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
39장 - 상담사와 연애 (1)
[저 사실은 독립 준비하고 있거든요. 맨날 엄마랑 둘이 있으니까 좋기도 한데요, 그만큼 많이 싸우거든요. 아 진짜, 엄마 남자 만나야 돼요. 아직 별로 늙지도 않았는데 맨날 엄마 죽기 전에 좋은 사람 만나야 된다고 계속 잔소리 잔소리……. 그 아저씨- 아, 그 교수님이면 좋을 것 같아요. 일단은 부장님 추천이니까 믿을 수 있을 것 같고요, 염색만 하시면 외모도 괜찮을 것 같고요, 사람도 좋아 보이셔서요. 맞죠? 부장님, 제가 제대로 본 거죠? 그리고 전요……]
송은진은, 최근 부쩍 외로워하는 엄마에게 새 친구를 만들어준다는 생각에 들뜬 듯했다.
특히 한효준이라는 사람을 꽤나 좋게 봤던 모양.
내 대만 생방송을 통해서 너그럽고 인자한 어른의 태도에 감명받았다는 얘기였다.
몰입해서 보느라 자기 생방송에 지각할 뻔했다나.
그래서인지 밤새도록 떠들 기세였던 것이다.
두 사람이 부담스러워할 수 있으니 자연스러운 기회를 노려보자는 결론을 내고서야, 비로소 강의실에 돌아갈 수 있었다.
수업에 집중하기는 좀 어려웠지만.
연애라는 것은 남들이 관여하기 어려운 문제다.
그런 동시에, 누군가 자리를 깔아주지 않으면 좀처럼 시작되지 않는 인연이기도 했다.
현대에 맞선 업체와 소개팅 앱이 난립하는 이유가 그것.
쉰일곱의 학자나 마흔일곱의 과부나, 그런 문제에서는 스스로 나서기 쉽지 않을 터였다.
그렇기에 본인들의 의사를 묻지 않고 추진하게 된 만남.
일단 사석에서 만날 기회를 마련해주면, 그 뒤에는 결코 어리지 않은 두 사람이 알아서 할 일이다.
이수아를 입양하는 문제 역시 마찬가지.
내가 나서도 되는 건 적당한 자리를 만드는 부분까지였다.
다만……
송은진 쪽을 생각하는 마음이 좋지 않았다.
사실은 모친만큼이나 그녀에게도 버팀목이 필요할 텐데.
[내담자 평가]를 보면, 주변에 티를 안 낼 뿐 여전히 우울증 약과 일상을 함께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런 점에서는 대수 역시 마찬가지.
송은진은 선의의 거짓말에 속아 고백을 퇴짜맞은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그건 그 녀석의 자격지심이었다.
자기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길 바라는 마음.
아름답지만 안타까운 부정적 감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밀어낸 채로는, 그 역시 다른 연애를 할 수 없을 터였다.
그러나 내가 뭔가를 해줄 수 없는 커플이다.
우선은 대수를 설득해야 이어질 수 있는 인연이니.
하지만 그 녀석 성격에 한 번 밀어낸 사람에게 다시 다가설 수 있을 리 만무하니, 슬픈 자격지심을 지워준다 해도 여전히 거리를 두려 하리라.
결국은 이대로 서로의 길을 걷게 될 두 사람…….
그렇게 답 없는 고민을 거듭하며 원룸에 도착했다.
현관까지 뛰어나온 대수는, 남의 속도 모르고 희희낙락 웃고 있었다.
“형님, 형님! 컴온! 이거 보셔야 됨다! 제휴팀이랑 미디어팀에서 정기연락 왔거든요? 대박이에요. PPL이 일곱에, 방송 섭외가 다섯인데…… 거기에 이게 있는 검다! 흐흐. 기냥 인방 역사를 뒤집어버리셨다, 이런 표현이 가능하겠네요.”
그 이야기가 큰 과장은 아니었다.
핸드폰과 가전제품과 게임을 포함한 일곱 개의 PPL 제안에, 여러 방송사의 다양한 게스트 섭외까지.
심지어 그 목록에 MBC뉴스가 끼어 있었다.
톱스타들도 좀처럼 나가기 힘들다는 뉴스 초대석에, 업계 최초로 스트리머를 출연시키려 한다는 이야기였다.
“이건 참, 터무니없는 일이네.”
“그럴 만도 하잖어요? 자극적인 거나 엽기적인 거 하나 없이 최단기간 8만 시청자 기록 세워버리셨으니까. 그리고 스타급 의원이 지지해주는 자선단체까지 차리셨죠. 이러면 보도국에서도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아이콘인 거지. 거기다가 MBC 안에서는 부장픽이라는 게 얼추 알려져 있지 않을까 싶네요. 그러면 이렇게 인플루언서 시대의 전환점이라는 프레임 잡고 초대하는 그림도 그려볼 만하죠. 흠…… 그렇게 생각하면 역으로 신태훈 CP가 먼저 제안한 일일지도?”
“그 사람이 날 위해서 그렇게까지 했겠니. 예능국이랑 보도국이 친근한 사이도 아닐 텐데.”
“형님도 참. ‘그렇게까지’ 하는 게 아니라, 윈윈이 될 만한 아이템임다. MBC뉴스 시청률 엉망이잖아. 그런데 퇴직하고 실버플랜으로 인방 해서 슈퍼스타 된 BJ가 나온다? 이러면은 채널고정 효과가 꽤 나올 수 있는 거죠.”
들어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뉴스는 중년층의 시선을 붙잡아야 하는 포맷.
또래의 중년이 인터넷상에서 스타가 됐다는 사실을 조명해주면, 뭐 흥미로운 거 없나 채널을 돌리던 손길이 잠시쯤 멈추는 효과가 생기기도 하리라.
거기에 평소의 품행이나 화제성, 주영주의 지지성명 등이 겹쳐 스트리머 최초의 공중파 출연이 가능해졌을 것이다.
인터넷방송을 시작하고 약 5주.
나는 어느새 이만큼이나 전진해 있었다.
상담이라는 서브 컨텐츠를 메인스트림으로 끌어올렸다.
1개월차에 이미 공중파 예능에 출연했고, 4월 별사탕 수익에서 모든 BJ 중 2위에 올랐으며, 이틀 전에는 김용식이라는 스타를 게스트로 불러내 8만 동시시청자를 달성했다.
아예 미디어를 외면하는 사람이 아닌 바에야 꼰마를 모를 리가 없어졌다.
그것으로 끝도 아니다.
내일이면 <트립크루>에 <골든아워> BGM을 곁들인 멘탈케어팀의 등장 씬이 예고편으로 삽입된다.
그 다음 주에는 대만편의 1회차분이 송출될 터.
뉴스 출연의 화제성에 힘입어 그 방송의 시청률까지 제고된다면, 그때는 정말 톱스타를 자부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글구 이제 진짜로 구독자 100만이 코앞입니다. 아까 80만 돌파 스샷 보내드린 거 보셨죠? 한국 유튜버 300위 안에 곧 들게 될 거란 얘기죠. 결과적으로 첫 달 광고수익만 한 7천 정도 잡히지 않을까 싶슴다. 거기다 PPL 수익까지 생각해보면…… 흐흐. 이미 월 억이라는 거죠.”
“실감이 안 나네. 그게 자연스러운 일인 거야?”
“뭐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죠. 밀리언유튜버 중에도 월 천 못 버는 애들 수두룩하니까. 하지만 형님은 다르다는 말씀. 매일 하나씩 올리는 영상들 평균조회수가 80만 가까이 됨다. 대만편은 벌써 300만 찍었고요. 거기서 90%가 거의 끝까지 시청한다는 거죠. 수익이 안 나올 수가 없지.”
“그건…… 네가 편집을 잘해준 덕분이겠구나.”
“헤헤. 그것도 없진 않지만요. 솔직히 논스키퍼블(반드시 끝까지 시청해야 하는 광고)만 좀 더 넣어도 바로 월 억이에요. 그냥 형님이 싫어하시니까 안 하고 있는 거지. 아무튼 축하드려요. 이제 진짜 슈퍼스타십니다. 뉴스까지 나가시고 나면 뭐…… 말 그대로 프통령 되시는 거지.”
대수가 다시금 프리TV 대통령을 논한다.
울돌목의 조류처럼 재빠른 변화의 흐름.
그 앞에서 나는 초연하고자 애썼다.
한산도에 오른 이순신 장군처럼.
이건 어디까지나 과정이다.
프리TV라는 작은 전투에서 승리한다 해서, 임진왜란보다도 더 난해한 세상과의 전쟁이 수월해질 리 없다.
흔들리지 말고 더 집중해야 할 때였다.
“그건 대수 네게 맡기마. 알아서 잘 조율해주고, 오늘 방송 내용은 별다른 거 없니?”
“아, 오늘. 형님. 그래서 말인데요, 오늘은 탐방 올 애들이 있슴다.”
“탐방? 아, 크루 애들 한번 띄워줄 때도 됐지.”
“아뇨, 걔들 말고요. 한태준이 공식적으로 중재 요청했어요.”
한태준은 BJ준태의 본명.
원래도 상위권 스트리머였지만, 탑급 여캠인 BJ세나와의 우결(우리 결혼했어요) 컨텐츠 이후 급격히 성장했다.
이제는 공식 열애만 7년차인 최장수 커플.
도중에 <인간극장>과 <랜예인>에 동반출연한 까닭에, 일반 대중 사이에서도 아는 이들이 많은 편에 속했다.
말하자면 프리TV BJ 커플의 상징 같은 존재.
TV스타로 따지자면 최수종 하희라 같은 느낌일 듯했다.
그 비유에 대수가 피식 웃더라.
“아, 형님 올드하시긴. 연예인 커플로 말하자면 원빈 이나영이죠. 옆에 세워두면 그 정도 클라스는 아니겠지만요. 아, 이거 되게 웃기던데. 이 드립 들어보셨어요? 2나 0 사이에 1이 비니까 one빈이랑 잘 어울리는 거래. 푸흐흐.”
“……연예인이라도 이름 가지고 놀리면 안 되지.”
“에이, 그게 뭐 대수라고. 전 이름드립 들어도 기분 안 나쁘던데요? 친구들이 맨날 대수롭지 않다고 그러는데.”
“그거야 친한 지인이니 용인해주는 일이잖니.”
“예 예, 대민스 크라이스트. 암튼 그런 ‘준나’ 커플이 최근에 갈등을 좀 겪었어요. 발단은 준태방 깡냥이 합방이었는데, 그게 안 좋게 보일 만한 구석이 좀 있었죠. 깡냥이가 너무 대놓고 들이대서요. 그걸 준태는 저쪽에서 일방적으로 한 일이라고 했고, 세나는 사심 품고 대본으로 지시한 거 아니냐고 몰아붙였고요. 이 과정이 다음날 커플방송 도중에 전개됐슴다. 사실은 그것까지도 뭐다?”
“대본이었겠구나.”
인터넷방송은 기본적으로 갈등을 필요로 한다.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을 헤쳐나가는 BJ들의 모습이야말로 흥미진진하게 시청을 이어갈 요인이니.
소위 ‘멍때리는 영상’ 부류라면 반복되는 양상 쪽이 매력적이겠지만, 인방 시청자들의 니즈는 다른 것이다.
그렇기에 다양한 대본이 추진된다.
공개 커플의 경우에는 불화야말로 필살기 같은 클리셰.
뻔히 대본이란 걸 알 수밖에 없을 만큼 흔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복되고 또 반복된다.
연애라는 것이 인류 최대의 관심사인 까닭이리라.
“정답임다, 형님. 뭐 흔한 수작이죠. 대본의 정석이랄까. 하여튼 한심하단 말이죠. 그런 거 말고 기본에 집중해야지. 진심 어린 소통으로 8만 시청자 묶어두는 형님 보면서 좀 배워야 돼요. 방송인이면 리얼리티를 지향해야지 말이야.”
대본은 없지만, 내 방송은 컨텐츠가 갈등을 담보한다.
종종 도저히 해결할 수 없을 듯한 사연이 올라오기에.
그 사연들을 꼰대 같기도 하고 성인 같기도 한 시각으로 해소해주는 모습이, 시청자들에게 갈등과 해소의 간접경험을 안겨주는 것으로 보였다.
대수가 날 지원하는 데 열의를 보이는 데에도 그런 이유가 조금쯤은 작용했으리라.
워낙 대본을 싫어하는 녀석이니까.
자기 소신과 다른 방식을 추진하는 게 즐거웠을 리 없다.
그런 사전기획 하나도 없이 즉석에서 나오는 소통으로도 재미요소를 만들어내는 내 방송 스타일이, 일종의 마스터피스처럼 여겨졌을 법도 했다.
“그런데도 탐방 제의를 받아들인 건, 예전에 도방하면서 홍보에 도움 줬던 일 때문이니?”
“예? 아, 아녜요. 그게 지금 실제가 돼버렸거든요.”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처음엔 대본으로 시작한 싸움이었는데, 자기들끼리 나름대로 리얼리티를 살리려고 실제로 싸웠던 기억들까지 끌어들여서 수위를 높였던 거지. 그러다가 세나가 레알로 빡쳐버렸대요. 결국은 대본이고 뭐고 결별 위기가 된 거죠. 전화로만 설명 들은 거지만, 거짓말 같진 않았어요.”
“저런…… 안타까운 일이네.”
“웃기기도 하고요. 아무튼 그래서 지금 중재요청은 실제라고 판단했어요. 형님이 이번에 은혜 한번 베풀어주시죠.”
은혜라니.
그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가능할지 모르겠다.
준태와 세나는 아직 라포도 형성되지 않은 인연.
게다가 연애라는 소재 자체가, 남이 나서서 중재해주기에 마땅치 않다.
기본적으로 연인 사이는 말 못 할 사정을 다수 담고 있다.
당사자들만 명확히 알 수 있는 깊은 이야기들을.
방송을 통한 상담이라면, 그 한계는 더욱 명확해진다.
본인이 스트리머라고 해서 편안하게 모든 이야기를 토로하지는 못할 터였다.
물론, 나는 그들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다.
[완전한 공감]과 [내담자 평가]를 통해서.
그렇지만 다른 문제들에 비해선 선택의 장벽이 높았다.
아무리 본인들이 중재를 요청했다곤 해도, 두 사람만 알아야 마땅한 세세한 사정들을 들여다봐도 괜찮은 걸까.
그런 고민은 금세 해소됐다.
방송 시작 후 20분도 되지 않아 찾아온 BJ세나가, 방치해선 안 될 것 같은 목소리로 간곡히 호소했기에.
[아…… 깡냥이님이요? 그건 뭐…… 괜찮아요. 대본이든 아니든 방송 재미 생각하면 막 쳐낼 수는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래서 그건 이해해요. 근데 자꾸 한숨 나오고 힘든 건, 그래서가 아니에요. 이제는…… 저만 좋아하는 것 같아요.]
「아 ㅠㅠㅠㅠ」
「언니맘알아여ㅠㅠㅠㅠㅠㅠㅠㅠㅠ」
“세나님…….”
[아! 저, 상담이니까 본명 부르실래요? 시내예요.]
“압니다. 그럼 이제부턴 시내 씨라고 부르지요.”
[아, 기억하고 계셨구나. 고마워라. 히히.]
본명이 도세나에 닉네임이 도나쓰인 내 네임드 시청자와는 반대로, BJ세나의 본명은 정시내다.
같은 초성에 좀 더 세련된 닉네임으로 ‘세나’를 택했다더라.
6년 전인 스무 살 무렵에는 본명으로 프리TV 최연소 여신 칭호를 들었기에, 시청자들 역시 그쪽이 낯설지 않을 터였다.
“그럼 돌아가서, 시내 씨만 좋아하는 것 같다고요.”
[네. 이거 근데…… 꼰마님, 태준이는 언제 들어와요?]
“여덟 시에 탐방 오기로 했습니다. 그때까지는 시내 씨 시간이에요.”
[그렇구나……. 사실 저 중재 받기로 했던 거 취소하려고 했어요. 처음엔 지푸라기 잡는 마음으로 부탁했던 건데…… 이젠 진짜 별수 없을 것 같아서요. 보고 싶어서 전화했는데, 저한테 그러는 거예요. 꼰마님이 중재해주기로 하셨으니까 그때까진 따로 얘기하지 말자고요. 걔는 이제 방송밖에 안 보이나봐. 저랑 연애한 것도 화제성 때문이었나 싶고…… 지금도 좋긴 좋은데, 믿음이 안 가요. 진짜 헤어질까봐.]
「ㅠㅠㅠㅠㅠㅠㅠㅠ언니힘내요」
「준태 도랏 ㅠㅠ」
「세나님 파이팅!!!! ㅠㅠ」
「그딴놈이랑 왜만납니까 ㅠㅠㅠㅠㅠ」
일방적인 옹호가 좋은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마음을 울리는 토로가 대본일 리는 없겠지.
[내담자 평가]를 읽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정시내가 진심으로 이별을 생각하고 있음을.
매년 30만의 커플이 결혼하고 10만이 이혼하는 시대.
아직 결혼에 이르지 않은 ‘준나’ 커플의 결별은, 사실 커다란 문제는 아니다.
만나고 헤어지는 일은 수백만 청년들의 일상이니.
본인이 결별을 원한다면 그렇게 둬도 무방할 터였다.
다만 그들의 직업적 특성이 미래를 염려하게 만들었다.
양자의 경력을 합하면 무려 17년에 달하는, 현존 최장수 스트리머 커플이다.
이별을 감행한다고 정말 행복해질 수 있을까.
평범한 연인들처럼 스마트폰 사진첩 정리한다고 끝날 일이 아닐 텐데.
함께 진행했던 모든 방송의 다시보기와 하이라이트를 삭제한다고 해도, 그들의 역사를 시청한 수십만 명이 남는다.
그 정도야 방송 짬이 있으니 극복할 수 있으려나.
하지만 새로운 연인을 만날 때마다 드는 불안감을 어찌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름만 검색해도 나오는 과거 연애사를 지워내지 못한 채로는, 사랑이 클수록 오히려 마음이 어두워질 터였다.
그렇다고 해서 억지로 관계를 유지할 이유는 없겠으나……
상대의 마음이 떠난 것 같다는 짐작만으로 헤어지겠다니.
지나치게 감정적인 선택이 아닐까 싶었다.
적어도 확인은 해봐야지.
정말 마음이 변했는지 아닌지.
이제는 어떻게 해도 행복해질 수 없는 것인지, 그게 아니면 사소한 몇 가지 변화만으로도 달라질 수 있을지.
그것도 확인하지 않은 채 헤어진다면, 둘 모두에게 지나치게 커다란 후회로 남을 터였다.
나라면 진실을 확인해줄 수 있다.
두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그 호수의 진짜 색깔을 묘사해줄 수 있다.
그게 청춘의 페이지들이 찢기지 않도록 도와줄 것이다.
또는, 더욱 깔끔하게 찢을 수 있도록 해주거나.
그런 생각을 하며 정시내의 기억들을 들었다.
당황스러웠던 첫 탐방과, 흥미진진했던 첫 합방과, 뭐 하나 편하지 않았던 우결 컨텐츠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 점점 빠져들었던 나날들.
7년의 세월이 어제 일처럼 흘러나온다.
중간중간 아픈 갈등들도 있었지만, 적어도 서로의 마음을 의심하지는 않던 나날들로 보였다.
사실은 그것이 연애의 가장 중요한 요건이다.
믿음.
비록 마음을 아프게 만드는 일도 생기곤 하지만, 결국은 함께일 것이라는 미래의 공유.
그 확신이야말로 전혀 다르게 살아온 두 사람의 우주를 합치시켜준다.
그렇지만, 이야기는 곧 파경에 다가섰다.
나이가 들며 어딘지 생각의 무게추가 바뀐 한태준.
그리고 믿을 사람 없는 세상에서 초심 그대로 오직 서로를 위해 살고 싶었던 정시내.
마음의 비중이 물과 기름처럼 달라지자, 싸움은 잦아지고 밝은 웃음은 드물어졌다고 했다.
“깡냥이님이랑 합방한다는 것도 저는 나중에 알았어요. 상의도 안 하고 혼자 결정한 일이지만, 그래도 다 우리 미래 위한 거라고 생각해서 참았거든요? 근데 그 방송 몰래 보는데…… 너무 행복해 보이는 거야. 그 어린 여자애랑 게임도 하고 스킨십도 하면서 노는 게, 저랑 처음 연애할 때처럼 즐거워 보이는 거예요. 나한테는 이제 안 보여주는 표정을 다른 여자한테 그렇게 보여주고 있으니까, 전 진짜…… 아, 왜 이래. 미쳤어 진짜…… 죄송해요. 저 잠깐만…….”
그때의 심경이 재현되었는지 울컥 눈물을 보인 정시내.
PIP 화면을 통해 그녀의 등을 보며 생각했다.
사랑이 깊으면 시름이 된다 했던가…….
아무래도, 오늘만큼은 큐피드가 되어야 할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