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진없는 상담사-67화 (67/200)

# 67

25장 - 미디어를 믿어 (1)

신태훈 부장의 전화를 받은 건, 교수아파트에서 한효준을 태워 종위보육원으로 이동하던 중이었다.

[이번에 새로 편성되는 프로그램이 있어요. <웃기고 앉아있네>라고, 일종의 스탠드업 코미디 부류입니다. 거기에 출연해보시면 어떨까 싶은데요.]

……이래저래 지적할 점이 많은 이야기였다.

‘스탠드업’ 코미디를 표방하면서 제목이 ‘앉아있네’인 게 특히 이상하지만, 핵심은 그게 아니었다.

“부장님. 죄송하지만 제가 코미디언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 그 부분은 오해하시면 안 돼요. 일종의 장르로서 표현을 하는 거고, 내용적으로는 한국식으로 변형이 있을 겁니다. 코미디로는 KBS에 이미 정규편성된 프로가 있기도 하고요. 상대적으로 우리는 유머보다 교훈 쪽에 중점을 두는 거죠.]

“그 말씀은…… 이를테면 예전 <말하는 대로> 같은 느낌이라고 보면 되는 겁니까?”

[아, 그거 아시는구나. 예. 비슷하다고 보면 맞겠고…… 그걸 숏폼으로 구성하는 겁니다. 유튜브에서 보기 쉽도록요. 나중에는 사회전반의 발언대로도 기능하게 할 요량인데, 그래서 타이틀이 그렇게 된 거죠. 웃기고 앉아있네, 내 말이나 들어봐, 이런 느낌으로요. 하하. 아무튼 그런 교훈에…… 약간의 위트 정도만 추가한다고 생각해주시면 될 것 같아요. 예를 들면 ‘펀치라인’이라는 게 있잖겠습니까? 뭐 그런 식입니다. 구색만 맞춰주시면 내용은 편하게 정하셔도 돼요.]

펀치라인이란 강한 충격을 주는 구절이란 뜻.

래퍼들을 통해 전파됐지만, 그 전에는 미국 코미디 업계에서 통용되던 말이었다고 한다.

긴 코미디 끝에 무릎을 칠 만한 한 방을 안겨주는 것이다.

미래기획팀 업무차 그런 것들을 본 기억이 났다.

이를테면 트레버 노아라는 남아공의 코미디언은, 에볼라 사태 때 미국이나 영국의 입국심사가 까다로워진 부분들을 한참 유머러스하게 이야기한 뒤,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영국인들이 아프리카에 왔을 때도 그랬어야 했는데.

아프리카 전체를 위험구역으로 규정하는 서구권에 그들의 선조가 한 일들을 상기시키며, 자성적인 웃음을 부른 것이다.

단박에 많은 사람들이 이마를 잡고 웃게 됐지.

말하자면 차별에 저항하는 해학.

그것이 스탠드업 코미디의 근본이다.

미디어가 만든 오해를 해소해보라는 조명기의 퀘스트를 생각해보면, 분명 적절한 프로그램이었다.

충분한 시간을 들여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을 테니.

하지만 문제는 내 입장이 아닌 방송국의 사정이다.

아무리 교훈적인 측면에 집중한다곤 해도, 코미디 프로그램에 유머감각이 전혀 없는 날 부른다는 게 영 염려됐다.

“부장님. 저는 아재개그조차도 못 하는 사람입니다.”

[하하. 알아요, 알아요. 하지만 말 자체를 맛깔나게 하시는 분이니까. 그 구성력에 기대를 걸고 있는 거예요.]

“구성력이요.”

[예. 코미디라는 게 사실은, 낄낄거리면서 웃는 것도 당연히 중요한 일이긴 한데, 스토리텔링은 더 더 중요하거든요. 스탠드업 쪽은 특히 그렇죠. 관객과 호흡하면서 흐름을 잘 만들어야 재미가 생겨난다고 하더라고요. 그 점에서 박 선생님 스타일이 참 잘 맞지 않을까 싶었어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아무것도 안 짜고 오셔서 관객들 고민상담만 해주셔도 좋겠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채널을 돌리지 못하게 될 테니까요.]

거기까지 듣고는 거절하지 못하게 됐다.

이미 <놀랍징> 쪽을 취향이 아니라며 거절한 바 있다.

그 뒤 메시지를 전할 만한 방송에 나가겠다고 요청해놓고, 그 내용에 딱 맞는 프로그램까지 거절해버린다면.

그건 신태훈에 대한 예의가 아닐 터였다.

“알겠습니다. 우선은 스크립트를 만들어보겠습니다. 그걸 보고 적합한지 평가해주신다면 영광이겠습니다.”

[평가는 필요 없을 것 같……긴 하지만 작가들 사기 문제도 있고 하니까,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일단은 다음 주 금요일이 첫 녹화일이고…… 이제 이런 부분은 작가진이 전화를 드리게 할게요. 잘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섭외를 수락하고 전화를 끊는데, 어째선지 한효준이 심통을 냈다.

“허, 참. 멍청하게 승낙하는 꼴 하고는.”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어쩌다보니가 아니잖나? 여우 같은 작자에게 홀랑 넘어간 꼴이야. 잘되고 있는 프로그램도 모자랄 판에 신규 프로그램을 잡다니. 이거야 완전히 이용당하는 꼴이 아닌가?”

“제가요? 아닙니다, 교수님. 이번 출연 건은 제가 요청한 부분입니다.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누가 요청을 했건 간에, 손해를 보는 꼴이야. 출연료를 아주 많이 받도록 해. 자네가 나가주면 당연히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을 테니까. 내 제자라면 응당 그래야 하는 거야.”

오히려 신규 편성의 화제성에 기댈 수 있는 기회인데.

참 부모 같은 신뢰다.

자기 아이가 세상에서 가장 잘났다고 믿는.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유머감각 없는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는 나로서는, 마음이 복잡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내 의무는 관객을 웃기는 쪽이 아니다.

그 부분에 있어서, 한효준의 의견이 필요했다.

“교수님. 말씀드렸다시피 이번 출연 건은 조명기 교수를 설득하기 위한 밑작업입니다. 관련해서 하나 여쭤보고 싶습니다. 그 선배가 과거 미디어에 출연했던 적이 있지요?”

“그런 적이 있었지. 얼추 기억이 나.”

“혹시 어떤 내용이었습니까?”

“흠…… 그걸 말하자면 조명기의 출신을 설명해야 하는데.”

등받이에서 몸을 떼고, 한효준은 두 팔에 턱을 괴었다.

그 위치는 조수석이다.

뒷좌석에 편하게 타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았다.

하는 말은 제멋대로지만 행동은 오직 겸허한 스승.

그가 처음으로 조명기라는 인간을 객관화했다.

“입학했을 당시부터 꽤나 유명했어. 부친이 검찰총장인가 그랬을 거야. 성적도 대단히 훌륭해서 법대에 갈 인재라고 할 수 있었는데, 희한하게 이쪽으로 온 거지. 그래서 사정을 아는 친구들이 떠들곤 하더군. 어쨌든 검찰 쪽으로 인맥이 있었고, 또 임상심리 대학원을 나왔다보니, 미디어에서 콜이 없을 수 없었던 거야. 프로파일러들과 더불어 형사사건의 심리를 분석하는…… 거기에 자문을 하게 됐지.”

“, 맞습니까?”

“그래, 그 프로야. 검거율이 50%다 자랑하고 그랬었지? 아무튼 그랬는데, 그치가 별로 인기는 없었어. 인물이 영 별로잖나? 내가 출연했다면 훨씬 더 인기를 끌었을 텐데.”

“아, 예.”

“표정이 그게 뭔가? 못 믿는 게야?”

“죄송합니다.”

“못된 자 같으니. 아무튼 거기서 조명기가 실수를 하게 돼.”

본론이었다.

운전대를 잡은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한 용의자에 대해서, 아마…… 재범률을 언급했을 거야.”

“재범률이요.”

“그래. 여자친구 살해 용의자였는데, 정신질환을 의심할 만한 여지가 상당했어. 가족역동 쪽으로 문제가 많았고…… 또 주변인들의 증언도 이건 분명히 BPD다 싶었던 케이스야.”

BPD(Boderline Personality Disorder), 경계선인격장애.

어떤 경계 위에 있는 것처럼 감정기복이 심하고 행동이 불안정한 정신질환을 일컫는다.

주로 우울증이나 자해 등과 연결되지만, 부족한 자제력으로 인해 경범죄를 일으키는 경우 역시 많았다.

특히 애착이 형성된 대상의 거절에 큰 분노를 표출한다.

여자친구와의 갈등 끝에 살인자가 됐다면, 그 장애와 결부된 충동을 의심할 수 있다.

하지만 재범률에 있어서는 얘기가 조금 달랐다.

“제가 알기론, 재범을 확신할 만한 장애는 아닙니다. 심리치료를 병행한다면 교화가 충분히 가능하고, 또 용의자라면 아직 재판조차 받지 못한 상황이었던 거 아닙니까?”

“그래. 실제로 그치는 범인이 아니었어. 다만 자신이 의심받으리라 확신해서 도주했던 거야. 이후 제보를 받고 출동한 형사들에게 쫓기다가 자살했지. 그 본인도 봤던 거야. 세상 모두가 자길 연쇄살인마로 단정 짓게 만든 그 프로그램을.”

“아…….”

“이후에 조명기는 방송출연을 그만뒀어. 실은 그 본인의 잘못도 아니었는데 말이야. 그치는 할 말을 했어. 그가 말한 재범이란 살인에 대한 게 아니었거든. 단지 BPD가 의심되는 정황들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도박이나 좀도둑질 등 기존의 전과가 재발할 수 있다는 얘기만을 했던 거야. 그렇지만 방송이란 게 편집놀음 아닌가. 경각심을 높이겠답시고 사람을 간헐적폭발장애처럼 만들어놨으니…… 보는 이들 입장에선 저거 연쇄살인마 되겠구나, 그렇게 믿게 됐던 게지.”

……죄 없는 환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셈인가.

미디어를 혐오하는 조명기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동시에, 그 자신에 대한 책망 역시도.

“죄책감을 느꼈겠군요. 악의적 편집이 나올 수 있었던 건, 그가 의심되는 범죄와 별반 무관한 얘기를 꺼낸 탓이었으니까요.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을 것 같습니다.”

“뭐, 그랬을 게야. 그치도 아주 독선적인 편은 아니니. 자기가 좀 더 표현을 주의했다면 그렇게까지는 안 갔을 거라고 생각했겠지. 그때 일이 트라우마로 자리 잡았다고 보면 틀림없겠어. 이후로 사람이 변한 꼴을 보면…….”

등산 때 했던 악담이 아주 없는 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 사건 이전까지는, 아마도 자길 드러내고 싶어서 안달이 난 전형적인 젊은 천재였겠지.

하지만 지금의 조명기는 그때와는 전혀 다르다.

가슴을 치며 자책해본 이는, 결코 이전과 같을 수 없다.

“……심리를 다룬다는 게 참 힘든 일인 것 같습니다.”

“그런 게지. 어떤가? 이제 좀 이 길이 두려워졌나?”

“힘들고 괴롭긴 합니다. 그렇지만 두렵진 않습니다. 제게는 잘생긴 스승님이 계시니까요.”

“허! 아주 늙은이를 놀리는 게 취미가 됐군. 못생긴 메뚜기에게 이상한 물이 들었어. 하여튼 머리 검은 짐승이란…….”

“하하. 교수님께서 그 말씀을 하시면 참 현실적으로 느껴집니다. 검은 머리가 하나도 안 남은 분이시니까요.”

“그래도 아직 몇 가닥은…… 흥. 됐고, 보기 좋구만. 첫 단계는 무사히 넘긴 모양이지?”

첫 단계.

그 말에서 테스트의 어감을 느꼈다.

“혹시…… 제가 혼란스러워하고 있음을 알고 계셨습니까?”

“어리석은 소리는. 내가 자넬 모르겠나?”

“그런데 왜 아무런 말씀도…… 서운합니다. 채점이 그렇게 바쁘셨습니까? 원생들에게 좀 맡기시지 그러셨습니까?”

“코찔찔이들 평가를 코찔찔이들한테 맡기라고? 헛소리. 아무튼 자네 그 어리석은 고민들은, 언급할 가치도 없었어. 그 정도 압박감에 무너질 위인이라면 내가 끌어줄 이유도 없지.”

“그야 그렇기도 하지만…… 첫 번째 단계라고 하셨는데, 이 뒤로 이어질 고민들에 대해서도 혜안을 가지고 계십니까?”

“걸어본 길인데 어찌 모르겠나?”

“그때도 말없이 지켜만 보실 겁니까?”

“당연하지. 난 자네 슈퍼바이저가 아니야. 흥.”

그의 천연덕스러운 콧방귀를 들으며 생각했다.

내 앞에는 또 어떤 난관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조명기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스스로가 고통스러워질 공감이라 했었지.

그것이 두 번째 단계가 되리라는 직감이 강하게 들었다.

성공으로 인한 압박감마저도 그토록 괴로웠는데, 만약 내 실책으로 인해 내담자가 피해를 입는 실패가 발생한다면.

그때 나는 그 현실을 견딜 수 있을 것인가……

다만, 고민은 운전하는 시간 동안만.

보육원에 도착할 무렵에는 모든 번민을 내려놨다.

환한 얼굴로 맞아주는 아이들을 위해서.

“꼰마다!”

“와썹! 꼰마 컴온!”

“어허! 상담사 선생님한테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처음 방문했을 때와는 전혀 달라진 반응.

이제 내 앞에서만큼은 그 나이대 아이들이 된다.

주기적인 방문과 방송 시청으로 라포가 형성된 덕분이었다.

특히 중3 유진호는, 바짓가랑이를 잡고 애교까지 부렸다.

“꼰마 아저씨이. 동수 입양돼가지고, 나 심심해요.”

“그랬구나. 동수랑 통화는 해봤어?”

“응. 근데 동수 신났어. 자랑만 해가지고 짜증나요.”

“하하. 우리 착한 진호가 동수 자랑하는 거 다 들어줬구나? 어쩜 그렇게 착하지? 아저씨였으면 화를 냈을 텐데.”

“제가 쫌! 푸하하!”

그에 더해, 예기치 못한 변화가 하나 더.

고1 여학생인 신은혜가 고민을 털어놨다.

“아저씨! 저요, 학교에 짝남이 있는데요.”

“푸하하! 짝남이래!”

“은혜 누나, 주제를 알거라!”

“조용! 얘들아, 누나가 얘기하는데 그렇게 장난을 치면 어떡하지? 아저씨야 그게 누나한테 남친 생기는 게 싫어서 투정하는 마음인 걸 알지만, 누나 입장에서는 상처가 되겠지?”

“아 뭐래.”

“아니거든요?”

“자, 은혜야. 꼬마들 농담 신경 쓰지 마. 인기 많은 은혜가 좋아해주는 그 짝남은 어떤 친구야?”

“인기 없는데. 헤헤. 영진인데요, 착하고요, 공부 잘해요. 인기도 되게 많고요. 근데 어떻게 친해져야 될지 모르겠어요. 저는 공부도 못하고 친구도 없어가지고…….”

처음이었다.

상담사로서 3주째 방문하면서도 신변잡기만을 듣다가, 처음으로 내면의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다.

드디어 꼰대마스터가 출격할 타이밍이 왔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지. 신중한 건 좋지만 자신이 없는 건 정말 매력 없는 태도거든. 기본적인 것부터 생각해볼까? 그 영진이는 어떤 걸 좋아하니? 취미나 특기가 뭐야?”

“저기, 축구 좋아해요. 맨유? 좋아한대요.”

“그래? 맨유는 어떤 팀이야?”

“어…… 박진성? 뭐라던데.”

“박지성. 그렇게 모르면 어떡하니? 짝남이 좋아하는 팀의 레전드 선수도 모르면서, 정말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어? 영진이가 좋아하는 맨유를 응원해보면 정말 많은 게 바뀔 거다. 영진이가 친구들하고 축구 얘기 할 때 은근슬쩍 한마디만 했다고 쳐봐. 그건 정말 대단한 일이 돼. 다른 여자애들하고 다르게 자기 관심사를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영진이한테도 은혜 네가 굉장히 중요한 친구가 될 거야.”

“진짜요? 음…… 중요한 친구…….”

말끝을 흐리지만, 이미 행복한 연애를 상상하고 있는 표정.

그것이 도화선이 됐다.

아이들이 앞을 다퉈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터무니없이 행복한 상담이었다.

“좋아. 규민이는, 그러니까 석주가 너에 대해서 거짓말을 한 게 굉장히 화가 나는 거구나? 규민이 네가 세희를 좋아한다고 말했다는 거지? 애들은 그걸 듣고 다 믿어버렸고? 그런데 걔가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가 없으니까 마음이 답답한 거야. 아저씨가 제대로 들은 거지?”

“댓츠 라잇 맨. 딥빡 맨.”

“신규민! 예의바르게 대답 못 해?”

“괜찮습니다, 김 선생님. 영어공부를 열심히 하는 모양이지요. 애니웨이, 규민 신? 방금 네가 한 이야기에는 모순이 있어. 석주가 거짓말을 한 걸 너는 어떻게 알았어?”

“딴 애들이 말해줬어 맨.”

“그렇게 말하면 반말이지, 미스터 신? 아무튼 친구들이 네게 거짓말에 대해 말해줬다면, 입증이 된 셈이잖아?”

“근데 누가 말했는지는 비밀이라 그래가지고요 맨.”

“아닐 가능성도 있긴 한 거네?”

“놉. 백퍼거든요 맨?”

“그래. 사람들은 다 그렇게 백퍼로 살아. 백퍼만 생각하지. 대부분의 거짓말이 거기서 나와.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해보지 않은 상태로, 내 생각이 맞다고 믿어버리는 거야. 그 거짓말도 그거 때문 아닐까? 자기가 보고 들은 것만 갖고 네가 세희를 좋아한다고 믿어버린 애가 있을지도 몰라. 아저씨는 규민이가 그런 식으로 쉽게 판단하는 애가 안 됐으면 좋겠어. 누가 한 거짓말인지부터 일단…… 근데 세희 정말 안 좋아해? 아예 관심 없어?”

“……쫌 이쁘긴 한데.”

“그래? 야, 석주가 문제가 아니라 세희가 문제였네. 바로 연애상담으로 들어가보자. 아저씨가 이래봬도 연애 고수야.”

사실은, 고민해결에 있어서도 스토리텔링은 중요하다.

상담사는 해결사가 아닌 까닭.

내담자가 자신의 마음을 관조하고 그 안에서 좀 더 나은 인지도식을 획득하게 하는 데에, 해답의 나열은 의미가 없다.

스토리를 통해서 생각이란 배의 키를 틀어줘야 한다.

거기서 중요한 건 내담자가 공격이라 느끼지 않는 것.

공격받는다고 느끼는 순간, 방어기제가 유대감을 깨뜨린다.

어디까지나 내담자의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

다만, 상담사의 존중은 표층의식이 아닌 심층의식 쪽.

자기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하는 일을 쉽게 단정 짓고 있다면, 그에 대해서는 직면을 일으켜야 마땅하다.

<웃기고 앉아있네>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미디어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거의 모든 매체가 가치중립을 표방하지만, 말뿐이다.

발화자 개개인의 사고는 존중받지 못한다.

매체의 기조가 대본과 편집 방향 전부를 좌우한다.

그렇기에 미디어는 대중의 관점에 영향을 미친다.

이른바 ‘프레임’이라는 메인스트림의 형성.

특히 전체를 관조하지 않고 자극적인 일부분에 매몰된 표현들이 난립할 때, 중요한 반대의견들은 지워지고 만다.

이른바 침묵의 나선 이론이다.

TV나 주요 언론사가 주기적으로 환기시키는 프레임은, 십중팔구 다수에게 지배적인 의견으로 받아들여진다.

그것이 실제 다수의견이건 아니건 중요치 않다.

의견이 다른 개인들이 그 프레임 앞에서 침묵하기에.

고립의 공포가 만들어내는 가짜 메인스트림이다.

연예인에 대한 호불호가 단적인 예시일 수 있겠다.

미디어가 어떤 연예인을 악인으로 몰아가면, 그것을 대세라고 착각한 일부가 악플 세례를 퍼붓는다.

이때는 그 연예인의 팬들조차 입을 다문다.

그러다가 새로운 관점의 기사가 나오면 그때부터 상황이 역전돼, 온건주의적인 댓글이 다수를 이루게 된다.

개중 정말 생각을 고쳐먹은 이도 없진 않겠지.

그렇지만 그것은 극소수에 불과하고, 대다수는 자기 의견을 고수하면서 표출의 시기만을 조절한다.

침묵과 발언 사이의 선택이 인터넷 여론을 만드는 셈.

군체가 아니라 무수한 개개인의 모임인 까닭이다.

세 사람이 입을 맞추면 호랑이도 만들어낸다.

호랑이보다 사람을 더 무서워하는 것이 인간이기에.

신규민이 당했다는 소문 역시 그런 사례.

그렇기에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미디어가 만들어낸 착각들.

방송에 출연해 그것을 바로잡는 일은, 논리로만 다가갈 문제가 아니다.

착각을 수용하고 살아가던 이들의 마음을 보아야 한다.

마음에 다다르지 못하면, 나라는 사람이 만든 새로운 프레임이 반대의견을 침묵시킬 뿐이다.

가장 주도면밀한 스토리텔링이 필요할 터……

길이 보일 것도 같다.

젊은 날의 조명기는 미디어에 휘둘려 피해자를 낳았으나, 나는 다를 것이다.

자기혐오로 번진 그의 후회까지도 내 안에 담을 테니.

거부할 수 없는 스토리를 이야기하리라.

그를 통해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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