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
27장 - 선택하는 상담사 (1)
“동시시청자가 15,000까지 치솟았어요. 프로그램 런칭하기도 전에 화제성 폭발하겠습니다, 아주. 이게 다 박 선생님 덕분이지. 거기다 내용까지 아주 꽉꽉 들어차서, 마지막에 눈물 흘리셨을 때는 관객들도 시청자들도 난리였어요. 감동의 대단원이었습니다. 최고였어요, 정말로.”
신태훈은 그렇게 말하며 또 엄지를 들어 보였다.
다 옳은 말은 아니다.
어제 생방송에서 웃기네 채널 구독을 부탁하긴 했지만, 그렇게 들어온 시청자들이라 해봐야 5천에 못 미쳤을 터였다.
NBSC의 ‘내담자’ 퀘스트가 무려 1만 이상 달성된 걸 보면.
다만 뒤쪽 이야기는 사실에 가까울 것 같다.
눈물을 흘린 것도 부인할 수 없는 부분이고……
그토록 조심스러웠던 조명기가 승복했으니까.
아직 방송본의 편집이 시작되지도 않은 시점에서, 내 이야기가 미디어의 오해들을 해소하리라고 믿게 된 것이다.
더불어 ‘행복’ 퀘스트가 60 이상 달성된 것을 확인했다.
행복감을 느낀 시청자가 그 수준이라면, 시청자들 중 상당수가 인지도식의 변화를 겪었을 것이라 낙관해도 무방하리라.
어쨌든 그런 것들은 부차적인 이야기.
방긋방긋 웃는 신태훈과 환담을 나누기보다는, 당장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많았다.
NBSC의 메시지 때문이었다.
「 에픽퀘스트 2 “조명기를 쓰러뜨려봐요” 완료!
조명기의 내면을 움직여 그가 향후 ‘상담사’님을 위해 행동하도록 유도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제2의 루트를 통해 업적 “크리스마스 캐럴” 달성!
업적 “크리스마스 캐럴” 효과 : 진단 +10 」
<크리스마스 캐럴>은 찰스 디킨스의 대표적인 소설로, 타이틀보다는 주인공의 이름 쪽이 유명하다.
스크루지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으니.
그 캐릭터가 구두쇠의 대명사라는 점에서 시사점이 있었다.
내가 이번 촬영에서 가장 집중한 부분이, 바로 인지적 구두쇠(cognitive miser)들의 변화였던 까닭이다.
휴리스틱(heuristic)이라는 용어가 있다.
사회심리학을 공부할 때 처음 접했던 말로, 컴공인들의 기본덕목인 알고리즘과 대비된다고 하니 이해가 쉬웠다.
상정 가능한 변수들을 전부 고려하는 것이 알고리즘.
그에 반해 휴리스틱은, 불확실한 모든 것을 배제하는 인간 보편적인 비합리성을 의미한다.
이 휴리스틱의 대표적인 사례가 인지적 구두쇠다.
시간의 부족이나 귀찮음으로 인해, 요체를 제대로 바라보지 않고 빠르게 결론을 내려버리는 태도.
드라마 속 약자들에게는 공감하면서 현실의 피해자들에게 무관심할 수 있는 게 그런 까닭이다.
시청자의 이해를 돕고자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일일이 설명해주는 드라마와 달리, 현실 쪽은 철저한 1인칭인 까닭.
그 모순을 파고들어 공감대를 얻어냈다.
드라마라며 전달한 전지적 상담사 시점의 이야기를, 내 주변 누군가의 실화로 전환함으로써.
<크리스마스 캐럴> 속 스크루지의 변화와 일맥상통하는 방식이다.
그 역시 유령의 인도를 통해 타인의 삶을 추체험했으니.
덕분에 평생 고수하던 삶의 태도를 수정하게 된 것이다.
난 그렇게까지 현격한 추체험을 부르지는 못했다.
NBSC의 꼰대클로스는 유령의 초능력과 다른 까닭.
그럼에도 어느 정도 인지의 변화를 일구기는 했기에, “크리스마스 캐럴‘이라는 업적이 달성됐을 터였다.
그러니 기뻐할 일이지만……
왠지 기분이 묘해지고 말았다.
산타라는 펀치라인과 저 업적 사이의 연관성을, 아무런 인과관계도 없는 우연이라 봐도 괜찮은 걸까.
NBSC는 정말 단순한 인터페이스일까, 아니면…….
그간 생각하지 않으려 애써온 문제였다.
알아낼 수 없는 신비라고 생각했기에.
NBSC라는 초능력에 한해서는, 나 역시도 정신적 에너지 낭비를 줄이기 위해 인지적 구두쇠로 기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본질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할 시점이었다.
다만, 그조차 당장 고민할 문제는 아니었다.
그 뒤로 더욱 흥미진진한 메시지가 이어졌기에.
「 상담사’님께 가장 적합한 보상을 분석할게요……
[직면 선택지] 할인권을 지급해드렸어요.
100exp 상당의 기술이 지금은 25exp!
준비되셨나요? (3:11 후 자동으로 수행됩니다)
(구매조건 : 화술 100 달성과 “크리스마스 캐럴” 달성) 」
직면이란 중기 상담의 핵심이 되는 화술.
‘화술’이 100에 이른 지금 이 기술이 제시됐다.
생각해보면, 진단의 극한과도 같은 [내담자 평가] 역시 ‘진단’이 100을 달성할 것을 전제조건으로 하고 있었다.
퀘스트 완료 전에 레벨업을 결심한 것이야말로 최선의 선택지였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아슬아슬한 성공이었다.
레벨업에 20exp를 소모한 직후의 여유분은 고작 7.
이후 사흘간 9exp를 벌었지만, 그래도 16이었다.
오늘 유튜브 생방송을 통해 17exp를 벌지 못했더라면 [직면 선택지]보다는 급이 낮은 보상이 나왔을 터였다.
그렇게 25exp로 구입하게 된 그 기술의 효용은……
어마어마했다.
「 기술 [직면 선택지]
직면 진술의 선택지를 두 개 제시합니다. 내담자의 반응을 예측해 수치화하며, 그 내용에는 오류가 없습니다. 」
[내담자 평가]에 이어, 이번에도 오류를 없애는 기술.
100exp 기술들은 미지수를 줄여가고 있다.
상담사가 두려워해야 마땅한 불확실성들을.
심지어 이번 기술은 미래예지에 가까운 초능력이다.
그 활용에 대해 고민할 것도 참 많았지만, 메시지는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에픽퀘스트 3 “한효준을 쓰러뜨려봐요” 발생!
NBSC는 ‘상담사’님의 끝없는 도전을 응원합니다.」
……설마 했는데 말이지.
스승이 될 만한 인물들이 계속 퀘스트 대상이 되었기에 혹시나 하긴 했지만, 한효준만은 여기 올라오지 않길 바랐다.
퀘스트 실패가 염려되어서는 아니었다.
이용덕과 조명기의 사례를 통해, 에픽퀘스트의 제2루트가 대상의 잠재적인 문제를 해소해주는 방향임을 확인했으니까.
이용덕의 경우, 아들을 잃은 슬픔으로 인해 상담사 전반을 미워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 편견과는 다른 상담사의 자세로 인지도식을 바꿔냈다.
조명기의 경우, 무고한 이를 죽게 만든 실책 때문에 스스로와 미디어를 극도로 혐오하고 있었다.
그에게 미디어가 선한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보였다.
나는 상담사로서 그들의 테스트를 통과했다.
그것을 NBSC는 제2의 루트라고 지칭하며, 퀘스트 대상의 “내면을 움직”였다는 표현으로 진술했다.
한효준 케이스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상담사로서 다가가 그의 마음을 내 안에 담으면 될 일이다.
그리고 한효준의 문제라면 이미 잘 알고 있다.
끔찍한 가정폭력으로 인한 자아존중감의 파괴.
놀라운 노력으로 훌륭한 상담사의 탈을 완성했지만, 마음속엔 여전히 과거의 상처가 거인처럼 자리하고 있을 터였다.
진정한 인간관계를 끊임없이 깨부수면서.
그렇기에 한효준은 믿을 수 있는 일부를 선별한다.
내면을 드러내도 떠나가지 않을 김지연이나 나 같은 호인에게만 스스로를 드러낸다.
그의 마음속에서, 나는 이미 상담사인 셈이었다.
그러나…… 그건 한효준의 개인사정.
나는 다르다.
그를 내담자로 생각하며 다가서고 싶지 않다.
한효준은, 이용덕이나 조명기와는 다르니까.
일찍이 부모님과 정서적으로 단절되고 또래들과 함께 스타트업에 투신한 나는, 존경할 만한 어른을 만나보지 못했다.
학업에만 열중하던 학창시절엔 은사님보다는 명강사에게 고마워했다.
대학 시절에도 장학금을 유지하기 위해 학점에 몰두했다.
그나마 하나 꼽을 수 있는 어른이 진갑수였는데, 그는 회사 창립 이후로 실망스런 모습만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내 삶에는 그 정도로 어른이 드물었다.
열 살 차이의 한효준이 처음이었다.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르게 된 스승.
그런 이를, 어떻게 내담자로 볼 수 있을까.
그렇기에 나는 그의 문제를 알면서도 회피해왔다.
신성시된 한효준이란 성물을 나 스스로 깨뜨리게 될까봐.
가시지 않는 PTSD로 인해 고통 받고 있음을 알면서도, 공적인 조언만을 요구하며 관계를 파편화했다.
한효준만큼은 거목처럼 그 자리에 있어주길 바랐다.
그렇기에…… 버겁다.
세 번째 에픽퀘스트는 정말로 버거운 문제였다.
“자 자, 고생들 했어. 어서 정리하자. 뒤풀이 장소는 예약해놨지? 바로 이동하자고. 박 선생님은 제 차로 가시죠.”
웃으면서 돌아보는 신태훈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죄송합니다. 전 들어가야 될 것 같습니다.”
“아이고. 혹시 방송 때문에요? 그거 하루 빼면 안 됩니까?”
“그게 안 됩니다. 하루도 쉬지 않기로 약속했습니다.”
“아…… 맞네. 그 도나쓰? 그 작가님이랑 약속하신 거죠? 그런 거면 할 수 없죠. 그럼 나도 들어가야 되겠네. 신규 프로그램 관련해서 이런저런 얘기나 해볼까 했던 건데.”
“전 신경 쓰지 마시고 회식 하시지요.”
“아유, 아녜요. 젊은 애들끼리 마시는데 괜히 불편하기만 하지. 전 카드만 주고 올 테니까, 주차장으로 가 계세요. 집까지 제가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그 친절까지 거절하긴 어려워 고개를 끄덕인 뒤, 주차장으로 이동하며 핸드폰을 켰다.
다양한 사람들에게서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아내와 딸, 대학 동기들, 전 부하직원들, 그리고 조명기.
「조명기 선배 : 좀 섣부른 말일 수도 있는데..」
「조명기 선배 : 괜찮네요.」
「조명기 선배 : 나는 참..」
「조명기 선배 : 뭐랄까, 그래요. 이건 예상 못 했어.」
「조명기 선배 : 미디어의 순기능, 잘 봤어요. 어느 정도 기대하고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설마 이렇게.. 이런 식으로 청중을 변화시킬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영리하시네. 절대적인 어떤 성과를 추산할 수는 없는 부분이지만.. 상당한 영향력이 나왔을 거라는 합리적 판단이 섰습니다.」
「조명기 선배 : 괜찮은 직면이었어요.」
휴리스틱의 오류를 스스로 인지하게 만드는 직면.
누구도 성과를 추산할 수 없는 일이지만, 오류 없는 수치화의 [직면 선택지]라면 달랐을지도 모른다.
다만 이제는 선택이 끝났기에 알 수 없게 된 일.
과거가 아닌 미래를 바라봐야 할 때였다.
「조명기 선배 : 나는 그냥.. 그랬어요. 아무리 개인이 용을 써봐야 자본주의에 잠식된 미디어 속에선 변화를 꾀할 수 없으리라 믿었어요. 우리 불독 선생처럼 자기 잇속 차리려는 사람이나 나가는 곳이라고 단정 지었지. 그렇지만 그건 단지 내가 부족한 탓이었을지도 모르겠어요. 미디어의 권력자들마저 탐낼 만한 구성력이라면, 양립이 안 될 것도 없지. 시청률과 순기능을 함께 거머쥐는 완벽한 성공이..」
「조명기 선배 : 좋습니다. 합시다.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함께 해보기로 하죠. 계획안 나오면 메일로 보내줘요.」
「조명기 선배 : 그런데 뭐, 프로그램 제목은 뽑혔습니까?」
개인적으로 생각해본 타이틀로 답해줬다.
1이 줄어든 뒤로 한참이 지나서야 답장이 돌아오더라.
「조명기 선배 : ㅎㅎㅎㅎㅎㅎㅎㅎㅎ뭡니까 그게?」
「조명기 선배 : 참 별난 사람이야.」
「조명기 선배 : 난 그거 까일 거라 봅니다.」
「조명기 선배 : 개인적으론 마음에 들지만.」
개인적인 기호는 보통 다수를 설득하지 못한다.
바로 그렇기에 테스트의 적기라고 판단했다.
‘나쁜 사람은 없다’는, 절대다수가 부정하는 명제일 테니.
신태훈 CP가 그 명제에서 불편한 기억을 떠올린다면, 그를 상대로 [직면 선택지]의 작동방식을 테스트해볼 요량이었다.
하지만 의외로 그는 즉답을 하지 않았다.
핸들을 붙잡고 신호를 기다리면서도, 그저 묘한 표정으로 고개만 까딱거렸다.
그러다가 한참 뒤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요. 나쁜 사람은 없다.”
“좋……습니까?”
“예. 줄이면 ‘나사없’이 되는데, 중의적인 느낌도 날 것 같네요. 나사 없이 미친 것처럼 보이던 사람들이 사실은 좋은 면도 가지고 있다…… 이런 프레임이면 꽤 흥미로울 수 있죠. 타이틀에서 어그로도 끌릴 테니 초반 화제성도 생길 거고요.”
개인적인 기호지만, 시청률과 양립 가능하다는 건가.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헷갈리는 일이었다.
“뭐 이건 제 생각이긴 합니다. 다른 프로그램 연상되게 하는 게 이미지상 좋지 않기도 하고, 제작진 사기 문제도 있고, 이후 조율을 해나가야죠. 조만간 팀 꾸려질 겁니다. 제작PD를 아직 물색 중이긴 한데, 놀고 있는 친구들이 많아서요. 그리고 그 미팅 때부터 저는 관여하지 않을 셈이에요.”
“예. 저도 그게 나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하. 아무튼 그 조명기 교수님까지 확답을 주셨다는 거죠? 진척이 빨라서 좋네요. 그분들이 박 선생님을 정말 아끼시는 모양이에요? 그 VR상담 인연 덕분이겠죠?”
“일단은 그런 셈입니다. 그 외에도 여러 일들이 있었고요.”
“한효준 교수님 쪽은 어때요? 유튜브 복습하면서 그분 채팅하시고 그런 것도 봤는데, 호형호제도 하시고 그럽니까?”
한효준과 호형호제라.
보통은 인간적으로 가까워지는 진전이겠으나……
내게는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었다.
“아닙니다. 대학원 지도교수님과 어떻게 그렇게 하겠습니까. 깍듯이 교수님이라 부르고 있지요.”
“아하. 뭐 그림은 그게 더 낫겠네요. 박 선생님은 어디까지나 겸손하고 열정적인 제자로 포지셔닝을 해주셔야 돼요. 그래야 석학들의 찬사를 받을 때 대리만족이 커질 테니까.”
“대리만족이요?”
“예. 왜, 시청자들 입장에선 그렇게 느껴질 거 아니겠습니까? 세 명의 전문가는 연령대도 외모도…… 이래저래 심리적 거리감이 멀 거예요. 그렇지만 박 선생님은, 워낙 동안이신데다 또 인상이 굉장히 좋으셔서, 보면 호감이 안 생길 수가 없단 말이죠. 그런 분이 활약하고 인정받는 모습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기 쉬울 겁니다. 그래서 초기 포지셔닝이 중요해요. 세 분께서 초반에는 주의도 많이 주고 그러셔야 됩니다. 그래야 전세역전의 쾌감이 크게 돌아오는 법이니까.”
확정되지도 않은 출연진의 역학까지 구상하고 있었던 모양.
자기 말마따나 전문가는 전문가다 싶었다.
그리고 그 부분은, 한효준이 충족시켜줄 수 있는 포인트다.
상담의 적합성을 논할 때만큼은 호랑이가 되는 사람이니.
“뭐 그건 그런데, 우리 사이는 좀 더 가까워져도 되겠죠?”
“예?”
“저랑 박 선생님이요. 제가 마흔넷입니다. 세 살 차이에 선생님 부장님 이러는 것도 좀 그렇잖습니까? 앞으로 길게 볼 사인데, 제가 형님이라고 부르면 좋지 않을까요?”
“아…… 예. 그렇게 하시죠.”
“아이고, 참. 그래 태훈아, 이렇게 얘기하셔야죠. 사실은 한 잔 걸치면서 풀면 더 좋을 부분인데, 뒤풀이를 안 오시니 이렇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대민 형님, 편하게 해주세요.”
“음…… 그래, 태훈아.”
어색하기 짝이 없는 대화에도, 신태훈은 즐거워했다.
“형님, 제가 처음에 뭐라 말씀드렸습니까? 방송에서 분명히 크랙이 되실 수 있으실 거라 말씀드렸죠? 어떻습니까? 이렇게 막상 해보시니까, 정말 되지 않습니까? 이대로만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런 식으로만 가면, 가을개편 때 프로 런칭하자마자 시청률 10까지 노릴 수 있을 테니까요.”
“음…… 그건 너무 간 것 같다. 5도 아니고 10이라니.”
“됩니다. 저는 확신을 갖고 있어요. 솔직히 말씀드려서 오늘 낮까지만 해도 확신은 아니었죠. 약간의 기대였는데…… 무대에서 말씀하시는 거 보면서 확신했습니다. PD 신태훈의 예능 인생에, 오늘이 전환점이 되리라는 걸요. 설레발 같아요? 하하.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인방에서도 이미 1개월 만에 최고가 되셨잖습니까? 방송이라고 다르겠어요?”
당황스러울 정도로 커다란 기대였다.
과분한 기대에 대처하는 방법이야 이제 잘 알지만……
다른 문제 때문에 약간 켕기는 마음이 들었다.
상담사로서 성장하기 위해선 에픽퀘스트의 달성이 필수다.
거기서 나온 [내담자 평가]가 이미 그 가치를 증명했다.
본질적으로는 상담사 박대민의 공감능력도 함께 작용한 셈이겠지만, 내담자의 안전을 위해서 더 많은 기술이 간절했다.
내 미래에는 단 한 명의 죽음도 생겨선 안 되니까.
그러나 그 과정에 한효준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그마저 내담자로 바라봐야 하는 걸까.
그 고민 속에 있었기에, 원룸 앞에 내린 직후 마주한 사람의 얼굴이 당황스러웠다.
순간 환각을 본 것인가 싶었다.
학교에 있어야 할 한효준이 내 원룸 건물 앞에 서 있었다.
“왜 이제 오나? 곧 생방송 아닌가?”
“아…… 교수님. 잠시만요. 태훈아, 고마웠다. 조심히 들어가.”
“어, 예. 그럼 다음 미팅 때 뵙겠습니다, 형님.”
신태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떠나간 뒤.
한효준은 콧방귀를 뀌며 방문의 목적을 전달했다.
“전화로 말하기도 우스워서 직접 한번 와봤어. 조명기 그치한테 연락을 받았단 말이야. 앞으로 한 배를 타게 됐으니 잘 부탁드립니다 이러면서. 그건 상관없네만, 프로그램 타이틀이 그게 뭔가? 애초에 그걸 나보다 조명기 쪽에 먼저 말해줬다는 것도 마음에 안 드는데, 그건 됐고. 대체 그게 뭐냔 말이야. 나쁜 사람은 없다? 자넨 정말 바보인가? 그런 말도 안 되는 타이틀로 방송을 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자넬 보고 뭐라고 하겠나? 얼마나 덜떨어졌으면 저런 소릴 하나 혀를 찰 게야. 그게 아니면 정말 행복하게 자랐나보다 하며 코웃음을 치겠지. 그런 꼴을 보고 싶은 겐가?”
당연히 반대할 줄 알았던 신태훈 대신, 한효준이 뿔이 났다.
그건 분명 날 걱정하는 마음.
업적을 통해 ‘진단’이 110까지 치솟은 까닭일까.
대중의 지탄을 걱정하는 것은 그저 표면일 뿐이고, 사실은 내가 정말로 사람을 맹신하고 있을까 염려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이상한 일이지.
낮게 으르렁대는 효과음과 함께 메시지가 떠올랐다.
바로 알 수 있었다.
예기치도 않게 [직면 선택지]가 발동한 것임을.
「1. 그러나, 나쁜 사람은 없습니다. (R-1 S+5 P+9)」
「2. 당신의 부친조차 선한 인간입니다. (R-2 S+9 P-9)」
……무슨 어드벤처 게임도 아니고.
일단 R과 S가 뭘 뜻하는 것인지는 대충 알 것 같고, P 역시 짐작되는 지점이 없지 않지만, 그런 게 문제가 아니었다.
선택지가 사라지지 않는다.
어디를 바라봐도 그 글귀들이 따라붙었다.
그 사실에,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