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
35장 - 고민하는 상담사 (2)
“5만 6천……! 진짜 쭉쭉 올라가네요. 이대로 10만까지 가는 검다. 형님, 슬슬 보육원 분들이랑 해서 미담 풀죠.”
진대수는 때때로 눈에 욕심의 불을 켜곤 한다.
주로 내 방송의 흥행과 관련해서.
한동안은 사촌인 프리월드 대표에게 착한 방식으로도 성공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싶은 모양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즘 보면 꼭 그런 느낌만은 아니었다.
“대수야. 넌 내가 더 유명해졌으면 좋겠어?”
“엥? 당근이죠. 형님은 더 유명해지셔야죠.”
“그래…… 나도 그러길 바라고는 있는데, 궁금하네. 왜? 유튜브 수익 때문에 그러는 거야? 빨리 집 장만하려고?”
“그거야 뭐 운명적으로 따라오는 거고요.”
“그러면 왜 그렇게 애쓰는 거야?”
“아니 그냥, 형님 잘되시면 좋으니까.”
“그 이유가 뭘까?”
“그건…… 제가 형님을 사랑하기 때문이죠!”
너스레를 떨어 빠져나가려는 태도다.
그야 내게 인간적인 호감이 큰 것도 사실이겠지만, 그렇다고 자기 생활도 팽개치고 헌신하는 것이 쉬울까.
열정적인 추동은 호감만으로는 잘 나오지 않는다.
그보다는 역으로 부정적 상상에서 우러나는 경우가 많다.
아마도, 어디선가 무너져갈 내담자들을 위해서.
생각해보면 대수는 늘 그래왔다.
아직 미처 준비도 안 돼 있었던 나를 우울증에 시달리던 정보람 앞에 대령했고, 첫 초대석에는 랜덤 선정이라는 원칙을 어기고 상태가 안 좋은 도세나부터 불러들였다.
그 의도를 이제는 이해할 것도 같았다.
“은진이 때문이야?”
“아, 형님도 참. 걔랑 전혀 노상관이거든요?”
“흠…… 그래.”
로맨스스캠설이 떠돈 뒤로, 송은진은 오래 우울증을 앓았다.
그 모습을 곁에서 지켜본 게 대수.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었으리라.
그렇지만 쉬운 일이 아니어서, 자칫 괴로움을 더하지나 않을까 염려하며, 아무 말도 못 하고 바라만 봤겠지.
그때의 막연한 감각들이 대수의 원동력일 것이다.
우울증에 대한 적의가 선한 추동을 만든 것.
순식간에 내담자들의 기분을 바꿔주는 나를 보면서, 이 사람을 더욱더 유명해지게 만들자고 결심했을 법도 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고마운 마음이지만, 방식이 조금 곤란했다.
“대수야. 착한 아이들이 살기 힘든 세상이야. 힘들어하고 있을 내담자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나는 정말 유명해져야지. 그렇지만 그 길에서 보육원 미담은 좀 빼고 싶다.”
“엥? 왜요? 형님, 그거 진짜 대박 마케팅인데! 아, 애들이 불편하게 생각할까봐 그러시는 거죠? 에이, 그렇게 생각하실 필요가 없슴다. 세상 다 기브앤테이크잖아요.”
“그래서 하는 말이야. 내가 해준 게 없어서.”
“아니, 해준 게 왜 없어요? 폰 줘, 용돈 줘, 에버랜드 데려다줘, 이거 뭐 거의 아빠처럼 잘해주고 계시잖아요?”
“그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걸 못 주고 있잖아. 그런 주제에 무슨 자신감으로 미담입네 하면서 뿌리겠니.”
“아니 그거야 형님은 뒷짐 지고 계시면 제가 물밑에서 바이럴마케팅을 하는 거니까, 신경 안 쓰셔도 된다니까요?”
“신경이 쓰인다. 내 생각은 변함없어. 그런 미담은 패스야.”
고민할 이유가 없는 일이었다.
아이들을 홍보의 수단으로 쓰는 것이 옳은가 하는 도덕적 성찰 이전의 문제.
그저 컴공인으로서 받아들일 수 없을 따름이었다.
정말 필요로 하는 것은 주지 못한 채 자기만족이나 다름없는 물질적인 수혜만을 베풀면서, 그것을 자랑하는 방식에.
“으…… 정 그러시다면 할 수 없지만요.”
“이해해줘서 고맙다. 그럼 정리부터 할까? 접근성방송 쪽은 어땠어? 지현이랑 수아가 잘해줬어?”
“내용적으로는 괜찮은 것 같던데요? 지현 씨 그분 타자 진짜 빠르더라고요. 시스템상으로도 잘 구현이 돼서, 진짜 소리 끄고 봐도 크게 지장은 없겠어요. 근데 나레이션 쪽은…… 수아가 별 탈 없이 잘해주긴 했는데, 사용자가 별로 없네요. 새 기능 생겼다고 하니까 호기심으로나 한번 건드려본 느낌? 인방이랑 팟캐스트는 시청자층이 좀 갈리니까 그런 거 같어요. 이거 빨리 소문이 나야 되는데. 아, 이거 말씀 안 드렸었나? 나름 중요한 포인트임다. 한번 들어보실람요?”
청각장애인들을 위한 동시자막과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나레이션 옵션이었지만, 대수의 창발적인 시각은 좀 달랐다.
공공장소에서 이어폰 없이도 볼 수 있는 인방.
또는, 폰을 주머니에 넣어둔 채 귀로만 들어도 되는 인방.
그 향상된 접근성 요소를 홍보함으로써, 이어폰을 휴대하지 않은 이들이나 라디오 및 팟캐스트 유저들까지 생방송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는 분석이었다.
그게 내게는 꽤 감명 깊은 발상이었다.
문화를 소비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
장애인은 배려해야 되는 대상이니 은혜를 베푼다는 사고방식이 아니라, 비장애인들 역시 때때로 그들처럼 감각을 닫아야 할 때가 있음을 인정하는 일이다.
그것이야말로 미래형 미디어의 시작이 아닐까 싶었다.
“알겠다. 소문을 내려면, 어떤 방식이 좋을까?”
“옙. 그래서 생각을 해봤는데요, <트립크루>가 수요일 출국이잖아요? 어머나 세상에, 딱 시청자 초대석 하는 날이네? 마침 옆에는 한효준 이용덕 조명기 이런 전문가들도 있네? 그러면 아예 야방으로 출연진 한 명쯤 끌고 가도 괜찮겠네? 그때 그 연예인한테 자막이랑 나레이션 옵션 설명해주고 한번 해보라고 시켜보면? 이건 홍보 제대로겠죠?”
장난기 넘치는 말투에 뼈가 담겨 있었다.
연예인의 체험담은 장기적으로 수만 명에게 알려진다.
그게 김용식 정도 되는 개그맨이라면, 차원이 다른 파급력이 나올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만 그런 만큼 활용하기 힘든 아이디어였다.
“대수야. 교수님들이나 나는 깜짝게스트로 나가는 거라서 생방 시간을 낼 수 있는 거고, 다른 출연진은 그렇지 않아. 여행 예능이잖아. 관광지 가서 예능 분량 뽑고 해야지. 1박2일 일정에 2주 분량 내야 되는데, 네 시간이나 빼앗을 순 없어.”
“아니, 뺏자는 게 아니에요. 콜라보죠. 우리 시청자가 벌써 6만을 앞두고 있잖겠슴까? 이런 대형 인방에 자기 프로 홍보할 기회가 흔하겠어요? 솔직히 내가 PD였으면 이미 무릎 꿇고 부탁했다. 형님이 먼저 제안해주시면 덥석 물걸요?”
그 확신 가득한 말에 일단 얘기는 해보겠다고 답했지만, 아무래도 불가능한 일 아닐까 싶었다.
보통 공중파 PD들은 인터넷방송을 얕잡아보곤 하니.
프리월드 미디어팀 업무를 지원하며 여러 차례 느꼈던 현실의 장벽이었다.
그렇지만 유종찬 PD는 대수의 예측에 부합했다.
이튿날 아침의 통화에서, 목소리를 확 바꾸며 기뻐한 것.
[야…… 이거 괜찮은데요? 꽤 재밌게 뽑히겠는데.]
“정말입니까? 이게…… 그렇게 될까요?”
[예. 콜라보가 2020년 상반기 트렌드니까요. 관광지 야방에 참여하는 걸 찍어서 본방에도 내보낸다…… 양쪽에서 시청자 파이를 키우는 효과가 나올 수 있겠는데요.]
생각처럼 그렇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긍정적인 대답을 얻을 수 있었다.
서로의 수요가 맞물렸다면 더 고민할 이유는 없겠지.
그렇게 홀가분한 마음으로 집을 나설 무렵이었다.
현관문 앞에, 음울한 그림자 하나가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바울아. 몇 호인지 어떻게 알았어?”
“어제 들어가실 때 센서등 켜지는 걸 봤죠.”
“지켜보고 있었어? 왜…… 직접 물어보지.”
“실례인 것 같아서요.”
“이게 더 실례야. 영락없이 스토커잖아.”
“죄송합니다. 이젠 안 그럴게요.”
“바울아. 궁금한 건 질문해서 알아내는 게 예의야. 알겠지?”
“네. 아무튼 오늘도 제가 운전하겠습니다. 선생님께서 직접 운전해서 학교로 가시다니, 안 될 일이죠. 앞으로 절 운전기사라고 생각해주세요. 마침 집도 가깝거든요.”
“집이 어딘데?”
“그냥 근처요.”
전혀 근처가 아닌데 대충 둘러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엿보기와 거짓말로 일관된 삶의 방식은, 어쨌든 장기적으로 상담을 통해 도와줘야 할 미래의 과제.
당장은 그런 것보다 현재가 문제였다.
그가 주차장의 내 차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어제는 일요일이었지만, 현관문 앞까지 찾아온 오늘은 월요일인 까닭에.
“아빠 아빠, 나 이거 모자 쓸……?”
뒤따르던 딸이 낯선 남자를 발견하고 멈칫한다.
손바울 역시 비슷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딸을 학교에 데려다주리라곤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손바울에겐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나를 평범한 아빠들과 구분 지어 생각하는 것도 있지만, 그 이전에 본인이 데려다줄 부모 없이 살아온 인생이니까.
그래서인지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흠…… 선생님,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거기서 다시금 NBSC에 감사하게 됐다.
며칠 전의 나라면, 혹시 이 괴상한 청년이 나중에 내 딸에게 해코지라도 하지 않을까 싶어서 전전긍긍했으리라.
그렇지만 당황한 손바울을 보는 마음이 가볍다.
[완전한 공감]을 통해 그가 어떤 인간인지 거의 정확하게 알게 된 까닭.
“바울아. 여기까지 왔는데, 운전 좀 부탁하마.”
“어…… 그래도 될까요?”
“왜? 뭔데? 이 아저씨 누군데? 아빠 직원이야?”
“그런 거 아냐, 지수야. 아빠랑 같이 공부하는 대학생.”
“아 그래? 알았어.”
딸은 손바울에게 직접 말을 걸지는 않았다.
보통은 연장자 쪽에서 인사를 건네는 게 일반적인 까닭.
그렇지만 손바울 역시 말없이 돌아서서 가버린다.
“……왜 저래? 저 아저씨 이상해.”
“이상하지만, 나쁜 아저씨는 아니야.”
“이상한 게 나쁜 거잖아.”
“그렇지 않아, 지수야. 다른 거지.”
“아 몰라. 빨리 가. 나 오늘 지각하면 안 돼.”
손바울이 운전대를 잡은 덕분에, 내 자리는 뒷좌석이 됐다.
늘 룸미러로 보던 아이와 나란히 차에 타는 기분이 묘했다.
정작 딸은 핸드폰에 정신이 팔려 있었지만.
“아 진짜. 킥. 뭐래.”
“왜? 뭐 재밌는 얘기 봤어?”
“아니, 수아 언니 때매. 아침에 교복에 국물 엎었는데, 혹시 냄새 날까봐 페브리즈를 거의 한 통 썼는데, 그게 너무 독해가지고 친구들이 향기의 여신이냐고 뭐라 그런대.”
“……지수야, 웃을 일이 아니잖아.”
“아니이, 수아 언니가 웃기지 않냐고 말해준 거거든? 아빠 진짜 너무 맨날 진지한 거 사람들이 뭐라고 안 해?”
개인적으로는, 너무 진지한 건 없다고 생각한다.
갈아입을 교복 셔츠가 없어서 빨아야 할 옷을 억지로 입고 나가야 하는 이수아의 현실 앞에서는, 특히나.
그렇지만 때로는 딸을 본받을 필요도 있을 듯했다.
스스로가 해학으로 웃어넘긴 일을 굳이 진지하게 파고드는 건, 역으로 괜한 불만을 심어주는 일일 테니.
이수아는 잘 견디고 있다.
평범한 가정에서라면 유세라도 떨듯 짜증을 부려도 이상하지 않은 고3 시기에, 보육원의 수많은 동생들을 보살피며, 그 본인의 어려움들은 그저 웃어버리고 있다.
참 아름다운 노력.
그 문제에 나서서 대신 고민해줄 필요는 없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손바울은 조금 달랐다.
용원중학교 앞 사거리에 딸을 내려준 직후였다.
그는 아주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이수아란 애가 대리만족을 하고 있는 모양이죠?”
“어? 대리만족?”
“네. 어제 보육원 가서 보니까 선생님을 동경하는 게 분명해 보이던데요. 따님하고 계속 연락하는 게 그래서겠죠. 딸은 못 되니까, 그 친딸의 가장 친한 언니가 되는 방식이죠.”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아닐까요? 그런 느낌인데. 아침부터 자기 약점을 굳이 톡으로 말한 게, 딸 데려다주는 선생님한테 전달돼서 죄책감 느끼게 하려는 계략 같은데요. 타당한 추론이잖아요?”
그 이야기가, 내가 정말 고민해야 할 문제였다.
손바울은 사람을 관찰하고 분석한다.
그 자체로 나쁜 일은 아니지만, 부처 눈엔 부처만 보인다는 말처럼 아무래도 관찰이란 자기 방식으로 해석되는 법이다.
같은 현상에서도 전혀 다른 곳을 바라보고 만다.
“바울아. 그게 아니야. 물론 무의식적으로 나와 이어지고 싶다고 생각할 수는 있어. 그 추론은 타당해. 하지만 수아가 지수하고 연락하는 건, 무수히 많은 추동의 결과야. 그걸 단순히 자기중심적인 계략으로 생각해선 곤란해.”
“……네.”
“그냥 고개 끄덕이라고 한 말이 아냐. 바울아. 사람은 관찰로는 해석되지 않아. 누군가를 정말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분석하고 연구하는 게 아니라 그 마음에 들어가야 해. 거리감을 좁히는 게 먼저야. 곁에 서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마음들이 있어. 알잖아? 선친의 일기를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네가 두 분의 진짜 심정을 짐작할 수 있었을까?”
“흠. 다음 주에 이수아 일기 찾아볼까요?”
“그런 뜻이 아니잖아.”
“아 맞다. 선생님, 점심 몇 시에 드세요?”
손바울은 티를 내면서 말을 돌렸다.
아직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였던 모양.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직면 선택지]도 나오지 않은 시점이니.
그렇게 손바울의 운전 속에 도착한 사회대.
연구실의 한효준은, 내 설명에 코웃음을 쳤다.
“이런, 우스운 자 같으니. 그 꼴을 그냥 받아줬나? 그 맹랑한 꼬맹이가 앞으로 매일같이 찾아오면 어쩌려고?”
“그럴 겁니다. 일단은 두고 보려고요.”
“쳐내. 다중관계를 정리하고 상담으로 만나야지.”
“그게 올바르다고는 생각하지만, 안 되겠습니다. 저를 지나치게 믿고 따르고 있어요. 그 덕분에 간신히 긍정적인 감정들이 생겨난 참입니다. 당장은 쳐낼 수가 없습니다.”
“허, 참. 이래저래 문제로구만. 그 녀석이 설마 대만까지 따라오겠다고 들지는 않겠지? 그래선 안 되는데.”
“거기까진 모르고 있습니다. 당일에나 말해줘야지요.”
그렇게 생각했었다.
수요일 아침에도 집에 찾아온 손바울이, 항공권을 흔들어 보이기 전까지는.
“선생님! 간신히 끊었습니다. 이 비행기 맞죠?”
“너…… 어떻게 알았어? 나도 아직 모르는데.”
“아, 티켓은 방송국 사람들이 들고 있어요? 미리 안 주는구나. 전 이쪽저쪽 물어물어 알아봤죠. 공내(공항 내 사진) 찍는 덕후들은 멍청해서 속여먹기 쉽거든요. 그런 주제에 어떻게 항공사 뚫고 연예인 일정 알아내는지 몰라.”
“그건 그랬다 치고, 내가 트립크루 출연한다는 건?”
“그거요? 일요일날 보니까 모니터 옆에 포스트잇 붙어 있던데요. 트립크루 대만편 수요일 준비물 어쩌고 하면서.”
한동안 멍하니 굳어 있어야 했다.
한효준에게 관찰력이 비범하니 주의해달라고 말했던 주제에, 나 스스로가 손바울의 비상한 재주를 모르고 있었다.
“넌 대체…… 왕복으로 끊을 돈은 있었고?”
“네. 선생님, 저 돈 좀 있어요.”
“아르바이트를 한 거야?”
“뭐 비슷하죠. 아무튼…… 흠.”
딸이 나오자마자 입을 닫는 건 3일이 되도록 여전했다.
다만 그 역은 조금 달랐다.
“아저씨 하이. 오늘도 안전운전 부탁해요.”
“……알았다.”
“근데 아저씨 면도 안 해요? 더러워요.”
“흠.”
“맨날 흠이래. 흠흠흠.”
이동하는 내내 고민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손바울을 저대로 둬도 되는 걸까.
당장 뭔가 수를 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가능하면 [직면 선택지]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안전하겠지만, 첫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집착하는 게 염려스러웠다.
그런 생각 속에 딸을 학교에 내려준 직후였다.
아침에는 드물게도, 이아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그래, 아리야. 학교 잘 갔어?”
[네 삼촌! 삼촌 오늘 대만 가요? 비 온다는데.]
“하하. 가벼운 비 정도로는 결항되지 않아.”
[아…… 글쿠나. 저요, 삼촌 만나서 얘기하고 싶은 거 있었는데요, 그러면 전화로 여쭤볼까요?]
“내일 귀국해서 얼굴 봐도 되겠지만, 급하면 지금 말할래?”
[으응…… 응…… 네. 삼촌, 저요, 캐스팅 받았어요.]
“어? 캐스팅?”
[응…… 저요, 치어리딩 한 거요, 조회수 높아서요, 그래서 보게 됐대요. 그랬는데 아이돌 하면 가능성이 있을 것 같다고 그러면서 기획사 들어오라구…….]
잘 만든 아이돌이 연 수백억 규모의 상품이 되는 세상.
누군가 아리를 캐스팅했다는 게 이상할 건 없다.
어버이날 치어리딩 공연의 그녀는, 그 수십 명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군계일학이었으니.
그렇지만 단지 즐겁게만 들어줄 일은 아니었다.
“아리야. 그거, 정말 잘 생각하고 결정해야 할 일 같은데?”
[어, 아빠 친구가 기획사 있는데요, 아는 사람이래요. 믿을 만한 회사고요, 계약 이상하게 하고 안 그런대요.]
“그런 얘기가 아니야. 아리 넌, 아이돌이 되고 싶어?”
[……네.]
“아리야. 신중해야 해. 정말 하고 싶은 일 맞아?”
[응…… 근데요, 엄마아빠가 좋아해서요.]
“그러셨을 거라고 생각해. 그렇지만 그게 기준이 돼선 안 되지 않을까? 아리 본인의 삶인데, 스스로 결정을 해야지.”
[아니요, 그게 아니라요…… 저 공부도 잘 못하고 맨날 속만 썩였으니까요. 예쁘다 예쁘다 해주시면서도, 걱정했을 거야. 근데 이거는 다르잖아요. 그냥 멍청한데 착한 딸 말고요, 자랑스러운 딸 될 수 있잖아요. 그러면…… 하고 싶어요.]
……이아리는 멍청하지 않다.
오히려 지혜롭고 존경스러운 아이다.
지옥 같은 따돌림 속에서 부모님이 슬퍼하실까를 먼저 염려했던, 그리고 자신을 괴롭힌 악인을 조건 없이 용서해줬던.
나는 아리가 그런 아이임을 알고 있었다.
“그런 거라면, 응원할게.”
[진짜요? 헤헤. 삼촌이 응원해주시면요, 잘할 거야.]
“잘할 필요는 없고, 행복하게 하렴. 그거면 돼. 즐거운 마음으로 임하면 성과는 저절로 따라올 거야.”
[맞아요 맞아요! 공부도 재밌게 해야 잘 올라요! 아, 쌤 들어오셨어요. 삼촌, 저 그러면 내일 또 전화할게요!]
통화를 마무리한 직후에, 손바울이 물었다.
“걔가 걔죠? 아리아리.”
“……그때부터 방송 봤었어?”
“아뇨? 방송 본 건 최근인데요.”
“그런데 아리아리를 어떻게 알아? 하이라이트에서도 뺀 사연인데.”
“다시보기 정주행 했거든요.”
누적 130시간에 달하는 방송을 통으로 정주행했다니.
참 상상하기도 힘든 몰두였다.
아이돌에 푹 빠진 덕후인들 그럴 수 있을까.
그러나 손바울이라면 그럴 수 있다.
그의 호수 속에 풍덩 담겨봤던 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
나는 손바울이라는 사람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고민할 이유는 없다.
그를 믿고, 내 곁에서 변화하길 기다리면 될 따름.
그제야 마음의 파도가 잔잔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