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진없는 상담사-61화 (61/200)

# 61

23장 - 상담사의 기대 (1)

AACD(American Association for Counseling and Development) 윤리요강에서는 상담사의 최우선 의무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내담자를 존중하며, 그 복지증진에 힘쓰는 것.

단순한 듯하지만 복잡한 이야기다.

존중도 복지증진도 모두 주관적인 가치판단의 결과이니.

그렇기에 의도와 행동 사이에 갈등이 발생한다.

내담자의 복지를 위해 내담자를 제약한다면 그건 옳은가?

혹은 반대로, 내담자의 가치판단을 존중하기 위해 복지증진의 가능성이 있는 간섭을 피한다면, 그건 옳은가?

내가 김서현을 상담한 과정은 전자였다.

나는 그녀의 복지증진을 위해 그녀의 가치판단을 무시했다.

실은 그것을 가치판단이라고 생각지도 못했다.

모친에 대한 과도한 죄책감이, 단순히 가정 내 억압의 결과일 뿐이라 믿었던 것이다.

[기존에도 엄마가 안 슬펐으면 좋겠다고 계속 그런 얘길 했었죠. 자기가 밥을 못 먹어서 엄마가 슬픈 게 싫다는 거야. 그래서 빨리 식욕 돌 수 있는 약을 달라고, 그런 말까지 했었는데…… 핵심은 신체가 아니었던 거죠. 과도한 죄책감 속에서 마음이 병들어 있었으니, 백약이 무효할 수밖에. 그런 모양새를 보고 어떻게든 가족상담으로 속사정을 끌어내려고 애썼는데, 그게 안 됐던 겁니다. 다른 일엔 협조적인 서현 씨가 엄마 얘기만큼은 기를 쓰고…… 좋은 엄마라는 말만 반복했거든. 상처를 끄집어내기 싫었던 거겠죠.]

그렇게 생각하며, 김서현은 한국 최고의 임상심리전문가인 조명기에게 심리치료를 받으면서도 진실을 감춰왔다.

그리고 스스로가 잘못된 존재라고 믿어버렸다.

단순한 가족역동이 아닌 마음 깊은 곳의 죄의식 때문에.

그래서 조명기가 내게 협력을 부탁하게 됐다.

김서현은 분명 어리석었다.

모친의 응어리를 묻어둘 뿐 풀어주지 못하던, 아이의 마음.

그로 인해서 촉발된 섭식장애가 그들 가족 전체를 비극으로 몰아갈 뻔했다.

잘못된 인지를 교정해 상황을 개선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 방식이 너무 위험천만했다.

내 직면이 만들어낸 건 커다란 절개면.

가정 내부를 오염시키던 탄환을 제거하는 수술이었다.

딴에는 그걸 깔끔하게 적출했다고 믿었고, 그렇기에 조명기에게 환부의 봉합을 부탁했다.

하지만 내가 꺼낸 것보다 더 커다란 파편이 남아 있었다.

조명기가 그걸 제거하지 못했다면, 김서현은 모친을 살인자로 만들 뻔했다는 새로운 죄책감에 사로잡혔을지도 모른다.

때문에 내 직면은 의료사고였다.

조명기라는 진짜 전문가가 있었기에 봉합이 가능했을 뿐.

하여 자문해보게 되는 것이다.

내 의도는 행동을 정당화할 만큼 정당했는가.

그리고 김서현과 그 모친이 눈물을 통해 마음속 응어리를 희석하게 된 지금의 결과는, 내게 얼마만큼의 공이 있는가.

“조 선배님.”

[예, 대민 씨. 말씀하세요.]

“고맙습니다.”

[으응?]

“선배님께서 정밀하게 진단해주시지 않았더라면, 일이 오히려 꼬일 뻔했습니다. 자칫하면 비극을 만들 뻔했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서현이의 가족을 치료해주셔서요.”

[어허허. 이거 왜 이래요? 그런 거 안 좋아하는 분인 거 아니까 내가 칭찬을 안 하고는 있는데, 이게 뭐 내가 한 치료인가? 다 대민 씨가 한 일에 숟가락만 얹은 것을.]

“아뇨. 저는 환부를 절개하는 정도에 그쳤습니다. 상담사로서 너무 성급했고, 또 정밀하지 못했습니다. 조 선배님께선 거기까지도 짐작하고 계셨겠지요. 그랬기에 신중한 접근으로 두 사람의 트라우마를 끌어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야…… 그랬을 거라 짐작하기야 했는데…….]

그랬을 것이다.

나는 조명기에 비해 터무니없이 작았다.

감당할 수 없는 수술대 위에서 멋대로 성공을 확신했다.

[내담자 평가]의 보고서를 너무 쉽게 해석했다.

사실은 무엇 하나 알아채지 못했으면서.

그것을 NBSC가 무엇보다 엄밀하게 입증하고 있다.

“조명기를 쓰러뜨려봐요”라는 에픽퀘스트는, 여전히 완수되지 않은 상태.

적어도 김서현 케이스에서 난 조명기를 경탄시키지 못했다.

그저 그가 의도한 방향으로 메스를 움직였을 뿐.

그렇기에 신태훈 부장이 말한 방송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나와 세 살 차이인 조명기만 해도 이토록 용의주도하다.

이용덕은, 한효준은, 실제 케이스를 상대로 할 때 또 얼마나 측량하기 어려운 지혜들을 보여줄 것인가.

그들을 멘토로 두고 가정방문을 반복할 수 있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이었다.

NBSC는 위대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그 부족함을 인정하고, 두려움과 실패 속을 걸어야 한다.

나보다 뛰어난 이들이 뒤를 받쳐줄 수 있는 동안에는.

새끼가 부모의 꽁무니를 따르듯 그렇게 배워나가야 한다.

[저기, 대민 씨?]

“예, 선배님.”

[아니 뭘 또 님까지 붙여요. 점 하나 붙이면 남 되게.]

절도 있는 호칭이 부담스러웠는지 너스레를 떤다.

그 뒤에, 조명기는 나와 다른 관점을 보였다.

[환부를 절개하는 정도라고 했죠? 좋은 비유긴 해. 그런데 난 이렇게 생각해요. 정신적인 문제에서, 애초에 환부의 절개처럼 어려운 일이 또 어디 있을까 하고. 이를테면 복강이 잔뜩 부풀어오른 환자랑 비슷하겠네요. 뭔가 문제가 있다는 건 분명한데, 아무데나 쭉 찢을 수는 없어서 무수한 검사를 해야 하는. 그게 어려운 거예요, 우리 일이. 당장 괴로워하는 게 눈에 보여도 무턱대고 갈라볼 수가 없으니까. 그래서 대민 씨한테 부탁해야 했어요. 나는 도저히 못 하는 뭔가를 해줄 것 같아서. 그리고 그게 실제로 일어났죠. 내가 6개월을 치료하면서도 제대로 짚지 못했던 환부를, 겨우 하룻밤 만에 발견했어. 그런 건 나 같은 사람은 못 해요. 솔직히 말하면, 한 선생님도 그렇게 빠르지는 않을 거야.]

그야, [내담자 평가]나 [정문의 일침]을 통한 환부의 탐색은 NBSC의 전유물이다.

기술이 있다고 해도 102의 ‘관계’와 100의 ‘진단’이 아니라면 사용이 쉽지 않을 것이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남에게 밝힌 적 없는 초능력.

조명기는 그걸 어떻게 확신할 수 있었던 걸까?

“왜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제가 할 수 있으리라고요.”

[그걸 봤거든요, 내가. 예전에 그 호십이치킨.]

“호십이 치킨이요?”

[왜, 있잖아요. 원래 착한치킨이었나? 거기가 호십이치킨으로 상호 바꿨대. 그 댓글에 추천이 많이 달렸더라고. 아무튼 그 자영업자 상담하신 내용을 보는데, 이 상담사는 진짜 다르구나 싶었어요. 그야 원래 심리상담이 우리 임상심리하고 좀 다른 게 있긴 하지. 우리야 평가하고 치료하고 그러지만, 상담에선 소통 그 자체가 자기평가와 치료로 기능하잖아. 그래서 개념으로는 알아요. 아는데…… 그 차이를 그렇게까지 극적으로 활용하는 상담사는 처음 본 거죠, 내가.]

좋은 사장님이 되기 위해 애쓰던 내담자였다.

그러나 그 노력이 보상받지 못해서 괴로워하게 됐고, 자기개념과 외부세계 사이에서 인지부조화가 발생해 있었다.

그때 내가……

더욱 심각한 호구짓을 권장했었지.

“부끄럽습니다. 그땐 제가 뭘 잘 몰랐습니다.”

[그렇게 생각해요? 뭘 잘 몰라서 해준 얘기다? 내담자가 도무지 자기 방식을 바꾸지 않을 호구란 걸 확신하고 충격요법을 시도한 게 아니라? 몰랐다면 더 충격이네. 틀을 벗어난 얘기거든요, 그게. 지인들이라면 옳다 그르다 그런 말이나 하겠죠. 임상은 인지구조로 접근할 거고, 상담에서는 상처가 크셨겠네요 하면서 위로할 거고. 그렇죠? 그런데 진심은 아닌 거예요, 사실. 그저 접근법일 뿐이지. 이후에 좋은 사람 콤플렉스를 해소하는 방향으로 이끌어가겠죠. 내담자를 정말로 인정해주는 의도가 아니라는 거지. 하지만 대민 씨는 달랐어요. 잘 알고 있었던 거예요. 내담자에게 정말 힘이 돼줄 말이 무언지. 그저 무차별적인 인정…… 살면서 다시 받아볼 수 없을 그런 인정에, 사람은 녹고 만다는 걸.]

……칼 로저스의 인간관을 말함일까.

어떤 행동에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믿으며 인정해주는 사람을 만나면, 대부분의 문제행동은 사라지고 만다.

인간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니까.

하지만 내가 칼 로저스와 같은 낙관주의자는 아니다.

“하지만 서현 씨에게는 그렇게 해주지 않았습니다. 섭식장애도, 죄책감도, 인정해주지 않았습니다. 그저 메스를 들이댔지요. 금고를 터는 강도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응? 하하. 뭔가 오해하고 계신 것 같은데? 아니, 내가 오해하고 있는 건가? 어찌됐건 난 그 부분에서 생각이 달라요. 정서적인 지지라는 게…… 단지 드러난 행위를 인정해주는 일일까요? 그럴 때도 있겠죠. 하지만 늘 그렇진 않다는 거지, 내 말은. 서현 씨 같은 경우 핵심은 양가감정이었어요. 두 개의 감정이 서로를 억누르고 있었죠. 그 중 승자는?]

“……죄책감 쪽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요. 그럼 패자는 뭐였을까?]

“분노와 증오……였을까요?”

[거기까지 가면 너무 멀고. 원망이라고 할 수 있겠죠. 마음은 다단계예요. 피라미드와는 다르지만, 여러 층위가 있죠. 표층에서는 연민하는 대상을 심층에서 부러워할 수도 있는 게 인간의 끔찍하고 귀여운 사고방식인 거. 서현 씨의 잠재의식은 모친을 원망하고 싶어했어요. 그렇지만 과거의 기억이 자아낸 죄책감이 그걸 틀어막았죠. 저 사람의 소유욕은 정당해. 나쁜 건 너야. 네가 모든 문제의 근원이야. 이런 방향으로 몰아붙여서는, 결국 거식증을 일으키고 말았을 겁니다.]

……‘양가감정으로 촉발된 섭식장애’란, 그런 의미였던가.

그 기작이 좀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렇게 들으니 기분이 또 복잡해졌다.

“제가, 그 원망 쪽을 지지해줬던 거군요. 모친을 죄인으로 몰아가면서 서현 씨가 모르는 잠재의식이 긍정되도록. 악감정을 지지해주는…… 금기를 어긴 무모함이었던 걸까요.”

[아니, 그런 뜻은 또 아니고. 아주 작은 서운함이었어요. 엄마는 왜 내 마음을 몰라주지, 정도의 작은 감정. 그런 걸 죄책감이 지나치게 싸맸던 거야. 그래서 병증으로 도졌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 같아요, 내 생각엔. 거기서 대민 씨가 해준 건 악감정에 대한 지지가 아녜요. 그저 본능을 인정해준 일이죠. 자기 자신에게도 인정받지 못해서 일그러지고 조급해졌던 작은 아이를 쓰다듬어준 거야, 대민 씨가. 그러면 그건 보상이 아닌 승화로 작용하게 돼요. 처음으로 자기 감정을 똑바로 바라보고 거기에 대처할 수 있게 되는 거죠. 대민 씨는 날 치료자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아녜요. 이 케이스에서 치료자는 김서현 씨였어. 실제로 상담 내내 엄마 손을 꼭 잡고 힘을 준 게 그 친구였단 말이죠. 대민 씨가 정화한 소녀의 샘물이 가족 전체를 충족시켰다, 난 이렇게 보고 있어요.]

김서현이 치료자였다고.

부정하고 싶은 마음 속 어둠을 인정해줬기에, 그로써 변화한 딸아이의 의지가 그 부모마저 변화시켰다고.

조명기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충격적인 동시에 터무니없이 부러운, 전체를 보는 사고였다.

“저는…… 거기까진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하하. 대민 씨, 언제는 생각하고 행동했어요?]

“예? 저…… 저도 열심히 생각을 합니다.”

[아니, 비난하려는 건 아니고요. 부러워서 그래요. 나는 머리를 굴리고 또 굴려서 간신히 찾아내는 어떤 길을, 대민 씨는 내담자를 만나자마자 걷기 시작하잖아. 그게 너무 부러워요. 그리고 배우고 싶어요. 본능적인 영역일 테니까 배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된 겁니다. 서현 씨는, 앞으로 내 병원에 통원을 하는 한편으로, 가정 내에서는 모친의 마음속 상처를 다독여주는 친구 같은 치료자가 될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숟가락 얹었다고 하는 거지. 결국 대민 씨 선에서 끝난 상담이었던 거거든요.]

그렇게 말하면 또 그렇게도 들리는 일이지만.

허탈하게 고개를 젓고 말았다.

정말이지, 상담의 길이란 무한히 넓고도 멀다.

마흔일곱에야 이 길에 들어왔음이 너무도 아쉬워졌다.

“저, 선배님.”

[하하, 참. 왜요, 후배님?]

“제가 조만간 TV 프로그램을 하나 맡게 될 것 같습니다. 가정에 방문해 그 안의 문제들을 해소해주는 프로그램입니다.”

[아하. 내 새끼가 달라졌어요, 이거였나? 그거예요?]

“……아뇨, 공중파의 신규 편성입니다.”

[아, 그래요? 그거 기대되네. 대민 씨라면 잘할 거예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저는 저를 믿지 못하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임상심리전문가로서 심리평가를 수행해주시고, 이번 케이스처럼 제게 길을 알려주십쇼.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이후 선배님께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하하하, 견마지로라니. 역시 통화를 하면 연식이 느껴진단 말이죠. 얼굴 보고 있을 땐 도무지 동년배로 안 보이는데.]

세 살 연상의 교수는, 그 농담 이후 침묵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말했다.

[미안한데, 그건 곤란하겠어요. 다른 분 추천해드릴게요.]

“예? 저,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별로 대단한 이유는 없어요. 그냥 난 미디어가 싫어.]

“선배님? 하지만 프리VR에는 참여해주셨지 않습니까?”

[그건 서현 씨 때문에. 대민 씨 직접 만나서 부탁하고 싶었거든요. 또 그건 연예인 프로모션 몇 번 빼면 상담 내용이 공개되지 않잖아요. 그런 면에서는 일반 심리치료와 다를 바 없다 싶었던 거지. 하지만 TV는…… 하하. 이제 끊어야겠네요. 슬슬 방송 시작하셔야 되죠? 나도 이제 밥 먹어야 돼. 다음에 판교에서 봅시다. 아무튼 고마워요, 대민 씨. 파이팅!]

전화는 유예 없이 끊겼다.

쓸모가 다했으니 더 볼일 없다는 듯한 태도.

그렇지만 100의 ‘진단’이 그 대화를 재해석한다.

[내담자 평가]가 오류 없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 내담자 명 : 조명기

평가 결과 : 활달하고 영민하고 주의 깊다. ‘박대민’의 독특한 능력에 크게 경도되어 있다. 매스미디어 전반에 극도의 혐오감을 품고 있다. 」

……극도의 혐오감이라니.

평소 성격만 놓고 보면 이용덕보다 몇 배는 더 미디어 친화적이어야 할 사람이, 대체 어째서.

이해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동시에 무척이나 곤란해졌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조명기를 쓰러뜨리라는 에픽퀘스트의 달성은 요원하다.

그의 드높은 기대감 때문이었다.

한효준의 말대로, 임상심리와 상담심리는 이란성 쌍둥이.

이용덕 때에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접근해서 그를 경탄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를 통해서 말 몇 마디로 에픽퀘스트를 완수했다.

그렇지만 조명기는, 업무의 유사성만큼이나 내 능력에 대해서 상세히 알고 있고, 그렇기에 커다란 기대를 품고 있다.

기대란 늘 양면성을 갖는다.

때로는 격려가 되어 잠재력을 이끌어내지만, 그것이 과도할 경우에는 반대로 실망감을 자아내기도 하는 법이다.

조명기의 경우에는 후자였다.

내 상담을 본능적인 초능력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렇기에 김서현이 치료자로 변모하는 신비조차 그에게는 상정범위였고, 실패했을 경우 오히려 크게 실망했을 법했다.

그런 후의 속에서 어떻게 제2의 루트를 찾아낼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이번에야말로 문자 그대로 쓰러뜨려야만 할지도.

그리고 그렇다고 한다면, 나는 더 이상 에픽퀘스트를 진전시키지 못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를 굴복시키고 싶지 않다.

감화시킴으로써 배우고 싶은 것이지, 적으로 상정하긴 싫다.

그는 내게 어떤 적의도 갖고 있지 않으니까.

내 적은 내담자의 응어리 하나면 충분하다.

어쨌든, 그의 말대로 곧 방송을 시작할 시각이다.

상념을 털어내고 오늘의 생방송에 집중했다.

“형님 형님, 5초전입니다. 빠이야!”

“……안녕하세요, 꼰마입니다. 반갑습니다. 어서 오세요.”

무서운 기세로 시청자의 수가 늘어난다.

이제는 이 방송도 3주차.

프리VR 홍보에 실검까지 등에 업고 꾸준히 애청자가 늘고 있어,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시청자가 6천 명에 도달했다.

“오늘은 중요한 공지사항이 있습니다. 어제 ‘꼰마크루’가 실검 1위까지 올랐죠? 관련해서 이후의 전개에 대해 알려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12인의 꼰마크루는 시청자초대석이 열리는 수요일을 제외한 요일마다 두 명씩 투입될 예정입니다. 아직 어떤 조합으로 어떤 역할을 맡을지는 정하지 못했어요. 스케줄과 크루의 관심사를 고려해서 팀을 짤 겁니다. 당장 모두가 들어오는 건 아니고, 한 달에 한 팀씩 차근차근 모셔볼까 해요. 그래서 첫 팀의 투입은 5월이 되겠습니다.”

「꼰마님~~~ 호정오빠부터해죠요~~~」

「10만 석빡이들이 진석이를 기다립니다!!」

「형님~! 루미루미~! 우리루미~!」

열두 BJ의 팬들이 저마다 자기 BJ를 연호한다.

내 방송에 출연하는 것이 대단한 명예라도 된다는 듯이.

사실은 별사탕 수익의 30%를 빼앗기는 착취의 현장인데도.

그 기대 역시 부담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그 청년들의 미래를 담보할 수 있을까.

조명기의 한마디 한마디에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풋내기 주제에, 미래가 창창한 열두 명의 BJ를 옭아매도 괜찮은 걸까.

그런 생각 속에서 첫 번째 사연을 읽었다.

“허허벌교님의 사연입니다. 안녕하세요, 부장님. 저 대호예요. 왜 면접 때…… 혹시 기억하세요? 예, 물론 기억합니다.”

10년 전, 현수와 프리월드 입사면접에 들어왔던 김대호.

잔뜩 긴장해서 준비한 대사만 웅얼거렸던 청년이다.

이제는 풋풋함은 없는 장년이 되어 있을 터.

그렇지만 그 사연엔, 푸르른 내음이 가득했다.

“10년 전 프리월드 최종면접 들어갔던 날, 부장님을 처음 뵀습니다. 그때 전 취준생 3년차라 자신감이 땅을 치고 있었고, 저도 왜 그랬나 싶을 정도로 심하게 떨었습니다. 솔직히 뭐라고 말이나 했는지 기억이 하나도 안 나요. 그런데 이상하게 부장님께서 해주신 말씀은 각인된 것처럼 기억에 남았습니다. 그 얼마 뒤에, 평소 좋아하던 잡지사 쪽에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편집부 에이스가 됐습니다. 올 봄에는 제가 신입사원 면접을 봤죠. 믿어지십니까? 하하.”

하릴없이 흐뭇해지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후의 전개는 조금 민망한 감이 있었다.

“거기서 열 몇 살 어린 면접자들 보면서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때 부장님이 이런 입장이셨구나. 이 자리에서 그런 말씀을 해주셨던 거구나. 주책없이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저라면 절대로 그렇게 못할 것 같아서요. 그래서, 지금의 저는 하나부터 열까지 부장님이 만들어주신 겁니다. 그때 해주신 말씀 덕분이에요. 감사합니다, 부장님. 실검 보고 우연히 발견하게 됐는데, 앞으로 매일 방송 보러 올게요. 마감 때는 어렵겠지만요. 사랑합니다, 부장님. 제가 남자인 게 슬플 정도…… 흠.”

「브로꼰백마운틴ㅎㅎㅎ」

「ㅋㅋㅋㅋㅋ뭐라고해줬는데 10년동안기억해요??」

「허허벌교님 별사탕 100개. 부장님 하트하트. 어떻게 10년전 그대로시네요. 유튭보고 설마했는데 진짜 반가웠어요.」

사실은 10년을 정통으로 맞았다가 회춘한 모습인데.

그리고 그때 김대호에게 해줬던 말이라고 해봐야, 별달리 감동할 것도 없는 일상적인 격려일 뿐이었다.

더 잘 맞는 회사가 있을 거다……

언젠가 대호처럼 세상을 호령할 수 있을 거다……

근거라곤 하나도 없는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그 자의적인 기대가 김대호의 길이 됐다고 한들, 거기에 내 역할이 컸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말 한마디에 무슨 마법 같은 것이 담겨 있었겠는가.

쓰러지지 않고 걸어가 자신의 하늘에 다다른 것은 그 본인이다.

내가 연민했던 청년은, 내가 닮고 싶은 장년이 되어 있었다.

“……허허벌교님. 아니, 대호야. 고맙다. 기억해줘서 고맙고, 잘 살아줘서 고맙다. 나도…… 너처럼 멋있게 살아보련다.”

「허허벌교 : 오잉ㅋㅋㅋㅋ 부장님 지금도 세젤멋인데요!」

아직은 아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될 수도 있으리라.

한효준의 초인적인 안목을 습득하고, 이용덕의 의료적인 관점을 익혀가며, 조명기의 마음을 돌려 그의 심오한 전략까지 흡수한다면.

그의 기대를 자기실현적 예언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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