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
30장 - 상담사와 크루 (3)
상담사에게 ‘관계’와 ‘진단’과 ‘화술’은 필수적인 패러미터다.
개중 하나라도 부족하면 상담의 성과가 줄어든다.
그 필수성이 [특성]과 [능력]을 가르는 분수령.
‘청력’이나 ‘해학’ 같은 패러미터는, 분명 있어서 나쁠 것은 없지만, 그걸 상담사의 능력으로 논할 수는 없을 터였다.
그렇기에 ‘외모’의 효용은 의아한 지점이었다.
상담사에게 생김새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기에.
극단적인 예를 들면, 얼굴천재라 불리는 아이돌이 한쪽 입술만 끌어올려 비웃는 듯 쳐다보는 모습과, 불독 같은 이용덕이 선량한 웃음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비교할 수 있다.
그중 어느 쪽이 내담자에게 힘이 될지는 자명한 일이다.
NBSC는 왜 ‘외모’를 [능력] 쪽에 올려뒀을까.
우지현의 면접 이후에 그 패러미터가 상승한 건 왜였을까.
“어쩐지, 점점 잘생겨지시는 것 같아요.”
식당으로 가던 길에, 김지연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72에서 73으로 미미하게 상승한 ‘외모’를 감지한 듯했다.
“그렇습니까?”
“네. 이건 좀 치사해요.”
“치사하다고요?”
“네. 외모의 열화는 정신적 성숙의 반대급부잖아요?”
“흠. 저는 열화라는 말을 썩 좋아하지 않습니다. 자연스럽게 늙어간다는 건 멋진 일이잖아요? 열화가 아니에요.”
“아아뇨, 열화가 맞아요. 외모지상주의를 재생산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 인류가 아직 그 수준인걸요. 아기들을 보면 누구나 행복해지죠. 우린 본능적으로 어린 외모를 사랑할 수밖에 없어요. 아이들 앞에선 살인자조차 순수한 반응을 표출하죠. 변태적인 도착증은 좀 다른 얘기겠지만.”
성적인 취향을 제외하고 보면, 미(美)와 나이는 반비례한다.
아이들은 예뻐 보이고 노인들은 추하게 느껴진다.
인간의 본능이 강요하는 심미안이다.
진화심리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무리에 위기가 닥쳤을 때 노인을 버리고 아이를 구할 추동을 만들기 위해서일 터였다.
그런 본능의 영역에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낭비.
그저 인정하고 대처하면 그만이다.
그리고 나는, 다른 관점에서 노화를 긍정해왔다.
“하지만 상담사에게 동안이 유리할 것은 없지요. 내담자의 삶에 각인된 인지도식이, 주름 자글자글한 얼굴 쪽을 좀 더 능력 있는 조언자로 여기게 만들 테니까요.”
“그것도 좀 오해예요. 일상에서는 물론 그렇죠. 실제로 회기 들어간 직후에는 어리다고 의심하시는 분들도 많고요. 하지만 우리 업무는 사적인 면담이랑은 다르잖아요? 단 5분만 대화해보더라도, 결국 노안보다는 소통으로 형성된 정서적 교감이 더 크게 작용해요.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그때부터는 오히려 잘생쁜 쪽이 더 파워가 강하고요.”
“어…… 정말 그렇습니까?”
“정말 그렇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은 더 멋져 보이는 법이죠? 그게 역으로도 성립돼요. 외견이 더 멋질수록, 심리적인 수용이 수월해져요. 외모는 강력한 무기예요. 후광효과를 생각해보세요. 박명수 씨랑 정우성 씨가 ‘당신은 그동안 잘해왔어요’ 말하는 경우를. 어느 쪽이 더 마음에 꽂히겠어요?”
예시가 좀 심하지만,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미추(美醜)의 차별이 정당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담자 입장에서 사회적으로 좀 더 나은 인상을 주는 사람의 이야기에 마음이 움직일 가능성이 높은 까닭.
치료적 도구로서 외모를 마냥 무시할 수 없는 이유였다.
내가 최초의 레벨업 때 ‘외모’를 올린 까닭이기도 하고.
“하지만 사회적 존경을 받는 사람 중에는 적당한 외모의 인물이 더 많지 않습니까? 예를 들면 유느님이라든지.”
“하핫. 신이 공평하신 까닭이겠죠? 다는 안 주시니까요. 하지만 똑같은 행동을 하고 같은 화법을 구사한다면, 잘생긴 사람 쪽의 울림이 클 건 명백해요. 물론 그 미모에도 종류는 있는데…… 아, 안녕하세요. 뚝불 두 개요. 감사합니다.”
대화는 배식을 받아 테이블로 간 뒤에 이어졌다.
“요즘 말로 얼굴천재라고 불리는 그런 스타일은, 상담에 도움이 되기 어렵죠. 그쪽은 지켜주고 싶게 만드는 방향이니까. 우리들이 선호하는 외모는 그쪽이 아니에요. 사회가 만든 미남이라고 불리는 유느님처럼, 완벽하지 않은 이목구비로도 만들 수 있는 무언가. 그런 게, 우리 박 선생님 얼굴에 자라나고 있네요. 처음하고 너무 달라요. 진짜 멋져지셨어.”
“멋져졌다고요?”
“네. 이 사람이 살아온 삶은 정말 멋있었겠다, 내게 해주는 모든 말들이 선의와 의지로 가득하겠다, 그렇게 믿어버리게 만들어요. 그래서 꼰대 캐릭터로 말씀을 하셔도 싫어하는 사람이 없었던 거죠. 진심은 다른 걸 아니까. 잘 먹겠습니다.”
‘외모’가 45이던 시절의 박대민과 73이 된 지금의 박대민을 모두 아는 김지연의 말이다.
객관적으로 수용해야 마땅할 조언일 터.
그렇기에, 뜨끈한 뚝배기불고기를 입에 넣으며 생각했다.
NBSC가 추구하는 ‘외모’의 이상향에 대해서.
지금까지는 주로 노화의 페널티를 지워가는 방향이었다.
주름이 사라지고, 피부가 깨끗해지고, 오랜 업무로 비뚤어졌던 자세 등 열화된 신체가 젊음을 되찾는 환골탈태.
그러던 것이 65쯤부터 진로를 바꿨다.
신중히 살피지 않으면 뭐가 바뀌었는지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미세한 부분들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 변화는 나를 어디로 데려가고 있을까.
분명한 건, ‘얼굴천재’와는 다를 것이라는 점이다.
그보다는…… 심영화 작가가 SNS에 언급한 ‘분위기천재’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편해지는 분위기.
마치 솜사탕/처럼 마주앉은 이를 녹여주는 온기.
NBSC의 ‘외모’는 그런 능력을 설명하는지도 모르겠다.
그 생각 중에, 김지연이 미간을 좁히며 수저를 내려놨다.
“말 나온 김에 얘긴데, 아리는 그 반대예요.”
“아리가요?”
“네. 걔 참 예쁘잖아요? 아까 말한 얼굴천재 스타일. 너무 막 순백의…… 우유 같은 느낌이에요. 그래서 지켜주고 싶은 마음도 드는데, 또래들에겐 괴롭히고 싶다는 생각까지 같이 떠올랐을 거예요. 꼭 시기심만이 아니라…… 너무 연약해 보이니까요. 막 망가뜨리고 싶단 충동이 들었을 법도 해요.”
“……무서운 발상인걸요.”
“무섭죠. 아시잖아요, 사람이 그렇게 무섭다는 거. 박 선생님께서는 늘 좋은 면만 봐주려고 애쓰시지만, 본능이란 건 선악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정말 잘하셨다 싶어요. 가짜 친구들은, 아리가 가진 약점을 가려줘요. 그 본인의 자신감을 고취시켜줄 테니까. 옆에 누가 있느냐에 따라서 전혀 달라지는 공기…… 얼굴천재 스타일을 그렇게 정의할 수 있을 듯해요. 그에 비해 박 선생님은, 그런 게 아무 상관없는 스타일. 혼자서도 공기를 바꾸는 무게감이 있어요. 그게 부러운 거예요. 전 솔직히, 예쁘장한 거 하나 빼면 무게는 없는 외모니까. 그랬는데 그 얼굴이 슬슬 노화를 겪고 있어요. 그게 참 힘들어요. 이룬 거 하나 없이 열화되고 있다는 그 느낌이…….”
어떤 마음인지 조금은 알 법도 했다.
그 이야기에서 외모는 대유(代喩)일 뿐.
진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학자로서의 자격지심일 터였다.
상담소 일 때문에 연구가 지지부진하다고 했으니.
인간은 언제나 인정을 갈망한다.
타인을 위로하는 상담사에게도 그 본능은 다르지 않다.
우리 모두는 타인의 손길 속에서 완성된다.
옆에 누가 있느냐에 따라 전혀 달라지는 것은, 얼굴천재들의 공기만은 아닐 터였다.
“멍청한 소리로군요. 김 선생님은 예쁘장하지 않습니다.”
“으악. 갑자기 꼰머님?”
“제가 처음으로 마음을 털어놓은, 딱 좋은 온도의 상담사입니다. 자부심을 가지세요. 김지연은 유일무이하니까요.”
“아…… 진짜…… 꼰마눌님한테 이를 거예요.”
“예? 왜…… 위로해드린 건데요?”
“외간여자 위로하지 마세요. 박 쌤은, 아재개그만 하셔도 위험하니까. 저 기다리지 마세요. 오늘 초대석은 따로 갈래요.”
반쯤 장난으로 하는 말이다.
남은 반이 진담인 것 같아 진땀을 빼긴 했지만.
민망한 점심식사 이후, 학부 수업을 들으며 깨닫게 됐다.
우지현과의 면접이 ‘외모’를 상승시킨 이유를.
내 밝음이 그림자를 만들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관계’도 ‘외모’도 지나치면 부작용을 만들 수 있으니, 스스로 경계하며 늘 주변을 살펴야만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나라는 등불의 자그마한 빛은, 시들어가던 새싹에게 더없이 풍요로운 자양분이 되어줄 수도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아주 조금쯤 자격지심을 걷어낼 수 있었다.
그 마음가짐의 변화가, 내 ‘외모’를 바꾼 것이다.
더 멋져지는 방향으로.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다가설 수 있는,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밝은 햇살의 형태로.
그렇게 즐거운 깨달음을 안고 교수실에 방문했을 때.
한효준은 웃는 낯이 꼴 보기 싫다는 듯 투덜거렸다.
“뭘 그렇게 실실거리며 들어오는 겐가? 면접을 봤으면 재빨리 보고부터 할 것이지, 왜 이제 와? 누구 뽑기로 했나?”
“아, 예. 일단은…… 재하와 은수, 그리고 우 선생입니다.”
“흥. 지현이, 괜찮은 애야. 가느다란 열정이 있는.”
“가느다란 열정이요?”
“그래. 아주 뾰족해서 많은 난관들을 뚫을 수 있지만, 그렇기에 자기 자신이 부러질 위험까지 안고 있는. 요즘 이래저래 고민이 많더군. 그나마 자네 방송 얘기를 할 때는 좀 기분이 나아 보였어. 그래서 면접 보라고 한 거야.”
“그랬군요. 제자들 좀 가만 놔두시라니까요.”
“그냥, 연구 미팅 중에 나온 얘기였어.”
“그럴 리 없잖습니까?”
“거! 그런 소소한 교류라도 없으면 어떻게 사나? 자네 같은 중늙은이 방송 보는 걸로만 여가를 채우란 겐가? 못된…….”
그야, 틀린 말은 아니다.
내 외모가 중늙은이와 거리가 멀다는 팩트는 관계가 없다.
방송이라는 소통양식이 영 미진한 탓이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존재니까.
물리적인 개념으로는 좀 다를 수도 있겠다.
무인도에서 어떻게든 생존해 귀환한 사례도 있다고 하니.
다만, 그런 이들조차 언젠가는 가족친지에게로 돌아갈 수 있다는 믿음 속에서 버텨냈다고 봐야 맞지 않을까 싶다.
그게 아니라면 이내 삶을 포기하고 말았을 것이다.
관계를 상실한 인간이란 참으로 외로운 존재.
자기존중감도 자아효능감도 무리 속에서 나온다.
관계의 행복이야말로 사람이 살아가는 원동력이다.
또는, 그 행복에 대한 기대감으로 대체될 수도 있고.
“전에도 말씀드렸던 건입니다만, 맞선 생각 없으십니까?”
“예끼! 날 노망난 늙은이로 만들 셈인가?”
“사실 늙은이까지는 아니시지 않습니까? 검게 염색하고 수염 정돈하시면, 그래도 매력이 있으실 법합니다. 그리고 제 친구들 중에 미혼인 아이들이 없지 않습니다.”
“거 정말! 헛소릴랑 그만하고, 썩 나가!”
아쉽게도 축객령을 듣고 말았다.
퀘스트도 퀘스트지만, 정말 인연을 만들어드리고 싶었는데.
쉰일곱이면 요즘 세상에서 늙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한효준 정도의 인망과 학식의 소유자라면, 괜찮은 배우자를 만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한효준이 내면의 어둠을 극복하고 진짜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김지연이 자격지심을 떨쳐내고 위대한 상담사가 되기를 바란다.
이용덕이 아들의 아픔을 방치했다는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조명기가 무고한 자를 죽인 살인자라는 낙인을 지울 수 있기를 바란다.
이 역시,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까닭.
상담사 박대민은 특히 그렇다.
그들이 내 인생2막을 지원해준 스승들이라서가 아니다.
오아시스를 향해 함께 걸어가는, 소중한 동료들인 까닭이다.
그들의 밝은 미래를 빌며 주차장으로 걸어가는 와중에, 이아리의 전화를 받게 됐다.
하루 한 번씩 걸려오는 정기보고.
늪 같은 수렁에서 한 발쯤을 꺼낸 아이가, 호수처럼 외쳤다.
[삼초온! 학교 끝났어요?]
“이제 정리하고 나가는 중이야. 오늘 학교 어땠어?”
[오오늘, 학교오, 짱잼!]
“정말? 짱잼이었어?”
[응! 저희요, 어버이날 공연 치어리딩 한댔잖아요? 근데 거기서요, 아리 앞줄에 서기로 했어요.]
“와! 정말이야? 앞줄은 경쟁이 엄청 치열하다 그랬잖아?”
[맞아요오. 근데요, 친구들이요, 아리 잘하니까 앞이라고.]
“친구들이 그랬어?”
[네! 아리 예쁘고 춤선 예쁘니까, 앞에 세우자고 그랬어요.]
“맙소사. 걔들이 그래도 보는 눈은 있었구나?”
[에헤헤.]
아리가 언급한 친구들은, 아직 진짜는 아니다.
과거 그녀의 따돌림에 암묵적으로 동의했던 방관자들이니.
지금도 내가 당첨시켜준 프리VR 체험인단이나 연예인의 싸인이라는 요인으로 아리의 곁에 붙어 있을 뿐이었다.
매주 밥을 사주며 조금씩 변화시키고는 있으나, 당장 진짜 친구로 거듭나기는 힘들 터였다.
그럼에도 그 존재감은 거대하다.
애초에 진짜와 가짜는 중요한 개념이 아닌 것.
아이들의 세계에서는 특히 그렇다.
또래 관계에서 배제되는 순간이 그들에겐 세상의 끝이니.
그렇기에 가짜조차도 소중하다.
허세든 가식이든 최대한으로 발휘해 붙잡으려 애쓴다.
인간은, 그렇게밖에 살 수 없는 동물이니까.
“어버이날 행사, 엄마아빠 다 오시지?”
[네에! 아리 앞줄 선다니까, 완전 좋아했어요.]
“하하. 진짜 좋으시겠다. 연습 열심히 해, 아리야.”
[네에에! 삼촌도 오……시면 안 되죠?]
“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삼촌 딸 학교는 어버이날에 별다른 행사가 없어서.”
[우와! 왜요? 왜 없어요?]
“거긴 문화제를 봄에 하거든. 그게 5월말이라서, 가정의 달 행사로 묶어버리는 것 같아. 삼촌도 아리 보러 갈까?”
[으, 응! 삼촌, 오면, 좋아요!]
어리광 부리는 조카와 한참 더 얘기한 뒤에 전화를 끊었다.
그 뒤에 운전석에 앉아 생각했다.
완전 좋아하셨다는 아리의 부모님에 대해서.
진학 후 한 달이 채 못 되어 팔을 그은 딸.
그랬던 아이가, 이제는 치어리딩 공연의 앞줄을 맡게 됐다.
그 행사를 기대하는 마음은 어떤 빛깔일까.
나였다면 아마 가슴이 터져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아리에게도 그 가족에게도 그 이상의 위로는 없으리라.
많은 상처들을 치유해줄 변화다.
팔의 흉터만큼은, 붉은 빛깔로 아련한 슬픔을 남기겠지만.
가해자들을 변모시키는 것 역시 그 체험이다.
영원할 것 같았던 무리의 우위가 뒤집어지는 경험.
소년원에 들어갈 때조차 ‘아 재수 없어서 걸렸네’ 따위로 생각할 수 있는 아이들이지만, 어떤 공권력도 없이 자연스럽게 무너진 파워 앞에서는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상하네?
왜 애들이 쟤를 앞줄에 세우지?
약한 애 괴롭히는 거 다들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그런 잠재의식의 인지가 가해자를 변화시킬 유일한 힘이다.
백문이 불여일견.
주변에서 백번 떠드는 도덕률보다, 실제로 다른 결론을 보여주는 일이야말로 변화를 만들어낸다.
거짓말하면 안 된다고 아무리 가르쳐봤자 부모가 한 거짓말 하나로 단번에 그릇된 인지도식이 생기는 것과 같은 이치다.
진화심리학적으로 따돌림은 보편적인 현상이다.
무리를 이루는 거의 대부분의 동물이,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유약하다고 판단되는 개체를 배제해 도태시키곤 한다.
그러는 편이 전체의 생존에 유익하니까.
오랜 집단생활의 본능이 잔악한 선택을 강요하는 것이다.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인간.
그러나 무리 안의 삶이라고 평탄하리라는 법은 없다.
오히려 가장 끔찍한 일들은 그 안에서 벌어진다.
하지만 인간은 이제 그 필요성으로부터 멀어졌다.
현대문명의 농업은 60억 인구를 거뜬히 먹여살린다.
유통의 문제로 곳곳에서 기아가 발생하지만, 당장 종의 생존을 명분으로 개체를 위협해야 할 어떤 당위성도 없다.
이제는 모두가 공동체를 이룰 수 있게 됐다.
시대의 변화에 빠르게 부응하지 못한 건 본능 쪽.
심층적 교육으로도 단기간에 바꿀 수 없는 잠재의식이다.
그렇기에 과도기의 상담사는 많은 것들을 고려해야 한다.
말로 변화시키는 데에는 한계가 있으니, 때로는 직접 변화된 현실을 보이는 홍수법(flooding)을 수행하는 편이 낫다.
그 결과를 5월 8일에 확인할 수 있으리라.
그때에도 적절한 반응이 나오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이 좀 더 직접적인 직면에 도전해야 하겠지만.
그렇게 결론짓고 원룸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모르는 번호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자 역시 알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다만, 그쪽에서는 날 잘 알고 있었다.
[박대민 선생님? 반갑습니다. MBC 유종찬 PD입니다. 신 부장님 지시로 연락드렸습니다. 예능 출연 관련해서요.]
“아, 예. 반갑습니다. PD님께서 전화 주실 줄은 몰랐네요.”
[예. 그게, 좀 컨펌을 받을 게 있어서요. 가을개편 때 편성될 프로도 있지만, 그 전에 지금 제가 맡고 있는 프로에도 나와주셨으면 싶습니다. <트립크루>라고 하는데요.]
알고 있는 프로그램이다.
세 명의 고정 출연자들이 목적지부터 게스트 출연진까지 직접 섭외해서 진행하는, 자급자족형 여행예능.
그 프로그램의 PD가 내 신규 예능의 사령탑으로 선택된 모양이었다.
“그렇군요. 신 부장이 놀고 있는 PD가 많다는 식으로 말해서, 저는 아마 입봉작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요.”
“아, 예. 그럴 뻔도 했죠. 제가 자원했습니다. 한번쯤 해보고 싶은 포맷이었고…… 또 박 선생님이랑 인연을 만들고 싶었거든요. 음, 그건 어쨌든 나중 얘기고, 우선 트립크루 때문에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송구스럽지만, 이번에 히든 게스트로 네 분이 함께 출연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네 분이라면, 교수님들 말씀이십니까?”
“예. 그러니까, 학계에서는 워낙 정평이 나신 분들이지만, 이용덕 교수님을 제외하면 방송에는 잘 나오지 않으셨잖습니까? 그래서 시청자들한테 함께 얼굴을 보이면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보게 된 부분입니다. 어떤 느낌이냐 하면…… 왜, 이번에 <골든아워>라고 드라마 하나 나왔잖습니까? 그리고 우리 고정 한 분이 최근에 광장공포증을 호소하셨어요. 그래도 하차는 안 하시겠다는데…… 아무래도 제작진이나 출연진이나 염려가 되는 부분이거든요. 그래서 마치 의료진처럼 그분의 여행을 케어해주시면 어떨까 하는데요. 그런 내용들에 드라마 BGM을 깔아서 감동적으로 표현해보고 싶습니다.”
심리적 문제를 안은 출연진의 주치의라는 건가.
내용적으로는 의미가 있지만, 즉답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한효준은 비행기를 타지 못하니까.
그러나, 오래 고민할 일은 아니었다.
“가능한지 확인해보겠습니다. 내일 연락드리죠.”
“아, 예. 이거…… 감사합니다. 얼굴도 뵙기 전에 섭외부터 부탁드리는 꼴이라서 많이 조심스러웠는데요.”
“괜찮습니다. 그분들은, 제 크루니까요.”
“예? 아, 예. 그렇습니까?”
“예. 제 은인들이십니다. 뭐든 함께 하고 싶은 스승님들이시지요. 저 역시 자급자족으로 섭외해내겠습니다.”
“아, 하하. 저희 프로 취지도 아시는군요.”
“좋은 프로라고 생각합니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환담 끝에 전화를 끊고, 속으로만 읊조렸다.
나와 온기를 주고받는 사람들.
오아시스를 향해 항해할, 나의 크루.
그 말의 울림이, 한없이 사랑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