시대에 인기를 끈다.
현실에서는 서로가 꽁꽁 싸매기만 하는 비밀들을,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보여주기에.
그곳에선 인물들의 가면 속을 직시할 수 있다.
우리는 드라마 속에서 조금 더 착한 관찰자가 될 수 있다.
천수연의 이중적인 배역들을 정의롭다고 평가한 진행팀 막내는, 현실의 그녀를 배우병 걸린 여왕님이라고 비난했다.
사실은 그 둘이 다르지 않은데도.
가면과 편견이 부딪칠 때, 인간은 잔인해진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조차 미워하게 된다.
장벽을 넘어, 가면을 걷어내, 공감을 만나기 위해서.
우리는 진심을 토로할 수 있는 대상을 찾아 헤맨다.
단지 공감만으로도 내담자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능력은, 바로 그 본능적 기작에 기인한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다.
사실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
상담사든 아니든, NBSC가 있든 없든, 그저 똑바로 바라보고 진심을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녹아내릴 수 있다.
내 앞에서 울며 웃는 천수연처럼.
그렇지만……
드라마에 넣기엔 좀 곤란한 테이크겠지.
없던 설정이 무더기로 등장해 PD도 인상을 쓰고 있다.
그렇게만 생각했다.
하지만 눈을 비비고 다시 보니, 곁에 다른 이가 있었다.
오른손으로 두꺼운 안경을 고쳐 쓰는 장은진 작가가.
(null)
/ 후기
안녕하세요, 독자 여러분. 비벗입니다.
부득불 일요일 연재를 못 했기에 오늘은 두 편을 올립니다.
모쪼록 즐거운 감상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ps) ‘황태자/황태녀’가 바른 표기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다만 ‘남자(男子)/여자(女子)’나 ‘자식(子息)’ 등의 표현을 고려해, 해당 표기의 자(子)가 남녀 구분을 뜻하지 않을 수 있다고 가정하고, ‘태자(太子)’로 통칭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