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
34장 - 공감이 경감하는 것 (2)
「허락도 없이 이렇게 연락드려 죄송합니다. 오늘 창립식 잘 봤습니다. VR상담도요. 그래서 친구 현서 통해서 연락처 알았어요. 혹시 실례였다면 곧바로 지우도록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만약에 용서해주신다면, 개인적으로 여쭤볼 일이 하나 있는데요. 제가 전화 한 통 드려도 괜찮을까요?」
오현서는 사회복지학과의 17학번.
그녀의 친구라면, 아마도 같은 학번의 서울대생이리라.
그 지점에서 일단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지금껏 등장한 에픽퀘스트의 대상은 모두가 내게 가르침을 줄 만한 스승들이었다.
네 번째 퀘스트 역시 그와 유사하리라 생각했다.
아마도 선교사거나 사회단체의 중역이거나……
검색에 나오지 않았던 걸 보면 아직 유명하지는 않겠으나, 나보다는 연식이 있는 선배일 것이라 짐작했던 것이다.
그랬는데, 17학번 대학생이라고 한다.
퀘스트의 방향성이 바뀐 것일까.
그게 아니면, 나이의 고하와 무관하게 존경할 만한 인격자인 것일까.
고민 속에서 통화 버튼을 터치했다.
[……박 선생님?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 손바울 학생 맞지요?”
[네. 제가 문자 드린 손바울입니다.]
“그래요. 지금 운전 중인데, 30분쯤 통화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할까요?”
[아, 넘치죠. 영광입니다.]
“영광은요. 그럼…… 물어보고 싶었다는 것은 무엇인지요?”
손바울은 미미하게 웃었다.
그 안에 담긴 감정의 색깔을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보통은 110이 된 ‘진단’ 덕분에 금세 속내가 보이는데……
그의 목소리에서 마음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에픽퀘스트의 주인공이라는 선입견 때문일까.
그게 아니면, 그가 극히 드문 연기의 달인인 까닭일까.
[음…… 여쭤보고 싶었던 건 이거예요. 한 남자가 있습니다. 선량한 청년인데, 연애를 했어요. 깊이 사랑했습니다. 자기가 가진 모든 걸 주겠다고 생각할 정도로요. 그랬는데 그 대상인 여자가, 어느 날 살인을 입에 담습니다. 일곱 명의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했고, 그들을 완전범죄로 죽이고 싶다고요. 처음에는 술자리의 사소한 토로였습니다. 그러나 점점 그것이 실현가능성을 띠기 시작합니다. 추리소설을 독파하는 모습이 보이고, 범죄심리학 서적이 쌓여가고, 서랍 속엔 범행에 쓸 법한 물건들이 늘어갑니다. 이때 이 남자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아, 여기서 애인을 설득해서 고소 쪽으로 가닥을 튼다는 선택지는 없습니다. 일단 공소시효가 남아있긴 하지만, 저쪽의 사회적 입지가 탄탄해서 공략이 불가능하거든요. 게다가 사실은 남자 역시도 자신의 하나뿐인 사랑을 강간한 놈들을 죽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다만 실천적인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애인이 남자들을 죽이게 놔두는 길과, 그녀를 대신해서 직접 남자들을 죽이는 길 중에서요. 선생님께서는 그 남자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싶으신가요?]
……이건 무슨 이야기일까.
도덕률의 딜레마로 나를 시험하는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가 처해 있는 현실을 말하는 것일까.
혹시, 손바울 본인의 고민을 입에 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복잡해지는 이유는, 여전히 그의 목소리에서 감정의 편린이 느껴지지 않는 까닭이었다.
어째선지 마음이 보이지 않는 목소리다.
한계치까지 올라간 ‘진단’에도 불구하고, 손바울의 목소리는 모호했다.
“……그에 답하기에 앞서서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손바울 학생. 그 남자는, 손바울 학생 본인입니까?”
[저요? 그건 아니에요. 가상입니다.]
“정말입니까?”
[음. 지인 얘기긴 한데, 사정을 말씀드리기 어려워서 극화한 거예요. 설마 이런 상황이 실제일 리 없잖아요?]
“그렇다고 한다면, 내 대답은 분명합니다. 고민하고 있는 남자를 내게 데려와주세요. 그를 통해서 살인 충동을 느낀다는 여자를 만나겠어요. 그리고 그들 모두를 변화시키겠습니다.”
[음…… 되려나. 근데 그래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아, 제가 한 가지를 빠뜨렸네요. 그놈들을 죽이지 못하면, 여자는 자살하고 말 겁니다.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 상황이에요.]
“그래도 마찬가지예요. 막아야 합니다.”
[정말요? 아, 일곱 명이 좀 많았나? 혹시 트롤리 딜레마처럼 생각하시는 거예요?]
트롤리 딜레마는, 광산의 수송용 트롤리 앞 선로에 여섯 명의 광부들이 쓰러져 있는 상황을 가정하며 시작한다.
이때 선로는 두 방향을 가질 수 있다.
선로전환기를 가동하지 않으면 다섯 명의 광부들이 있는 쪽으로 트롤리가 폭주하게 된다.
그걸 막고자 선로를 전환하면, 진로는 한 명의 광부가 쓰러진 방향으로 바뀌게 된다.
윤리학의 사고실험이다.
다섯 명을 지키고자 한 명을 희생시키는 것이 옳은가 하는.
그렇지만 지금의 논의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일곱 명의 남자들이 파렴치한 성폭력범이라는 가정까지 받아들인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일곱 명의 목숨이 더 무겁다고 생각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 남자와 여자를 위해서 막아야 해요. 살인을 실행하건 또는 방조하건, 그 경험은 두 사람의 미래를 망가뜨릴 겁니다. 완전범죄라고 해도 마찬가지예요. 두 사람이 행복한 미래를 마주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필요합니다. 기본적으로는 사회적 명망을 갖춘 이들이 지지해주는 가운데 그 7인의 범죄사실을 낱낱이 밝히는 게 우선이 되겠지요.”
[그렇게 되면 여자는 이미 만신창이일걸요? 성폭력이란 게 재판이 됐든 여론이 됐든 굉장히 공격적이잖아요. 민형사재판도 주변 시선도 피해자에게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줄 거예요. 자살까지 생각하는 아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겠죠.]
“그렇기에 상담사가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여자도,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도, 어떤 상처도 없이 재판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나라면 할 수 있어요. 믿고 얘기해줘요, 바울 학생. 그 남녀는…… 누구입니까.”
손바울은 5초 정도 침묵했다.
그 뒤에, 다시 웃음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마음이 보이지 않는 소리였다.
[하하. 그렇게 나오시는구나. 흥미롭네요. 너무 진심이신 게 느껴져서…… 제가 다 감동 받을 것 같네요. 그렇지만 그렇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이번에 여쭤본 건은 정말 과장이니까. 아무튼…… 갑작스런 질문에 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은 도움이 됐어요. 다음에 직접 뵐 기회가 생긴다면 좋겠네요.]
전화는 여유를 주지 않고 끊겼다.
내 머릿속에 복잡한 고민만을 심어둔 채로.
손바울의 마지막 말은 진실일까.
단순히 학문적 호기심이라고 하기에는, 시시각각 추가되는 조건들이 지나치게 구체적이었는데.
그렇지만 정말 지인의 사례라고 한다면, 아무리 극화한 것일지라도, 그렇게 무감정하게 사실만을 나열할 수 있을까.
답이 없는 고민 속에서 오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선생님! 안녕하세요! VR상담 잘 봤어요!]
“이런. 밤새 행사 준비하고 피곤하지 않았어요?”
[헤헤. 괜찮아요! 내일 일요일이니까 밤에 푹 자면 돼요. 대민재단 팀장인데, 선생님 방송 하나도 빠짐없이 봐야죠.]
“그래요, 고마워요. 이건 다른 얘긴데…… 손바울 학생 말이에요. 친한 사이인가요?”
[바울이요? 걔가 왜요?]
“방금 통화했는데…… 독특한 케이스를 물어보더군요.”
[아, 걔가 좀 그래요. 진짜 4차원. 근데 걔랑 어떻게 통화하셨어요? 선생님 연락처 어떻게 알았지? 아, 아까 창립식장에서 여쭤봤어요? 별일이네. 걔가 왜 그랬지? 저한테는 그냥 주말에 심심하니까 들른다고 했는데.]
……거기부터 거짓말이었던 건가.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진실이었다.
“현서 학생. 손바울 학생은 어떤 사람입니까?”
[어…… 그냥 진짜 조용한 애예요. 뭔 생각을 하는지 아무도 몰라요. 그런데 공부는 계속 과탑이었고, 저도 열심히 공부하는 편이라서 같이 팀플 자주 하기는 했어요.]
“그렇군요. 혹시 손바울 학생에게 여자친구가 있습니까?”
[네? 에이, 없어요. 걔 완전 아싸예요.]
“……친하게 지내는 친구는 없습니까? 고민상담을 할 법한.”
[응? 전혀요. 레알 아싸예요.]
‘레알’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의 아웃사이더라.
그렇다고 한다면, 지인의 사정이라는 말조차 거짓말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단지 진지한 조언을 얻기 위해서 연기를 했을 뿐일지도.
성폭력이나 살인 등의 자극적인 소재를 덜고 나면, 사실 사회복지학과의 졸업반 학생이 고민할 법한 윤리 문제였다.
가해자들에게 복수하려는 피해자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긍정할 수도 없고 무시하기도 어려운 감정이다.
생각 많은 ‘4차원’ 학생이라면, 용서를 외치고 다니는 상담사에게서 대답을 들어보고 싶었을 법도 했다.
하지만 그 방법이 문제였다.
친구의 핸드폰을 몰래 봐서 연락처를 얻고, 마치 자기 사정인 것처럼 오해하기 좋은 뉘앙스로 질문하다니.
아무리 독특한 성격이라도 그렇게까지 할까 싶다.
어쩌면 정말로 어떤 특별한 사정이 있어서는 아니었을까.
“현서 학생…… 아, 미안해요. 오 팀장. 그 손바울 학생과 만나보고 싶습니다. 월요일에 만나볼 수 있을까요?”
[네? 아, 네. 걔가 출석은 무조건 하니까…… 월요일이면…… 두 시 반쯤 오시면 보실 수 있을걸요? 왜요? 전화로 나오라고 하시지. 걔 진짜 하는 일 하나도 없어서, 한가할걸요?]
그렇지만 그 거짓말쟁이가 내 전화를 받으려나.
잠깐 고민한 뒤에, 일단 시도는 해보기로 했다.
서울대 내에서 내가 지나치게 유명인인 까닭.
석좌교수의 후원에 3선 의원의 지지까지 더해져, 사회복지학과 강의실에 찾아간다면 학생들을 따돌리기 어려울 터였다.
그렇게 다시금 손바울에게 연락하게 됐던 것이다.
염려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신호가 두 번 울리기도 전에 목소리가 화답했다.
[아, 선생님. 무슨 일 있으세요?]
무슨 일 있냐니.
대체 무슨 배짱인지 알 수 없는 녀석이다.
그렇지만 당장 공격적으로 말했다간 회피할지도 모르겠다 싶어서, 우선은 평온을 가장했다.
“바울 학생 말대로, 직접 한번 만나보고 싶어서요. 오늘 밤에는 혹시 일이 있습니까?”
[저요? 없어요. 저 어디로 갈까요?]
“내가 열한 시에 방송이 끝나는데-”
[네, 거기로 갈게요.]
“……어딘지 압니까?”
[현서한테 들었어요.]
헛웃음을 감추기 위해, 잠시 심호흡을 했다.
“흐음. 그래요. 그러면 그쪽으로 와줘요.”
[네. 그 앞에 가서 전화 드릴게요.]
이번에도 전화는 곧바로 끊겼다.
정서적 교류에 무관심한 그 태도에서, 조현성 인격장애(Schzoid Personality Disorder:ScPD)가 떠올랐다.
타인과의 교감을 원하지 않고 일차가족이나 혼자서 할 수 있는 활동에만 관심을 가져, 히키코모리와 결부되는 케이스.
인구 중 7.5%가 해당한다고 분석될 정도로 흔한 질환이다.
사회활동에는 약하지만 연구 등에서는 오히려 두각을 드러낼 수도 있다고.
오현서에게 들은 손바울의 사회적 행동양식 역시, 그 조현성 인격장애를 연상하게 만드는 측면이 있었다.
그렇지만 쉽게 단정 짓기는 어려웠다.
조현성 인격장애를 가진 이가 사회복지학과에 들어갈까.
그곳이야말로 인간사회에 참여하는 최전선인데.
복잡한 생각 속에서 [내담자 평가]를 사용해봤지만, 증거가 미약한 탓인지 무엇도 도출되지 않았다.
제대로 진단하기 위해서는 보다 긴 대화가 필요해 보였다.
어쨌든 그것도 11시에 손바울이 도착한 뒤의 일.
당장은 7시에 시작할 생방송에 집중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며 원룸 앞에 주차할 무렵이었다.
음울한 인상의 청년 한 명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소한 체구와 움츠린 어깨.
그리고 무생물을 관찰하듯 감정 없는 눈초리였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그 앞으로 몇 걸음 다가섰다.
“거기, 학생?”
“네, 선생님.”
“……혹시 손바울 학생입니까?”
“네. 좀 빨랐죠?”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데도 느껴지는 감정은 미약하다.
놀라울 정도로 딱딱하게 굳은 표정.
다만, 정서 외적으로 몇 가지 추론을 할 수는 있었다.
“빨리 온 게 아니라, 처음부터 여기 있었던 거 아닙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코끝이 빨개요. 쌀쌀한 날씨도 아닌데.”
“아, 그런 걸 보시는구나. 재밌네요.”
“여기 주소는 어떻게 알았지요?”
“네?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현서한테-”
“미안한데, 현서 학생은 이 원룸에 와본 적이 없어요.”
손바울이 찔끔해서 어깨를 으쓱인다.
그럼에도 표정이 차분해서, 괜히 소름이 끼쳤다.
서울대 내에서는 오직 김지연만 알고 있는 주소.
그걸, 손바울은 어떻게 손에 넣은 것일까.
“아…… 현서는 모르는구나. 아깝네요.”
“아깝고 자시고, 이미 현서 학생과 통화했습니다. 내 번호 알려준 적도 없다고 하던데요.”
“오. 굳이 전화도 해보셨어요? 오지라퍼시네요. 근데 뭐, 별 건 없는데요. 해킹이나 도청은 못 해요. 그냥 미행한 거.”
……해킹이나 도청보다 미행이 더 무서운데.
그리고 그 미행보다도 무서운 것이 하나.
여전히 무감정한 눈으로 웃는 손바울의 얼굴이, 내가 평생 만나본 그 누구보다도 더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그랬군요.”
“실례였다면 죄송합니다. 이젠 안 할 거니까 용서해주세요.”
“그런 건 됐어요. 아까 했던 이야기 말인데, 정말 누구 얘기입니까? 일곱 명을 살해하려는 남녀의 정체를 말해줘요.”
“그거요? 에이, 걱정하실 것 없다니까요. 설마 친하지도 않은 분한테 살인모의 같은 걸 말씀드렸겠어요? 하하.”
[내담자 평가]는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완전한 공감]은…… 사용할 수 없겠지.
라포 형성이 문제가 아니라 내 정신 쪽이 문제였다.
속에 무엇을 담고 있을지 모를 청년을 향해 그 기술을 사용한다는 것은, 호랑이굴에 자청해 들어가는 꼴이니.
그렇지만 NBSC의 기술이 그뿐인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훨씬 미약하고 제약도 크지만, 보다 안전하게 쓸 수 있는 독심술이 하나 있다.
내담자 한 명당 단 한 번만 사용할 수 있는.
「 [정문의 일침]을 사용합니다 > 손바울
주제 ‘남녀의 정체’에 대응하는 키워드는 다음과 같습니다
> ‘부모님’ 」
예상외의 결과에, 잠깐 멍해졌다.
“……부모님의 사연입니까?”
“네? 무슨 그런 실례되는…… 어? 뭐야? 진짜 아시나? 뭐예요? 오? 뒷조사? 그새? 어…… 아닐 건데? 뭐지?”
혼란에 빠진 손바울을 보는 내 마음도 복잡했다.
지인 얘기라는 해명은 진실이었던 모양이다.
걱정할 것 없다는 말 역시.
이미 끝난 사건이라고 하면, 뒤늦게 걱정할 이유는 없으니.
“부모님께선…… 어떻게 하셨습니까?”
“아니 근데 뭐지? 저 먼저요! 어떻게 아셨어요? 이거 완전 비밀인데? 콜드리딩? 그걸로 이렇게까지 추론이 되나?”
“……예. 얼굴에 쓰여 있었습니다.”
“하하! 아, 거짓말. 진짠가? 거짓말. 어…… 진짠가?”
손바울은 내 얼굴을 읽어내려고 애쓰고 있다.
하지만 그의 분석이 끝나길 기다릴 여유는 없었다.
“내가 질문할 차례죠. 그 뒤에, 어떻게 됐습니까.”
“응? 아, 여섯 명 죽였대요. 두 분이 협력해서, 완전범죄로. 한 명을 놓쳐서 아쉽게 됐죠. 아무튼 20년도 더 된 일이에요. 공소시효 끝.”
어떤 연쇄살인의 진범이 잡히며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대한민국의 살인죄 공소시효는 2015년에 완전히 폐지되었지만, 이미 시효가 만료된 사건에까지 소급되지는 않았다.
적용된 건 2000년 8월 이후의 사건들뿐.
그 이전의 살인은 처벌할 수 없게 되었다.
손바울의 말대로 이미 끝난 이야기다.
형법상으로는.
“바울 학생…… 왜 내게 그 얘길 해주는 겁니까.”
“음…… 이것도 아시는구나? 사실 저도 여기까지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기왕 이렇게 된 거 다음 단계까지 해보는 거예요. 소멸시효는 범죄 사실을 안 날부터 3년이죠. 선생님이 유족들 찾아내서 완전범죄였다고 알려준다면, 민사소송 걸 수 있어요. 어떻게 하실래요? 가서 알려주실래요?”
다음 단계라.
처음엔 과거의 사건을 현재의 것처럼 얼버무려, 내가 그 상황을 알았다면 어떻게 행동했을지를 캐물었다.
그리고 지금은 과거에서 비롯된 현실의 문제를 묻는다.
손바울은 나를 단계적으로 테스트하고 있었다.
그 문제에서 출제자의 의도는……
결국 누구를 우선할지다.
손바울의 모친이 당했다는 성폭행에 집중해 함무라비식의 보복을 묵인할 것인지, 그게 아니면 연쇄살인에 집중해 그 유족들에게 고인의 범죄와 그 보복에 대해 알려줄지.
전자는 양심적으로 택하기 어려운 길이었다.
무려 여섯 명을 죽인 범죄자들을 감싸는 셈이니.
그렇지만 후자는, 사고사로 알고 있었을 20여 년 전의 사건이 성폭행에 따른 보복살인이었음을 밝히는 것이 유족들에게 과연 도움이 될 일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그 고민들과 무관하게 이번에도 답은 정해져 있다.
나는, 상담사니까.
“하나 물어보죠. 바울 학생은, 그 남은 한 명의 가해자를 죽이거나 괴롭힐 의향이 있습니까?”
“네? 아뇨. 알아봤는데, 암 걸려서 죽었대요.”
“그 가족들에게 보복할 생각은 있습니까?”
“별로요. 그건 왜 물어보시는데요?”
“필요해서요. 상담학회의 윤리강령은, 내담자가 직접적으로 범죄를 일으킬 것이 현저히 의심될 때를 비밀보호 원칙의 예외로 인정합니다. 그게 아니라고 하면, 난 바울 학생의 가정사를 제보할 수 없어요.”
“오. 와. 저도 내담자예요?”
“내 안에 담겼으니까요. 원하던 바는 아니지만, 할 수 없지요. 허락해준다면 열한 시까지 잠깐 행동을 구속하겠습니다. 인터넷방송을 라이브로 볼 수 있는 기회, 잡겠어요?”
“오…… 솔깃한데요?”
전혀 솔깃하지 않은 목소리로 하는 말.
그렇게 한 명의 손님과 함께 원룸에 올랐다.
그것이 어떤 인연이 될지, 조금도 짐작하지 못한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