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
22장 - 나쁜 내담자는 없다 (3)
“당신이, 그랬다고? 정말로? 그렇게 화를 냈어?”
아내는 빠져나올 듯이 눈을 크게 떴다.
민망해져서, 누운 채로 뒤통수를 긁었다.
“화를 냈다기보다는, 직면이라는 걸 시도한 거야. 그들이 가정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집안의 새장이 공고한 채로는 치료가 불가능할 테니까. 하지만…… 자랑할 만한 방식은 아니었어. 나도 반성을 해야 되는 부분이지.”
“잘한 거지! 할 말 해야지. 그런데 그런 게…… 가능한 거야? 계속 알던 사이도 아니잖아? 오늘 잠깐…… 용산구면, 겨우 30분쯤 있던 거 아냐? 그랬는데 그게 됐어? 혹시 부작용 나면 어떡해? 괜히 당신이 덤터기 쓰거나 그러면……?”
합당한 염려였다.
나 역시 예전이었다면 그 걱정으로 잠을 못 이뤘으리라.
아니면, 아예 직면을 시도조차 하지 못했겠지.
다만 지금은 웃음만 나온다.
[내담자 평가] 덕분이었다.
“확실히 좋아질 거야. 이젠 그게 보여.”
“……진짜 신기해.”
“뭐가?”
“그렇게 자신감 넘치는 모습, 처음 봐.”
“아. 이건 좀 별로였나.”
“아아니. 보기 좋아, 여보. 당신이 자신감에 차 있어야지. 그래야 내담자들도, 가족들도, 같이 확신을 할 거 아냐? 잘 됐을 거야. 나도 그렇게 믿을게.”
아내는 그렇게 말했지만, 다시금 반성하게 된다.
주의가 필요한 부분이었다.
‘오류 없는 보고서’라곤 해도, 약식이다.
단서를 얻어내지 못한다면 어떤 문구도 표시되지 않는.
그리고 상담사라는 존재는, 끊임없이 의구해야 하는 자.
자신감은 필요하지만 그게 독선으로 이어져선 안 된다.
어디까지나 겸허하게 내담자에 집중해야 한다.
들떠 있던 내게 준엄하게 경고했다.
그래선 안 돼.
너는 단 한 순간도 확신해서는 안 돼.
그 타이밍에, 아내가 손뼉을 쳤다.
“아! 그런 거 하면 좋겠다! 왜,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이런 거 있잖아? 주민이 인맥이란 CP가 당신한테 그런 프로그램 딱 만들어주면 좋겠어. 그 놀랍징처럼 민망하지도 않을 거고, 인방도 엄청 홍보 될 거잖아. 그렇지?”
“그렇겠지만, 그건 안 돼.”
“응? 왜? 상담은 자랑할 만한 일이랬잖아?”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잖아, 내가. 석사 과정은 아직 시작도 못 했지. 자격증은커녕 수련 경험조차 없지. 그런 나한테 상담사 역을 맡긴다면, 그 CP는 나쁜 사람이야.”
“전문가들이랑 같이 하면 되지 않나? 그리고 집에 가서 뭐 족보를 바꿔? 딱 방송에 낼 만한 미미한 문제가정 가서, 아 그러셨냐 얘기 들어주고, 이렇게 생각해보세요 하면서 좋은 말 좀 해주면 되지. 왜 자신 없는 척해?”
“자신이야 있지만…… 내 생각은 그래. 그런 프로는 애초에 만들어져선 안 된다고 봐. 방송의 대본이나 편집이란 게 정말 무서운 거잖아. 자칫하면 희생자를 낳을 수 있어.”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는 4년 전 막을 내린 교양프로.
그 역시 실제로는 ‘우리 부모가 달라졌어요’라고 할 수 있는 전개가 많아, ‘세나개’와 비슷하다면 비슷했다.
다른 것은 단 하나.
이쪽은 피보호자가 사람이라는 점이다.
시청률이 최고의 덕목인 방송프로에서, 대본과 편집은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예능이 아니라고 해서 전부 실제는 아닌 것.
일례로, 유명한 다큐멘터리인 EBS의 <인간극장>조차 핵심적인 얼개는 일정 부분 조율해서 그림을 뽑는다고 했다.
거기 출연했던 BJ준태가 해준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렇게 시청률을 위한 얼개를 짜다보면, 어쩔 수 없이 나오는 것이 이른바 ‘악마의 편집’이다.
자극적인 장면이야말로 시청자들을 붙잡아두는 요소기에.
사소한 문제행동을 부풀리거나 없는 갈등을 만들어내려는 시도 등이 있을 법했다.
그게 문제였다.
전 국민이 프로그램 비평가가 된 양방향 소통의 시대.
반려견 가정이라면 그저 ‘강아지를 저렇게 기르면 어떡해’ 하며 혀 차는 데 그치지만, 사람의 아이 쪽은 다르다.
자칫 없는 악마를 만들어낼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런 케이스가 있었다.
문제를 단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대본과 그걸 자극적으로 편집한 구성 때문에, 하루아침에 낙인이 찍혀버린 집안.
악플러들은 유명인에게만 관심을 갖는 게 아니다.
그들이 ‘문제 부모’라는 명분으로 정의의 철퇴를 가장해,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갈 만한 말들까지 토해냈다.
그 비난들은 어떤 개선도 만들지 못했다.
오히려 부모에게 심각한 사회불안을 안겨줬고, 악플러들이 지키겠답시고 소리 높였던 아이는 더더욱 불행해졌다.
정의는 어디에도 없었다.
자기만족만이 있었을 뿐.
내가 과거 악플러들을 욕했던 게 딱 그 꼴이었다.
진짜 고민 없이 내 감정만을 강요해버리는.
비난은 대부분의 경우에 상황을 악화시킨다.
김서현 가정의 직면 역시, 조금만 삐끗했으면 오히려 치료자인 조명기의 권위를 실추시킬 수도 있었다.
모든 것을 관찰하며 적절한 선을 지켜야 한다.
진심으로 그들의 개선을 바라야 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그저 감정의 배설에 불과하다.
사실, ‘우아달’ 출연자들은 비난 받을 이유가 없었다.
적어도 내담자니까.
자신의 가정을 방송에 공개하면서까지 스스로를 바로잡으려 했으니, 그 의지만으로도 칭송을 들어 부족함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3자의 몰이해에 부딪치는 것이다.
만약 그런 프로그램이 다시 생긴다면……
생기고 만다면, 내가 하는 편이 나을 거라 생각한다.
차라리 내가 비난해야지.
NBSC의 기술로 반응을 통제할 수 있는 내가 대신 비난을 해준다면, 악플의 빈도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을 테니.
하지만 생기지 않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당장 세상을 바꾸기엔, 아직 내가 너무 약하기에.
그런 생각 속에서 잠든 탓이었다.
이튿날 점심에 받은 문자 한 통이, 나를 패닉에 빠뜨렸다.
「신태훈입니다. 프리월드 쪽 답변 받고, 거기 거치는 것보다 직접 설명 드리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전화번호 물어봤습니다. 실례가 안 됐다면 좋겠네요. 놀랍징 출연은 사실 그냥 징검다리처럼 추진한 부분이었는데, 작가들한테 거기까지 말해주긴 좀 어려웠던 게 있습니다. 팀 사기 문제니까요. 아무튼 메인은 그게 아닙니다. 패널로 얼굴을 좀 알리신 뒤에, 가정 교화 프로그램을 추진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그 과정으로 몇몇 예능에 출연해주시는 방향이라면 어떨까요? 문자로는 더 말씀드리기 어렵고, 편하실 때 연락 주십쇼.」
MBC CP 신태훈 부장은, 처남의 추측대로, 내 스타성을 정말 높이 사고 있는 듯했다.
그에게 전화를 걸기 전에 한참 말을 골랐다.
가능한 예의를 지켜 거절하기 위해서.
“저, 안녕하십니까. 박대민이라고 합니다.”
[아, 박대민 선생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 문자 잘 읽었습니다. 배려와 관심에 무척 기뻤는데…… 놀랐습니다. 저는 처남에게 예능국 CP시라고 들었거든요.”
[응? 아, 하하. 그래요. 그런 프로가 교양국 느낌이긴 하지. 하지만 세상이 많이 달라지고 있잖아요? 이제 진짜 예능의 무대는 거의 인터넷상으로 옮겨지고 있으니, 우리도 변화가 필요한 시점인 거죠. 숏폼 컨텐츠들이 할 수 없는…… 그렇지만 사회에 꼭 필요한…… 이런 것들 말입니다.]
단순 재미로는 유튜브의 숏폼 컨텐츠를 따라잡기가 불가능하니, 역발상으로 교양적인 예능을 강화하겠다는 건가.
직위에 비해 상당히 파격적인 사람이었다.
다만, 그 파격의 내용이 무척 곤란하다.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만, 조금 당황스럽습니다.”
[예. 이게, 안타깝게도 고민할 시간을 많이 드릴 순 없습니다. 가을개편 때는 편성하고 싶어요. 이쪽에서 화제를 잡기에 딱 좋은 시기여서요.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이것도 후속작이 없고, KBS 안녕하세요 이것도 취소됐고. 블루오션이죠.]
“저…… 실례되는 말씀일까 조심스럽긴 합니다만, 여쭤보지 않을 수가 없네요. 시청률이 나오지 않아서 종영한 프로들이잖습니까? 그런 걸 다시 추진하는 게 정말 맞겠습니까?”
[괜찮아요, 괜찮아요. 제가 부탁하는 입장인데, 편하게 물어보셔도 됩니다. 아무튼 그건 또 방송가에서는 약간 얘기가 다른 문제예요. 올드해져서 시청률이 떨어진 건 맞는데, 그렇다고 해서 시청자들이 정보성 예능을 싫어하게 된 건 아니거든요. 안녕하세요 내리고 편성된 강아지 행동교정 프로 있죠? 그게 시청률이 10을 넘보고 있어요. 처음에는 그냥 한 시즌 때우려는 프로였는데, 그게 그렇게 되더라고요. 그때부터 저희 쪽도 여기에 상당히 진지한 관점을 갖게 된 거죠.]
속칭 ‘개통령’이 진행하는 KBS 예능 프로 얘기다.
나 역시 잘 아는 성공신화.
프리월드의 미래기획팀 부장으로서, 애견인들을 타겟으로 한 어플리케이션 개발 의견도 낸 적이 있는 까닭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블루오션을 확신할 순 없었다.
“주제넘지만, 나름대로 관련 업계 종사자였던 제가 한말씀 드려도 될까요? 그건 그저 출연진의 이슈 효과라고 보는 게 적절할 것 같습니다. 그 훈련사가 연말 시상식에서 상을 받고 울면서 호소한 일이 있었잖습니까? 앞으로는 부디 사지 말고 입양해달라고요. 그 이례적인 행동이 인터넷상에서 정치 이슈들까지 누를 정도로 화제가 됐었지요. 정보성 예능의 성공을 확신할 수 있는 준거는 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신태훈은 즉답하지 않았다.
그는, 기이하게도,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핫, 아이고…… 바로 그래서 부탁드리는 건인데요.]
“예?”
[이거 참. 이런 말씀까지 드리게 될 줄은 몰랐는데. 예상했던 대로 참 조심스러운 분이시네요.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좀 더 정확히 말씀드릴게요. 교정 프로그램들이 하나둘 막 내린 것도 똑같은 맥락입니다. 이런 류의 방송은 재미보다는 근본적으로 어떤 흐뭇함에 대한 기대가 있을 수밖에 없어요. 고구마에 뒤따르는 사이다 말이죠. 그런데 내려간 프로그램들은…… 제작진에서 좋지 않은 이슈가 많았죠. 악편이다 대본이다 하면서…… 그러면 똑같은 고구마여도 사이다가 기대되지 않는 겁니다. 선입견이라고 해야 되나? 결국 자승자박…… 딜레마라고 할 수 있겠네요.]
들어보니 좀 더 시야가 넓어지는 느낌이긴 했다.
하지만 그래서 더 당황스러웠다.
“딜레마란 말에 딱 어울리네요. 방송인 이상 어느 정도의 조작이 필요한데, 그런 일들이 쌓이면 흐뭇한 인상을 주기가 어렵게 되는. 덕분에 더욱 염려스럽게 느껴집니다.”
[하하. 그러니까, 그래서 박 선생님이라는 겁니다.]
“예? 제가 무슨……?”
[축구 식으로 표현하자면, 크랙이란 말이 있어요. 아시죠? 전진도 후진도 곤란한 고착상태에서 혼자 힘으로 틀을 깨버리는. 그걸, 저는 박대민 선생님께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건…… 과한 기대 같습니다.”
[과하지 않아요. 진행하시는 방송 여러 번 모니터링 했습니다. 그리고 확신했어요. 이분이라면 다르겠다. 어쩔 수 없이 고민하게 되는 그 아슬아슬한 악마의 유혹들이, 이분이 진행하는 방송에서는 필요가 없겠다. 그냥 찍는 대로 내놓으면 되겠다. 그렇게만 하면, 개통령 그분보다도 더 강력한 어떤…… 선한 영향력이 만들어지겠다.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그건 좀, 너무 간 게 아닐까.
아직은 아니다.
언젠가는 그렇게 되고자 꿈꾸고 있지만, 아직은 부족하다.
“신 부장님. 저는 그럴 수 있는 존재가 못 됩니다.”
[아이고. 이런 부분은 전문가의 의견을 신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가 그래도 MBC 예능의 전성시대를 이끌었던 사람인데요. 제일 유명한 건 호태지만, 저도 뒷받침을 열심히 했던 사람입니다. 믿어주셔도 괜찮아요. 선생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상담 하면 박대민, 이렇게 될 거라고 봐요.]
처남 말로는 차기 예능국장이 확실시되는 인물이라 했다.
무수한 출연진을 선별해왔을 방송의 전문가.
그럼에도 아직 확신이 안 선다.
내 부족함은, 스스로 가장 잘 알기에.
“그렇지만…… 신 부장님. 저는 심리학 학위조차 없습니다. 거기에 외견이 과하게 동안인 점도 있어서, 대중적으로 신뢰감을 바로 드릴 수 있다는 확신이 안 서는 겁니다.”
[아이고, 괜찮습니다. 개통령 그분 프로를 모티브로 할 거예요. 각 가정 상황에 맞게 전문가들이 패널로 자리하고, 선생님께서는 가정 안으로 들어가는 제자 역할이신 거죠. 리시버로 송수신을 하면서 상담하시는. 중간중간 그분들 전문용어도 해설해주셔야 되니까, 말하자면 MC 포지션입니다. 시작은 그렇게 가는 거지요. 그런데 막상 뚜껑을 따보면 전문가들이 감탄을 하네? 하하. 의외성 있는 임팩트가 되겠지요?]
예를 들면 한효준과 이용덕과 조명기가 관찰자 패널이 되고, 그들의 소견을 등에 업은 내가 상담을 한다는 그림.
황당한 파격이다.
그렇기에 조금씩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출연진을 내 사람으로 채운다면, 그 영향력으로 혹시 모를 제작진의 만행을 막을 수 있다.
“만약…… 한다면, 패널들을 제가 결정할 수 있을까요?”
[흠. 그건 좀 어려운 문제긴 한데요. 사기가 떨어질 수도 있어요. 출연료 문제도 잘 타협이 돼야 하는 부분이고.]
“제가 한국 최고의 권위자들과 가까운 사입니다. 한효준, 이용덕, 조명기, 이분들을 모셔오고 싶어서 그럽니다.”
[어어? 그래요? 저도 이름 아는 분들인데? 아니 그런데, 조명기 그분은 미디어에는 절대 안 나오시던 분 아니에요?]
“설득할 자신이 있습니다. 출연료 역시…… 제 출연료를 삭감해서라도 맞추고 싶습니다.”
[아이고. 아니 뭘 또 그렇게 받으십니까? 그러실 것까진 없고, 그 정도로 네임밸류 있는 분들이라면 나쁠 게 없지요. 인상도 좋고 말씀도 잘하시는 분들이잖아요? 그렇게 앉혀둔다고 생각하면, 신선한 케미가 또 기대되네요. 왜, 호태 프로그램 아시죠? 거기서도 뜬금없이 작곡가 편곡가 이런 양반들이 빵빵 터뜨리곤 했거든요. 이건 제가 잘 수렴을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문제가 사라진다.
조명기와는 아직 교감이 크지 않지만, 다른 두 명은 나를 상당히 신뢰해주는 관계니까.
그들이 패널이라면 꽤 자율적인 상담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그들의 명성을 빌려 악마의 편집을 막을 수 있다.
어쩌면, 이거라면, 정말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국인들이 상담 하면 떠올릴 존재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이.
[역시 통화를 해야 돼. 서면으로는 이런 소통이 잘 안 됐을 거예요. 그렇죠? 하하. 아무튼 그런 쪽으로 저희가 준비를 해보고, 조만간 미팅 요청하겠습니다. 관련해서 한 가지만 또 부탁을 드릴 수 있을까요?]
“예, 말씀하세요.”
[프로그램 타이틀이요. 임팩트 있고 호기심 드는 그런 게 필요한데, 요새 트렌드도 잘 아시는 분이라 여쭤보네요. 다양하게 한번 생각해주십쇼. 그러면, 점심 맛있게 드시고요.]
전화를 끊고, 가만히 미래를 관조했다.
말도 안 되는 기회를 잡았다.
어쩌면 신께서 내 꿈을 응원해주시는 건가 싶을 정도로.
하지만 모든 것이 생각처럼 간단할 리는 없고, 신중하게 준비하지 않으면 그 행운이 끔찍한 실패로 변할지도 모른다.
정말 할 수 있을까.
이 길이, 내가 전진할 방향이 맞는 걸까.
오아시스일 수도 있지만……
사막의 순례자를 꾀는 신기루일지도…….
오랫동안 교정을 걸으며 혼자서 고민을 이어갔다.
한효준 교수는 중간고사 채점으로 바쁜 탓.
그 와중에, 조명기의 전화를 받게 됐다.
[대민 씨. 방금 서현이네 왔다 갔어요.]
“아…… 예. 저, 혹시, 어땠습니까?”
[응? 이런. 우리한테도 내담자의 정보는 비밀인데요?]
“그, 그렇죠. 죄송합니다. 선을 넘을 뻔했네요.”
[그래서, 직접 전화하라고 했습니다. 대민 씨는 내담자가 아니니까. 전화번호 비밀보호 이런 거 안 했어요. 하핫.]
……전화번호와 비밀보호로 운율을 맞춘 건가.
평소와 비슷한 장난에 조금 안심이 됐다.
다행히도 부작용은 없었던 모양.
‘오류 없는’ 보고서를 읽었으면서도, 괜히 걱정이 됐던 것이다.
확신과 의심 사이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줄을 탄다.
이런 내가 매주 가정 방문 프로그램을 진행한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일까…….
의문에 답을 내준 건, 한 시간 뒤의 전화였다.
[여, 여보, 어, 안녕하세요, 꼰마님……?]
“아, 예. 서현 씨죠? 목소리 모를 뻔했어요. 어제 말씀을 너무 안 하셔서. 반가워요. 번호 저장해둘게요.”
잔뜩 떨고 있음이 느껴져서, 짓궂은 장난부터 쳤다.
그제야 웃으면서 말을 잇기 시작했다.
[히힛…… 저…… 병원, 아까 나왔는데요. 거기서 전화번호 주셨는데, 해도 되는지 몰라서…… 고민했어요.]
“당연히 해도 되죠. 어제 그런 오지랖을 부리고 나와서 전화를 안 받으면, 그건 인간말종이죠.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 죄송해요. 저는…… 무서웠어요. 그러니까…… 제가 그, 엄마가, 저 때문에 다치셨던 적이 있어요.]
“……그랬어요?”
[네. 저 어렸을 때 산에서 구를 뻔했는데…… 엄마가 대신, 그렇게 되셔서…… 그때 제 동생, 유산되고, 엄마 몸도, 다시 아이 못 갖게 되셔서요…….]
그런 일이…… 있었다고.
폭풍 속의 나무처럼, 모녀의 역사가 머릿속에서 재구성된다.
어제의 생각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흔히 발견되는 첫 딸에의 애착과 동일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인옥이라는 여인에게 김서현은……
모든 것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낳아주지도 못한 둘째와, 사고로 잃은 여성으로서의 기능까지 포함해, 정말 모든 것이 첫 딸에게 투사되었을 테니까.
남편 쪽은 또 어떠했을까.
공처가라고 예상한 건 억측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저 목숨을 걸고 딸을 구해낸 아내를 경애하는……
그렇기에 그녀에게 가정의 전권을 맡길 수밖에 없었던, 너무도 흔한 아버지였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감히 내가 비난할 수 있는 일이었던가.
정말 직면만이 답이었을까.
그들은 정말 악인이었나…….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어쩌면, 피해자의 부모를 원망한 나머지, 상담사의 첫 번째 의무마저 조명기에게 떠넘긴 건 아니었던가.
……역시 될 법한 일이 아니다.
전형성을 맹신하고 행동의 이면을 살펴보지 못했다.
이런 내가, 어떻게 매주 가정상담을 할 수 있을까.
신태훈 부장에게 다시 전화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때였다.
[저, 무서웠어요. 엄마가 상처받으셨을까봐……. 그런데, 오늘, 병원에서 얘기하시면서, 그때 얘기 처음 하시면서, 많이 우셨어요. 그리고…… 고맙다고 말씀드리랬어요.]
“고맙……다고요.”
[네. 엄마가, 저까지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게 해주셔서요. 꼰마님 아니었으면, 계속 그거 모르고, 계속 그렇게…… 서로가 아팠을 거라고, 고맙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저도요…… 고맙습니다. 영혼을 위한 짜장면…… 맛있었어요. 진짜로요.]
……눈물이 날 것 같다.
사진을 찍는 주변 학생들이 아니었다면, 정말 울었을지도.
나는, 참, 정말로……
상담사가 되길 잘했다.
“저기…… 고맙다고 하니까, 하나 대답해줄 수 있을까요?”
[네, 네네! 네…… 어떤 거요?]
“나쁜 사람은 없다…… 어때요?”
[네, 네?]
“프로그램 제목으로요. 혹시 너무…… 어그로 같나요?”
[아, 아아아뇨! 머, 멋져요……. 꼰마님은, 멋있어요.]
아직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섣부른 실수를 반복하는 인간.
끔찍한 고통을 안고 있는 여인을 편견 속에서 매도하고 비난한, 아직도 갈 길이 먼 사막의 순례자다.
그렇지만……
길은 스스로 찾아오지 않는다.
신기루에 홀려 몇 차례고 쓰러질지라도, 나아가야 한다.
어딘가에서 기다릴 오아시스를 찾기 위해.
겁을 걷어내고 전진하자.
날 두렵게 만드는 내담자들을 향해서.
그렇게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