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진없는 상담사-55화 (55/200)

# 55

21장 - 상담사와 외모 (1)

[기부 크루 건, 대표님께서 고맙다고 전해달라네요.]

민원식은 그렇게 말했다.

듣는 기분이 복잡해지는 이야기였다.

“고맙다고요.”

[예. 프리TV 이미지 제고에 큰 도움이 될 일이라고…… 그렇게 꼰마크루가 형성되면 이후 프리VR에도 탄력이 붙을 수 있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꼬아서 듣지는 말아요.]

꼬아서 들을 것까진 없지만, 당황스러웠다.

진갑수 대표가 크루를 몹시 싫어하는 인물이었던 까닭.

회사 입장에서 보면 베스트나 파트너들보다 일반BJ들이 벌어들이는 별사탕이 수익성 면에서 좀 더 낫다.

파트너는 8:2, 베스트는 7:3, 일반은 6:4.

많게는 두 배까지 수수료의 차이가 생기는 것이다.

거기서 크루라는 무리는 이미 오래 방송을 해온 베스트BJ들 중에 형성되는 경우가 많아, 그들의 합방과 좌표가 일반BJ들의 파이를 빼앗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기에 진 대표가 크루 억제 정책을 밀어붙였던 것이다.

나만이 반대의견을 폈다.

크루가 인기 BJ들의 플랫폼 이전을 막는 유일한 방벽이니, 역으로 그걸 장려해줘야 전체 파이가 커질 것이라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옳았던 건 내 쪽.

대표의 뜻으로 크루를 억제한 프리TV는 스타급 BJ들을 다수 잃었고, 그들에 비견될 만한 신인들을 키워내지도 못했다.

거기서 드러난 식견의 차이도 진갑수가 날 멀리하게 된 요인 중 하나이리라.

그런 그가 이제는 내 크루를 응원한다는 것이다.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그 표현법은 좀 아쉬웠지만.

“직접 말했다면 더 좋았을 것 같은데요.”

[흠…… 뭐…… 일찍 주무시는 분이니까. 아, 그건 그렇고 또 희소식이 하나 있어요. 내일 미디어팀에서 미팅 진행하고 나서 정리해서 연락할 일이긴 한데, 전화한 김에 미리 말씀드리죠. 대민 씨, 방송 잡혔습니다.]

둘러대기 위해 꺼낸 말임에 분명한 이야기.

그렇지만 그 내용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방송이요? 어떻게 벌써……?”

[웬일로 공중파에서 먼저 제의를 줬다고 하네요. 원래는 우리 쪽에서 열심히 프로필 돌려야 흘끔 봐주는 사람들인데, 별일이죠. 혹시 방송국 쪽으로도 아는 사람 있습니까?]

그 말에 처남이 떠올랐다.

방송국의 지인에게 운을 띄워보겠다 했었지.

대중적인 명성을 얻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라 신경 써달라고 부탁했던 건이다.

그게 설마 공중파로 이어질 줄은 몰랐지만.

“공중파라면, ‘마이텔’입니까?”

[아뇨. 거기랑도 잘 맞을 것 같아서 컨택은 해봤는데, 지금은 출연하고 있는 우리 BJ가 있어서 곤란할 것 같다네요. 한 명이나 두 명이나 그게 그건데 말이죠. 이번에 들어온 건 ‘놀랍징’입니다. 아시죠?]

“어…… 이름은 들어본 것 같네요.”

[몇 년 한 건데 몰라요? 올해 초에 부활한 토요일 예능입니다. 일반인 중에서 놀라운 사람들을 불러다가 대결시키고, 매 단계 통과할 때마다 징 쳐주는. 올드하죠. 그래도 시청률은 잘 나옵니다, 요즘 예능 중에서는 아주 발군이죠. 대신 연령대가 높아서 화제성 면에서 약점이 있는데…… 해서 이번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될 만한 특집을 준비한 모양이에요.]

“들어보니, 상담은 아닐 것 같은데요.”

[예. 얼굴 서바이벌입니다. 전국의 동안들을 다 불러다가 세워놓고 대결시키는 거.]

민원식 말대로 올드한 예능이다.

그만큼 단순해서 유명세를 얻기에는 딱 좋았다.

한국은 동안에 열광하는 나라.

내 실제 나이와 NBSC가 변화시킨 ‘외모’를 생각하면, 해당 방송이 화제가 되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 같았다.

지금도 내 방송 스크린샷은 떠돌고 있다.

‘꽃중년 47세 BJ’등의 자극적인 문구로.

다만 인터넷 커뮤니티를 자주 찾지 않는 대다수의 중장년층에게는 아마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으리라.

그들에게 나를 소개하기 위해서는, 인터넷 기사를 양산하는 것이 최선책이다.

그 기사를 내기 가장 좋은 방법은 시청률 높은 예능에 출연하는 것이고.

놀랍징 출연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파급효과는 크다.

방송가는 대중의 인지도에 민감한 법.

지금이야 이쪽에서 컨택을 해도 긴가민가하겠지만, 나라는 사람 자체가 널리 알려지면 역으로 섭외가 쏟아질 터였다.

그렇지만……

이건 아니다.

유명세도 좋지만 그런 식으로 나아가고 싶진 않았다.

집에 돌아와서 그 제의와 결심을 이야기했다.

딸애가 무척 아쉬워하더라.

“아 왜? 방송 나가면 좋은데. 애들한테 자랑할 수 있는데.”

“동안 이런 건 그렇게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야.”

“왜? 다 부러워할 건데?”

“지수야. 부러움을 사는 게 좋은 일일까? 예를 들면, 아빠가 노력해서 열심히 한 방송이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존경을 받게 된다면 그건 기쁜 일일 거야. 하지만 외모는 그게 아니잖아. 생각해봐. 타고난 노안이라서 불편한 시선을 받았던 사람들한테 아빠 얼굴이 어떻게 보일까? 동안으로 주목받는 방송이란 게, 마음속의 박탈감을 더 크게 만들지는 않을까?”

대학생 시절의 동기 중에 그런 녀석이 있었다.

얼핏 보면 교수님들과 또래로 보일 법한 탈모의 정호성.

아빠 심부름이라는 변명 없이도 쉽게 술을 살 수 있었다는 둥 우스개로 말하곤 했지만, 그 외모가 호성이의 마음에 얼마나 큰 돌이었는지 나는 잘 알 수 있었다.

그런 이들과의 비교우위로 나를 자랑하고 싶진 않다.

내가 노력해서 만든 외모가 아니니까.

그렇게 보면 상담 쪽도 마찬가지지만, 그건 그나마 귀감이 될 만한 일이니 부끄러움을 상쇄하는 측면이 있었다.

상담은 어떤 이든 노력하면 잘할 수 있는 일이니.

“근데, 아빠 지금도 동안이라 잘나가는 거잖아.”

“……그런 면이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암묵적으로 이득을 보는 것과 대놓고 자랑하는 건 달라.”

“아빠는 너무 답답해.”

“답답하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아, 지수야. 그만큼 불의의 피해자들을 안 만들 수 있으니까. 무슨 말인지 알지?”

“몰라.”

입술을 삐죽거리며 방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본다.

아마 방송국에 가보고 싶었던 것이리라.

아이돌들도 패널로 나오는 프로그램이니, 출연자 가족으로 방청석에 가면 재밌는 시간이 될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진단’을 아내가 부정했다.

“아빠 방송이 더 잘됐으면 하고 생각했을 거야.”

“어…… 그래?”

“그래. 방송국이야 방학 때 공방 열심히 다녔는데, 그게 뭐 대수겠어?”

“어, 공방?”

“공개방송. 친구들이랑 같이 몇 번 갔대. 그랬는데 대기하는 시간도 너무 길고 대기열에서 갑질까지 당했다고 투덜댔어. 방청객으로 가는 건 별로 원하지도 않을 거야.”

출연자 가족 입장으로 간다면 좀 다르겠지만……

그게 핵심은 아니겠지.

거기까지 듣고 나니 자연히 ‘진단’이 수정됐다.

새로운 정보를 통해 딸애의 심리가 재해석된 덕분이었다.

그렇게, 아직도 선입견이 참 많은 가족이다.

10년을 단절된 채 지냈기에.

하지만 [내담자 평가]를 사용하진 않았다.

그런 식으로 확정적인 정보를 얻고 나면, 나 스스로 알아가려는 노력이 부족해질 것 같아서.

NBSC의 기술을 사용하는 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 한해.

아내의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크루 건이 잘되면, 방송 나가는 것보다 훨씬 더 효과가 클 거야. 호정 씨는 아이돌 출신이고, 진석이는 지금 케이블 예능에도 나가고 있으니까. 이젠 굳이 방송에 출연 안 해도 돼. 곧 지수도 아빠가 자랑스러워질 거야.”

“이미 자랑스러워하고 있네요. 나도 그렇고.”

“하하.”

“웃기는. 일찍 자. 난 당신 서재 좀 쓸게.”

“서재는 왜?”

“내일 재단 직원 될 애들 만나기로 했잖아. 걔네들 얘기 알아듣는 척이라도 하려면 공부해야지. 아직 모르는 게 많아.”

열의를 담은 얼굴.

오랜만에 보는 반짝이는 눈이다.

연애 시절엔 늘 저렇게 당찼던 아내인데.

“……그래. 잘 준비해줘요, 진주희 이사장님.”

“예, 박대민 후원자님. 근데 걔네들도 놀라겠다. 출연금 규모가 갑자기 월 2억으로 뛴 거니까. 할 얘기가 참 많겠어.”

그렇지.

내일은 할 얘기가 많은 날이다.

아내 입장에서도, 내 입장에서도.

*

「BJ은진 : 부장님!!! 왜저한텐연락안했어요ㅠㅠ」

아침 일찍 날아온 송은진의 메시지.

최대한 정중하게 답변해줬다.

「미안하다. 크게 좋은 기회도 아니라서 미리 교감이 있던 친구들하고만 얘기했어. 그렇게 많이 와줄 줄도 몰랐어.」

「BJ은진 : ㅠㅠㅠ대수오빠죠 오빠가 저 뺀거죠ㅠㅠ」

아마……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나와 인연을 맺은 모든 BJ들에게 보낸 메일에서 송은진을 제외한 이유는, 두 사람의 사적인 관계 외에는 없을 터였다.

송은진 입장에서도 모를 수 없는 일이겠지.

하지만 그렇게 대답하면 큰 상처가 될 것이다.

「아냐. 너랑은 내가 덜 친한 것 같아서 빼라고 했어.」

「BJ은진 : 아왜요ㅠㅠ 저랑도친하자나요부장님ㅠㅠ」

「너보다는 너희 어머니랑 친하지.」

「BJ은진 : 아맞다 울엄마가 부장님또언제오녜요 ㅎㅎ」

「BJ은진 : 부장님 언제올거에요~~」

「요즘 너무 바빠서. 미안하다. 또 연락하자.」

등교 준비를 위해 폰을 집어넣었지만, 생각은 계속됐다.

묘한 관계다.

송은진은 엽캠이지만 가만히 있을 때는 대단한 미인이고, 만인의 사랑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천진난만한 성격.

그에 비해 진대수는 ‘별로’라는 언급을 반박할 수 없는 평범한 외모다.

그런 그들의 관계가 송은진이 차이는 방향으로 끝나버렸던 건, 남들이 들으면 결코 믿지 못할 얘기였다.

하지만 그게 또 의외로 흔한 사례.

개개인의 소통은 외모보다 마음에 더 좌우되는 법이다.

다만 TV 등의 매체로 겉보기만을 보여주는 연예인들에게는 그 외모가 무엇보다 크게 작용하고, 그렇기에 외모지상주의가 팽배해져 많은 이들에게 박탈감을 안겨주게 됐다.

외모 콤플렉스로 자살하는 사람이 생길 정도로.

그럴 필요가 없는 일인데.

자신감을 갖고 살아가는 그 모습 그대로 아름다운 것인데.

그런 생각 중에, 아내가 자신감 없이 물었다.

“여보, 나 어때? 좀 괜찮아 보여? 이 색깔 어울려? 별로지? 아줌마가 멋 부린 느낌이지? 당신 옆에 있으면 싫겠지?”

“솔직하게 얘기해?”

“어…… 응. 솔직히.”

“예뻐.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워.”

“……아니, 그런 말 할 때가 아니잖아? 당신이랑 나랑 같이 학교 가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냐구. 다 내가 연상인 줄 알 거 아냐. 그게 싫어서 물어보는 거라니까?”

이럴 때는 미안해지고 마는 것이다.

내 외모는 몹시도 어려졌다.

표정에서 드러나는 무게감이란 게 있기에 20대로까지 보일 정도는 아니지만, 이젠 30대 중반 소리도 못 듣게 됐다.

잘 꾸민 아내가 지레 겁먹을 법했다.

하지만, 내게는 그녀가 가장 빛나는 진주인데.

“진심이야. 외모를 보는 눈은 사람마다 다르니 남들이 뭐라고 할지는 모르겠지만, 나한테는 그래. 당신이 세상에서 제일 예뻐. 내 곁에 있어주는 게 고마울 정도로.”

“……참나.”

“아, 둘이 뭐 해! 닭살 돋아!”

준비 마쳤다고 말하러 온 딸이 팔을 긁는다.

하지만 얼굴은 웃고 있었다.

결국 셋이 함께 깔깔대고 웃고 말았다.

*

차에서는 연신 침을 삼키며 긴장했지만, 캠퍼스에 내린 아내는 마치 런웨이의 모델처럼 행동했다.

작은 제스쳐 하나까지도 계산한 멋들어진 움직임.

심지어 20cm 가까이 차이가 나는 나와 보폭을 맞춰, 함께 걸어가는 내내 학생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두리번거리지 마. 다 쳐다보잖아.”

“그게 아니라 당신 때문에 보고 있는 거야.”

“아니거든?”

“맞대도. 날 알아봤으면 사진 찍으러 왔겠지.”

사실 반반이었다.

아내의 파워풀한 워킹에 돌아본 학생들도 있고, 내 얼굴을 알아봤지만 멋진 언니와 함께 있어서 다가오지 못하는 학생들도 있고.

카페에서 마주한 세 졸업반은 물론 후자 쪽이었다.

“와…… 저분 맞지?”

“장난 아니신데?”

“과연 꼰마눌님…… 쎄다…….”

작은 소리라서 아내에게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손짓해서 옆에 앉히고 인사를 나눈다.

그 뒤에 열정적인 사회복지학과 오현서가 찬사를 건넸다.

“저기, 완전 멋지세요. 완전 커리어우먼…….”

“그래요? 고마워요.”

“막…… 그냥 하는 말인데요, 언니라고 부르고 싶었어요.”

“미안한데, 아부는 안 해도 돼요.”

“앗, 진짠데…….”

“정말이에요, 이사장님. 거의 브란젤리나 커플 느낌?”

“야 야, 거긴 깨졌잖아?”

“아, 맞다. 그…… 베컴 커플 느낌!”

아내의 입가가 실룩거린다.

나 역시 비슷한 심정이었다.

날 향한 칭찬에는 민망한 기분이 주로 들지만, 아내를 띄워주는 말에는 절로 기분이 좋아지고 만다.

그 기분 역시 외모지상주의의 산물이려나.

그들이 본격적으로 대화를 나누기 전에 먼저 일어섰다.

오늘은 나 역시 미팅이 예정돼 있다.

조명기가 한효준을 만날 겸 모교에 찾아오고 있을 터였다.

일찌감치 나온 덕에 막 주차한 한효준을 마중할 수 있었다.

“에잉…… 귀찮아. 자네 때문에 새벽같이 이게 뭔지 원.”

“새벽은 한참 전에 지났잖습니까.”

“흥. 조명기 그치도 참 문제야. 점심식사나 같이 하면 될 일이지, 무슨 새벽부터 등산을 하자는 것인지 원.”

“등산이라고 하기엔 뒷동산 아니겠습니까. 아무튼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홀로 만나기엔 좀 부담스러워서요.”

“부담스러울 건 또 뭔가? 또래인데 편하게 대해.”

“그분이 너무 편하게 대하셔서 도리어 불편합니다. 차라리 권위적으로 나온다면 저도 마음이 편할 텐데 말이죠.”

“참 희한한 사고방식이야. 자네, 친구들하고 잘 못 지내지? 스타 되고 나서도 친구들 연락 잘 안 오지 않나?”

대답하지 못하고 뒤통수를 긁고 있는데, 다행히도 그때쯤에 조명기의 차가 주차장에 들어섰다.

아침부터 활달함이 극에 달해 있더라.

“한 선생님! 대민 씨! 아이고, 빨리 온다고 서둘렀는데 제가 제일 늦었네요. 죄송합니다. 제가 아침을 꼭 챙겨먹는 타입인데, 오늘따라 갑자기 밥솥이 고장이 났지 뭡니까? 그걸 고친답시고 끙끙댄 덕분에 이렇게 됐어요.”

“거, 핑계 하고는.”

“그래도 약속시간보다 10분 일찍 오셨습니다.”

“아니, 원래는 20분쯤 일찍 도착하려고 했거든요. 오랜만에 모교에 나오는 건데 혼자서도 한번 돌아보고 싶어서요. 아, 참 오랜만이야. 고려대로 석사 간 게 94년이니까…… 거의 30년이네요. 여긴 아직도 공기가 참 좋아요. 요즘도 아침에 일어나면 관악 캠퍼스 생각이 난단 말이죠. 도심에 살다보니까 이런 상쾌한 공기를 참 느껴볼 수가 없어서…… 하하.”

한효준은 벌써부터 귀를 후비고 있다.

그 편안한 대응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조명기 역시 그가 인정하는 ‘진짜’ 중 하나임을.

이번에도 전혀 불쾌한 티를 내지 않은 조명기는, 등산로 방면으로 걸어가는 내내 내 옆에 붙어서서 조잘거렸다.

“한 선생님이 잘해주시죠? 나 신입생 때부터 저분이 참 유명했어요. 학사 논문을 JAP(Journal of Abnormal Psychology)에 올려버린 분이라서. 해서 대체 어떤 선배인가 싶어서 랩까지 올라가본 애들도 있었는데, 갔다 와서는 너무너무 반겨주셔서 감동했다고 또 입소문을 내는 거예요.”

“조 교수님께서도 찾아가보셨습니까?”

“아, 조 선배라고 하라니까요. 아무튼 난 안 갔어요. 그때 한창 어깨에 이렇게, 힘이 딱 들어간 상태였거든. 그깟 JAP가 뭐냐, 나도 학사논문 올릴 거다, 이러면서 혼자서 이렇게 저렇게 해봤지. 그랬는데 뭐, 실패했고. 이후에 고려대로 옮긴 것도 약간 혼자 그런 생각이 있었던 것 같아요. 여기 있어봤자 거성 한효준의 후배밖에 더 되겠냐, 차라리 다양한 연계가 가능한 사립대로 옮겨보자, 이러면서 그쪽 석사로 간 건데…… 지금 생각해보면 남아있을 걸 그랬어. 그랬으면 박사 때는 저분한테 지도를 받을 수도 있었을 텐데.”

“거 좀, 조용히 좀 걸어. 옛날 얘기를 뭘 그리 해.”

“하하하. 저렇게 부끄러워하신다니까. 귀여운 분이죠?”

“허! 정말이지 종알종알…….”

한효준에게도 조명기는 꽤 까다로운 인물인 모양.

그 관계를 관찰하며 조금 더 올라가자, 조명기가 한효준에게 들리지 않게 목소리를 낮췄다.

꽤나 조심스런 어조였다.

“혹시…… 환자 한 명 만나줄 수 없겠어요? 대민 씨 방송을 자주 본다고 해요. 사실 그 친구 덕분에 내가 대민 씨를 처음으로 알게 됐지. 그런데 부끄러워서 사연은 못 보내겠대. 그래서 내가 부탁해주겠다고 말을 해놨어요. 혹시 잠깐 시간 내서 만나줄 수 없을까요? 이렇게 부탁 좀 할게요.”

뜬금없는 청탁에 잠깐 얼이 빠졌다.

이후 듣게 된 내용 쪽은 더욱 당혹스러웠다.

“섭식장애(eating disorder)예요.”

전혀 예상치도 못한 질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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