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
19장 - 제2의 루트
대학병원 건물을 나서 차에 오르며 생각했다.
NBSC란 인터페이스의 주체는, 대체 어떤 존재인 걸까.
「 에픽퀘스트 1 “이용덕을 쓰러뜨려봐요” 완료!
이용덕의 내면을 움직여 그가 향후 ‘상담사’님을 위해 행동하도록 유도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제2의 루트를 통해 업적 “비소유적 온정” 달성!
‘상담사’님께 가장 적합한 보상을 분석할게요……
[내담자 평가] 할인권을 지급해드렸어요.
100exp 상당의 기술이 지금은 25exp!
준비되셨나요? (4:35 후 자동으로 수행됩니다)
(구매조건 : 진단 100 달성과 “비소유적 온정” 달성) 」
상품 광고 같은 서술이다.
거기에 내가 가진 exp가 현재 26.
‘적합한 보상’이라는 게 갖고 있는 exp를 전부 소모시키는 방향이라는 점에서, 의도가 심히 의심되는 부분이다.
그게 대체 어떤 목적인지는 모르겠지만.
반면, 처음으로 등장한 ‘업적’ 쪽은 이해하기 쉬웠다.
대부분의 게임에서 통용되는 요소이기에.
유저가 특정한 도전요소를 달성했을 때 주어지는 보상이다.
퀘스트처럼 미리 제시해서 플레이를 유도하기도 하지만, 보통은 독특한 플레이 방식을 시도할 수 있도록 장려하는 히든퀘스트 느낌이 강하다고 했다.
이번 경우에는……
이용덕을 쓰러뜨리는 대신 그가 스스로 내게 의지하도록 만드는 것이, ‘제2의 루트’라는 히든퀘스트였던 거겠지.
「업적 “비소유적 온정” 효과 : 관계 +10」
비소유적 온정(non-possessive warmth)이란 트루악스가 구체화한 개념.
내담자의 감정, 사고, 행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수용하는 상담자의 태도를 말한다.
그럼으로써 내담자가 스스로 변화하게끔 돕는 것이다.
단순한 포용과는 개념이 다르다.
내담자가 사회 속에서 살고 있는 이상, 옳고 그름에 대한 직면은 필수요소.
문제행동이 있다면 교정하는 편이 낫다.
다만 그 판단을 내리는 건, 상담자가 아닌 내담자여야 한다.
상담사는 심판자가 아니다.
사회 속에서 몇 번이고 겪었을 지적을 되풀이하는 일은 상담일 수 없다.
상담사는 ‘그렇게 행동하면 어떡해요?’ 등의 비난 대신, ‘왜 그렇게 행동하게 됐지요?’ 등의 말로 성찰을 장려한다.
단절되어 있던 마음의 문을 열고 편향된 사고에서 빠져나올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
내가 이용덕을 바라본 시선이 그와 유사했다.
그의 좋지 않은 행동들을 편견 없이 받아들이고자 애썼고, 내가 가져야 마땅한 것들을 양보하며 협력을 요청했다.
정확하게는 이용덕이 아닌 주민성을 위해서였지만……
NBSC는 그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판단한 것 같다.
그 끝에 나온 게 ‘제2의 루트’.
기분이 묘해지는 요소였다.
사실은 그게 역으로 제1의 루트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요약하면 이런 얘기다.
표면적인 퀘스트 문구는 함정이었을지도 모른다.
정말 이용덕을 논파하고 계도하는 방향으로 퀘스트를 해소했다면, 그때는 어떤 업적도 달성되지 않았을 수 있다.
상담사와 내담자 관계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인 까닭.
그러니…… NBSC는 나를 시험하고 있다.
그렇게 봐도 틀린 생각은 아니겠지.
이어진 퀘스트를 보는 심정이 복잡한 게 그런 탓이었다.
「 에픽퀘스트 2 “조명기를 쓰러뜨려봐요” 발생!
NBSC는 ‘상담사’님의 끝없는 도전을 응원합니다. 」
단순하게 생각하면, 정신과 모델인 이용덕을 해치웠으니 이제는 임상심리사 조명기 쪽을 노리자는 퀘스트.
하지만 끝없는 도전을 응원한다는 문구가 눈에 밟힌다.
그건 단순한 상용구가 아닐지도 모른다.
쉽게 갈 수 있는 길조차 번민하고 고뇌하며 걸어가라는, 상담사에게 필요한 경구일 수 있다.
그런 거라고 한다면……
이번에도 조명기에게 어떤 업적이 걸려 있는 걸까.
대중의 인지도는 이용덕에 못 미치지만, 학계에서는 오히려 그 이상인 인물이다.
대학원생들 얘기에 따르면 한효준과 함께 이상심리학 분야의 양대산맥을 이루고 있다 했다.
완벽주의 한효준과 달리 털털하고 유머러스한 사람이라고.
그래서 매스컴에서 러브콜도 많았지만, 지금까지는 연구를 위해 전부 거절했다고 한다.
그렇기에 고민이 왈칵 다가왔다.
조명기에겐 대체 어떤 변칙을 사용해야 할까.
이용덕 쪽은 적의와 경쟁심을 보였지만, 조명기는 그와 반대로 내게 호의를 보인 사람이다.
민원식 말로는 빨리 만나보고 싶다고 했다나.
그렇기에 제2의 루트가 상상되지 않았다.
선배 심리학자에게 상담사로서 다가서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방향에서든 영향을 줘야 업적을 달성할 수 있을 터.
하지만 악의 없이 웃는 사람이란, 오히려 얼굴을 붉히고 소리를 지르는 사람보다도 더 변화시키기 어려운 대상인데……
그런 고민을 하다가, 그냥 픽 웃어버렸다.
이렇게 또 쓸데없는 생각들을 하게 된다.
퀘스트를 위해 행동하지 않겠다고 다짐해놓고서.
인간의 욕심이란 정말 질기고도 질긴 물건이다.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지웠다.
NBSC의 업적은 내 오아시스가 아니다.
이용덕도 조명기도 그저 함께 걷는 동료일 뿐.
목을 축여줄 내담자들만 생각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기술 [내담자 평가]를 구입했다.
26까지 모아둔 exp가 1로 줄어들고.
무려 100exp짜리 상품이, 초보 상담사의 수중에 들어왔다.
「 기술 [내담자 평가]
약식 심리평가 보고서를 제공합니다. 내담자가 보인 행동을 분석하며, 기술된 내용에는 오류가 없습니다. 」
그 설명을 보며 이해했다.
왜 [내담자 평가]가 지금껏 벌어들인 모든 exp보다도 더 큰 값을 요구하는 기술이었는지.
‘오류 없는’ 평가 보고서.
그건 전설 속 현자의 돌과도 같은 물건이다.
거기 기술되는 모든 내용이 진실이라면, 그 평가 내용에 대해서는 한 점의 의심도 필요치 않기에.
어떤 상담사도 내담자의 심리를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한다.
인간의 인지도식은 밤하늘의 별보다도 더 다양해, 같은 환경과 사건을 공유한 쌍둥이조차도 오해에 빠지곤 한다.
그저 일로 만난 상담사에게는 끝없는 난이도다.
그렇기에 긴 상담 회기를 통해서 조심스럽게, 아주 천천히, 내담자의 우주를 알아가는 일에 힘을 쏟는다.
그럼에도 때로 시행착오를 겪고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낳고 마는 것이다.
어떤 이는 내담자에게 주먹질을 당했다고 한다.
어떤 이는 내담자의 가족에게 욕을 먹었다고 한다.
어떤 이는, 내담자를 자살로 잃고 오열했다고 한다…….
그 모든 것이 상담사의 업이다.
어떤 학식과 윤리강령으로도 피할 수 없는 몰이해의 벽.
매일 가슴을 치며 자신을 다잡게 만드는 번뇌.
그런 한계가, 이제 내게는 무의미해졌다.
[내담자 평가]야말로 한효준이 말한 마음의 지도가 아닐까.
그런 생각까지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김칫국이었음을 깨달았다.
75% 바겐세일로 구매한 100exp짜리 기술은, 분명 대단히 가치 있는 물건이었지만……
「 약식 심리평가보고서
내담자 명 : 한효준
평가 결과 : 관찰력과 추리력이 비상하다. 냉소적이고 소심하고 독선적이고 집착적이고 혁신적이다. 유년기의 불안정 애착으로 인해 낮아진 자아효능감이 감정적인 성숙을 제약한다. 단, 초인적인 수준의 자기조절로 극복하고 있다. 」
약식이라곤 해도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딱 내가 확신하고 있는 선에서 정보가 도출된다.
‘진단’이 100이 된 지금은, 보고서 없이도 충분히 추정할 수 있는 요소들.
NBSC에게 사기 당한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뭘 그렇게 빤히 보고 있나? 얘기 안 할 건가?”
“아. 죄송합니다. 잘 해결하고 왔습니다.”
“잘 해결했다고?”
“예. 이후 이용덕 교수와 협력해서-”
“협력! 허. 협력이라고?”
“예. 다행히 말이 잘 통했습니다.”
“허허. 그 좀생이와 말이 잘 통했다고. 도무지 내가 어떤 자와 마주보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 자네는 인간이 맞나?”
그런 찬탄을 들을 만한 일은 아니었다.
사실은 나보다도 한효준 쪽이 더 공감할 여지가 컸을 터.
서로의 경험이 부정적으로 엮이지만 않았다면, 두 사람은 지금쯤 좋은 친구로서 교류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다 해서 내담자의 아픈 기억을 폭로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상담 행위 자체에 부정적인 견해가 강하더군요.”
“설마, 나와의 악연 때문에 그렇게까지 됐다고?”
“거기까진 말씀드리기 어렵겠습니다. 다만, 어떤 사건 이후 상담사 전체를 매도하는 일반화가 발생했고, 교수님을 필두로 한 상담심리학계를 정신질환 분야에서 배제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품은 듯합니다. 그 지점에서 대화를 풀어갔습니다.”
“……허. 내가 잘못 봤단 말인가? 그야 그치의 행동을 섬세하게 분석해본 적은 없지만…… 별일이로군. 자네에겐 그렇게 순식간에 내적인 추동이 이해됐단 말이지?”
“이해했다기보다, 스스로 말해줬습니다.”
“대체 어떻게?”
“우선은 목표를 공유했습니다. 주민성 내담자의 치료를 원하는 마음은 진심이더군요. 덕분에 대화가 쉬웠습니다.”
“아니, 그러니까,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냐는 거야. 자네를 타겟으로 삼아 상담사를 찍어누르려던 이와, 어떻게 목표를 공유할 수 있었냐는 거야.”
자신을 까닭 없이 미워하는 이와 건설적인 대화를 나누는 일은, 물론 어렵다.
하지만 내게는 그것이 가장 쉬운 일이다.
나를 좋아하는 이들 쪽이 오히려 부담이었다.
그 기대를 배신하게 되진 않을까 하는 불안 때문에.
“저와 사고방식이 비슷한 듯해서요. 제가 제 사람에게는 최선을 다하는 편입니다. 이용덕 역시 비슷하더군요.”
“참 터무니없는 소리만…… 자네는 아무한테나 그러잖나?”
“제 사람인 까닭입니다. 처음에는 교수님 욕했다니까요.”
“이런, 못된.”
“물론 지금은 아닙니다. 존경하고, 믿고, 사랑합니다.”
“이…… 참으로 우스운 자야. 됐어. 나가봐.”
한효준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심리평가보고서에 새로운 메시지가 추가됐다.
「 자신의 진단보다도 ‘박대민’의 말을 우선해서 신뢰한다. 그의 존경을 받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생각이다. 」
그것 역시 이미 확신하고 있는 일이었지만.
명문화된 한효준의 마음을 읽는 마음이, 참 따뜻했다.
어쩌면…… 이것만으로도 25exp의 값은 충분히 될지도.
*
「 약식 심리평가보고서
내담자 명 : 진대수
평가 결과 : 이해력과 추리력이 비상하다. 외향적이고 활발하고 창의적이고 자율적이고 혁신적이다. ‘송은진’에 대한 연민이 죄책감으로 발전해 지속적인 우울감을 발생시키고 있다. ‘박대민’으로부터 연대감을 얻고 있으나, 정서적 지지자로 규정하지는 못하고 있다. 」
진대수는 헤벌쭉 웃으며 내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크! 호정! 합방! 오늘! 크!”
“……문장을 형성해서 말해주지 않을래?”
“크! 호정이랑 합방하는 오늘, 이 진대수의 마음은 크!”
“그 ‘크’가 무슨 뜻이야?”
“설레고 긴장되고 짜릿하고 막 그런 거죠. 암튼 형님, 오늘 정말 잘해주세요. 호정이가 아주 여의주 같은 애니까.”
“여의주고 뭐고, 늘 하던 대로 할 거야. 특별취급은 없어.”
“캬! 이거지! 바로 그걸 원했슴다!”
잘해주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모르겠다.
다만, 심리평가보고서의 마지막 문장이 신경 쓰였다.
연대감은 얻되 정서적 지지자는 아니라는 말.
가장 가까운 동료인데도 신경을 너무 못 써줬던 걸까.
“대수야. 늘 하는 말이지만, 힘든 일 있으면 말해라.”
“헤헤. 그럼요 그럼요. 아무튼 전 장 좀 봐올게요. 시간이 빠듯하겠는데, 먼저 방송 시작하고 계십쇼. 호정이 오기 전에는 들어올게요. 오늘 요리솜씨 좀 발휘해봐야지.”
진대수가 나간 뒤에 엘피 가디건을 걸쳤다.
그리고 카메라에 비친 내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이제 3주.
많은 면에서 변화한 미중년이 그곳에 앉아 있다.
하지만 바뀌지 않은 것도 있다.
내 곁을 둘러싼 사람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그 수는 수십 수백 배 늘어났고, 학생으로부터 교수와 의사까지 범주도 거대해졌지만.
그들에게서만 안식을 느낄 수 있는 건 동일하다.
프리월드 직원들을 보며 행복을 느꼈던 박대민은, 이제 프리TV 시청자들을 만나며 매일 밤 웃고 있다.
그날 1부에서 이슈가 하나 생겼다.
도세나가 새 웹툰의 프롤로그를 보내왔다.
혹시 있을지 모를 어그로성 채팅을 걱정해 처음엔 나 혼자 보려고 했는데, 괜찮으니 꼭 화면에 보여달라고 하더라.
「dosena : 여기선 괜찮아요. 꼰마님이랑 같이 있는 것 같으니까, 꼭 여기서 최초공개 하고 싶었어요. 그러면 좀 더 자신감이 생길 것 같아서요. 그러니까 보여주세요 ㅎㅎ」
“……예. 그럴게요. 여기, 도나쓰 작가님의 신작 프롤로그입니다. 모쪼록 쓸데없는 채팅은 치지 마세요. 슈아야, 이상한 채팅 있으면 그냥 단칼에 썰어버려. 무슨 말인지 알지?”
「Manager슈아 : 넹 학살해버릴게여」
「엌ㅋㅋㅋㅋㅋ」
「와 근데이거 재밌겠다」
「오.. 주인공 존멋이네 실물보다 낫네여~~ㅋㅋㅋ」
「머리카락 디테일봐 ㅋㅋㅋ 애정형 금손 ㅋㅋㅋ」
「도나언니 개멋있어여 ㅠㅠ 빨리보고시픔 ㅠㅠ」
「dosena : 감사합니다! 열심히 그려서 빨리 보여드릴 수 있도록 할게요. 그리고 끝에다 꼰마님 방송 광고를 뙇」
“……아니, 그건 좀. 제가 광고까지 낼 돈은 없습니다.”
「ㅋㅋㅋㅋ2주동안 70만별 벌고 돈없다는 클라스」
「와 근데이거 4월 별 1위각인데??」
「dosena : 꼰마님 죄송한데 제가 후원회장인데요? 후원 개념으로 홍보해드리는 거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흥쳇핏.」
「Manager슈아 : 회장님 나이스샷」
「마구니 : ㅋㅋㅋㅋㅋㅋ짝짝짝 누님 멋져요!!! 」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도세나의 상담도, NBSC에겐 제2의 루트였을까?
내게는 그 외의 어떤 대안도 없어서 찾아간 길이었는데.
[dosena님 별사탕 10000개. 이건 광고비예요.]
“……잠시만요. 자꾸 이러실 겁니까? 액수도 너무 크지만, 광고는 도세나 후원자님이 해주겠다면서요? 반대잖아요?”
「dosena : 방금 제 만화 광고했잖아요? 만 명한테 프롤로그 보여드리는 게 얼마나 큰 홍본데요 ㅎㅎ」
신작 내놓기만 하면 수십만 명이 찾아볼 게 분명한 유명 작가면서.
이렇게 변명까지 해가면서 나를 응원하는 것이다.
아직도 하루하루가 넘기 힘든 허들일 텐데.
뭐 하나 해소해주지 못한 내게, 이토록 따뜻한 마음을…….
정말이지 참 쓸데없는 고민을 했던 것 같다.
상담에 제1의 루트와 제2의 루트 따위는 없다.
그저 죽을힘을 다해 내담자를 만날 뿐.
내 업적은, 저 마음이면 된다.
그 온기가 나를 한없이 나아가게 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