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
42장 - 상담사의 드라마 (3)
[꼰마야놀자님 별사탕 100개. 엄허나 드라마라니. 꼰마오빠 진짜 축하드려요. 퀸즈랜드 꼭 봐야되겠네요.]
[케바케님 별사탕 500개. 캬 맙소사 대배우 꼰마뉨 흐흐.]
[양수리퀸님 별사탕 100개. 저 저 그거 완전 보고 싶었는데 더 보고 싶어졌어요 우왕 크크 수연언니 사랑해.]
내 드라마 출연 소식을 들은 시청자들은,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고맙고 머쓱한 일이다.
사실은 본업에 충실하지 못한 꼴인데.
어찌됐건 응원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행복한 일.
나 역시 솔직한 이야기들을 꺼내게 됐다.
“개인적으로 영화를 외화 위주로만 봐서…… 사실 천수연 씨 작품을 본 게 없습니다. 여러분은 다들 보셨나요?”
「엌ㅋㅋㅋㅋㅋ」
「여윽시 스크린쿼터 세대」
「봐야죠 ㄹㅇ 6월이랑 어르신이랑 다봐야돼여」
“<어르신>은 일제강점기 배경이고, <6월>은 근현대였지요? 이번 드라마는 현대…… 참 스펙트럼이 넓은 배우시네요.”
「수연언니 연기도잘하고 짱예존예 ㅠㅠ」
「천수연도 우리방송 보면좋겟당 홍보해바여 ㅎㅎ」
“그렇게 되면 참 좋겠네요. 돈도 잘 버는 스타니까 잘 꼬드겨서 후원을 받으면…… 흐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진짜」
「기부빌런이 연옌한테까지 」
「꼰마눌 : ㅎㅎ 여배우 얘기 언제까지해요? 상담하시지」
「헐」
「꼰마님 도망쳐여!」
“음…… 상담, 시작하겠습니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씻고 나왔더니, 아내가 IPTV 결제창을 켜놓고 날 부르더라.
“<어르신>, 보고 잘래?”
“어…… 글쎄. 그건, 베드신이 있다고 들었는데.”
“지수 자.”
“그게, 방음이 잘 될지.”
“볼륨 줄이고 보면 되지.”
“……일단 내가, 내일 그 배우를 보게 될 예정이라.”
“왜? 그게 뭐? 그거 보고 만나면 기분 이상할 거 같아?”
“그렇다기보다는…….”
“치. 됐어. 그렇겠지. 젊고 예쁜 애, 설레겠지.”
아이처럼 구는 아내를 보면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이렇게 어리광부리기 좋아하는 사람인데.
내가 어떤 말도 들어주지 않던 십여 년, 그녀는 참……
얼마나 외롭고 쓸쓸했을까.
“주희야. 내가 당신이랑 영화 왜 잘 안 보게?”
“응? 어…… 그러게. 내가 히어로무비 싫어해서?”
“아니. 내가 너랑 영화를 왜 봐? 너랑은, 찍어야지.”
“……어, 어? 지금……?”
“……아니, 요즘 아이돌들 유행어라고 해서.”
“아, 그래서? 난 또. 후후. 그래. 보지 말고 나랑만 찍어.”
애들 같은 말장난에 만족했는지, 아내는 또 어려졌다.
“음, 흠. 흠흠. 맞아. 여보, 어제 지수 울었다?”
“뭐? 지수가?”
“어. 그 게이머 애들 엉엉 울 때, 짠했나봐. 이렇게 눈가 훔치더라구. 그래놓고 당신한텐 절대 말하지 말라는 거야? 웃겨서 진짜.”
“음. 지수가…… 그런 쪽으로 감수성이 있구나.”
“그래. 의리, 동료, 이런 거 완전 좋아해. 그래서 아이돌들 여성향 소설도…… 아. 이건, 진짜 말하지 말라 그랬는데.”
“왜? 그럴 수도 있지.”
“정말? 어…… 나빠 보이지 않아?”
“전혀. 걔도 참, 그런 걸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는데.”
“……아빠한테 말하긴 좀 그런 얘기잖아. 당신, 이거 모른 척해야 돼? 혹시라도 티 내면 안 돼? 어차피 잠깐이니까.”
“흐음. 혹시 당신도?”
“어, 어렸을 때 잠깐. 다 그렇게 잠깐인 거야.”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만.
내게 온갖 것을 다 숨기는 딸에게, 못내 미안해졌다.
어렸을 때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어줬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벌써부터 가면을 쓰지는 않았을 텐데.
BL까진 아니어도 울었다는 얘기 정도는 해줬을 텐데.
역시, 난 나쁜 아빠였다.
그나마 최악만은 면했을 뿐.
지금부터라도 딸에게 더 많은 것을 해줘야지.
<퀸즈 랜드> 출연하는 미남 배우들의 싸인이라면, 작은 선물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맞이한 금요일.
애석하게도, 남자 배우들의 싸인을 받을 수는 없었다.
“배우들요? 어쩌나, 오늘은 없는데. 벌써 10화까지 완성돼 있어서 이래요. 장 선생님 전작들이 사전제작으로 기록적인 시청률 계속 냈으니까, 믿고 제작비 당겨준 거죠. MBC가 이번에 칼을 간 느낌이에요. 케이블에서 드라마 주도권 뺏어오겠다! 이런 거죠. 그래서 오늘 원래 촬영 없던 날이에요.”
진행팀 막내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괜찮다는데도 PD가 굳이 입구까지 마중 보낸 안내인.
그 본인도 불쾌하게 여기지는 않는 듯했다.
“그래서 배우는 수연이만 와요. 천수연, 아시죠?”
“예. 모를 수 없는 배우지요.”
“걔가 참 대단하죠? 충무로 5년차도 안 돼서 천만배우 되더니, 드라마판으로 오자마자 회당 1억 받아버리고. 걔 보면 세상이 참 불공평하다 싶다니까요. 아, 근데 미리 말씀드릴게요. 너무 친근하게 생각하진 마세요. 사실 배우병이 좀…….”
“그렇습니까? 주로 맡는 배역과는 꽤 다른 느낌이군요.”
“아, 그렇죠. 선하고 다정한 그런 이미지가 있어서 자꾸 정의로운 배역만 들어가나봐요. 근데 카메라 안 돌 때 보면 아예 여왕님…… 으휴. 아, 이건 비밀이에요, 선생님. 입이 방정이었네. 아무튼…… 예. 여기서 쉬고 계시면 돼요.”
그가 떠난 뒤, 대기실에 앉아 드라마 포스터를 살폈다.
인터넷 기사에서 자주 접한 메인 포스터 외에도 배우별 포스터가 따로 붙어 있었다.
개중 간소한 예복 차림으로 향원정에 서 있는 천수연의 포스터를, 나는 최대한 신중하게 살폈다.
한복이 잘 어울리는 동양적 미인상의 한 꺼풀 아래.
황제라는 배역 속, 배우 천수연이라는 가면 속.
그녀의 마음에는 무엇이 있을까.
천수연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정신과 의사 아놀드 루드비히는, 2018년 <천재인가, 광인인가(The Price of Greatness)>라는 저서를 통해 예술가와 광기 사이의 잘 알려진 통념에 대해 파고들었다.
천 명의 저명인사를 대상으로 수행한 양적연구.
그 결과는, 예술가 집단이 타 직업군에 비해 분명하게 높은 정신질환 유병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배우들은 시인과 함께 자살 기도 이력이 가장 많은 집단으로 드러났다.
물론, 양적연구는 인과관계를 선명히 드러내지 못한다.
그저 스케일이 조금 큰 경험적 판단일 뿐.
유명인라는 이유로 정신질환을 섣불리 의심한다면, 그것은 선량한 관심이라기보다는 폭력적인 오지랖일 터였다.
하지만 무엇이든 지나친 것은 화를 부르기 마련이다.
우리가 뛰어난 배우의 연기에 전율하고 경탄하는 것은, 그것이 보통 사람이라면 결코 재현해낼 수 없는 수준으로 현실적이기 때문.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에는, 아무나 겪을 수 없는 환경이 얽혀 있을 가능성이 높다.
연기라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 소양이다.
TV에 나오지 않는 현실에서도, 때로 불쾌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써 페르소나가 필요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두 얼굴에 가면을 덧댄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벼운 가식의 영역.
자신을 비우고 몰입하는 배우들과 비견될 수 없다.
뛰어난 배우들 가운데에는, 배역으로부터 헤어나지 못해 고통을 호소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톱스타 김명민이 그 문제로 화제가 된 인물이다.
내 동년배들에게 인생드라마로 손꼽히는 <하얀 거탑>의 주연을 맡은 시기에, 배역이 가진 삶의 무게를 자기 것처럼 느끼며 우울증 증세를 겪었다는 것.
자기 드라마의 마지막 회를 본 뒤 네 시간 동안이나 멍하니 쇼파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그 뒤에 25층 베란다에 나서자, 한참 아래의 화단이 마치 1층에서 보는 것처럼 가까워 보였다고.
그런 연기자들의 상담은 아무래도 특수할 수밖에 없다.
단지 개인의 경험만으로 생겨난 병이 아니기에.
무척이나 주의 깊은 관찰이 요구될 터였다.
그렇지만 이번 상담은…… 상황이 조금 묘하다.
배우 본인이 아닌 드라마 배역의 상담을 촬영하는 상황.
장은진은 그것을 실제 상담처럼 진행해달라고 말했지만, 정확히 어디까지 소통이 가능할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10분쯤 지나 찾아온 천수연이 그 혼란을 가중시켰다.
“안녕하세요? 와 계셨네요.”
“아, 예. 처음 뵙겠습니다. 박대민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천수연이에요. 방송 잘 보고 있어요.”
“……정말입니까? 립서비스지요?”
“아뇨, 아뇨. 유튜브에 떠서…… 궁금해서 봤어요.”
“민망하네요. 그렇게 흥미로운 방송은 아닌데.”
“아뇨, 흥미로웠어요. 재밌었어요. 촬영 대기하는 동안 진짜 심심하거든요. 원래는 대본 보고 연구하고 그래야 되는데, 머리를 너무 많이 쓰면 촬영 때 오히려 진이 빠지더라고요. 그래서 유튜브 자주 보는데…… 네.”
대본을 안 봐야 연기가 더 잘된다니.
다른 배우들이 들으면 욕할 소리였다.
수십 년 경력의 대배우들에게도 격찬을 받는 ‘천재 연기자’야, 더없이 진지하게 하는 얘기겠지만.
어쨌든 그런 이야기들이 꽤나 의외였다.
대기실에 인사하러 온 것까지는 이미지관리라고 봐도 되겠지만, 굳이 취미생활에 대해서까지 설명하는 것이.
오늘 하루만 보고 말 인연인데.
손가락 꼼지락거리며 화제를 찾을 이유가 없다.
현장 진행팀에게 ‘여왕님’이라고 불리는 배우라면 특히나.
“저…… 아 맞다. 제 영화, 혹시 보셨어요?”
“아니요. 죄송하게도 한 편도 보지 못했습니다.”
“아, 그렇구나…… 네. 저…… 대기실은 어떠세요?”
“편안하고 좋네요. 원래 단역이 쓰는 곳은 아니겠지요?”
“네. 원래 균헌 오빠 대기실이에요. 오늘은 없으니까…….”
“그렇군요. 제가 참 과한 대접을 받는 것 같습니다.”
“아뇨, 아뇨. 워낙 유명하신 분이니까요.”
“허명일 뿐이지요. 그러면, 오신 김에 오늘 촬영에 대해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제가 이쪽으로 감이 없어서요.”
“아, 네! 오늘은 세트장에…… 상담실처럼 꾸며놓은 방이 있거든요? 거기서 풀샷, 클로즈업, 오버숄더로 씬 구성할 거라서 아마…… 아. 이렇게 말씀드리면 어려우시죠?”
“괜찮습니다. 이론은 알고 있습니다.”
드라마는 보지 않지만, 영상 작법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프리월드가 한때 드라마 제작에도 발을 걸쳤기에.
금세 자회사 인수 쪽으로 뱃머리를 돌린 프로젝트지만, 워커홀릭인 나는 당시에 영상 용어를 달달 외우며 살았다.
“1분 분량이지만 촬영은 꽤 길어지겠군요. 목소리도 나중에 후시(촬영 이후 음성만 재녹음하는 과정)로 따겠지요?”
“네? 어, 와. 잘 아시네요. 근데 후시는 안 딸 것 같아요. 최대한 현장감을 주고 싶으신가봐요. 그래서 만족할 만한 그림에 사운드 나올 때까지 계속 찍으시려나봐요. 촬영 없던 날에 따로 날짜 잡으신 게 그래서래요. 좀…… 힘드실 거예요.”
그런 환경에서 상담을 진행하라니.
아무래도 PD와 작가 사이에 혼선이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핵심 대사 몇 개 빼고는 대부분이 비어 있는, 대본이라고 부르기 민망한 쪽대본만 봐도.
“황제 배역은, ‘이연’이군요. 이름을 부를 일은 없겠지요?”
“네. 외척이지만, 폐하라고 부르셔야 돼요.”
“알겠습니다. 그 외에는…… 대충 알겠네요.”
내 배역은 이름 없이 그저 ‘상담사’로 되어 있다.
장은진 작가에게 들은 배경 스토리를 종합해보면, 이 배역은 어린 시절의 황제를 무척 귀여워했던 외사촌.
긴 유학 끝에 상담심리 권위자가 되어 귀국했다.
이후 연일 알현을 요청했으나, 늘 거절당했다는 설정이다.
그러던 와중, 황제가 암행으로 상담소에 찾아온다.
어디까지나 잦은 요청에 귀찮아서 왔다는 투로.
그렇지만 그것은 다짐 같은 거짓말.
지문의 설명으로는, 내적 고뇌가 폭발하기 직전에 마지막 기대를 걸고 상담사를 만나러 간다는 전개였다.
“수연 씨는 이 황제라는 인물을 어떻게 보십니까?”
“아, 이연은…… 상처가 많은 아이예요. 어렸을 때부터 세뇌하듯이 배운 제왕학으로 단련돼서 겉은 강철 같지만, 속은 두부 같아요. 연두부…… 그래서 보는 눈 없으면 집사 앞에서 혼술도 하고 흐트러진 모습도 보여주고 그래요. 그래도 되는 대상이니까. 반면에 이정혁 의원은, 특히 잘 보이고 싶은 대상이에요. 국회의원인 동시에 사학자 출신이니까요. 이 사람한테 좋은 평가를 받는다면 사후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칭송받을 수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어요.”
삼각관계의 두 남자가, 극단적 양면성의 목격자인 셈인가.
과연 장은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미남이 진짜 황제를 알아가는 과정이, 들키고 싶은 비밀을 간직한 현대인들에게 대리만족을 줄 수 있을 테니.
그러니 천수연은 드라마 내에서도 배우 역할이다.
정의롭고 강인한 군주를 연기하는 마음 여린 이연을, 사석에서는 까칠한 성격이라는 천수연이 연기하는 것.
그 지점에서 묘한 연결고리가 느껴졌다.
촬영 때면 배역 그 자체가 되어버린다는 천수연은, 어쩌면 황제의 캐릭터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인물일지도 모른다.
“수연 씨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편한 집사, 존경하는 의원, 그리고 집안에서 정해준 상대 중에서 말입니다.”
“저요? 저는…… 별로 생각 안 해봤는데.”
“정말로요? 배역을 연구하며 해봤을 법한 생각 같은데요.”
“저는, 그냥…… 자기 입장에서 하는 생각이 맞겠지 했어요.”
일견 배역과 자신을 구분하는 말처럼 들린다.
배우로서 성실하지 못한 자세처럼 보여, 누군가는 천재 연기자는 대충 해도 잘하는구나 하며 혀를 찰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110의 ‘진단’에는 다른 것이 보였다.
황제와 동일시하고자 자신을 배제하는 걸지도……
“그렇군요. 작가님께선 아직 결말을 정해두지 않았다고 하셨으니, 오늘 촬영에서 괜찮은 결론이 나온다면 좋겠네요.”
“아, 맞아요. 그랬으면 좋겠어요. 이연도 아직 마음을 못 정한 시점이니까, 여기서 나오는 얘기가 결말 파트를 결정하게 될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굉장히 중요한 롤이세요. 물론 시청자들 반응도 신경 써야 될 부분이겠지만…….”
그 정도로 중요한 롤은 아니다.
찍어보고 별로면 버릴 수도 있는 시퀀스니까.
관건은 나보다는 천수연의 연기 쪽이 되겠지.
그런 그녀는 이후로도 이런저런 화제를 찾으려 애썼다.
하지만 내가 적극적으로 받아주지 않자, 이내 자신이 방해꾼이라고 느꼈는지 조심스레 몸을 일으키더라.
그 등을 보며, 나는 공감에 대해서 생각했다.
사람은 공감을 갈구하고 서로를 이해하려 노력한다.
그것은 분명 아름다운 일.
그렇지만 지나치면 병이 된다.
세상에는 몰랐으면 좋았을 일들도 있다.
남의 사정에 아무 관심 없는 유아기야말로, 가장 순수하게 행복을 만끽할 수 있는 시기라는 말처럼.
우리는 그 불편한 진실 사이에서 종종 고통받는다.
나야 딸이 어떤 동인지를 보건 존중할 수 있지만, 어떤 부모들에게는 끝끝내 숨기는 것이 나을 수도 있을 터였다.
그렇기에 가면을 쓰는 일은 사회성의 동의어다.
우울한 사람에게 기를 빨린다고들 말하는 것도 그런 까닭.
준비 없이 공감을 강요당하면 고통만 전염된다.
그 논리는 가상의 배역에도 적용될 것이다.
드라마틱한 상처를 가진 여러 삶을 마음에 담는 배우들이라면, 늘 마음이 소란스러운 것이 당연할 터.
연기자들의 고충은 바로 그 지점이 아닐까 싶다.
지나치게 많은 ‘나’ 때문에 쉽게 사람과 관계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니, 배우병이니 뭐니 비난해선 안 될 노릇이다.
사실 그런 면에서 나는 조금 독특한 케이스다.
NBSC의 ‘관계’가 상징하는 것이 단지 공감만은 아니기에.
상담사의 라포란 다중관계를 배제하고 철저하게 사람과 사람으로서 마주하는 일.
‘관계’가 100이 된 나 역시, 공감 속에서 적절한 선을 만드는 데에 능해졌다.
유튜브 하이라이트로도 그 기조가 잘 전달됐을 터였다.
아마 그것이 천수연의 방문을 낳은 이유였으리라.
주변 사람들에게 까칠하게만 군다는 ‘여왕님’은, 그러나 내게는 사춘기 아이 같은 모습으로 다가와 말을 걸려고 애썼다.
송성희의 평가가 떠오르는 지점이다.
내가 나쁘게 대하지 않을 사람이란 걸 믿을 수 있어서, 세상과 싸우려고 곤두세웠던 가시들을 접을 수 있었다는…….
자연히 생각하게 되고 만다.
천수연에게 해피엔딩을 안겨주고 싶다고.
아직은 그 마음의 독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지만.
그녀가 곤두세우고 있는 가시들이 어떤 모양인지 알아내자.
황제 이연이 아니라 배우 천수연에게 행복을 안겨주기 위해서, 나는 대사 몇 개 없는 상담사 배역을 마음에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