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32장 - 상담사의 용서 (2)
한설중학교에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학생들이 만들어서 학부형들에게 대접한다는 ‘보은의 급식’ 행사까지는 따라가지 못하고, 곧바로 여의도로 향했다.
<트립크루> 미팅을 위해서.
한산한 식당의 룸에는 유종찬 PD가 앉아 있었다.
“어? 아이고, 빨리 오셨네요? 반갑습니다. 유종찬입니다.”
“예, 박대민입니다. 다른 분들은……?”
“예, 아직이시네요. 곧 도착하시겠죠.”
작가들은 어디 있냐고 물어본 거였는데, 뜻이 안 통했다.
작가를 거치기보다는 진두지휘하길 즐기는 모양.
비쩍 말라 강퍅해 보이는 얼굴이 그 태도와 잘 어울렸다.
“아무튼 정말 다행입니다. 용식이 형이 괜찮다고 갈 수 있다고 계속 말하긴 했지만, 저희 입장에선 부담이 많이 됐거든요. 타 방송에서 이미 광장공포증 얘기가 나온 상황에서 해외여행 프로를 계속 간다는 부분이요. 재삼 말씀드리는 부분이지만, 정말 감사합니다. 박 선생님 덕택에 잘 풀렸어요. 이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섭외할 분들이 아니신데 말이죠.”
“서로의 목적을 위한 일 아니겠습니까. 편히 생각하시지요.”
“흠…… 예.”
김용식은 10년차쯤 된 중견 개그맨.
요즘 꽤나 인기를 끄는 인물인데, 최근에 타 방송에 게스트로 출연해서 광장공포증을 앓고 있음을 고백했다.
그 상황이 <트립크루> 제작진에게 부담이 된 것이다.
화제성이 시청률의 향상에 도움이 될 수는 있겠지만, 자칫 잘못되면 일이 커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저도 잘 몰랐는데, 광장공포증 그게 꽤 무섭더군요.”
“그렇습니다. 보통은 광장이라고 해서 폐소공포증의 반대쯤 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게 아니라 사람이 많은 공간에 대한 공포니까요. 폐소공포증과 마찬가지로 엘리베이터가 그 광장이 될 수도 있지요. 기차나 비행기 등은 더더욱 그렇고요. 대부분의 경우 공황장애를 동반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으니, 제작진에서 신경을 쓰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예. 그런 면에서 박 선생님이 꼭 필요했습니다. 이미 공황장애 친구 한 명을 도와주신 분이니까요.”
“……제가요?”
“예. 아, 그러니까 그게, 발작 상황은 아니었다고 말할 수도 있긴 하지만, 어쨌든 TOX 민성 그 친구가 발작 직전에 도움을 받았다고 말했잖습니까? 그걸 아는 사람들 입장에선 확 신뢰가 가는 인선인 거지요. 저희도 그쪽으로 어필을 할 예정이고요. 예고편에 쓰려고 자료영상도 받아뒀습니다.”
그게 그렇게 연결이 된 건가.
유종찬의 최초 목적이 짐작되는 부분이었다.
인기 개그맨 김용식을 끌고 프로그램을 진행하려면, 제작진이 광장공포증에 대비하고 있다는 제스쳐를 보여야 한다.
그걸 어필하는 데에 나만 한 인선이 또 없었다.
공황장애 진단을 받은 주민성이 내 덕에 호전됐다고 말하고 다니는 상황이기에.
「 TOX_MS 첫 팬싸 마치고 숙소 가는 길 ;) #오늘의TMI 저 오늘 약 안 먹었어요! 그래도 괜찮았지롱~ 이게 다 #꼰마님 덕분 ㅎㅎ 사랑해요 꼰마님 #꼰마업!
toxiclover 민쭈야ㅠㅠㅠ 누나가애낀다ㅠㅠㅠ 꼰마업!
ms_office_02 쭈오빠 머시써여!!! #꼰마업!
minZZoo 힝 울오빠 자래따 머시따 ㅠㅠ #꼰마업! 」
그런 식의 포스트들이 SNS에 자주 올라왔다.
내용이 영 민망해서 이용덕에게 물어봤더니, 웃으면서 고백하더라.
처음에는 ‘#이용덕’까지 기재하겠다 했었다고.
그런 것을 그가 거절하고 ‘꼰마’를 띄워달라 부탁했다고.
[그게 사실 아닙니까? 나야 민성이한테 해준 것이 없어요. 이제 유명세가 필요 없어진 상황이기도 하고요. 그러니 의연하게 상징성을 받아들이세요. 민성이 하나로 그칠 것 아니지 않습니까? 더 많은 환자…… 아니지. 더 많은 내담자들을 만나고 싶다고 했지 않습니까? 그 길에 도움이 될 겁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공황장애는 인지적 치료가 주효한 증상이니까.
처음으로 발작을 조절해본 경험이 주민성에게 자신감을 심어줘, 그로써 공포감을 경감한 것이다.
그 VR클립을 시청한 다른 공황장애 환자들에게도, 조금쯤은 무력감을 걷어내는 느낌을 줬을 테고.
그렇지만 내가 한 일은 별 게 아닌데.
그저 내담자를 믿었을 뿐이다.
끔찍한 공포에 마주서서 질환을 떨쳐낸 것은, 상담사 꼰마가 아닌 아이돌 주민성이었다.
어쨌든 그런 지점에서 유종찬에 대한 ‘진단’이 발생했다.
새 PD를 올리려던 자리에 자원해 나섰다고 했지.
이미 잘나가는 프로그램을 담당하고 있으면서, 뉴페이스인 나를 중심으로 한 신규 예능에 도전한 것이다.
그게 단순히 충동적으로 결정한 일은 아닌 듯했다.
아마도 최악의 가능성을 고려했으리라.
현장에서 김용식이 공황 발작을 일으키는 경우를.
그때는 당장 분량을 채우지 못하는 것은 물론, 거기에 대비하지 못한 유종찬 역시 도덕성 논란으로 곤란해질 터.
그 대비로 나와 세 명의 석학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신규 프로그램까지 떠안았을 법도 했다.
그렇다고 한다면, 순수하기보다는 주도면밀한 인물.
잠시 후에는 그 판단에 준거 하나가 더해졌다.
“그런데 그분…… 한효준 교수님. 그분이 비행공포증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이걸 잘 모르긴 하지만…….”
잘 모른다는 말로 둘러대며 정곡을 찌른다.
한효준의 비행공포증이 학계에서야 공공연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인터넷 검색으로 알 수 있는 수준은 아닌데.
미팅 전부터 성실하게 사전조사를 한 모양이었다.
여기에는 나 역시 성실하게 답해줘야 할 듯했다.
“예. 어제 함께 공항을 둘러봤고, 촬영 전까지 국내선 정도는 탑승해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염려 놓으셔도 됩니다.”
“그게…… 그렇게 쉽게 되는 일입니까? 제가 잘 몰라서요.”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증상이 심각하다면 급하게 처리할 수는 없는 사안이겠지요. 하지만 한 교수님의 경우에는, 사실 필요치 않기에 비행을 하지 않으셨을 뿐, 이미 스스로 극복하신 상황입니다. 정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흠.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유종찬은 이후 다시 그 화제를 꺼내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명기와 이용덕과 한효준이 차례대로 식당으로 들어오고, 식전의 미팅이 시작됐다.
“이렇게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다시금 인사드리겠습니다. <트립크루> 연출 맡고 있는 유종찬이라고 합니다. 이후에 박 선생님을 중심으로 진행할 행동교정 프로그램도 제가 연출할 예정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의 깜짝게스트 플랜을 들으며, 나는 종종 아쉬워했다.
충동적인 사람일 거라 생각했는데.
이아리나 주민성처럼 감성을 우선하는 성격일 것이라고.
자기 프로그램까지 놓고서 도전할 정도로, 내 신규 예능이 내재한 인간애에 푹 빠져 있기를 기대했었다.
하지만 그는 그보다는 훨씬 더 계산적인 인물이었다.
그렇다고 성격이 나빠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때로는 시청률을 위해 이런저런 꼼수를 쓰기도 할 법했다.
지레짐작이 아닌 확신이다.
오류 없는 [내담자 평가]가 보고한 내용이기에.
「 내담자 명 : 유종찬
평가 결과 : 주도면밀하다. ‘박 선생님’을 이용해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끌어올리려 획책하고 있다. 」
……실망할 만한 일은 아니다.
악한 것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인간일 뿐이니.
계산 하나 없이 움직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막연한 기대에 미치지 못해 아쉽긴 하지만, 해야 할 것은 실망이 아니었다.
나는 대비할 따름이다.
그가 무언가 문제를 일으키지 못하도록 제지할 방법을.
혹시 내 대비가 부족해서 그가 악행을 저질렀을 때……
그를 용서할 준비를.
“후배님, 이제 어디 가시나? 한 선생님 차 가져오셨잖아요?”
식사를 마치고 나오며, 조명기가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늘 그랬듯 싱그럽게 웃는 얼굴.
그렇지만 그 안에 예리한 송곳 같은 것이 보였다.
“……혹시 하실 말씀이 있으신지요?”
“흠, 정답. 나 일부러 택시 타고 왔어요. 데려다줄래요?”
“기쁘게 모시겠습니다. 어디로 가십니까?”
“대민 씨 가는 곳이요.”
“한가하십니까?”
“그것도 정답. 하지만 꼭 한가해서는 아니고요.”
마침 한가해서 다행이라는 얘기였다.
나 역시 낮의 일정은 이걸로 끝.
집에 돌아가서 아내와 재단 이야기만 좀 나누면 된다.
조명기와의 드라이브에 한 시간 정도는 할애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강변북로에 접어들자마자 나온 조명기의 이야기는, 한 시간을 들여도 해소가 될지 모를 문제였다.
“그래 그래, 역시 드라이브는 강변이지. 아무튼…… 수요일 방송 잘 봤어요. 매일은 못 보는데, 초대석은 챙겨보게 되더라고.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거든요. 케바케 그 잘생긴 친구, 혹시 방송 끝나고 차도 태워주고 그랬어요?”
“……아닙니다.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됐지만요.”
“결과적으로는? 뭐야, 설마 자발적으로 택시를 탔어요?”
“친동생이 비 예보를 듣고 우산을 전해주러 왔습니다. 그 앞에서 변화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에요. 저와 전화를 연결한 채, 강서구까지 그 차로 이동했습니다.”
“허. 거참, 별일이네요. 대단한 일이에요. 정말 동화 같은 일이야. 그래서…… 나는 참 그렇습니다. 무척 기쁜 한편으로 걱정이 돼요. 후배님. 일전에도 한 차례 얘기했던 바지만…… 우리네 세상은 동화가 아닙니다. 잘 알고 있지요?”
“……케바케 내담자 얘기를 하시려는 게 아니었군요.”
“그렇지요. 대민 씨는 능력 있는 상담사예요. 그 힘으로 자신의 운을 만들어내고 있고…… 지금껏 마치 동화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오셨죠. 하지만 그게 말이죠, 꼭 그렇진 않거든.”
조명기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당장 그가 4월에 매일 찾아갔다는 유족들만 해도 그렇다.
용서하면 편하다는 것을 그들이라고 모르겠는가.
매일같이 가슴이 찢어지는 괴로움에 절망하면서도 끝끝내 진상규명을 외치는 그 의지 앞에서, 어찌 원망하지 말고 편해지라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아마 그런 이야기를 들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명기는 보다 가까운 사례를 제시했다.
더 가깝고, 더 흔한 이야기를.
“내 지인 중 한 명이, 어렸을 적에 성폭행을 당했어요.”
“……그렇군요.”
“그 친구가…… 보자. 중2면 몇 살이죠? 열다섯?”
“그렇습니다.”
“응, 그러네. 그때 강간을 당하고, 이제 심각한 PTSD를 앓게 됐지요. 낯선 사람을 두려워하는 건 기본이고…… 아예 성관계를 못 한대요. 그때 담배빵까지 당했거든. 성적 흥분 상태만 되면 flashback(갑작스런 회상) 돼서, 도저히 안 선대.”
“……예? 남자였습니까?”
“그렇죠. 응? 뭐야, 당연히 여자 얘기일 거라고 생각한 거야? 그거 안 좋은 태도예요. 누구나 피해자일 수 있어요.”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아무튼 그런 지인이 한 명 있어요. 그제 대민 씨 방송을 보면서 그 친구를 생각했어요. 케바케 그 친구야, 몸은 멀쩡하잖아. 지금까지 대민 씨가 상담해온 케이스들도 그렇잖아요. 신체적으로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남은 케이스는 없었잖아. 그런데…… 내 지인은 좀 다를 수 있어요. 걔가 그날 방송을 봤다면,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더 짧을 수 있는 이야기를 개인의 입장에서 풀어 설명한다.
남성 입장에서 공감할 가능성이 높은 케이스로.
논리로 압도하지 않고 감화하고자 하는 마음이겠지.
선배의 고마운 배려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지점이 있다.
우리는 용서를 말해야만 한다.
가해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 모든 피해자들을 위해서.
“말씀 잘 알겠습니다만…… 김 이병이라고 합니다.”
“응? 뭐가요?”
“제가 최초발견한 자살자입니다. 도저히 이름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저 김 이병…… 그렇게만 알고 있습니다.”
“예…… 그래요. 김 이병. 그렇군요.”
“목을 매단 시신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없어요.”
“무전 뒤 장교들이 달려오기까지 3분을, 그 앞에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10초쯤 되니 다리에 힘이 풀리더군요. 무릎 꿇은 채로 그 불어버린 얼굴과 쏟아진 체액들을 마주하며……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저 아이를 죽인 것은 누구인가.”
“음. 사회적 타살, 그런 이야기를 하지요.”
“예. 우리 모두가 죽인 셈입니다. 하지만 범인은, 분명히 한 명입니다. 그 본인이지요. 김 이병의 자아가 스스로의 존재를 살해했습니다. 저는 그런…… 살해를 막고 싶습니다. 나도, 타인도, 용서하지 못하면 위해로 이어집니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한 첫걸음이 용서입니다. 그 외에는 답이 없습니다.”
“음…….”
“지인 분을 말씀하셨지요. 공감합니다. 저라도 그 상황에서는 수십 년 동안 가해자들을 증오할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놓아주자고. 보내주자고. 무의식을 움켜쥐고 있는 지나간 시간을, 이제 용서하자고. 그것만이 우리가 살 수 있는 방법이니까요.”
그렇기에 상담사가 향할 이상향은 단 하나.
사악한 본능의 가해자들과, 이유 없이 끔찍한 괴롭힘을 당한 피해자들이, 손을 잡고 성장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어느 하나도 내 오아시스에서 배제해서는 안 된다.
처벌은, 복수심 없이 사회정의만을 위한 행위여야 한다.
그 지점은 일견 불공정한 목적지로 보인다.
가해자는 증오당해야 마땅하다고 말하는 것도 당연한 일.
피해자의 표층의식을 고려하는 따뜻한 마음들은, 함무라비식의 보복이야말로 그들의 이상향이라고 확신하곤 한다.
그러나 정말 그런 것일까 의구하지 않을 수 없다.
적법한 처벌은 응당 이뤄져야 할 일.
그러나 그것이 피해자의 상처를 치유해주지는 못한다.
법은 저간의 모든 사정들을 무시하고 오직 결과에 대해서만 논하니까.
그 안에 담긴 무수한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이 아니라, 피해에 등급을 매기고 그것을 벌금이나 형량으로 환산할 뿐이다.
법망의 처벌은 결코 고통의 마침표가 될 수 없다.
피해자도 친지들도 그저 피해 사실을 덮고 살게 될 뿐이다.
그나마 사회불신은 예방할 수 있겠지만……
불가해한 악의에 노출되었던 피해자는, 그 처벌과 무관하게 낯선 이를 만날 때마다 불안과 공포에 떨 수밖에 없다.
상담사라면 그 이면을 바라봐야 한다.
진정으로 상처를 치유하는 길은, 용서에 있음을.
인간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다.
본능에 잠식돼 때로 못된 짓도 저지르는 동물이지만, 그 근원이 악마가 아닌 잘못된 추동의 착각임을 확신할 때.
우리는 비로소 사람을 믿으며 살아갈 수 있게 된다.
그것이 진정한 피해자중심주의.
나를 위한 용서의 완성형이다.
“하지만, 대체 누가 그럴 수 있겠어요? 난 못 하겠습니다. 나는 용서할 수 없어요. 내 신체에 상처를 남긴 일이 아님에도 그래요. 그 불쌍한 녀석…… 자기한테 BPD(경계선인격장애)가 있음을 알기에, 조금이라도 컨디션이 안 좋은 날이면 방에 자기를 가뒀던 아이예요. 애인을 만나는 날이면 꼭 바늘을 챙기고 가서, 주체할 수 없는 충동이 치밀 때마다 그걸로 자기 허벅지를 찔렀던 아이예요. 그런 녀석을, 시청률에 눈 먼 개새끼들이 살해했어요. 대민 씨 당신이 말한 그 자살을, 그런 끔찍한 일을, 우리가 강요했어요. 그런 자들을…… 그 꼴을 만든 나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단 말입니까…….”
조명기는 간절한 표정으로 묻고 있다.
내 말을 원망하면서도, 내 대답을 하릴없이 기대하면서.
마침내 때가 된 듯했다.
눈앞에 두 줄의 메시지가 떠오른 것을 보면.
「1. 예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R-1 S+1 P-3)」
「2. 예, 선배님은 살인자입니다. (R-4 S+9 P+5)」
[직면 선택지]는 여전히 극단적이다.
가장 소극적이고 가장 적극적인 직면들을 내놓고 있다.
오류 없는 결과 예측과 함께.
늘 그랬듯, 답은 그 사이의 무언가다.
“우리 중 죄 없는 자가 있겠습니까.”
“……뭐라고요?”
“정말 나는 죄가 없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자가 있겠습니까. 저는, 살기 위해 용서를 말해야 합니다. 일전에 제 PTSD에 대해서 물어보셨지요? 예, 맞습니다. 저는 트라우마를 겪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건 시신을 마주한 충격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날…… 그날, 봤기 때문입니다.”
떠올리지 않기 위해 기억 저편에 묻어뒀던 영상.
그것이 플래시백처럼 눈앞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비가 와서, 급히 빨래를 걷고 있었습니다. 김 이병을 말처럼 탄 채 훈련장을 내려오는 병장이 보이더군요. 그 병장의 이름은…… 황당하게도, 그쪽은 기억이 납니다. 김대청 병장. 김 병장이 김 이병의 허벅지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습니다.”
“그건…… 좀 심한데요.”
“그보다 더 심한 일도 많았다고 합니다. 제가 몰랐을 뿐…… 아니, 모른 척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날 밤에 소대장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한참을 쭈뼛거리다가, 물러났습니다. 다른 중대의 관심병사 얘기 따위에 아무도 신경 써주지 않으리라 짐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날 저는…… 김 이병의 죽음을 마주했습니다.”
“음…… 그랬군요.”
그렇기에, 나 역시 살인자다.
우리 모두가 살인자다.
꼭 어떠한 학대를 묵인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신체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우리는 스스로 인지하지도 못한 채로 내 주변에 무수한 상처를 입히며 살아간다.
살 좀 빼라 한마디에 고통 받는 이들이 있다.
그것도 못하냐 한마디에 눈물짓는 이들이 있다.
우리는 모두가 모두를 가해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들 중 우리에 대한 증오와 통증을 머금고 자살한 이가 단 하나도 없을 거라고, 대체 어떻게 자신할 수 있단 말인가.
신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나를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아시지 않습니까. 사실은 우리 모두가 언제든 살인을 할 채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런 주제에 나는 선인입네 하며 살아갈 따름입니다. 그래야 정신질환에서 자신을 지켜낼 수 있는 까닭이겠지요. 그 방어기제 때문에 용서가 어렵습니다. 나는 선인이고 적은 악인이니, 당연히 증오해야 한다고 믿게 됩니다. 하지만 그 증오가 무엇을 낳을까요. 스스로를 좀먹을 따름입니다. 저는, 그걸 두고볼 수가 없는 겁니다. 조명기 선배님. 당신은 살인자입니다. 박대민. 나는 살인자입니다. 나는 나를 용서하기 위해서 당신을 용서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도 그랬으면 합니다. 당신을 용서하기 위해서, 시청률에 눈 먼 개새끼들을 용서해주세요. 그들이 바로 인간이니까요.”
그 직면은, 일견 실패처럼 보였다.
조명기는 그 뒤로 입을 꾹 닫았다.
내 궤변 따위엔 더 이상 관심이 없다는 듯이.
상담에서 나와서는 안 될 회피의 태도였다.
그렇지만 표현이란 것도 그렇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
[직면 선택지]가, 조명기의 마음을 오류 없이 예측했다.
「3. 우리는 살인자입니다. (R+9 S-9 P+9)」
……P가 참여도라고 생각했는데, 꼭 그런 것은 아닌가.
우리는 대화에 참여하지 않고 차를 몰았다.
한강 위로 비친 태양이 참 뜨거웠다.
간헐적으로 볼 위를 흐르는 조명기의 눈물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