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
32장 - 상담사의 용서 (1)
“……에바야.”
박중민은 무척 진지하게 신조어를 읊었다.
그 심리가 참 복잡해 보였다.
“방송 다 봤어. 서울대 박사에, 미인에, 자기 사업장까지 있는 전문가잖아. 그런 사람이랑 나랑 어울릴 리가 있나.”
“그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알면서 왜 소개팅 주선하려는 건데?”
“부모 마음이다. 아무리 괜찮은 며느리감도 내 새끼보다는 못하니까, 내가 아는 가장 좋은 사람을 소개하는 거야.”
“……엄마아빠 대신이라고?”
“그래. 오지랖이냐?”
“아니 뭐, 그런 건 아닌데…… 하하.”
웃어버리는 심경을 모를 바는 아니었다.
8년을 연락 한 통 없이 살았으면서, 서른일곱 먹은 동생에게 보호자 노릇을 하려는 게 황당했겠지.
그렇지만 박중민은 곧 나를 당황시켰다.
“지수는 좋겠네. 이런 아빠 있어서.”
“……진심이야?”
“내가 형한테 아부해서 뭐 얻을 게 있다고. 아무튼 마음은 고마운데, 못 할 것 같다. 내가 그…… 자만추라서.”
“자만추는 ‘자기만족 추하다’의 줄임말이라더라.”
“아, 뭘 또 그렇게 말하냐? 난 됐어. 아무튼…… 내릴까.”
묘역에는 아침부터 꽤 사람이 많았다.
어버이날인 까닭.
보내드리고 나서야 한없이 후회하게 되는 그리운 분들을 찾아서, 중장년들이 여기저기를 이동하고 있다.
박중민 역시 활기차게 언덕을 향해 걸었다.
“2주 만에 또 오네. 이렇게 자주 온 건 처음인데.”
“보통 언제 왔는데?”
“기일, 명절, 어버이날, 그렇게 분기별로?”
“잘했네. 장남은 기일에도 찾아뵙지 못했는데.”
“일하느라 바빠서 그랬던 거잖아.”
“세상에 바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 변명일 뿐이지.”
“됐어. 엄마아빠가 그런 걸로 서운해할 분들인가.”
사실 나는 잘 모른다.
내 양친이 어떤 분들이셨는지.
8년 동안 자기 시간 날 때만 대중없이 찾아온 장남을 어떻게 생각하실지 확신하기엔, 정서적 교류가 없다시피 했다.
옛날 장남들의 특징이다.
부모는 온갖 기대를 전할 뿐 감정을 감추고, 아들 역시 기계적으로 지시에 따르면서 애교 한 번 부리지 못한다.
그러다보면 자연히 마음의 거리가 멀어진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의리’로 강하게 연결될 뿐,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난다거나 하는 정감과는 달라지는 것이다.
그런 나에 비해 동생은 꽤 응석받이였다.
당장 부모님을 부르는 호칭만 해도 ‘엄마아빠’.
중학교 입학한 뒤로 ‘어머니 아버지’를 강요당한 나와 달리, 서른이 다 되도록 그렇게 부모님과 가깝게 지냈다.
그게 때로는 질투가 날 정도였다.
하지만 사람은 자기 입장만 볼 따름인 법.
박중민은 전혀 다른 측면에서 나를 질투했음을 고백했다.
“엄마, 아빠, 나 또 왔어. 오늘은 형도. 형 자주 오니까 좋지? 뭐만 하면 대민이 대민이 그랬잖아. 감이나 밤이나 실한 것들 나오면 형 줘야 된다고 빼놓고, 내가 심심해서 하나 까먹으면 아주 화를 화를……. 그래놓고 막상 형 보러 가면 공부 잘해라 동생 챙겨라 바르게 살아라…… 그런 얘기만 하고. 왜들 그렇게 표현을 못 했나 몰라. 요즘 그런 사람들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 츤데레라고 그래. 엄마아빤 모르지? 하하.”
츤데레 같은 부모님과, 그들을 닮아 무뚝뚝해졌던 장남.
양쪽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던 건 동생뿐이었다.
가끔은 동생이 보지 못한 부분도 있었지만.
“형 입사하고 얼굴 보기 힘들어진 뒤로는, 좀 우울해하셨어. 멍하니 전화기만 보시는 날이 많았던 거야. 그럴 만도 했지. 농사야 나 대학 졸업하고도 계속 지으셨지만…… 그 보람이 어디 자식농사만 한가. 매일 형 전화 기다리셨어. 보고 싶다고 말도 못 하고, 그냥 전화만 기다리셨던 거야.”
“그랬구나.”
“나는 어떤 기분이었냐 하면, 다른 남자 좋아하는 여친한테 계속 구애하는 그런 기분이었어. 어떻게 해도 장남밖에 없더라. 그래도…… 첫 전시회 열었을 땐 흐뭇해하셨나.”
“흠. 흐뭇한 마음 이상이셨다.”
“그래? 그랬어?”
“전시회 잡혔다는 얘기 듣고 전화 드렸을 때, 네 도록(圖錄)을 처음부터 끝까지 달달 외우시더라. 말로만 들은 거지만 어떤 그림들이 있는지 다 머릿속에 그려질 정도였어.”
“……그랬구나.”
“너 학교에서 맞고 왔던 날 기억해? 너한테는 쓸데없이 나서니까 애들한테 미움 산다고 나무라셨지만, 밤에 나 데리고 때린 녀석 집에 찾아가셨다. 거기서 그러시더라. 한번 당신도 때려보라고. 그럴 자신 있으면 당신 새끼 또 때려도 뭐라고 안 하겠다고. 걔, 진혁이었나? 그 뒤로 친해졌지?”
“어…… 어. 왜 그러나 했는데…… 그런 일이 있었구나.”
표현할 줄 모르는 옛날 부모님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
아버지가 된 내가 아직 결혼하지 못한 동생에게 이런저런 말을 하다보니, 다시금 화제가 소개팅으로 이어졌다.
“좋은 사람을 잘 만나야 돼. 조만간 자리 한 번 주선하마.”
“아, 왜 그래 진짜. 자만추라니까.”
“자연스러운 만남으로 주선해주면 되잖아.”
“……어떤 식으로?”
“네가 초대석에 한번 나오면 되지. 화가의 고민 사연으로.”
“으엑.”
“겸사겸사 그림도 좀 소개하고 하면 좀 좋냐.”
“으…… 난 그런 거 싫어.”
“미디어 유명세로 네임밸류 띄우는 게?”
“그래. 어떤 창작물이든 작가와 함께 해석되는 게 사실이긴 하지만, 그런 외부적인 프레임에 갇히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냥 내 그림이 작품으로만 보였으면 싶어.”
“큐레이터들의 존재가치를 부정하는 말인데.”
“아니, 큐레이터들이 작가 약력 읊어주는 그런 건 미디어가 만들어낸 편견인데…… 실제로 그런 데도 있긴 하지만, 보통 전시회는 그런 느낌은 아니야. 형도 좀 다녀봐야 돼.”
귀경할 때까지도 설득은 지지부진했다.
동생이 열심히 말을 돌렸던 까닭.
“아무튼 어버이날인데, 지수네 학교는 행사 있나?”
“아니. 그쪽은 월말에 가정의 달 축제를 한다더라.”
“그래? 그러면 오늘도 대학교 가는 거야?”
“그건 아니고. 하루 쉬고 조카 학교 가기로 했어.”
“조카? 누구? 지민이 결혼도 안 했잖아?”
“지인 딸 말하는 거야. 학예회 같은 걸 한다나봐.”
“아하. 되게 친한 모양이네? 그런 데도 초청하고.”
“그런 편이지. 일 없으면 너도 같이 갈래?”
“어유. 나 나름 바쁘거든? 전시회가 내일모레야.”
바쁜 동생을 작업실에 내려주고 나니 9시 10분.
곧바로 차를 몰아 강동구로 향하자, 10시가 되기 전에 한설중학교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곳 강당에서 이아리의 양친과 마주했다.
이미 가슴이 벅차서 손을 떠는 상태였다.
“우리 딸이…… 정말로 앞줄에 서는 모양이에요.”
“예, 그럴 겁니다. 워낙 잘한다고 하더군요.”
“그런 재능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재능 쪽이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자리를 펴줘도 쑥스러워 나서지 못하는 게 요즘 애들이라고 하지만, 춤 좀 춘다 하는 중학생들에겐 그게 아니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주목을 받을 거라고 확신하는 일이니까.
그렇기에 무수한 청소년 댄스팀이 지역 경연대회나 홍대 앞을 차지하곤 하는 것이다.
어버이날 치어리딩 공연도 그런 느낌이었다고 한다.
남녀공학에서 전교생이 참여하는 행사이기에.
아리의 말에 따르면, 외모에 자신이 있는 여학생들 사이에서 앞줄에 서기 위한 ‘기싸움’이 치열하다고 했다.
마치 아이돌들이 센터 경쟁을 하는 느낌이었다고.
그런 각축전 속에서 아리가 두각을 드러낸 것이, 순수하게 실력만으로 이뤄진 일일 리 없었다.
무려 여덟 명의 가짜 친구들 덕분이다.
콩고물을 노리는 그들이 아리의 지원군으로 가세한 일이, 학교라는 이름의 정글에서 그녀를 맹수로 변모시켰을 터였다.
사실은 순해빠진 토끼인데도.
“아! 삼초온!”
“아리야, 안녕. 준비는 잘돼가?”
“네에! 저희 인제 옷 갈아입으러 가요. 아빠, 삼촌 챙겨줘.”
“음. 알았다.”
자신들보다 날 더 신경 쓰는 딸의 태도에도 내외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 감개무량한 얼굴.
아리가 스스로를 해치려 했던 4월까지는, 오늘 같은 날을 상상도 해보지 못했던 까닭이리라.
그 마음을 이해하며 식순을 기다렸다.
[귀한 시간 내서 방문해주신 학부형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한설중학교 개교 12주년 어버이날 기념행사를 시작하겠습니다. 가장 먼저, 교장선생님의 축사가 있겠습니다.]
어버이날에 행사를 여는 학교는 이제 많지 않다.
이유는 두 가지 아닐까 싶다.
촌지가 거의 근절되고 맞벌이가 기본공식인 시대가 되어, 학교 입장에서도 무의미한 행사라고 여기게 됐을 법하다.
그리고 보다 근본적으로는, ‘어버이’가 없는 아이들에게 차별적 경험이 될 수 있다는 자성이 있었을 터였다.
건강한 가정에서 화목하게 자라는 것은 그저 행운.
그렇기에, 가정의 달 5월이 모두에게 환영받지는 못한다.
어떤 아이들은 부모가 없어서.
어떤 부모들은 아이를 먼저 떠나보내서.
어린이날이나 어버이날을 맞을 때마다, 그 사람들은 ‘보통’ 가족에게만 친절한 5월을 저주한다.
이런 식으로 학생들의 헌정 무대와 학부형의 관람을 메인으로 삼는 행사라면, 상대적 박탈감이 더욱 클 터였다.
내 옆의 내외도 그렇게 될 수 있었다.
아이를 잃고 어린이날을 통곡으로 채웠을지도 모른다.
내 아이의 빈자리를 잊고 어버이날을 기념하는 학교를 보며 복수심을 불태웠을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들이기에, 예쁘게 차려입고 1열에 서는 이아리를 보는 표정이 침착할 수 없는 것이다.
[다음은, 2학년 2반 학생들의 치어리딩 공연입니다.]
남녀 20여 명의 학생들이 삼각편대로 자리하고, 맨 앞이자 한가운데 위치에 응원단장복을 입은 이아리가 섰다.
곡은 싸이의 <아버지>.
흥겨운 노래에 맞춰 아이들의 작은 몸짓이 무대를 채우기 시작했다.
그게 이아리 학급의 전원이다.
내가 만든 8인의 가짜 친구들 중 다섯이 저 안에 있다.
다른 여학생들은 일곱 명, 남학생은 열한 명.
그 18인 안에 아리를 자살로 몰아간 주동자가 있을 터였다.
사실은, 보자마자 한 명을 특정할 수 있었다.
110의 ‘진단’이 어린 표정들을 읽어냈기에.
무려 여섯 명의 대형 그룹이 된 아리 파벌에 밀려 뒷줄에서도 가장 끝으로 간 단발의 여학생이, 모든 일들의 원흉이나 지을 법한 표정으로 이를 갈고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내게 아리의 부친이 속삭였다.
“저는요. 사실은…… 오늘 오기 싫었어요.”
“마음이 복잡하셨던 모양입니다.”
“……예. 저 안에 내 딸 괴롭힌 애들이 있을 테니까요. 선생님이 친하게 해주셨다는 애들이야 몇 번 집에 놀러 오기도 했지만…… 그리고 걔들이야 옆에서 하는 짓이니까 따돌림 당하기 싫어서 따른 것이었겠지만…… 그 외에는 다를 거 아닙니까. 직접 왕따 시킨 애…… 그 악마도 저 위에 같이 있을 거 아닙니까. 그런 무대를 본다는 게 참…….”
모를 수 없는 마음이다.
나라고 달랐으랴.
내 딸을 괴롭힌 녀석이라면,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벌을 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거기까지는 장려하지 못했다.
한효준과는 상황이 달랐다.
그 교수는 오랜 세월 스스로를 다스려온 인격자.
하지만 아리는 이제 고작 중학교 2학년이니, 방관자들이라면 몰라도 주동자까지 용서할 수는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조차 옛날 아저씨의 착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대형을 이동하던 중에, 표정이 안 좋던 아이가 넘어졌다.
연습에 열심히 참여하지 않았던 까닭이겠지.
다른 아이와 동선이 엉키며 앞으로 고꾸라지더라.
그럼에도 주변에서 도와주려는 아이가 없었다.
돌아가는 분위기를 알 법도 했다.
없는 말을 지어내서 멀쩡한 애를 원조교제 날라리로 꾸며냈던 아이임이 드러나, 이미 멸시받고 있는 것이겠지.
다섯 명의 가짜 친구란 그 정도의 힘을 갖고 있다.
여학생이라고 해봐야 고작 열세 명에 불과한 학급이니까.
그렇기에 쌤통이라며 좋아해도 됐을 상황.
이아리는, 무릎을 어루만지는 아이를 부축했다.
평소의 그 표정으로.
어떤 악의도 없이 순진무구한, 때로는 그래서 주변 아이들의 시샘을 사기도 했을, 아름답고 선한 얼굴로.
“……아버님. 아리는, 용서한 것 같습니다.”
“예? 그게 무슨…… 아리가 뭐라고 얘기를 했습니까?”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편안해 보이지 않습니까.”
“그야…… 그래 보이긴 하네요.”
“참 착한 아이예요. 그렇기에 때로 상처도 받겠지만, 결국은 이겨낼 겁니다. 나를 괴롭힌 아이조차 이해해줄 겁니다.”
“그렇게 호구처럼, 그러면 안 되는데.”
“그래도 됩니다. 부모님이 계시고, 제가 있으니까요. 아리는 극복해낼 겁니다. 누구도 미워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미움 받지 않는 길을 걸을 겁니다. 그러니 편하게 봐주세요. 아리가 바꿔낸 저 학급의 공연을요.”
아리의 부친은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그저 슬프고도 기쁜 눈으로 하염없이 딸을 바라보고 있다.
그런 그의 옆에서, 나는 아버지를 생각했다.
차라리 당신을 때리라고 외치셨던 내 아버지를.
왜 그러셨을까.
미웠을 텐데.
가해자든 그 애비든, 멱살을 잡고 욕하고 싶으셨을 텐데.
그는 왜 양팔을 펼친 채 자신을 때리라고 했을까.
공연을 마치고 자리로 돌아온 이아리에게 물었다.
왜 부축해줬냐고.
자그마한 천사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흔들었다.
“아, 아닌데요? 수진이가 그런 거 아닌데요?”
“그래? 그 녀석이 주동자냐고 물어본 적은 없는데.”
“아…….”
“그 아이까지 용서해주라고 말했던 건 아닌데.”
“응…… 근데요, 수진이한테, 제가 잘못했던 거 같아서.”
“아리 너는 잘못하지 않았어.”
“아니요, 근데요, 수진이는…… 엄마아빠가 없대요.”
“어?”
“근데 저는 모르고 엄마아빠 자랑 많이 했어요. 우리 엄마 이쁘고 요리도 잘하고, 아빠 맨날 일찍 들어와서 놀아준다고. 눈치 없이 계속 그러니까 미웠던 거 아닐까요?”
이 갈던 얼굴이, 단지 아리 때문만은 아니었나…….
그런 개인사도 무서운 날조의 변명이 될 순 없다.
하지만 더 아무런 지적도 할 수 없었다.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롭게 만들었던 가해자를, 피해자인 아리가 두둔하고 있는 순간이기에.
“……다 컸네. 우리 아리, 어른이야.”
“히히. 진짜요? 잘했어요? 시집가도 되겠어요?”
외모도 말투도 어리지만, 나보다도 더 어른스러운 아이.
그 꼬마숙녀를 바라보며 확신했다.
그녀에게 더는 상담사가 필요치 않음을.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을, 이미 홀로 해낸 까닭이었다.
용서는 가장 어려운 해결책이다.
그 선택지를 향해 가는 길목에는 장애물이 넘친다.
개인적인 복수심에서 정의구현이라는 명분에 이르기까지.
우리 뇌 속의 무수한 프로세스가, 용서를 가장 마지막 선택지로 미뤄둔 채 다른 시원한 가능성들을 찾게 만든다.
하지만 처벌도 복수도 끝은 개운치 못하다.
현실적으로는, 무기징역이 아니고서야 가해자가 언젠가는 사회로 돌아오게 되고, 개인적으로 복수를 할 경우 오히려 본인이 가해자로 둔갑하고 만다.
거기에 정서적으로는 오히려 자승자박이다.
가해자가 떵떵거리며 잘 사는 것보다는 조금 더 낫겠지만, 처벌도 복수도 이미 발생한 트라우마를 지워주지는 못한다.
결국 그것이 내면을 망가뜨리고 만다.
그렇기에 우리는 언제나 상대의 변화를 기다린다.
가해자가 진심으로 뉘우치고 반성하기를.
그럼으로써 내 안에 가득 찬 독을 지울 수 있게 해주기를.
그러나 그런 기대는, 가해자를 변화시키기 어렵다.
심리학계에서 여러 차례 검증한 진실.
반성하고 사과하라는 투의 뉘앙스는, 오히려 대상으로 하여금 존재가치를 증명하기 위한 반발심을 발동하게 만든다.
그 자기증명을 위해 도리어 잘못을 합리화한다.
진정으로 가해자를 바꾸는 것은 으름장이 아니다.
조건 없는 용서.
반성을 했을 때나 주려던 용서를, 반성보다 먼저 주는 일.
선후가 뒤바뀐 이상한 프로세스다.
그렇지만 그래야 비로소 상대를 마주볼 수 있다.
인간애로 가득한 무조건의 용서만이, 서로의 방어기제를 허물고 마음의 호수를 정화할 수 있다.
“삼촌한테도 너 같은 친구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랬으면 더 많은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었을 텐데.”
“어…… 진짜요? 아리 좋은 친구예요?”
“그래. 가짜 친구들도 반하게 될 친구. 언젠가는…… 수진이도 진짜 친구가 되고 싶어서 다가오게 될 친구야.”
“헤헤. 삼촌 거짓말쟁이. 근데 그랬으면 좋겠다아.”
그렇게 될 것이다.
진혁이라는 아이가 동생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됐던 걸 보면.
바다 같은 아리의 호수는, 늪이 되어버린 친구들의 마음까지도 전부 채울 수 있을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