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
31장 - 케이스 바이 케이스 (3)
“최고시청자 4만 3천. 별 12만 개. 사 삼 십이!”
진대수는 주먹을 휘두르며 외쳤다.
“레전드가 떴습니다아!”
“……좀 조용. 옆방에서 뭐라고 하겠다.”
“세이 박수철! 세이 박수철! 박! 수! 쳐-ㄹ!”
말려도 잘 듣지 않더라.
히딩크에 빙의한 듯 연신 어퍼컷을 날려대는 통에, 별 수 없이 홀로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
유명 스트리머들은 각자의 레전드를 갖고 있다.
BJ명을 들었을 때 이구동성이 나오는 에피소드.
새롭게 유입된 팬들이 가장 먼저 보게 될 하이라이트.
이를테면 BJ진석은 100번의 다이어트 리액션을 실시하고 <피 땀 눈물>을 부른 일로 유명세를 끌었고, BJ뜨갱은 고물 트럭 한 대를 해머로 때려 부순 뒤 스타 반열에 올랐다.
내 경우에는 정보람과의 합방이 그 레전드였다.
유튜브 하이라이트 조회수가 이미 300만 이상.
이후로도 도세나 초대석이나 이호정 합방 등이 좋은 반응을 얻었지만, 아무래도 최초의 임팩트를 넘지는 못했다.
그렇기에 한동안 ‘존잘 꼰대 때문에 울어버린 BJ보람’을 뛰어넘을 방송이 나오기는 어려울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방송은……
대수의 설레발처럼, 그게 될 것 같다.
오랫동안 ‘꼰마의 고민상담소’를 대표할 만한 에피소드가.
물론 12만 개의 별사탕이 충격적인 일은 아니다.
10만 개와 12만 개의 인상에 큰 차이는 없으니.
사실상 그중 1/3이 박수철 박진철 형제의 후원이었으니, 평소보다 압도적으로 좋은 방송이었다는 판단준거는 못 됐다.
그렇지만…… 케바케의 3만 개 후원은 극히 드문 일이다.
최상위권 여캠 방송에서도 특별한 날이 아니면 잘 나오지 않는 수준이라서, 상담으로 그게 됐다면 이슈거리였다.
그 친동생이 1만 개를 추가했다면 더더욱.
‘상담료 400만원’ 등의 썸네일만으로도 많은 클릭을 유도할 수 있을 듯했다.
그에 더해 내용 쪽도 호응이 컸다.
셜록 홈즈 같은 소리에 처음에는 대본 아니냐며 코웃음 치는 이들이 많았지만, 게스트의 반응 때문에 의심이 불식됐다.
어딜 어떻게 봐도 진정성 가득한 반응이었으니까.
만약 그걸 꾸며낼 수 있는 연기력을 가졌다면, 박수철은 이미 각종 영화제의 남우주연상을 꿰찼을 터였다.
미남 게스트가 양친의 사고와 마음속의 상처를 이야기하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 그림.
그것이 합방이나 이벤트도 없이 43,305명을 붙잡아뒀다.
새롭게 팬가입한 시청자의 수도 천 명 이상.
이 정도면 레전드 각을 회의하는 것이 이상할 터였다.
그렇게 만족스러운 성과를 앞에 두고……
나는 김지연을 돌아봤다.
“택시, 아마 타지는 못했겠지요?”
“네? 아, 네. 아직은 무리일 거예요. 트라우마를 연상시키는 상황에 대한 극복은 거의 마지막 단계니까요. 지속노출치료나 EMDR(안구운동 민감 소실 및 재처리요법)도 없이 바로 해소되지는 않겠죠. 그런데…… 잘 아시면서 왜 주셨어요?”
“주머니 속에서 만지작거리라는 의미에서요.”
“만지작거리면서 얻는 건요?”
“온기입니다. 아직 밤에는 꽤 추우니까요.”
“하핫. 그건 효과가 꽤 있겠네요.”
300을 기부하고 받은 5만원 지폐 한 장.
박수철은 그조차 거절하려 했지만, 억지로 주머니에 넣었다.
걸어가는 내내 그 안에 손을 넣고 있길 바라면서.
나름의 의미가 있는 시간일 것이다.
결국은 한강변을 홀로 걷게 되겠지만……
그걸 만지작거리는 동안에는 온기를 느낄 테니까.
지폐 속의 미소가, 오랫동안 오늘을 되새기게 해줄 테니까.
“미쳐 미쳐…… 오늘은 밤샘각이다! 형님! 젼쓰! 수고쓰!”
“어휴, 시끄러워. 가요, 박 선생님. 쟨 가망이 없어요.”
“하하. 예, 가지요. 대수야, 고생해줘.”
“얍! 백! 만! 돌! 파! 가즈아!”
김지연을 차에 태워 관악구로 이동하는 동안, 나는 박수철을 생각하던 마음을 조금 확장시켰다.
그와 전혀 다른 트라우마를 겪은 인물에게로.
한효준은, 오늘따라 채팅을 거의 하지 않았다.
2부에 들어선 이후로는 그 닉네임을 본 적이 없다.
그렇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가 그 어느 때보다 집중해서 방송을 보고 있었을 것임을.
부모님을 잃고 차를 기피하게 된 박수철과는 반대로, 하나뿐인 친부로 인해 비행기를 타지 못하게 된 한효준.
그는 여전히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다.
나와의 대화로 조금쯤 긍정적인 자기인식을 회복하게 됐지만, 여전히 그 원흉을 미워하고 있으니까.
아직 그를 용서하지 못했으니까.
정신분석학이 말하는 인간의 심리는, 컴퓨터와 같다.
내가 컴공인이라서 하는 말만은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상 적절한 상징이 없었다.
어플리케이션 프로그램은 다양한 프로세스를 램(Read Access Memory) 위에 올려두고 연동작업을 진행한다.
개중 그래픽카드를 거쳐서 모니터 위에 표시되는 것은 빙산의 일각이고, 대부분의 작업들은 램의 바다에 잠긴다.
다만 각각의 프로그램이 무수한 디버그로 검증되어 있다.
그렇기에, 굳이 사용자가 하나하나 체크하지 않아도, 깔끔하게 작업을 마치면 바다는 다시 비워진다.
그러나 오류로 프로그램이 강제종료 됐을 때는 다르다.
운영체제는 각각의 프로그램이 어떤 런타임 라이브러리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었는지까지는 파악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표면적이고 직접적인 프로세스만을 종료할 뿐, 램에 쌓여 있는 잔재들까지 지워내는 데에는 실패한다.
그때부터 망령들이 새 프로세스를 방해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사용자가 바라보는 모니터 화면은 의식.
그리고 우리가 볼 수 없는 램의 바다가 무의식.
저장장치의 데이터가 전의식, 롬(Read Only Memory)이 이고(es), 운영체제가 자아, 파이어월이 초자아쯤 되겠다.
거기서 프로그램은 인간의 감정에 대응한다.
그리고 해소되지 않은 감정은, 강제종료된 프로그램.
의식 속에서는 깨끗이 지워진 듯해도 무의식을 점거한다.
그 잔재들이 새로운 감정에 집중하는 일을 가로막는다.
한효준이 바로 그러했다.
가장 중요한 성장기의 모든 경험이 양가감정의 오류 속에서 엉망진창으로 일그러져, 램이 거의 가득 차버린 케이스.
그렇기에 가족도 친구도 없는 독신이다.
그가 만들 수 있는 건, 그저 잘 꾸며진 바탕화면뿐이었다.
거기까지는 접근하지 않으려 했다.
가해자를 바꿀 수도 있었을 거라는 얘기야 그저 가능성.
그렇지만 끔찍한 학대자를 용서하라는 소리는……
어떤 학대도 경험해본 적 없는 나 따위는, 감히 할 수 없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사실은 그게 맞을 것이다.
미움도 용서도, 선택하는 것은 개인.
주변의 섣부른 조언들은 대부분의 경우 부작용만 낳는다.
믿고 기다려주는 것이야말로 해답이리라.
하지만 나는……
학대는 모르지만, 한효준은 알고 있다.
그의 운영체제가 얼마나 위대한지를.
“한 교수님 말입니다.”
“네? 아, 네.”
“그분을…… 비행기에 태우고 싶습니다.”
“으앗. 갑자기요?”
“예. 여행 예능에 함께 출연하고 싶어요. 이후 해외 학회에도 마음 내키는 대로 다니실 수 있게 해드리고 싶습니다. 굉장히 어려운 일이 되겠지만, 그렇게 해드리고 싶습니다.”
“그랬으면 좋긴 하겠는데…… 말씀하신 대로 정말- 어.”
대화 중에 전화벨이 울렸다.
발신자는, 박수철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저 수철인데요…… 야.]
[으. 안녕하세요. 박진철입니다.]
형제가 함께였다.
그 정황이 의아해질 무렵에, 설명이 흘러나왔다.
[진철이가, 데리러 와서요…….]
[비도 올 것 같고 해서요.]
[그래서 지금 같이 차에 타 있는데요. 저…… 이거 타고 가도 될까요? 확신이 없어서…… 죄송해요.]
조수석에 올라타긴 했지만 시동을 걸진 않은 듯했다.
두 사람의 목소리 외에는 그저 조용하기만 하다.
그리고 우리 차창 밖의 하늘이 과연 희끄무레했다.
한강을 걷는 동안에는 분명 뭔가 쏟아질 듯했다.
뭐라고 말해주면 좋을까.
전문가를 대동하지 않은 노출치료는 리스크가 크니 당장 내리라고 할까, 최대한 조심해서 서행해보라고 할까.
그게 아니면……
“수철 씨. 진철 씨. 그런 사소한 것까지 말해줘야 합니까?”
[헛, 죄, 죄송합니다!]
[……형.]
[어?]
[농담이잖아. 눈치가 없어.]
[아…… 어…… 꼰머!]
“사소한 질문이니 대충 답해드리죠. 진철 씨, 차 오토죠?”
[네? 어, 네.]
“운전경력은?”
[3년 정도…… 형이 운전을 못 하니까요…….]
“잘하겠네. 핸들 왼손으로 쥐고, 오른손으로 형 손 잡아줘요. 그거면 충분해요. 내가 장담합니다. 수철 씨, 나 믿죠?”
박수철은 3초 정도 고민했다.
하지만 나는 대답을 알고 있다.
[내담자 평가]가, 박수철이라는 운영체제에게 상담사 ‘꼰마님’이 얼마나 중요한 백신이 되었는지 알려줬기에.
[……하, 하하. 아니, 누가 뭐 그런 거 여쭤봤어요?]
“응?”
[택시비 주셨는데 못 쓰게 됐으니까 그러죠. 얘가 눈치 없이 데리러 와가지고요. 이거 그냥 용돈 해도 되죠?]
“어…… 예. 동생 기름 넣어줘요.”
[하하. 알았어요. 근데 저…… 좀만 더 통화해도 돼요?]
“그래요. 나도 어차피 장거리 뛰는 중이니까, 켜놔요.”
수화기 너머에서 시동음이 들린다.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소리도.
[괜찮아. 난 괜찮아. 우린 안 죽어…….]
물론 죽지는 않겠지만, 죽을 만큼 힘들 텐데.
김지연에게 부탁해 그녀의 핸드폰을 한효준과 연결했다.
그리고 인사 한마디 없이 대시보드에 올려뒀다.
밤늦게 뭐 하는 짓이냐며 구시렁대는 것 같긴 했으나, 이내 그 역시 이중으로 전달되는 통화 내용에 집중하게 됐다.
[와, 와 씨, 빨라!]
[빨라? 40인데…….]
[하, 학교 앞, 서행이잖아, 멍청아.]
[아 맞네. 쏘리. 근데…… 진짜 괜찮아? 안 세워도 돼?]
[……돼, 돼! 된다고! 나, 아빠, 나, 차 타고 있어!]
“오냐.”
[아하하! 꼰머 아빠다. 야, 형이 몰까? 내가 몰아볼까?]
[미쳤냐? 좀 진정해라.]
[히히…… 히히…… 꼰마님!]
“예, 수철 씨.”
[저 레이서 한번 해볼까요? 지금 완전 괜찮은데!]
“참 꿈도 크시네요.”
[형, 지금 60이야. 존나 서행 중이야.]
[으, 음…….]
형제 레이서의 타임어택은 30분이나 걸렸다.
서행도 서행이지만, 사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릴 때마다 뒤 차에서 클랙션이 울릴 때까지 기다렸던 탓.
그때마다 박수철이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아, 맞네! 이렇게 기다렸다 가면 되네! 달려, 달려!]
[……꼰마님. 형 괜찮은 거 맞아요?]
“예. 꽃미남 레이서의 탄생을 기대해도 될 것 같네요.”
오류 없는 [내담자 평가] 덕에 농담으로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형제와의 통화를 마치고, 나 역시 김지연의 집 앞에 차를 정차한 뒤.
마침내 그녀의 핸드폰을 스피커 모드로 전환했다.
“교수님, 접니다. 늦은 밤에 죄송하게 됐습니다.”
[……못된 자 같으니. 노출치료에 아주 맛을 들였구만. 걱정돼서 이중 통화까지 연결할 거면, 좀 제지하지 그랬나?]
“귀찮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다만, 내담자 본인이 간절히 원하고 있었습니다. 걱정돼서 밤늦게 먼 길을 달려온 동생에게…… 조금이라도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했습니다. 그 마음을 알기에, 도저히 저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CPT(인지처리치료) 한 번 하고는 PE(지속노출치료)도 아니고 홍수법을 해버렸다는 건가? 겁도 없지. 제아무리 야매 EMDR을 병행했다곤 해도, 위험한 일이었어.]
EMDR이란, 트라우마 경험을 떠올리는 동안 안구를 좌우로 움직이게 해, 뇌가 얼어붙은 기억을 재처리하게 만드는 과정.
지속적인 좌우 안구운동이 인지 오류로 고착된 공포와 거부감을 제거하는 데 상당한 효과가 있다 했다.
내 방식으로 말하자면 램 청소기 같은 것이다.
오류를 일으킨 잔재들을 처리하는 과정.
그렇지만 나는 그 램 청소기엔 별 조예가 없는데.
한효준은 대체 어디서 야매 EMDR을 발견했을까?
“교수님? 저는 안구운동을 유도한 적은 없었습니다만.”
[없긴 왜 없어? 케바케는 조수석에 탔을 거 아닌가.]
“예? 아, 예. 뒷좌석보다는 거기가 나았겠지요.”
[사고 당시와 똑같은 환경보다는 좀 나았겠지만, 그 자리가 사실은 트레일러에 받힌 그 위치잖나. 주행 중에 어디만 봤겠어? 바짝 얼어서 오른쪽만 주시하고 있지 않았겠나? 피드백으로써 불안을 조장하는 감각의 경직이야. 하지만 전화가 연결된 상태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꼰대가 한마디씩 툭툭 던지면, 무의식적으로 왼쪽도 힐끔거릴 수밖에 없었을 거야. 그 오락가락 속에서 조금쯤은 재처리가 일어났겠지. 참으로 영리한 전략이라고 생각했는데, 의도치도 않았던 겐가?]
……맙소사.
이 교수는 셜록 홈즈의 환생인가.
두 대의 전화기 너머로 거기까지 정황을 추론했다는 게, 믿을 수 없는 충격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에는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본인이 PTSD를 앓고 있으니까.
그 치료에 유의미한 가능성을 가져온 EMDR의 기전이라면, 꿈에서도 강의가 가능할 정도로 숙지하고 있을 터였다.
“예. 저는 그쪽엔 큰 관심이 없습니다.”
[뭐? 꽤 괜찮은 요법이야. 공부해둬야지.]
“다른 청소기를 하나 알고 있거든요.”
[갑자기 청소기는 왜?]
“기억 청소기 말입니다.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EMDR의 효과 역시 아주 없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제가 의도한 것은 그쪽이 아닙니다. 사실 치료는 이미 끝나 있었습니다.”
[무슨 소린가? 이 사람, 트라우마를 아주 우습게 아는군?]
그래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PTSD는 분명 난치병.
고작 한두 시간의 상담으로 그걸 치료했다고 자평한다면, 그것은 내담자를 위험하게 만드는 자기과신일 터였다.
다만 나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다.
내가 믿는 것은 내담자.
내 안에 깊이 담긴 박수철의 마음을, 나는 믿었다.
“박수철 내담자의 호수를 가득 채운 독은, 미움이었습니다.”
[그거야 그랬겠지만, 공포 역시 실존했잖나?]
“그 공포는 얇은 살얼음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대담하고 미래지향적인 인물이거든요. 그렇기에 차를 두려워하는 심리는 사고에의 공포가 아니었습니다.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를 졸음운전자들에 대한 증오와, 그렇게 발생한 응급환자를 제대로 치료해주지 않는 외상센터에 대한 원망이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극복했습니다. 재처리를 필요로 하는 얼어붙은 감정이 더는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때부터는, 학습이지요. 마음을 열고 좋은 경험을 쌓기만 하면 된다고 봤습니다.”
당연히 호통이 날아오리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한효준은 뭔가를 궁리하듯 한참 침음했다.
그리고 차창 밖으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할 무렵에야 물었다.
[그런 것도, 마음의 지도에 나오든가?]
“예.”
조수석의 김지연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런 그녀의 위로, 마음의 지도가 펼쳐져 있다.
「 내담자 명 : 박수철
평가 결과 : 대담하고 미래지향적이다. 운전자와 의료진에 대한 증오가 녹아, 차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막연해졌다. / ‘꼰마님’이 하는 말은 모두 진리라고 생각한다. 」
……아까는 ‘믿음직하다’였는데, 주행 뒤에 ‘진리’가 됐네.
과도한 기대에 조금쯤 황당해졌다.
짧은 대답 한마디에 다시금 침음하는 한효준에게도.
이런 야매 상담사를 뭘 그리 신뢰하는 건지.
사실 믿어야 할 것은 그들 자신인데.
다른 이들은 잠시도 견디지 못할 트라우마를 오랫동안 짊어지고 살아온 그들이야말로, 진리와도 같은 히어로들인데.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거기까지입니다. 저로서도 그 지도의 도법(圖法)은 알기가 어렵거든요. 그래서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만…… 한말씀 올리고 싶습니다. 교수님. 교수님께서도 하실 수 있습니다. 비행기를 타실 수 있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든 가실 수 있습니다. 논문밖에 없는 교수라고 혀 차는 멍청한 코쟁이들에게, 한 방 먹여주실 수 있습니다.”
[……누굴 말하는 겐가? 그런 자들은 없는데?]
“클리셰 같아서 해본 말인데, 없었군요. 죄송합니다. 어쨌든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결혼도 마찬가지입니다.”
[거, 쓸데없는 얘기는 왜 꺼내나?]
“쓸데없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증오하며 겪었던 모든 괴로움들을, 아이를 사랑하며 겪는 모든 기쁨으로 끌어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필요한 것은 단 한 가지입니다.”
[흥…… 뭔가?]
“용서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제가 아는 최고의 청소기입니다. 과거의 망령을 그만 보내주시지요. 행복해지기 위해서요.”
[허. 아주 질리지도 않고 간디 같은 소리를…….]
가르치듯이 떠벌렸지만, 사실은 우스운 꼴이었다.
그 모든 것을 가르쳐준 것이 한효준이니.
입을 열어 용서의 의미를 논한 적은 없었지만, 한효준이라는 사람은 그 누구도 증오하지 않았다.
이용덕과 조명기를 비난했지만, 그건 그저 유치한 투덜거림.
그가 자신의 천성에 안 맞게 몹시도 미워해왔던 것은……
부친과 본인, 단 두 명이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다른 환경이었다면, 어딘가에서 교수님 같은 상담사를 만날 수 있었다면, 분명히 좋은 아빠가 됐을 분이라고. 다른 누구도 아닌 교수님의 부친이니까요.”
[……시끄러워. 내일 아침에…… 김포공항으로 나와.]
“예? 바로요……?”
[누가 비행기를 탄다 했나? 공항 분위기 정도에는 익숙해져야, 거부감이 줄어들 거 아닌가. 싫으면 오지 말아.]
“아, 아닙니다. 제가 안내해드리죠.”
[흥. 지연이한테는…… 알아서 설명해.]
전화를 끊고 돌아보자, 김지연은 이미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믿을 수 없는 일들이 연이어 일어난 까닭이리라.
사실은 그 시선도 민망한 일이었다.
이 치료법은, 김지연이 가르쳐준 것이기에.
“김 선생님. 제가 처음 상담소를 찾았을 때 그러셨지요. 상담이란 마음을 토로하고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그렇게만 하고 있습니다. 스스로가 모르는 자신을 만나게 해주고 있어요. 운이 좋아 남들보다 좀…… 예리한 편이거든요.”
“하핫. 다른 사람이 그런 말 했으면, 교수님이 아마 차 몰고 달려와서 멱살 잡으셨을 거예요. 무식한 자가 확신을 품으면 어떤 꼴이 되는지 알아야 한다고. 그렇지만 그러지 않으시네요. 정말 많이 믿고 계신 거야. 저처럼요.”
“아, 예. 영광입니다.”
“저, 동생 분 만나봤으면 해요.”
“예? 제 동생이요? 혹시 그 녀석도 사고의 트라우마가 남아있을까 염려하시는 거라면,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이미-”
“그게 아니라, 남소요. 소개팅…… 해보고 싶어졌어요. 선생님 동생 분이면…… 과분하게 좋은 분이실 거 같아서.”
서른의 미녀 상담사와 노총각 화가를 곁에 세워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느 쪽이 과분할지는 자명하다.
그렇지만, 일단은 웃으며 끄덕여 보였다.
세상은 케이스 바이 케이스니까.
일반화된 결론 따위 없다는 점이, 내가 살아가는 세상의 가장 큰 매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