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
38장 - 상담사와 아빠 (3)
[부장님, 너무해요. 제가 엄마아빠 얘기 할 때마다 그런 생각 하셨던 거죠? 사실은 제가 문제라고 생각하셨던 거죠?]
아침부터 전화해서 칭얼거리는 아이의 이름은, 송성희.
나를 아빠라 부르며 따랐던 프리월드의 대리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 역시 치환이란 방어기제의 일종이었을 테니, 블루벅이 연상되는 측면이 있기는 했다.
내 심리라는 측면에서는 전혀 달랐지만.
“그런 거 아니야. 그때는 다른 생각을 했지.”
[다른 생각? 무슨 생각이요?]
“내 딸도 이렇게 생각하면 어쩌나. 잘해준 거 하나 없는 아빤데, 혹시 미워하면 어쩌나. 네 얘길 들을 때마다 그런 고민을 많이 했었어. 그래놓고 치킨 한 번 사 간 적이 없었지만.”
[아, 나빴다. 치느님 좀 사 가시지.]
“그래. 그런 후회 속에서 많이 고민했던 내용이야.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야 내 실수들이 명확하게 보이더라. 블루벅 내담자한테는 그래서 부탁했던 거야. 충분히 좋아질 수 있는 가정이니까, 모쪼록 화해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아하, 그런 거였구나? 근데…… 암튼 저 찔렸잖아요.]
“그럴 것 없어. 송 대리 아버지는…… 다르잖아.”
[흠. 그것도 야수파 아니에요? 저한테만 들으신 건데. 그 사람 얘기도 직접 들어보셔야 입체파죠. 큐비즘, 쫘아.]
야수파와 입체파 얘기까지 언급한다는 건, 어제 방송을 놓치지 않고 전부 봤다는 뜻이다.
프리VR 런칭이 코앞으로 다가와 연일 야근이라 했는데.
그런데도 밤늦게 들어와서 네 시간짜리 다시보기를 전부 다 봤다는 얘기.
참 사람 미안하게 만드는 녀석이었다.
“송 대리. 잠이 보약이야. 내 방송은 하이라이트로 봐.”
[시른데 시른데 크크.]
“……송 대리도 시른데 빌런이었어?”
[헤헤. 채팅방 유행어는 착실히 익혀놔야, 야근 시즌 지나고 아싸 안 되죠. 아무튼 아빠, 오늘 스승의 날인데, 저 이따 끝나고 놀러 갈까요? 언니랑 셋이서 맥주 한 잔?]
“될 법한 소리를 해. 어버이날에 오고 며칠이나 지났다고.”
[힝입니다! 아빠는 오늘 뭐 할 건데요?]
“나야 학교지. 스승의 날이 공휴일은 아니잖아. 그건 그렇고, 팀 분위기는 어때?”
[난리 났죠! 신인BJ가 평일 8만 찍은 게 말이 되냐고요. 이사님들부터 말단 사원들까지 완전 축제 분위기 됐죠.]
“……그게 아니라 팀 분위기 말이야. 민 차장하곤 괜찮아?”
[흐음. 나쁘지 않아요. 그렇게 일 열심히 하는 사람인 줄 처음 알았잖아. 평소엔 정치질만 하던 사람이, 기한 다가오니까 완전 광전사처럼 진두지휘를 하네요. 덕분에 저흰 편해요.]
그야 그럴 법도 한 일.
아빠라는 종족의 특성이다.
시각장애인인 딸을 위한 플랜의 일환이니, 광전사가 아니라 자살특공대라고 하더라도 마다하지 않으리라.
그렇게 설명해줄 수는 없는 이야기지만.
민원식이 감추고 싶어하는 까닭만은 아니다.
송성희의 부친이 다섯 번이나 외도를 한 인물이기에.
딸을 위하는 마음에 참고 또 참은 모친의 인내가 아니었다면, 이미 이혼도장이 마르고도 한참 지났을 터였다.
그 극단적인 차이가 못내 마음을 괴롭혔다.
그도 처음부터 그런 사람은 아니었을 텐데.
사랑스러운 딸의 재롱에 세상을 다 가진 듯 웃던, 평범하고 다정한 아빠였을 것이다.
그런 남자가 일그러진 건 대체 무슨 이유였을까.
송성희에게 그 질문을 꺼내지는 못했다.
언젠가 진지하게 상담을 청한다면 성실히 응답하겠지만……
내 쪽에서 다가서기는 아무래도 곤란했다.
그녀는, 내게 너무 가까운 사람이니까.
타인의 삶에 개입한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대상이 친한 지인일 경우에는 그게 더욱 어려워진다.
어쩌면 그간의 모든 관계가 깨어질지도 모르니.
그 위험을 감수하고 간섭할 만큼 위기일발의 가정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송성희의 집안은 그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그녀라면 나를 꼰대라고 욕하지는 않으리라.
그러나 소통의 다리에서 몇몇 교각(橋脚)이 이탈하는 일은 막을 수 없을 터.
어쩌면 소중한 인연 하나를 잃게 될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녀의 억측이 정답일지도.
블루벅의 직면은 사실 그녀를 위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
야근을 하고서도 내 방송을 놓치지 않는 애청자니까.
간접적인 방식으로나마 조금쯤 다른 관점을 생각해보게끔 유도하려는 마음이, 전혀 없었다고는 할 수 없을 듯했다.
그리고 아마……
나는 한효준 역시 염려하고 있다.
만에 하나라도 그가 수아에게 좋지 못한 아빠가 된다면.
그럴 리 없다고 믿지만, 절대 아니라고도 장담할 수 없다.
그때도 나는 용서를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고맙고 고마웠던 스승에게 분노의 칼날을 돌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편집증적으로 좋은 아빠 매뉴얼을 주입하려 한 데에 그런 이유도 있었던 것 같다.
무의식의 신비한 작용.
스스로는 인지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다각도로 상황을 검토해, 왜인지도 모르고 강박에 빠지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는 그들이 안온한 가정을 꾸리기를 열망한다.
이제는 대체할 수 없게 된 인연들이기에.
스승의 날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
“뭐야? 아침부터 표정이 왜 그런 건가?”
“……별일 아닙니다.”
한효준은 별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면서도 은연중에 내 눈치를 살핀다.
귀여운 스승이, 뭔가 중요한 얘길 꺼내려는 듯했다.
“흠…… 이봐. 생각을 해봤는데 말이야. 아무래도 무리겠지?”
“뭐가 말씀이십니까?”
“홀로 사는 남정네가 다 큰 여자아이를 입양한다는 것 말이야. 주변에서 충분히 오해할 수 있는 그림 아닌가?”
“……교수님의 경우엔 그럴 일이 없겠지요.”
“내가 학과장에 협회장에, 그런 사람이라서? 하지만 세간의 시선이란 게 꼭 그렇지만은 않아. 오히려 고학력자일수록 변태 성범죄자가 많잖나? 이건 내가 생각을 좀 성급하게 한 감이 있어. 아무래도 재고해봐야 옳을 것 같네.”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렇게 오해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정말인가? 확실한 게야? 이유가 뭔가?”
당신 외양을 보면 어떻게 생각해도 70대라서 그렇다……
라고 말하는 건 지나친 실례겠지.
본인의 걱정을 무마하기엔 부족할 수도 있고.
잠깐 고민하다가, 다른 방향으로 물꼬를 틀어봤다.
“일전에도 말씀드렸던 건입니다만, 맞선 어떠십니까?”
“이 자가? 왜 내 상투를 틀려고 안달인 겐가?”
“좋은 인연이 있어서요.”
“좋은 인연이 있는지 없는지는, 내가 판단할 문제야.”
“제자로서 그 정도 간섭은 괜찮지 않습니까?”
“허…… 참, 미치겠군. 한동안 뜸하다가 또 이 얘길 시작하는 건, 수아 때문인가?”
“그것도 있지요. 엄마까지 계신 가정이라면 더더욱 안정적일 테니까요. 거기에 예쁘고 착한 언니까지 있다면-”
“뭐어! 딸 있는 여자와 선을 보라는 겐가!”
“금상첨화 아니겠습니까? 단번에 세 명의 가족을 맞이하실 수 있습니다. 세간의 시선을 염려할 이유도 없어질 테니, 논리적으로 그보다 더한 행복은 없을 겁니다.”
“이 자가 정말이지…… 흥. 스승을 놀려대기는.”
반쯤 장난으로 건넨 말이긴 했지만, 문득 궁금해졌다.
송은진의 모친은 어떻게 생각할까.
열 살 연상이긴 하지만 딸린 식구는 없고, 세간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는 석학에, 곧 TV에서도 활약할 인물.
이 정도면 꽤 괜찮은 재혼 자리가 아닐까?
“거! 진지하게 고민하는 표정 짓지 말고, 썩 나가!”
“죄송합니다. 일단 이거, 받으시지요.”
“뭔가? 웬…… 선물이야?”
“스승의 날이잖습니까.”
“어허! 자네 김영란법도 모르나? 대학원 면접 앞두고 이런 짓을 하다니. 비공개적으로 주면 100원짜리여도 안 되네!”
“열어보시지요.”
상자에서 나온 건, 물론 정가를 매길 수 없는 선물.
아내가 쓴 지수의 육아일기다.
그것을 일일이 복사하고 엮으니 거의 200페이지가 나왔다.
한효준의 표정이 일그러진 것도 당연했다.
“아니…… 정말 왜 이러나? 아직 그 E북도 다 못 봤단 말이야. 게다가 이건 어린이의 육아일기 아닌가? 장성한 처녀를 입양하는 일과 무슨 연관이 있다고 이러는 게야.”
“수아는, 육아일기가 없습니다.”
그 한마디로 얼추 짐작이 된 모양.
한효준은 굳은 얼굴로 침음했다.
“음…… 그런 건가.”
“예. 친모는 일기를 쓸 만한 처지가 아니었다고 하고, 이후로 전전하게 된 친척집들은 전혀…… 그랬지요. 수아에게 있는 건, 열네 살에 지금의 보육원에 들어온 뒤로 생활지도원들이 써준 성장일지뿐입니다. 딱 지수 나이부터지요.”
“그래. 그렇군.”
“입양은 마음으로 낳는 일이라지 않습니까. 한 아이가 어떻게 태어나 어떻게 성장하게 되는지, 직접 보지는 못하셨지만 마음으로 보실 수는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흠. 그래. 좋은 생각이야. 그래.”
일기를 쭉 훑어본 뒤, 한효준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 부럽구만. 자네 같은 아비를 둔 아이가 말이야.”
“그렇지는 않습니다. 아내가 훨씬 훌륭하지요.”
“허허. 두 배로 부럽구만.”
“……교수님. 가끔은 아빠라고 부르셔도 괜찮습니다.”
“응? 어허. 떽! 썩 나가!”
쫓겨난 뒤에야 실수였음을 깨달았다.
한 대 맞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농담으로도 지나친 말을, 진심으로 해버리고 말았으니.
그저 조금이라도 편해질 수 있길 바랐을 뿐이었는데.
머쓱한 심정으로 내려온 교실에는 민재하가 있었다.
수업 시작까지는 20분도 넘게 남은 시점.
남들보다 한참 더 일찍 학교에 나오는 것은, 민원식의 출근시간에 맞춰야 하는 까닭일 터였다.
“재하야.”
“어? 아, 삼촌!”
민원식과 친구가 된 뒤, 민재하의 호칭은 삼촌이 됐다.
다른 아이들이 하듯 오빠라고 부를 수는 없는 탓.
그렇지만 말에 담긴 목소리는 어떤 오빠보다도 따뜻하다.
아빠의 친구라는 관계가 무척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어제 삼촌이 말이 많아서 힘들었지? 네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막 떠들고 말았어. 고생이 참 많았다.”
“헤헤. 괜찮아요. 슈아 씨 자막까지 적어봤어요.”
슈아는, 나레이션을 맡고 있는 이수아의 닉네임인데.
따발총처럼 떠든 내 말에 그 나레이션까지 옮길 수 있다니.
분당 1000타를 친다더니 과연……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아연해졌다.
수아는 어땠을까.
보육원 아이들에겐 어땠을까.
내담자 한 명에 집중하느라 떠올리지도 못했던 그 아이들은, 아빠를 죽이고 싶다는 블루벅의 사연을 보면서 대체-
“슈아 씨, 처음으로 의견을 표출했죠.”
“의견을……?”
“네. 아직 못 보셨어요? 하긴, 많이 바쁘셨겠다. 어제 블루벅님 사연 듣고 나서 그랬어요. 먼저 결혼한 사람들 조언 듣고 결혼 결정하는 것처럼, 가족이랑 연 끊는 것도 가족 없는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고 결정해야 되지 않을까요, 이렇게요. 부모님 여의고 생전의 후회로 눈물 펑펑 흘리는 사람들 보면 좀 달라지지 않을까…… 그렇게 말했던 거예요.”
수아답지 않게 사적인 의견을 길게 삽입한 모양.
그렇지만 그 내용은 수아답다.
가까운 것들은 뭐든 잃고 나서야 분명해진다.
그걸 세상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내 나레이터에게, 멀쩡히 살아있는 부친을 마음속에서 죽이려 드는 블루벅이 답답하게 느껴졌을 건 당연지사였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욕을 하는 게 더 당연한데.
부모 없이 살아본 적도 없는 주제에 행복한 고민에 빠져서 죽이네 살리네 하고 있다며 비난해야, 더 적절했을 텐데.
그러지 않은 부분이 수아다운 것이다.
저마다 사정이 다르다는 것을 아는 아이니까.
나 역시 그 마음에 보답해야 할 터였다.
그렇게 다시금 한효준의 장가 플랜을 고민하고 있는데, 문득 민재하가 고개를 떨궜다.
“재하야?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뇨. 헤헤. 그냥, 엄마 생각나서요. 엄마 살아계실 때까지는 저도 좀 비슷했던 거 같아요. 블루벅님이랑요.”
“아…….”
“아빠는 맨날 뭐 연구한다고 잘 놀아주지도 않고 집에도 잘 안 들어왔고요, 휴일에도 그냥 쇼파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했어요. 그래서 저 사람 내 아빠 맞나…… 그런 느낌이 들었던 것 같아요. 엄마 돌아가시고 나서 아빠랑 둘이 살게 되고, 그때 처음 알았어요. 제가 시각장애가 있으니까…… 앞이 거의 안 보이니까, 그거 극복하게 해주려고 연구보고서 만들고 기업 찾아가서 투자 요청하고 그러느라…… 잠도 거의 못 자고 뛰어다녔던 거래요. 나 때문에 자기 몸 상해가면서 그렇게 일하고 있었는데, 정작 저만 몰랐던 거예요. 그게…… 어제 사연 들으면서 자꾸 생각이 났어요. 블루벅님도 비슷했을까요?”
……비슷하다고 할 수 있으려나.
답하기 곤란한 질문이라, 그저 웃어줬다.
그리고 생각했다.
프리월드에 들어와 보인 민원식의 모든 행적에 대해서.
출세지향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능력은 있으나 지나치게 정치적인 방향에만 집착해서, 저렇게 사는 게 행복할까 혀를 찼던 기억도 있다.
그렇지만 그건 너무도 타자화된 생각이었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VR 개발은 쉽지 않은 사업이다.
그 정도의 기술력이 있다면 메인스트림인 비장애인들에게 집중하는 것이 훨씬 수지맞으니.
어중간한 대학의 박사 학위만 가진 민원식의 투자 요청은 번번이 무산됐을 것이고, 그 와중에 한국의 신생 기업인 프리월드만이 작은 관심을 보여줬던 것이리라.
그가 그토록 사내정치에 몰두했던 것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부모가 되면, 사람은 자식을 위해 살게 된다.
남들이 뭐라고 비난하고 눈총을 주건 신경 쓰지 않고, 오직 후대에 더 나은 미래를 주고자 자신을 버려가며 일한다.
사실 어리석은 행동이다.
어떤 마음도 표현하지 않으면 전달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가족이기에 전달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무한정의 노력을 경주할 뿐.
그것이 지나치게 일방적인 신념인지라, 기대가 무산됐을 때 외벌이 가장들은 쉽게도 배신감에 몸부림치게 된다.
아마 그것이 아빠의 사랑이 변질되는 기작이리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던 아이가, 자신을 거의 남으로 치부하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
애정이 컸던 만큼 반동 역시 커진다.
때로는 그 부정적 감정이 외도나 폭력으로 이어지게 될지도 모른다.
한심하고 안타까운 비화.
이유가 어떻든 잘못은 잘못이니, 옹호해줄 여지는 없다.
그러나, 내가 그들을 어떻게 비난할 수 있겠는가.
그토록 소중한 아이에게조차 외면받으면서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려온 그들을, 어떻게 한심하다 말할 수 있겠는가.
그저 사랑이 지나쳐 독이 되었을 뿐인 것을.
사랑스러운 존재들이다.
나 역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
내 소중한 스승 역시도, 그렇게 되길 바란다.
그런 생각으로 송은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에? 엄마 소개팅이요? 우와! 좋겠다! 할래요, 할래요!]
어떻게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는 만남이지만.
새로운 아빠의 탄생을 기원하며, 주먹을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