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진없는 상담사-50화 (50/200)

# 50

18장 - 타협하는 상담사 (3)

[오기 전에 뒷조사 좀 해봤는데. TOX 좋아하시나봐요? 어제 콘서트 가셨다면서요?]

다정다감한 목소리였다.

꽃미남의 정석이라고 할 만한 외모고.

20대 중반이 된 지금도 미소년이란 호칭이 어색하지 않다.

BJ호정- 이호정은 그런 인물이었다.

“예…… 저는 아니고, 딸이 좋아해요.”

[아, 그렇구나. 사진 봤어요. 따님 완전 예쁘시던데요?]

「ㅇㅈ」

「꼰순이 존예~~~」

「꼰순이 ㅋㅋㅋㅋㅋ」

「꼰마귀욤 : 꼰순이.. ㅎㅎ..」

「꼰마귀욤 : 호정오빠 TOX랑 친해여??」

‘꼰마귀욤’이 딸애의 닉네임이다.

처음에는 도무지 뜻을 알 수 없는 ‘떼껄룩’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금요일부터 바뀌었다.

방송국 닉이 아닌 메인 닉네임을 변경한 것이다.

어쩌면 조만간 또 ‘꼰순이’로 바꿀지도.

“저희 시청자들께서 호정 오빠 TOX랑 친해요…… 라고 물어보시네요.”

[예? 아, 엄청 친한 건 아니고 음방 때 몇 번 본 정도? 친하다고 하면 민성이랑 연락처는 아는 사이? 그 정도예요.]

“민쭈 말씀이시군요.”

[와, 민쭈도 아세요? 꼰마님 덕후시네요.]

“하하. 그런 것도 있지만, 오늘 공지 나간 VR상담 첫 번째 내담자시니까요. 그래서 미리 조사를 좀 해봤지요.”

[그렇구나. 민성이가 진짜 애가 착해요. 가끔 좀 소심한 거 아닌가 싶을 때도 있긴 한데, 성격이 너무 좋아서 친해지려고 제가 먼저 전번 땄거든요. 팀 해체하고 나서는 저도 약간…… 이거는 제 방송에서도 했던 얘긴데, 약간 공황이 왔었거든요. 그래서 너 치료해주신 그 의사 분 어떠냐고 그런 식으로 톡을 좀 했었죠. 그 의사 분도 VR상담 같이 하시는 거죠?]

“예, 그렇지요. 민성 씨는 어떻게 얘기해주셨나요?”

[진짜 좋은 분이라고, 꼭 찾아뵈라고 하더라고요. 근데 저는 그 뒤로 좀 괜찮아져서 병원은 안 갔어요.]

진짜 좋은 분이라.

한효준은 아마 동의하지 않겠지만, 의미 있는 이야기였다.

방송이나 인터뷰가 아니고 사적으로 연락한 내역이다.

정말 부모 같은 신뢰를 획득한 게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 라포의 형성과정이 몹시 궁금해진다.

성심성의껏 증상을 완화해주려는 노력 때문에 인간적인 호감까지 품게 된 걸까?

그게 아니면, 유명인에게 점수를 따겠다는 전략적 목적 속에서 화려한 언변을 펼친 의사에게 홀랑 넘어간 걸까?

그 고민 중에 문득 생각했던 것이다.

이 의심은 어떤 의심인가.

내담자를 위한 의심인가, 퀘스트를 위한 의심인가.

이용덕의 마음이 진심인지 아닌지가 TOX 민성의 상담에 유의미한 요소인가…….

“형니임! 축하드림다! 무려 2만따리! 2주 만에 2만따리!”

방송이 끝나자마자 외친 진대수의 말대로, 그날 방송은 무려 21,331명의 최고시청자를 기록했다.

순전히 내 힘으로 이룩한 결과는 아니다.

시청자 많은 일요일 저녁 시간대에, 특출한 외모와 센스 있는 언변으로 남녀 모두에게 사랑받는 BJ호정의 탐방에, 프리TV를 온통 뒤덮은 배너들이 지원해준 덕분.

덕분에 오랜만에 11exp를 획득할 수 있었다.

「 성명 : 박대민 / 성별 : 남 / 연령 : 47

직업 : 상담사 Lv.9 (26/10)

관계 : 92 / 진단 : 100 / 화술 : 83 / 외모 : 72

‘경청은 상담사를 성장시켜요’ (341028/400000)

‘더욱 많은 내담자를 만나봐요’ (31288/32000)

‘내담자를 행복하게 해주세요’ (475/480)

“이용덕을 쓰러뜨려봐요” 」

다시금 커다란 가능성이 주어졌다.

두 번의 레벨업으로 ‘관계’와 ‘화술’을 최상급으로 만들거나, 두 개의 기술을 새로 얻거나, 한 번의 레벨업과 하나의 특성 구매로 새로운 잠재력을 개화하는 일이 가능하다.

어느 방향으로 성장하더라도 유용할 터였다.

하지만, 가장 아래의 에픽퀘스트 쪽에 시선이 쏠렸다.

요 며칠 계속 그랬던 것처럼.

어쩔 수 없이 그쪽이 눈에 밟히고 만다.

이용덕은 내담자의 적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무의식중에 그와 나 사이에 넓은 강이 존재한다고 믿게 돼버린다.

“……대수야. 퀘스트란 건 참 묘하지.”

“엥? 갑자기 뭔 퀘스트? 형님 게임도 하세요?”

“게임에서도 그렇겠지. 원래 의도는 그저 멋진 3D 경관을 구경하거나 그 안의 모험에 푹 빠져들게 만드는 것일 텐데, 퀘스트라는 것이 있음으로 해서 그를 위한 활동에만 몰두하게 돼. 좀 더 빨리 많은 퀘스트를 달성하고 싶게 돼. 진짜 목적을 잊고 목표에만 집착하게 만드는 거야.”

“……아니, 아닌데스? 아, 설득당할 뻔했네. 게임이란 게 어차피 순간순간 즐기는 용도잖아요? 뭐 거창한 목적 같은 게 어디 있어요? 걍 목표 달성! 강해져! 아 신나! 이게 다지.”

“나는, 아니거든. 내게는 목숨을 걸어 이룰 사명이 있거든.”

“엥? 어…… 뭐 현실에선 그런 게 있겠지만요.”

착각하고 있었다.

NBSC가 내 사명에 공감해 에픽퀘스트를 내려줬으니, 반드시 그에 따라 행동해야만 목적을 이룰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당장은 아니라도 언젠가 이용덕을 쓰러뜨려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NBSC의 길이 올바르다는 보장이 어디 있단 말인가.

내 사명은 나 스스로 정한 것이다.

에픽퀘스트는 그 부산물일 뿐.

비록 ‘에픽’이라는 용어에 합당하게 큰 보상이 기다리겠지만, 그걸 얻지 못한다고 한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당장 내 앞에 다가온 내담자를 무거운 마음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면, 새로운 능력 따위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대수를 보내고 민원식에게서 이용덕의 전화번호를 얻었다.

그리고 지체 없이 전화했다.

[예, 여보세요.]

“안녕하십니까. 박대민이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여유롭고 포근한 목소리였는데, 내가 인사하자마자 태도가 달라졌다.

[뭐야? 허. 박대민 군이 내 번호는 어찌 알고?]

“죄송합니다. 긴히 연락드릴 일이 있어서 실례했습니다.”

[이거야 원. 아주 날강도 같은 친구로구만. 뭔가?]

“부탁드릴 게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사사로이 부탁을 주고받을 사이였나?]

“왜 아닙니까?”

[허허, 이런. 뭐 이런 우스운 이가……. 말해봐.]

진지하게 들을 의사가 전혀 없다는 투였다.

그런 그를 향해, 나는 그저 내 이야기를 떠들었다.

그가 대답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이야기를.

“한 고아가 있었습니다. 사별인지 위탁된 아이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친부모와의 이별로 인해 약한 불안장애가 발현됐습니다. 안전과 생존을 담보해줘야할 주양육자가 그를 거절하고 애착을 상실시킨 것이니까요. 이후 운 좋게도 양부모의 눈에 들어 입양되지만, 거기서 안정을 찾을 순 없었습니다. 새 가정 자체가 불안의 요소니까요. 언제 버려질지 알 수 없기에 행동 하나하나를 주의하게 됐습니다.”

[이봐, 늦은 밤에 전화해서 무슨 헛소릴 하는 거야?]

“다행히도, 정말 다행히도, 양부모는 훌륭한 인격자들이었습니다. 그 아이가 비뚤어지지 않고 꿈을 꿀 수 있게끔 도와줬습니다. 그렇지만 그 새로운 꿈이 그에게 곤란을 안겨줍니다. 무수한 대중 앞에 서는 일이었거든요. 아이돌이지요.”

[뭐……?]

이용덕은 어떤 정보도 말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목소리에 무수한 정보가 담겨 있다.

감춰야 할 것을 들켜버린 사람의 당혹감.

100의 ‘진단’이 정곡을 짚은 모양이었다.

“그룹으로 묶인 멤버에게도 안심하지 못해서 한없이 순종적으로만 행동해야 했던 아이에게, 수만의 팬덤은 기쁜 만큼 두려운 존재가 됐습니다. 언제 떠나버릴지 모를 애착이지요. 그렇기에 매일 외칩니다. 레벨업.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사람인 척 연기합니다. 하지만 불안은 해소되지 않아요. 언젠가는 모두가 친부모처럼 자신을 버릴 것 같기 때문이지요.”

[……흠.]

“막연한 불안감이 사회불안장애로 발전합니다. 자신의 부족한 점을 들킬 것만 같아서, 숨고 또 숨습니다. 그런데 고아원에서 알고 지냈던 친구가 인터넷에 글을 올렸네요. 아무것도 아닌 일이고, 금세 묻혔지만, 그게 두렵습니다. 당장이라도 지금의 행복이 다 무너져버릴 것 같습니다. 그 공포가, 청년이 된 소년으로부터 모든 긍정적인 마음을 앗아갑니다.”

[하하. 재밌는 케이스군. 누구 얘긴가?]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금세 정제된 목소리.

노회한 정신과 의사는 감정을 숨기는 데에도 능했다.

예전의 나였다면 분명 고개를 갸웃거렸으리라.

“교수님. 농담 주고받을 시간은 없습니다.”

[나야말로, 이 불편한 대화를 끝내고 싶어지는데.]

“메인모델, 포기하겠습니다. 주민성 케이스만이 아니라 이후 모든 활동에서 서브 롤을 맡겠습니다.”

[뭐……?]

이번에는 1분 전의 ‘뭐’와 달랐다.

정말 반가운 말을 정말 의외의 상황에서 들은 반응이었다.

사실은 전혀 의외일 것이 없는데.

나는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의도가 어떻건, 이용덕은 실력 있는 의사다.

적어도 주민성은 그의 진료와 처방을 통해 마음의 위안을 얻었고, 불안의 근원을 해소하진 못했을지언정, 지금도 최고의 아이돌로서 활약하고 있다.

그럴진대 대체 왜 이용덕에게 의심을 품어야 한단 말인가.

돋보이길 좋아할 뿐 환자에게 어떤 해악도 끼친 적이 없는 사람을, 나는 여전히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고 있었다.

내담자를 생각하지 않고 퀘스트를 생각했기에.

이용덕과 협력해야만 주민성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음을 알았음에도, 에픽퀘스트가 만든 프레임에 갇혀 그와 나 사이를 가르고 있었다.

그래서는 어떤 오아시스도 만들 수 없음을 알면서도.

내가 걷고 싶은 길은 육상 트랙이 아니다.

모든 이들이 편안하게 들어와 동행할 수 있는, 넓고도 포근한 산책로다.

그 길에 정신건강의학과 임상심리학과 상담심리학을 나누는 레인은 필요치 않다.

그저 손을 마주잡고 발 디딜 보드라운 흙이면 족하다.

“뭐든 드리겠습니다. 제게는 필요치 않으니까요. 이후 국군 시범사업으로 들어가는 데에도 명망 높은 이 교수님의 얼굴이 들어가는 쪽이 더 효과가 클 겁니다. 그렇게 하시죠.”

[……갑자기……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군. 원하는 게 뭐야?]

“제 내담자이자 교수님의 환자인, 주민성의 치료입니다.”

[아니…… 좋아. 속을 모르겠지만 일단 좋다 치자고. 그렇지만 공황장애는 그렇게 단숨에 해소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비전문가 입장에선 의욕이 앞서겠지만, 자네랑 나랑 짝짜꿍을 한다고 해서 무슨 대단한 효과가 나오는 게 아니란 말이야.]

“해소해줄 수 있습니다.”

이용덕은, 비명을 지르는 사람처럼, 속삭였다.

[무슨…… 소리야.]

“주민성 케이스, 해소할 수 있습니다. 패닉에 대한 공포 쪽이 아니라 모든 불안의 근원 쪽을 풀어줄 수 있습니다.”

[개소리 집어치워! 그딴 게 가능할 리…… 후우. 자네가 말한 그런 케이스라면, 상담이 유효할 리가 없어. 끊겠네.]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실 셈입니까? 교수님의 친아들이었어도 그렇게 하셨을 겁니-”

[어디서, 개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쩌렁쩌렁 울리는 노성(怒聲).

예상 이상의 반응이다.

어딘지 역린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교수님. 정말 현대의학으로 해소해주실 수 있는 케이스입니까? 그렇다면 맡겨두겠습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협력하시죠. 제게는 방법이 있습니다. 실패한다 해도 해는 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만약 성공한다면…… 주민성 씨는, 분명 새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제는 매일을 공포 속에서 떨지 않아도 됩니다. 친구에게 마음껏 화를 낼 수도, 멤버들끼리 다툴 수도 있습니다.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불안 없이 말입니다. 그리고 아침마다 새로운 행복을 기대하며 눈을 뜰 수 있습니다. 더는 세상을 괴로움으로만 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사기꾼들이나 할 소리를!]

“판단은 직접 하시지요. 전 어떤 말도 하지 않을 테니까요.”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방법이 있다면서?]

“제가 상담을 하겠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 주민성 환자를 제게 보내달라고 요청하려는 게 아닙니다. 전 그저 교수님을 뵙고 싶을 뿐입니다. 내일 낮에 시간 마련해주시죠.”

[대체 무슨…… 무슨 짓을 하려는 건가.]

“아무 짓도 안 합니다.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으며, 나는 다시금 다짐했다.

다시는 NBSC에 휘둘리지 않겠다고.

그 초월적인 능력에 힘입되, 오직 내담자들을 위해 내 길을 걷겠다고.

*

한효준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후에, 화난 눈초리로 날 쏘아봤다.

“넘겨짚기도 유분수지, 그게 말이나 되는 논리인가?”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뭐? 무슨 독심술사야? 그야…… 황당하지만, 가능성이 있는 일이긴 해. 이용덕 본인도 부정하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게 맞겠지. 자네쯤 되는 사람이니 그 맥을 짚을 수 있었던 거겠고. 헌데…… 그런 거라면 일이 까다로워지겠는데.”

“저도 너무 깊은 불안이 아니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쪽 얘기가 아니야. 이용덕 그 작자 때문이야.”

“예?”

등받이에 깊이 몸을 묻으며, 한효준은 설명했다.

“이용덕이한테 외동아들이 있었어. 내가 레지던트 끝마칠 때쯤에 팔삭둥이를 낳았지. 그래선지 아주 끔찍이 아꼈다더군. 하지만 의사들이 워낙 바쁘잖나. 이용덕은 최연소 과장 자리를 노리고 있던 야심가였고. 그래서 꽤 오래 대화도 못 했던 모양이야. 그러던 것이…… 자살로 끝을 맺었다더군.”

“……외동아들이, 자살했다고요.”

“그래. 자세한 건 몰라. 학회에서 얼핏 들었을 뿐이니. 하지만, 살아있다면 그 아들이 스물쯤 됐을 거야. 어쩌면 환자에게서 아들을 겹쳐봤을지도 몰라. 그런 케이스라면 더욱 떨어뜨리기 어려울 거야. 자네가 개입하기 힘들겠어.”

그래서, 친아들을 언급했을 때 그런 반응을 보였던 건가.

아들에게 도움을 주지 못했던 의사의 비명.

대체 어떤 심정이었을까.

아들을 자살로 잃은 정신과 의사가, 그 아들의 불안을 젊은 아이돌에게서 겹쳐봤을 때, 그 기분은 어떠했을까.

“……교수님. 저는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잖습니까? 주민성이라는 그 친구 역시 이용덕 교수를 멘토로 따르고 있습니다. 그 마음은 서로가 동일하지 않겠습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이용덕은 아들을 겹쳐보고, 주민성은 아빠처럼 여기고. 그랬다면 사이가 돈독한 것도 이해가 되지.”

“잘됐지 않습니까? 이용덕이 상담을 진행한다면요.”

“……뭐?”

“이용덕이 진료가 아닌 상담을 하게 만들겠습니다. 제가 막후에서 대화를 이끌겠습니다.”

“아니! 왜! 대체 왜! 자네가 뭐가 아쉬워서!”

“아쉽지요. 전 아직 주민성과 어떤 라포도 형성하지 못했잖습니까? 내담자를 위해서 이용덕의 활약이 필요합니다.”

“허…… 허허. 그래서 자네 솜씨를 빌려주겠다고? 자네를 불러내서 창피를 주려 했던 그 의사에게, 자네가 떠올린 해결책을 전수해주겠다고? 대체 그게 무슨…… 허허허…….”

한효준은 이마를 짚은 채 한참을 웃었다.

그리고 10초쯤이 지났을 때,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내가…… 자네 그 ‘네버랜드’를 왜 좋아하는지 아나?”

“……글쎄요. 어떻게든 결과를 내기 때문일까요?”

“아냐! 결과가 행동을 정당화하지 못한다고 몇 번을 말하나? 단지 나는 그저…… 그 말을 떠올릴 뿐이야. 내담자는 상담자의 인격 수준만큼 좋아진다는 말.”

누군가의 명언은 아니다.

그저 상담심리학계의 경구 같은 이야기일 뿐.

하지만 그 흔한 이야기 때문에, 지금도 무수한 상담사들이 자신의 마음을 갈고닦고 있다.

“상담사는…… 바보 같은 게 좋아. 천재적인 학식으로도, 현대의학의 금자탑으로도, 정말 심각한 정신질환에는 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어. 그들의 마음을 울릴 수 있는 건 위대한 지식이 아니야. 그저…… 바보 같은 인간의 바보 같은 한마디가 필요한 거야. 난 그렇게 생각해. 그러니 막지는 않겠네. 어디 한번 가봐. 자네가 원하는 방향으로.”

“……감사합니다, 교수님.”

차를 몰아 연건캠퍼스로 가며 생각했다.

사실 나는 한효준이 말한 것처럼 바보 같은 이는 못 된다.

이용덕과의 협업은 어디까지나 전략적인 행동.

말하자면 타협이었다.

내가 이루고자 하는 일은 상담사 한 명의 과업이 아니다.

아무리 초인적인 능력을 갖고 있어도, 안 되는 건 안 된다.

사회불안장애 속의 내담자에겐 라포가 형성된 조력자가 필요하다.

내가 메인모델로 육군 시범사업에 들어간다 한들, 신경병리적인 문제에는 어떤 의견도 낼 수 없다.

그 모든 문제에 이용덕과의 협력이 불가피했다.

그렇기에 살을 내주고 뼈를 얻는 것이다.

내 명성의 상승이라는 도구를 내주는 대신, 주민성의 호전이라는 목표을 달성하는 일.

그게 NBSC가 아닌 박대민의 에픽퀘스트였다.

“……정말 왔군. 거기 앉아요.”

이용덕은 몹시 불편한 표정으로 인사했다.

전화로는 대차게 반말을 했으면서, 다시 존댓말이 돼 있다.

긍정적인 반응이라고 봐도 되겠지.

그에게 차분하게 내 계획들을 설명해줬다.

반문에 화답하고 의혹을 해소하며, 10분 정도가 흘렀을까.

이용덕이 만년필을 손 위에서 돌리기 시작했다.

나름의 방어기제인가 생각했는데, 잠시 후엔 그가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의외의 금손이어서 금세 한 남자의 얼굴이 완성됐다.

어리다.

훌륭한 그림솜씨 덕분에, 척 봐도 10대임을 알 수 있었다.

“혹시……?”

“내 아들이에요. 한 교수한테 얘기 들었겠지.”

“아…… 늦었지만, 죄송합니다. 어제는 정말 몰랐습니다. 오늘 아침에 교수실에 방문해서 처음으로 듣게 됐습니다.”

“알아요. 알고 있었다면 그렇게는 말 못 했겠지. 당신은…… 그런 인간이니까.”

자신의 그림을 내려다보며, 이용덕이 무너져내렸다.

단단하던 표정이 용해되는 것처럼 흘러내려갔다.

“나는…… 이쪽 계통에서 유명한 의사예요. 아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 그래서…… 정신과 진료를 받지 못했대요. F코드 Z코드 문제가 아니라, 의사가 비밀보장을 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 아이가 병원에 드나드는 순간 누군가가 내게 보고할 게 분명하니까. 정신과 의사의 자식이 정신병자라는 사실이 알려질 게 뻔하니까. 그래서 안 갔다는 거야. 그래서 동네 상담소만 몇 번 찾아가고 말았다는 거야. 그러다가 그렇게 된 거예요. 내가 과장 자리를 노리고 원내 정치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 그렇게 가버렸던 거야.”

“……교수님. 말씀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나는! 나는…… 나는 말이에요. 난, 당신네들이 정말 싫어. 아무것도 해소해줄 수 없는 주제에 교묘한 말발로 희망만 안겨주지. 그것마저 무너졌을 때 환자가 얼마나 끔찍한 고통을 겪을지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로. 그런 작자들을 다 몰아내고 싶었어. 정신이 아픈 모든 사람들이 다 정신과로만 몰려오게 만들고 싶었어. 참 열심히 해왔어요. 이제는 정신과 하면 이용덕이라는 대답이 나오게 되었지. 그래도…… 그런데도, 아직도 안 찾아와. 아직도 정신과가 아니라 상담소를 찾아가, 사람들이. 아직도 나보다 한효준 그 교수가 더 유명한 거야. 그리고 막상 찾아오는 환자들을, 내가 다 고쳐줄 수도 없어. 빌어먹을 현대의학으로는, 그저 증상을 완화해주는 것밖에 해줄 게 없는 거야!”

바로 어제 자식을 잃은 듯 울부짖는, 흰 가운의 의사.

그의 마음이 턱없이 날카롭게 폐부에 꽂혔다.

내가 있기에 정신질환 걱정이 없다던 딸애를 떠올린다.

그가 있었기에 제대로 된 진료를 받을 수 없었던, 이용덕의 아들을 상상해본다.

의학적인 표현은 아니겠지만.

속을 열어보면, 이용덕의 내장은 갈기갈기 찢어져 있지 않을까.

“그래서…… 이번은, 나도, 타협을 해봅시다.”

“……타협이요.”

“그래요. 메인모델…… 그런 건 모르겠고. 우선은…… 민성이는, 당신이 시키는 대로 해보겠어요. 일단은…… 그렇게 해봅시다. 제발…… 잘됐으면 좋겠어요. 잘 준비해줘요. 이번만 믿어볼 테니까.”

그 순간, 오랜만에 커다란 효과음이 들려왔다.

‘맙소사! 에픽퀘스트를 달성하셨네요! 축하드려요!’

귓전을 울리는 소리 속에서 생각했다.

NBSC는…… 한국어 공부를 다시 해야 할 것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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