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진없는 상담사-72화 (72/200)

# 72

26장 - 솜사탕 같은 상담사 (3)

유머라는 것이 상담사에게 아주 낯선 개념은 아니다.

성숙한 방어기제 중 하나인 까닭.

프로이트의 주요한 업적 중 하나인 방어기제 이론은, 현대 심리학에서도 주의 깊게 연구하고 있는 요소다.

보통은 퇴행이나 합리화 등 신경증적 반응의 이해를 위해.

그렇지만 보다 긍정적인 방향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방어기제 자체가 자아가 초자아를 지키는 방식인 만큼, 사회적으로 성숙하다면 충분히 좋은 효과를 낼 수도 있다.

이를테면 자신의 고통스런 기억을 이타주의로 승화시켜 세상의 존경을 받는 이들이 많다.

유머 역시 그와 비슷한 개념이다.

불편을 야기할 수 있는 화제를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것.

유머라는 필터 하나만 거쳐도 대처(coping)가 훨씬 더 부드러워지기에, 자기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유익한 방어기제다.

다만 그 유머는 상담사의 덕목이 아니다.

대부분의 내담자는 심리적으로 몹시 몰려 있으니.

유머를 잘 활용하는 내담자에게 동조해주는 정도면 몰라도, 먼저 나서서 웃기려다간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다.

그렇기에 NBSC의 능력 중에도 ‘유머’는 존재하지 않았다.

직무에 필수불가결한 능력이 아닌 것.

다만, 특성 상점에는 그 패러미터가 있었다.

10exp짜리 특성 ‘해학’이었다.

사실은 그쪽이 우선적인 고려사항이었다.

만약 그걸 구입하고 레벨업을 두 차례 했다면, 나는 지금의 대본과는 다르게 유머러스한 스탠딩코미디를 짰을 것이다.

그게 더 나은 선택지일 수도 있었으리라.

주민성이 자기 사정의 공개를 용인해주지 않았더라면.

[벌써 오늘이구나…… 헤헤. 괜히 떨리네요.]

“꺼려지신다면, 지금이라도 내용을 수정할 수 있습니다. 혹시나 싶어서 대안도 준비해뒀어요.”

[아녜요, 괜찮아요. 어차피 제 이름 나오는 것도 아니고…… 솔직히 약간 궁금하기도 해요. 만약에 제가 그런 사정들 공개했을 때,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까……. 그래서 설레네요.]

“만약 민성 씨의 사정이란 게 알려진다면, 좋은 영향도 좋지 않은 영향도 있을 겁니다. 상식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이들이라면 분명 공감할 겁니다. 하지만 일부 나쁜 대처방식을 가진 이들이 다른 문제에 결부시킬 수도 있겠지요.”

[알아요. 뭐 하나만 실수하면 부모 없는 애라서 저러는 거라고…… 자기들 맘대로 떠들겠죠. 그건 좀 무서워요. 좀 웃기죠? 기대하면서도 불안해하는 마음이란 게.]

“전혀요. 당연한 겁니다. 사회가 미성숙한 탓이에요.”

[하핫. 아무튼 잘되시길 빌게요. 저 나름대로 고민 많이 했어요. 꼰마님이니까 괜찮다고 한 거예요. 폰으로나마 본방사수 할 테니까, 멋있게 해주세요.]

“……예.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일 겁니다.”

상담 과정을 통해 획득한 정보를 제3자에게 전달하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기본적으로는 상담학회의 윤리강령에 위배된다.

또한 내담자가 유추되도록 발언한 경우엔, 명예훼손 고소 사유에 해당하는 부분이었다.

다만 몇 가지 예외가 존재한다.

내담자가 그 자신이나 주변의 안전을 위협하는 경우.

내담자가 학대를 당하거나 또는 자행하고 있는 경우.

그리고 내담자 스스로가 정보 공개를 용인한 경우 등이다.

주민성 케이스는 앞쪽의 두 요건에 해당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의 개인사를 방송에 활용해도 되는지 문의한 것은, 거절을 예상하고 넌지시 떠본 정도의 적극성이었다.

그랬는데도 웃으면서 동의해줬던 것이다.

이름만 드러내지 않는다면 괜찮을 것 같다고.

일정 정도의 양가감정은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들키고 나면 편해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

과도한 불안 속에서 허덕이는 이들은, 차라리 불안감을 예기시키는 상황이 빨리 닥쳐오기를 기대하기도 한다.

불확실성을 줄이려는 인지 종결(cognitive closure) 욕구다.

그렇지만 그런 방향성이 크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보다는……

스스로 말한 대로, ‘꼰마님’에 대한 신뢰 때문.

내가 결코 자신에게 해가 될 일을 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기에 쉽게도 동의해준 것으로 보였다.

고마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만큼 부담스러운 일이다.

대본에서 주민성이 유추되지 않도록 최선의 주의를 기울이긴 했으나, 전혀 다른 측면에서 드러날지도 모르니.

이를테면 그의 어린 시절을 아는 어떤 지인이 나타나, 저게 바로 주민성의 비하인드스토리라고 외칠 수도 있는 것이다.

주민성은 그런 리스크를 스스로 짊어졌다.

그건 분명 위대한 걸음.

공황장애를 불러온 거대한 불안감에 자발적으로 맞서려 드는, 작고 여린 인간의 숭고한 도전이다.

나는 그 마음에도 보답해야만 한다.

그러니, 고아와 입양을 향한 세상의 편견에 도전하자.

저 단상 위에서 울림을 만들어내자.

그런 결의 속에서 다른 출연진의 무대를 바라봤다.

“하하하. 진짜로요. 전 그 상황에서 인종차별을 느끼진 않았어요. 어디까지나 코미디잖아. 인종차별로 받으면 싸움이 되는 거고. 사실 질 것 같진 않았는데…… 하하. 근데 다르게 보면 그냥 코미디인 거니까. 다만 그걸 본 어떤 관중이 그런 행동- 눈 찢는 거 있잖아요. 그걸 전혀 인종차별적이지 않다고 착각하지는 않길 바랐던 거죠. 코미디가 아닌 자리에선 분명히 불쾌한 행동이니까. 그래서 올라가서 내가 이걸 했어요. 그리고 말한 거죠. 아, 나는 할 필요 없나? 이상하네, 난 실업잔데. 하하하. 안 웃기죠? 이렇다니까. 스페인이 실업 문제가 심각하거든요. 그래서, 눈이 찢어진 실업자는 너희 편견 속의 어떤 인종이냐, 이런 의도로 풍자한 거…… 아니, 왜 환호해? 이거 웃으실 타이밍인데? <웃기고 앉아있네>잖아요!”

나중에야 터지는 웃음이 무척 밝았다.

스페인어 문화권에서 다양한 인종차별을 경험하고 온 유튜버가, 그곳 코미디 클럽에서 겪은 일을 소개하는 중.

내게는 귀감이라 할 만했다.

그것이야말로 방어기제 중 유머에 해당하는 방식이니.

사람들은 많은 경우에 정서적인 불편을 느낀다.

인종차별처럼 대다수가 공감하는 문제는 아닐지라도, 개개인이 각자의 이유로 타인의 행동에서 불쾌감을 경험한다.

그때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관계를 좌우한다.

원망하고 맞대응하는 방식으로 손해를 줄일 수도 있지만, 웃음으로 자성을 부를 경우 상대를 변화시킬 수도 있다.

나 역시 그와 같아야 할 것이다.

비록 나 자신은 고아가 아니기에 대중의 편견에서 어떤 불쾌감도 느낀 적이 없지만……

소중한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들이 세상 속에서 조금이라도 덜 차별받기를 바라니까.

그 생각 속에서 다섯 명의 출연자를 관찰했다.

그리고 확신했다.

적어도 오늘 방송에서는, 내 이야기가 가장 재밌을 것임을.

그리고 가장 빠르게 재미없어질 것임을.

웃길 생각은 조금도 없는 이야기지만, 분명 웃길 것이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니.

그리고 나는, 그들을 가까운 곳으로 불러올 생각이다.

가장 비극적인 이야기의 한복판으로.

“자…… 이제 벌써 마지막 차례가 됐네요. 오늘의 여섯 번째 ‘웃기네’를 소개하겠습니다. IT기업에서 20년을 일하고, 이제 인터넷방송 4주차. 그런데 이미 월수입 1억이 코앞이라고 하네요. 심지어 그걸 전부 기부하겠다고 밝히셨다고 해요. 그렇게 마음씨가 고와서 그런가? 최고시청자가 벌써 3만 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이거 진짜 엄청난 건데. 지금 라이브 보시는 분이 겨우 만 명이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구독과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아니, 우리 프로 채널 말고 제 거요. 하하. 그럼 소개하겠습니다! 인터넷방송의 성인군자, 상담사 꼰마!”

장황한 소개 멘트가 대미를 장식할 출연자를 부른다.

그간 계속해서 상상해온 순간이다.

아마도 무척이나 떨릴 것이라고 추측했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스탠드마이크 앞에 선 뒤에도 아주 작은 긴장감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꼰마라고 합니다.”

“휘익!”

“잘생겼다!”

“꼰대! 마스터!”

“절 아는 분이 계시네요? 반갑습니다. 예, 맞아요. 꼰대 마스터의 줄임말이에요. 꼰대 중의 꼰대라는 뜻이지요.”

소소한 웃음이 귓전에 맴돈다.

관객들의 표정을 구분하기에 충분한 조명이 켜져 있다.

여섯 명의 출연진과 50명 정도 되는 청년들.

그들을 향해 [인자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방금 소개해주신 대로, 20년간 일한 직장을 그만둔 지 한 달쯤 됐어요. 지금 나이는 마흔일곱이고-”

“거짓말!”

“정말로요. 4월 들어서 인터넷 고민상담 방송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어, 손을 든 분이 계시네요? 상담해달라고?”

앞선 출연자들이 워낙 소통하는 분위기를 잘 만들어둬서, 제대로 자기소개를 하기도 전에 질문이 들어왔다.

여친이 남사친과 단둘이 해외여행을 떠나려 한다는 사연.

무겁게 보면 한없이 깊어질 수 있는 문제다.

하지만 가볍게 보면 또 전혀 다른 관점이 있다.

“남사친과 해외여행이라. 질문하신 분은 그게 너무 싫고 걱정돼서 막고 싶으신 모양인데, 이걸 도덕적이고 논리적인 문제로 바라보면 답이 없어요. 그냥 여행일 뿐인데 왜 막냐, 그렇게 말하면 그만이잖아. 그러니까 성숙한 해결책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쿨하게 보내주고 혼자 속앓이 하는 거.”

“아, 그건 좀…….”

“그렇군요. 둘째는 치맛자락 붙잡고 매달리는 건데.”

“아, 그것도 좀…….”

“그럼 헤어져야지. 이렇게 급하게 질문하실 정도면 여친 분하고도 이미 얘기를 해보셨을 텐데, 안 먹혔죠? 여친한테만 논리 따지지 말고, 한번 객관적으로 생각해봐요. 여친 분은 질문자 분이랑 도덕관념이 전혀 다른 거예요. 그 자유로운 사상을 정신개조 해가면서 사귀고 싶으신 거예요? 그건 연애가 아니라 억압이에요. 부부간이건 연애 관계건, 억압을 정당화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헤어짐을 각오하는 거. 그 정도 각오가 없다면 억압하지 마세요.”

질문자와 몇몇 남자들이 풀 죽어서는 팔자 눈썹을 만드는 가운데, 몇몇 여성들이 뜬금없이 환호성을 냈다.

어느 쪽도 성숙한 반응은 아니다.

다들 자기 입장만 대입해서 바라보니 몰이해가 생긴다.

“스톱. 여기까지가 꼰대로서 한 말입니다. 이제 마스터로서 한말씀 드릴게요. 여친 분도 방송 보고 계시겠죠? 발자크는 이렇게 논했습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이다. 당신의 여행은 분명히 개인의 자유지만, 남친 분께는 이렇게 낯부끄러움을 감수하고 질문할 정도로 가슴 아픈 문제예요. 혹시 그런 괴로움에 무관심하신 건 아닐까요? 그것도 좋은 연인의 자세는 아닐 수 있어요. 자유를 억압하는 괜한 걱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랑이란 게 그런 겁니다. 걱정할 수밖에 없는 사람의 마음도 진지하게 생각해주세요. 부탁해요.”

그제야 남녀 모두에게서 박수갈채가 나왔다.

누구나 말할 수 있는 양비론일 뿐인데도.

자기 입장에서만 바라보면 모든 것이 ‘백퍼’ 절대적이지만, 마음을 조금 열고 상대를 살피면 갈등은 쉬이 해소된다.

내 본론 역시 그와 같은 맥락이었다.

“박수를 쳐주시니까 민망하네요. 보통 이런 식으로 방송을 합니다. 황희 정승 얘기 아시죠? 그런 식이에요. 너도 옳고 너도 옳다. 그러니까 알아서들 해라. 이런 소리나 하면서 후원금을 받으려니 마음이 편치 않더라고요. 그래서 전액 기부하기로 한 겁니다. 이게 돈 받을 일은 아니잖아요? 제 기준에는 그래요. 그래서 오늘은, 상담이 아니라 썰을 풀까 합니다. 출연료 받고 나왔는데 공으로 먹을 순 없잖아. 제가 본 특별한 드라마 하나를 소개해드릴까 해요.”

관객들의 눈이 초롱초롱해진 것이 느껴진다.

드라마공화국이라는 말이 공공연한 나라인 까닭.

TV 시청인구가 극히 줄어든 2020년 현재에도, 절대다수라고 할 만큼 많은 이들이 드라마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나 역시 그런 흔한 태도로 발언을 시작했다.

“자, 주인공은 고아예요. 벌써부터 엔딩이 짐작되시죠? 고아가 된 건 홀어머니가 우울증이 심해져서 그랬던 거. 그래요. 그런 일이 참 흔하죠. 혼인 없이 아이를 갖게 된 케이스였는데, 도저히 지우지 못하고 낳았다가, 정신적인 문제로 아이를 키울 상황이 못 돼서 위탁하게 된 거야.”

“아…….”

“예, 우셔도 돼요. 산타는 없거든. 다들 아시죠?”

“아하핫!”

“아니, 산타 다들 믿으시나보네. 왜 웃으시지? 제가 너무 간략하게 말해서 그런가요? 그래도 괜찮아요. 이 주인공은 운이 아주 좋았거든요. 보육원 들어간 지 3년 만에 입양이 됐어요. 정말 어려운 일인 거 알고 계시죠? 우리나라 입양률이 위탁아동의 절반도 안 되거든요. 10대까지 가면 10% 아래로 떨어지고요. 거기다 그게 아주 유복하고 훌륭한 집안일 가능성? 이건 뭐 인방 4주차에 1억 벌 확률하고 비슷하죠.”

“휘익!”

자랑이라고 생각했는지 누군가 또 휘파람을 불었다.

그리고 다른 관객들은, 그 휘파람에 불편을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다.

적절한 어휘와 액센트를 활용한 덕분.

영상화된 스토리가 아니더라도, 드라마라는 간단한 전제만으로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다.

그 비슷한 드라마를 서너 편은 보면서 성장했을 테니까.

“그렇게 운 좋은 주인공에게 양부모는 뭐든 하고 싶은 걸 하라고 풍족하게 지원을 해줍니다. 거기다가 이 친구가 얼굴까지 잘생겼네? 그래서 고등학생 때부터 유명해져요. 캐스팅까지 받고 그랬나봐. 왜, 그런 거 있잖아요. 강남 5대 얼짱 뭐 그런 거. 얼짱이라고 하면 요즘은 모르나? 인스타에서 얼굴천재로 유명해졌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그래서 인터넷방송도 하고, 저처럼 이렇게 TV에도 나오게 되고. 팔자 폈죠? 이쯤에서 당연히 예쁜 여친을 만날 거라고 예상하시겠지만, 아쉽게도 그건 아직이에요. 일단은 유명해진 목적을 이뤄야죠. 이제 진짜 엄마를 찾아나서는 거야. 흥미진진하죠?”

“네!”

“재밌겠다!”

“그렇지. 재밌다니까, 이게. 인생역전 성공기만큼 재밌는 게 또 없잖아요. 이건 분명히 먹히는 거지. 그런데 시청률이 되게 낮았어요. 이중에선 아무도 모르실 거예요.”

통속적인 신파지만, 분명히 먹히는 클리셰.

그걸 50명 중 누구도 모른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웹드라마라도 타이틀 정도는 알려지는 세상이니.

그렇기에 관객들의 표정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그럴 수밖에 없어요. 이 드라마는 실화거든요.”

“아…….”

“실화예요. 제 지인 이야기죠. 누군지는 비밀로 할게요. 아직 세상에 알리고 싶어하지 않아서. 자, 이제 다음 스토리를 말해볼까요. 주인공은 유명해진 뒤에 자기 엄마를 찾아내요. 납골당을요. 이미 오래 전에…… 주인공을 버리고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자살하셨거든요. 그걸 안 기분은 참, 힘들었을 거예요. 스타가 되려고 했던 것도 사실 엄마한테 보여주고 싶었던 마음이었거든요. 엄마가 버린 내가 이렇게 잘 컸다, 엄마한텐 버림받았지만 수만 명이 날 사랑하고 있다, 이렇게요. 그런데 이제 보여줄 사람이 없어졌어요. 참 고구마죠?”

이미 객석의 반응은 먹먹해져 있다.

웃으면서 듣기엔, 실화라는 언급이 너무 뜬금없었던 까닭.

예상과 전혀 다른 전개가 불편함을 안겨준 것이다.

심지어 그 스스로가 뭔가를 잘못한 것 같은 불편함이니, 유머 같은 효율적인 방어기제를 발휘할 수도 없을 터였다.

그렇게 50여 명을 코너로 몰았다.

이제 그들은 자승자박의 죄인.

그리고 한 꼰대가, 판관이 되어 마이크를 붙잡고 있다.

“주인공은 양부모님 앞에서 엉엉 울었대요. 그리고 그게 또 죄송했대요. 괜찮다고 이해한다고 하셨지만, 그분들 입장에선 억장이 무너졌을 테니까. 상냥한 주인공은 그것까지도 가슴속에 담게 돼요. 그리고 팬들을 보며 또 괴로워해요. 그 사람들이 좋아하는 건 빛나는 스타거든요. 엄마를 잃고 괴로워하는 소년은 보이지 않아요. 이 드라마 얘기에 즐거워하셨던 여러분처럼, 그저 겉만을 바라볼 뿐이죠. 누구도 그 소년의 마음을 위로하지 못해요. 드라마가 아니니까. 회상 씬과 나레이션으로 진심이 전달되는…… 그런 해피엔딩은 없으니까.”

찰리 채플린은 멀리서 바라본 인생이 희극이라 했다.

그것은, 사실 반어법.

어떤 인생도 희극은 아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비극조차 희극으로 둔갑시킬 뿐.

그 거리를 좁혔다.

100이 된 ‘화술’의 솜사탕으로 관객들을 꾀어, 그저 멀게만 바라보던 어떤 인생의 앞으로 도열시켰다.

이제부터 하는 모든 말들은, 비극이다.

“저는 드라마를 잘 보지 않습니다. 당장 제 주변에만 해도 이렇게 많은 드라마가 있거든요. 여기 계신 분들도 다 각자의 드라마를 갖고 계시겠죠. 그중에 웃음과 화합으로 가득한 사이다는 몇이나 될까요. 내 삶은 사이다다, 손 들어볼래요?”

한두 명 정도는 있지 않을까 했는데, 전혀 없다.

몇 가지 멘트를 건너뛰어도 될 듯했다.

“그렇군요. 다들 힘들게 살고 계시네요. 그런 분들께 즐거운 이야기만 해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프로그램 타이틀처럼 웃기고 앉아있는 이야기를 들려드리면 좋았을 텐데. 진짜 드라마 얘기를 해야 우리 PD님 표정이 밝았을 텐데. 전 그게 잘 안 되는 사람입니다. 울면서 서있는 사람들이 자꾸 눈에 밟혀서요. 그러니까 아마 오늘 이후론 안 불러주시겠죠?”

사실 PD는 빙긋 웃고 있다.

신태훈 CP가 엄지를 치켜세우고 있는 까닭.

모니터 앞 심영화 작가도 비슷한 표정인 걸 보면, 전략적인 반전이 유튜브에서 괜찮은 채팅들을 끌어낸 모양이었다.

“이번 달에 1억 이상을 기부할 예정이지만, 그 모든 용처에 찾아가지는 못해요. 제가 다니는 곳은 보육원 한 곳이에요. 거기서 저랑 제일 친한 친구 한 명이 그런 얘길 했어요. 드라마에 고아들이 너무 많이 나와서 힘들다고. 천 명이 있으면 그중에 한두 명이나 잘되는 게 우리 사정인데, 드라마는 백이면 백 다 성공하잖아. 재벌집 입양되거나, 아니면 재벌집 자식이랑 연애하거나. 그게 판타지란 걸 알아주셨으면 했어요. 당장 우리들만 해도 그렇잖아요. 내 지인이 입양한다고 하면 말릴 거잖아. 내 친구가 고아랑 사귄다고 하면 걱정할 거잖아요. 그런 사회에서 대체 어떤 고아가 행복해질 수 있겠어요.”

직면의 시도는 언제나 조심스러운 일.

그렇지만 NBSC의 상담사에겐 다르다.

100의 ‘진단’으로 눈앞의 50인을 지속적으로 관찰하며, [내담자 평가]의 진실을 토대로 그들의 마음을 읽고 있었기에.

내 대본은 이미 그들 모두를 움직이고 있다.

“판타지는 판타지일 뿐입니다. 드라마 같은 행운을 겪은 사람도 친부모를 모른다고 밝히기 힘든데, 현실이 어떻게 드라마처럼 되겠어요. 전 그래요. 드라마 속 판타지를 믿지 않으셨으면 해요. 리얼리티 속의 진짜 드라마에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어요. 드라마 속 악역들에겐 쌍심지를 세우면서 내 주변 사람들에겐 쉽게 악역이 되는, 그런 세상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산타는 없거든. 우리가 노력하지 않으면, 누구도 산타가 되지 않거든요. 산타가 되면 좋겠어요.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선물을 나눠주는. 여기까집니다. 감사합니다.”

우스갯소리로 꺼낸 척했던 ‘산타’를 펀치라인으로 만든다.

그렇기에, 프로그램 타이틀과는 전혀 맞지 않는 이야기지만, 그 한 방에 관객들이 녹아내렸다.

과연 100의 ‘화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이 착각임을 깨달은 건 모니터 앞으로 간 직후.

심영화 작가가 훌쩍거리며 손수건을 건넸다.

멍하니 쳐다보자, 내 눈가를 가리키더라.

“모르셨어요? 계속 흐르고 있었는데.”

“아…… 이게 진짜…… 집중하면 촉각이 0이 되네요.”

“하핫, 게임 같은 거에 비유하시는 거예요?”

게임이 아니라 NBSC 얘기다.

[특성]에 ‘촉각’도 있던데, 아마 사서 보면 10쯤이 아닐까.

첫 TV 출연에 울보가 되고 만 게 몹시 민망했다.

관객들을 빠져들게 만드는 데에는 꽤 공헌했겠지만.

“진짜, 꼰마님은 진짜 솜사탕 같아요. 에스프레소만 마시는 분이신데, 보고 있으면 너무 달달해요. 이번 방송, 정말 잘될 거예요. 이건 진짜 최고예요. 화제성 1위, 확실해요.”

화제성보다는 메시지 쪽이 더 중요한 부분이지만……

심영화의 기대가 크게 빗나가지는 않을 듯하다.

MC의 마무리 멘트보다도 더 쩡쩡거리는 NBSC의 메시지를 들어보면.

‘맙소사! 에픽퀘스트를 달성하셨네요! 축하드려요!’

조명기를 쓰러뜨렸다……라고 말하기는 좀 그렇고.

유튜브로 생방송을 보고 있었던 모양이지.

두 번째 에픽퀘스트가, 솜사탕처럼 녹아내렸다.

* 작가 주) 본문에 언급된 유튜버의 모델은 ‘코믹꼬’님입니다. 개인적으로 해당 영상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기에 인용하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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