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
34장 - 공감이 경감하는 것 (3)
“쟤 별로 마음에 안 듬다, 형님.”
잠깐의 대화 뒤에, 진대수가 그렇게 속삭였다.
흔치 않은 일이었다.
대수가 언제나 넉살 좋은 호인인 것만은 아니지만, 어찌됐건 그는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리길 즐기는 인사이더.
5분도 안 되어 마음에 안 든다고 말한 적은 처음이었다.
“음…… 어떤 면에서?”
“그냥 별로예요. 쟤 뭐 문제 있죠? 그래서 상담할 겸 데려오신 거죠? 견학이라는 건 그냥 핑계거리죠?”
“글쎄. 아직은 잘 몰라.”
“딱 봐도 알겠는데요 뭘. 말할 때 눈 말고 다른 데를 보잖아. 수줍어서 그러는 것도 아니고…… 지나가는 개미 보듯이 관찰하는 느낌? 그게 소름끼쳐요. 쟤 내보내면 안 돼요?”
대수의 적대감을 나무랄 수도 없었다.
손바울이 말 그대로 ‘4차원’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으니.
그래도 나와 대화할 때는 이성적으로나마 적극적으로 소통하려고 노력하는 느낌이었는데, 원룸에서는 달라졌다.
조명이나 마이크 팝필터 등의 생소할 방송장비에도, 방송을 통해 별명이 잘 알려져 있는 ‘찐데스’에게도, 그는 최소한의 흥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게 이해할 수 없는 지점이었다.
손바울은 어째서 내게만 관심을 보이는 것일까.
그것만 아니라면 공감능력의 장애를 진단할 수 있을 텐데.
보통 공감능력 결여라고 하면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 등 반사회성 인격장애(Anti-Social Personality Disorder : ASPD)를 연상하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 거의 모든 정신질환이 공감의 부재를 동반한다고 할 수 있다.
공감능력이 곧 ‘정상인’의 지표니까.
인간이 사회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활용하는 가장 근본적인 능력이기에, 그것이 부족하다면 정신질환으로 분류된다.
타인의 감정을 무시한다면 자기애성 인격장애.
과잉해석해서 투사한다면 편집성 인격장애.
지레짐작으로 도망친다면 회피성 인격장애.
그렇게 표현형이 다를 뿐, 대부분의 정신질환이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공감 문제로부터 발전한다.
하지만 110의 ‘진단’으로 어떤 감정도 감지할 수 없는 케이스라면, 썩 흔치 않을 것이다.
정서적 상호작용의 해석에 어려움을 겪는 아스퍼거 증후군.
그 자신의 감정이 약해 타인의 감정에도 무지한 반사회성 인격장애.
감정이 보편적이고 타인의 표현을 잘 이해함에도 자기 표현이 억제되는 조현성 인격장애.
손바울의 경우는 그중에서도 가능성이 좁혀졌다.
성폭행을 당한 모친과 그 사실에서 불쾌감을 느낀 부친에게 명확하게 공감하고 있었기에, 반사회성 인격장애는 아니다.
관련 소재로 나와 대화하며 상호작용을 수행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으니, 아스퍼거 증후군 역시 아닐 터였다.
결국 조현성 인격장애 외에는 의심하기 어려웠다.
관련해서 환경적 요인을 추론하기에도 적절했다.
조현성 인격장애는 환경적으로는 어린 시절 부모의 양육 속에서 경험한 부적절감이 원인일 것이라 추정되는 질환.
그게 손바울의 케이스와 잘 어울렸다.
그의 부모가 여섯 명의 살해에 성공했다고 한다면, 이후로는 그들의 아이와 인간적인 애정을 나누기 어려웠을 테니.
살인이란 그런 행위다.
보편적으로 공감능력을 활용해 소통해야 마땅한 동종을 살덩어리로 만드는 경험은, 자연히 정신질환을 유발한다.
애초에 살인을 모의한 시점에서 마음이 무너져 있었을 것이기도 하고.
그런 상태로 정상적인 육아가 가능할 리 없다.
결국 손바울은 조현성 인격장애를 앓고 있을 확률이 높다.
그런 근거들에도 [내담자 평가]가 묵묵부답인 것은, 그가 내게 보여주고 있는 비정상적인 관심 때문일 터였다.
조현성 인격장애 환자는 망상만을 즐긴다.
사회적으로는 방금 전 대수에게 그랬듯 냉담한 것이 보통.
자기 세계의 만족을 위해 겉으로 사교적인 척할 수는 있지만, 친구의 핸드폰을 훔쳐보거나 미행을 하는 것처럼 적극적으로 관계를 유도하는 행위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렇기에 그는 내게도 NBSC에게도 불가해였다.
다만, 한 가지 가능성 정도는 떠올랐다.
만약 그게 손바울 나름의 라포라고 한다면.
극히 낮은 확률이지만, 어떤 이유로 인해 내가 이미 그의 섬세한 내면세계 속에 자리잡는 데에 성공한 것이라면, [완전한 공감]을 통해 심리를 살펴볼 수는 있을 듯했다.
어쩌면, 애초에 그게 이유였을지도.
신비로운 NBSC는 이 전개를 예측했을 수도 있다.
[완전한 공감]이 네 번째 에픽퀘스트와 함께 주어진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말 그렇게 해도 되는 걸까.
어쩌면 심각한 정신질환을 안고 있을지도 모를 손바울의 마음에 직접 들어가는 경험을, 나는 견뎌낼 수 있을까.
확신하지 못한 채로, 토요일의 생방송이 시작되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예, 대민재단의 물주 꼰마입니다. 안녕하세요, 람보님. 야놀자님, 오늘도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마구니님, 반갑습니다. 그리고- 아, 케바케님. 여전히 올출석이시네요. 상담 이후로 좀 어떠신가요?”
「케바케 : 성님 저 운전면허학원 등록했어라 ㅋㅋ」
「엌ㅋㅋㅋㅋ 케성님 도랐ㅋㅋㅋㅋㅋ」
「ㄹㅇ?? 아니 와 머단하네..」
“이런. 제가 흉폭한 드라이버 한 명을 세상에 풀어놨네요. 설마 정말로 레이서가 되시려는 건 아니지요?”
「케바케 : ㅋㅋ 고건 찐데스여라」
“찐데스라고요?”
「케바케 : 아따 별로라는 뜻 아니겄소 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은진알통 : 찐이시여.. 내마음의별로..」
「마구니 : 케성님 찐님 실물 어땠음?」
「케바케 : 별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찐death : 고만좀해 미친형님들아 ㅠㅠ」
“마침 세이클럽님 들어오셨네요. 세이 선생님. 선생님의 과거 발언으로 인해 제 디렉터가 여전히 고통받고 있는데요.”
「세이클럽 : 그래요?」
「세이클럽 : 별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별로좌」
「찐death : 너어는진짜 하..」
진대수와 김지연이 티격태격하는 동안, 본방의 시청자 수가 빠르게도 2천 명을 달성했다.
놀랄 것은 없는 일이었다.
창립식 행사에 이어 3선 의원 주영주의 지지성명까지 기사화된 뒤인지라, 오늘에야말로 5만의 벽을 뚫을 수 있을지도.
대수 옆에 얌전히 앉아 있는 손바울은 나중 문제였다.
지금은 방송에 집중해야 할 때.
새로이 유입된 시청자들에게 첫인상을 제대로 심어주기 위해서, 그에게서는 가능한 관심을 끄고자 애썼다.
네 번째 사연이 나오기 전까지는.
“다음은 양키캔슬님의 사연입니다. 과거에 저를 많이 좋아해주셨던 후원자님이시죠. 오늘은…… 음. 안녕하세요, 꼰마님. 전에 고민 있으면 보내달라고 하셨는데 계속 고민하다가 이제 보내요. 사실 저 중딩 때 같은 반 애한테 성폭행 당한 적이 있거든요…….”
거의 반사적으로 눈을 들어 손바울의 기색을 살폈다.
그 역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연 때문이라기보다는, 방송 시작한 뒤로 내내 저 상태.
내가 하는 언동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그에게서는, 여전히 한 톨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렸을 때기도 하고 극복했다고 생각했는데, 우울증 임상 받다가 그때 얘기가 나왔어요. 그랬는데 갑자기 눈물이 막 났어요.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봐요. 생각해보니까 동창회 연락 받은 뒤로 우울감이 심해졌던 거 같기도 하고, 한번 그놈 생각나니까 점점 더 많이 떠오르고…… 근데 증거도 없고 너무 옛날 일이라…… 거기 쌤은 그거 생각하지 말고 현실의 밝은 면만 보라고 하셨는데, 근데 머리로는 알아도 잘 안 되네요. 그놈 찾아가서 죽여버리면 나을까요…….”
손바울은 여전히 무감정하다.
가족사를 연상하게 만드는 사연을 들었음에도, 그저 무심한 눈으로 나를 관찰할 뿐이었다.
통화로 한 말을 어떻게 실천하는지 확인하겠다는 듯이…….
일단은 양키캔슬의 상담에 집중해도 될 듯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성폭력에 대해 생각했다.
그것이 어떻게 양키캔슬을 괴롭히고 있을지를.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통제권의 박탈.
내가 통제해야 마땅한 내 몸이, 수 분 이상 타인의 강압적 행위에 노출되는 경험이다.
그 박탈에는 신체적이거나 정신적인 폭력 또한 수반된다.
스스로를 구제하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유린당한 경험이기에, 기억이 장기적인 트라우마로 마음을 공격하게 된다.
그에 더해 사회적인 관념 역시 큰 몫을 한다.
타인의 강요로 통제권을 빼앗긴다 해도 그 내용이 긍정적이라면 장기적인 우울감으로 남지는 않는다.
부모의 훈육이나 친구 사이의 장난 등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인류 보편적으로 성행위는 극히 신성시되거나 터부시되는 경향이 있어, 더럽혀졌다는 인식과 자신 역시 방조자라는 왜곡이 견디기 어려운 스트레스를 안길 터였다.
이때 피해자의 마음은 두 가지 빛깔을 띤다.
분노와 자괴감.
분노는 이내 인간불신으로 이어지고, 자괴감은 자기비하가 되어 우울증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양키캔슬 역시 그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익명 채팅창에서도 오랜 고민 끝에 토로한 이야기.
잊어버렸다거나 극복했다고 생각했던 것은 오인이고, 일정 부분 해리(dissosiation : 정신적 격리) 반응이었으리라.
그것이 오랜 시간이 지나 우울증으로 터져나온 듯했다.
결코 단기간의 상담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
보복도, 고소도, 근원적인 치유를 안겨주지는 못한다.
내면의 평화를 되찾기 위한 길은……
사실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제가, 양키캔슬님의 채팅을 쭉 지켜봤습니다. 약 12회 정도 ‘힘내세요’라는 문구를 발견했어요. 실제론 그 이상이겠지요?”
「오 ㅋㅋㅋ 기억력마스터 ㅋㅋㅋ」
「이아재 왜서울대인지 알거같음 ㄷㄷ」
「양키캔슬 : 아진짜요?? 그랬나봐요」
“쉬운 말 같지만, 쉽지 않은 말이에요. 나 스스로가 우울증으로 힘들어하고 있는 경우에는 특히 그렇습니다. 제 경우에는 물론 성폭행을 당한 적도 없고, 우울증을 심하게 앓은 경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못된 대표님한테 퇴사하면 어떻겠냐는 말 듣고는 우울감이 꽤 강하게 들었더랬습니다.”
「폴리스!!!」
「스티브갑스가 뚜드려맞고이써여!!!」
“한 일주일 정도, 내 생각밖에 못 하고 살았습니다. 옆에서 챙겨주려 노력했던 가족들조차 밉게만 느껴지더군요. 그러다가 세이클럽 선생님을 만나서 조금쯤 변화할 수 있었지요.”
「오오 세이클럽좌」
「세이 호오!」
「세이 호호호!」
「세이클럽 : 으앙 왜 저 꺄」
「양키캔슬 : ㅎㅎ상상이안돼여」
“그랬는데, 양키캔슬님은 참 다르시네요. 자기 고통을 묻어두고, 아파하는 타인을 격려할 줄 아는…… 그게 대단히 멋지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번 사연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지막에는 그래도 인간적으로 죽여버리면 나을까요 이런 말씀도 해주셨지만, 사연 내용에 가해자 얘기가 하나도 없어요. 보통 피해 사실을 고백할 때는 그렇거든요. 그 개잡놈이 나를 이런 식으로 괴롭혀서 이러저러한 피해를 입었다, 그래서 복수하고 싶은데 이거 정당한 거 아니냐, 그렇게들 말하거든요. 그런데 그런 얘기가 하나도 없습니다. 양키캔슬님은 미워하고 싶어서 사연을 올린 게 아니에요. 제게서 그 미움을 승인받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공감받길 바라셨던 것 같아요. 그렇지요?”
손바울이 무언가 중얼거린 듯했지만, 애써 보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지금 봐야 할 것은 양키캔슬.
손바울과의 상담은 그 이후의 문제다.
「양키캔슬 : ㅎㅎ 그런가.. 그랬을지도요..」
「양키캔슬 : 꼰마님방송보면 맘이좀편해져서요」
“그게 어디 제 덕일까요. 제 방송국 위치까지 알면서, 범죄자는 완전범죄로 죽이는 게 정당하다 말하는 친구도 있어요.”
「양키캔슬 : 앜ㅋㅋㅋ」
「양키캔슬 : 설마요 농담이겠져」
이번에도 손바울은 관찰하지 않는다.
그저 양키캔슬을 위해 말을 골랐다.
“사실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요. 복수를 생각하는 마음은 보편적인 것이고, 그만큼 작은 위로의 힘은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로서는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그 살인이 자살의 다른 표현임을 알고 있는 까닭입니다.”
「???」
「반대 아님?」
「양키캔슬 : 어 왜그런건데요??」
“거의 모든 자살자가, 실행 전에 살인을 고민합니다.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관계 자체를 종결시키는 두 가능성을 저울에 올리는 거지요. 결국 의도는 같습니다. 둘 중 하나는 죽어야 된다는 신념인 거예요. 그리고 결과 역시 마찬가지예요. 보복 뒤에는 불안과 공포와 자책 속에서 합리화만을 위해 살아가게 되니까요. 그걸 생존이라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렇게라도 해야 할 만큼 힘들겠지.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마음이다.
그러나 절벽을 향해 달려가는 이를 붙잡지 않을 수는 없다.
상담사로서, 피해자를 위해 그 뜻을 꺾어야 한다.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예시를 들었지만, 그게 다가 아닙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방식의 복수가 있지요. 흔하게는 보복주행을 들 수 있겠고, 왕따 가해자를 역으로 따돌리는 경우도 있고, 폭행 가해자의 뒤통수를 친 사례도 있고……. 하지만 그 끝에 남는 건 결국 자해와도 같은 2차피해뿐입니다. 세상은 제로섬게임이 아닙니다. 하나가 죽어야 하나가 살 수 있다면, 그게 어떻게 고등동물의 사회일까요. 가해자를 엄벌하고 정신개조하는 일은 아저씨 아줌마들이 하겠습니다. 오늘을 살아야 하는 양키캔슬님께선, 모쪼록 행복한 일만 해주세요. 지금처럼 남들의 아픔까지 생각해주는 아름다운 마음씨로요. 동창회에 갈 거라면, 내가 동행하지요. 혹시 그놈이 나온다면 반드시 무릎 꿇게 만들겠습니다. 복수보다 큰 위안이 될 거예요.”
「양키캔슬 : ㅎㅎㅎ 모야모야..」
「여기까지 대민스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행복하지않을이유가 하나~도없습니다」
[양키캔슬님 별사탕 100개. 동창회는 안갈거에요. 세상스윗한 꼰머가 있는데 먼상관이야 흐흐.]
성폭력은 장기적 상담이 필수적인 케이스.
NBSC의 힘으로도 단숨에 치유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믿고 의지해도 되는 누군가와 이어진 존재임을 확신할 때, 내담자는 트라우마의 뒤통수를 칠 수 있다.
네깟 게 뭔데 감히 내 행복을 망치려 드느냐!
과거는 내 현재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그런 마음의 변화가, 치료의 효율에 작은 도움은 되리라.
부디 양키캔슬이 호수의 독을 몰아낼 수 있기를.
그런 생각을 하며, 무심코 손바울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리고 당황했다.
미행과 테스트로 나를 곤란하게 만들었던 에픽퀘스트의 대상이, 무표정한 얼굴로 눈물을 닦아내고 있었다.
*
“코앞에서 보는 방송, 재밌네요. 나쁘지 않았어요.”
대수가 떠난 원룸 안에서, 손바울은 의자를 돌리며 말했다.
“대민스님이라던데. 불교 믿으세요?”
“……종교는 갖고 있지 않아요.”
“그렇구나. 저는 모태신앙이에요. 그래서 바울이죠.”
“그렇군요. 양친 중 어느 쪽이 신앙인이셨는지요?”
“둘 다요. 교회에서 만난 분들이라. 그래놓고 교회 사람들한테 강간을 당했고, 그 교회를 불태워서 여섯 명을 죽였고.”
그런 말을 할 때에도 그는 무감정했다.
당한 일에도 한 일에도 별 관심은 없다는 듯이.
양키캔슬의 상담 때에 눈물을 흘린 모습은 환각이었던 걸까, 그런 생각까지 들 지경이었다.
“바울 학생. 실례되는 질문 하나, 괜찮겠습니까?”
“아, 그럼요. 저도 실례했는데. 쌤쌤으로 가시죠.”
“……양친은 무탈하십니까.”
“아뇨. 둘 다 죽었어요. 선생님 말씀대로, 오래 못 버텼죠. 검색하면 나올걸요? 99년 인헌동 교회 가스 폭발 사건, 모텔방 부부 동반자살 사건…….”
예언처럼 맞춘 진실에, 못내 가슴이 아파왔다.
그러지 않기를 바랐는데.
손바울에게 가족이라는 보루는 남아 있기를 기원했는데.
“그래서 직접 들은 얘기는 없어요. 할머니댁에서 자라다가, 거기서 일기를 찾았죠. 아버지 거요. 이런저런 얘기들이 적혀 있더라고요. 속도위반으로 결혼하고 저 낳은 다음에야 자기 애가 아닌 걸 알았다고. 처음엔 열 받더라고요.”
“……그랬겠군요. 어린 나이에 양친을 잃어야 했던 원인이 끔찍한 범죄 때문이었음을 알게 됐으니…….”
“아뇨, 그건 됐고요. 왜 지들만 죽었나 싶더라고요. 갈 거면 나도 데리고 가든가. 어이없지 않아요? 죽일 거면 날 제일 먼저 죽였어야 했는데. 왜, 지들끼리 죽고 죽였을까? 이해가 안 돼요 지금도. 왜 그랬을까요? 이게 마지막 단계인데요.”
세 번째 테스트.
슬픈 부부의 피비린내 나는 사연이, 끝으로 치닫고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너무도 쉬운 문제였다.
이해하기 어렵지만, 느낄 수 있는 마음이기에.
“사랑했기 때문이겠지요.”
“사랑이라. 통속적이네요.”
“인간이, 그렇게 통속적인 존재입니다. 내 아이가 아님을 알더라도, 범죄자들의 씨앗임을 알더라도, 2년을 키워온 그 세월의 기쁨을 지울 수 없는. 인간은 그렇게 살고 죽습니다.”
“어떻게 아세요? 꼰순이는 그런 거 아니잖아요.”
딸을 언급하는 손바울의 무표정이, 더는 두렵지 않았다.
어떤 인격장애인지 아직 알지 못하지만.
그 딱딱한 얼굴 아래에 무슨 악의가 넘실거릴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손바울의 진심을 믿을 수 있었다.
“상상해봤어요. 내 딸이 바울 학생과 같다면, 나는 어떨지.”
“그래요? 근데 대민스님은 보통 사람들이랑 다를 텐데.”
“다르지 않아요. 나 역시 생각 많은 인간입니다.”
“그래도 사고방식이 좀 다르신 것 같은데.”
“같습니다. 나도, 바울 학생도, 다르지 않습니다.”
「 내담자 명 : 손바울
평가 결과 : 마음을 잃어버린 몽상가. 」
[내담자 평가]는 아직도 형편없는 수준이다.
한 방울의 눈물 덕분에 한 줄이 생성된 것으로 끝.
심리를 평가할 만한 감정 표현이 부족한 탓이리라.
그렇지만 그런 것은 중요치 않다.
손바울은 인간.
그리고 나 역시 인간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인격장애나 뇌의 질환으로 공감능력이 현저히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전해지는 마음이 있다.
“우리는 닮았습니다, 바울 학생. 내게 5초만 주겠어요?”
“5초요? 그러세요. 어…… 어어.”
대뜸 다가와 끌어안는 내가 몹시 황당했던 모양.
그답지 않게 목소리에 여러 감정이 묻어났다.
그렇지만 해석하고자 애쓰지는 않았다.
나는 호랑이굴에 들어섰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끌어안기 위해서.
왜 이래 불편하게 끌어안고 있으면 내가 기분 좋을 줄 알았나 근데 그런 건 상관없는데 따뜻하긴 하네 뭔 생각 하고 있는 걸까 궁금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은 아닌 것 같은데 역시 신인가 내가 보고 있어도 편한 사람이 인간일 리는 없잖아 아 날파리다 흠 엄마도 그랬을까 미움을 승인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위로받고 싶어서 말한 거였을까 그런 거였으면 좀 별로네 생각해보면 같이 죽여주길 바란 건 아니었을지도 보통 인간들은 우주가 시끄러우니까 나처럼 조용하면 편할 텐데 겉 다르고 속 다른 거 관찰하는 게 재밌긴 하지만 아 뭔가 답답하네 5초 돼가는데 이 아저씬 무슨 생각 할까 내가 무슨 생각인지 알까 신이라면 알겠지-
반곱슬의 머리카락처럼 헝클어진 생각들.
어둡고 공허한 마음에 공감했다.
무표정한 사념의 다발에 공감했다.
그 안에 담긴 일부 해괴한 망상에도 공감했다.
그야 신비롭게도 보였겠지.
NBSC의 힘으로 압도적인 후광까지 획득한 내가, 세상을 막아내지 못하고 도망쳤던 몽상가에게는 신처럼도 보였으리라.
기쁜 일은 아니지만, 당황할 일도 아니었다.
그저 편안하게 수긍할 수 있는 마음이었다.
“바울 학생. 인간은 사실 공감을 하지 못합니다.”
“네? 아, 위로해주시는 거구나? 역시 아시나보네. 맞아요. 저 성격장애 있어요. 정식으로 진단을 받은 건 아니지만-”
“바울 학생을 놓고 말하는 게 아니에요. 모든 인간이 그렇습니다. 외부의 인간이 뿜어내는 별처럼 다양한 감정들은, 그저 내 우주 속의 별들에 비춰서 해석될 따름입니다. 그렇기에 완전한 공감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아요. 어떤 감정도 분명하게 전달되지 못하니까. 나도 그렇고, 바울 학생도 그렇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공감을 갈구한다.
어떻게든 상대방을 이해하고 싶어하고, 모든 수단을 써서 자신의 마음을 전하길 원한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방법이기에.
공감이 경감하는 것은, 삶 자체가 가진 통증이다.
“……선생님은 아니잖아요. 근데 억지로 공감하진 마세요.”
맞는 말이고, 틀린 말이다.
손바울의 말처럼 나는 인간의 기준에서 벗어났다.
적어도 [완전한 공감]을 사용한 직후에는, 내 마음에서 박대민보다도 내담자의 목소리가 더 크게 울릴 수 있다.
그렇기에 이것은 억지 공감이 아니다.
“바울 학생의 마음은…… 원시우주 같군요.”
“원시우주? 그게 뭐예요?”
“천문학에서 말하는, 빅뱅 이전의 별이 없는 우주입니다.”
“와…… 그거 되게 상처 될 것 같은 말인데요.”
“그런데 상처를 받지는 않지요.”
“네. 별로 아프지는 않네요.”
“별이 없으면 충돌도 없어요. 편안한 우주지만, 다른 별의 우주선에서 볼 때는 좀 비어 보였겠지요. 고생 많았습니다. 몰이해 속에서 매일 도망치며, 그럼에도 양친을 이해하고자 애쓰면서, 참 고생했어요. 날 찾아와줘서 고맙습니다.”
“……진짜요?”
손바울은 웃으면서 그렇게 물었다.
그 직후에, 얼굴을 파르르 떨었다.
“아…… 뭐야. 아, 뭐지.”
“빅뱅일지도 모르겠네요.”
“빅뱅……?”
“거의 다 와 있었어요. 지속적인 방치의 시간 속에서 먼지처럼 흩뿌려졌던 감정들이, 부친의 수기를 발견하고 그 마음들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모이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에너지를 넣었습니다. 바울 학생이 듣고 싶어했던, 평생 들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공감의 말을. 물론 아직은-”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도움으로 이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완전한 공감] 사용 이후 시간이 좀 흐른 탓일까, 이번 말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어딘가 익숙한 화법이었다.
“혹시…… 성경구절입니까?”
“네. 사도 바울의 말씀입니다, 아멘.”
손바울은 다시 무표정해진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움직임을 바라보다가, 문득 아연해졌다.
“저…… 바울 학생.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신이 아닙니다.”
“아멘.”
“바울 학생, 잠깐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아주 작은 감정을 되찾은 몽상가가, 내게 경배한다.
나는 노아의 방주처럼 그 전개 위를 표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