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
16장 - 복수의 용서 (3)
중학생 시절, 박대민은 영웅이었다.
왕따 가해자들을 제지하고 피해자를 돕는 데 성공했다.
어른들의 조력도 없이 내부에서 학급의 분위기를 바꿔내, 그들이 진짜 친구가 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렇지만 그건 한때의 영광.
시대가 바뀌었고, 나는 한설중학교의 내부자도 아니다.
그러니 전혀 다른 전략을 사용해야만 했다.
다행히도, 이제 내게는 100의 ‘진단’이 있다.
상담사의 ‘진단’은 정보로부터 해석을 도출하는 능력.
그 정보는 대화나 관찰로 획득되며, 그 결과물은 개개인의 내면일 수도 있고, 인간관계 속의 역동일 수도 있다.
그리고 내게는 지난 주 이아리를 바래다주며 듣게 된 무수한 정보들이 있었다.
그로부터 그녀를 둘러싼 어둠을 분석할 수 있었다.
한설중학교 2학년 2반 이아리는, 세 가지 측면의 따돌림에 노출되어 있다.
따돌림 주동자들을 제외하면 누구도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는 투명인간.
그 말을 거는 소수의 주동자들이 저지르는 금전 갈취.
마지막으로 이미 정설이 돼버렸다는 SNS 루머였다.
이아리가 원조교제로 용돈을 번다는 루머.
그것이야말로 모든 괴롭힘의 명분이었다.
몸 함부로 굴리고 다니니 무시당해도 싸다, 예쁜 얼굴로 쉽게 돈 벌었으니 빼앗아도 된다, 이렇게 생각이 전개되는 것.
약자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주동자들은 언제나 이유를 만들어낸다.
쟤 너무 못생겼지 않냐. 쟤 성격 좀 이상하지 않냐. 쟤 너무 돈 안 쓰지 않냐. 쟤 너무 여우짓 하는 거 같지 않냐……
이아리가 그 어떤 보편적인 밉상에도 해당하지 않았기에 새로운 명분이 필요했으리라.
그래서 스스로도 거짓임을 아는 이유를 댔을 것이다.
그 명분이 해소되지 않는 한 아리는 친구를 사귈 수 없다.
그렇기에 나는 그녀의 삼촌을 자처했다.
혈연이 아니기에 오해를 살 수도 있을 법한 인물을.
“아저씨가 아리네 아빠랑 아는 사이거든. 그래서 가끔 이렇게 아리 만나서 밥도 사주고 그래. 전에 학교 근처도 간 적 있었는데, 혹시 나 본 사람 없었니?”
“어…….”
“처음 봐요!”
“하하. 예전엔 아저씨가 안 유명했으니까 몰랐던 걸 수도 있어. 어쨌든 이렇게 아리 친구들도 보게 돼서 참 좋다.”
거짓말이다.
진대수가 좋아하는 선의의 거짓말.
이로써 이아리의 원조교제 루머는 if문을 갖게 된다.
누군가가 익명으로 애스크에 제보한 이아리와 장년 남자의 식사 장면이, 혹시 꼰마 삼촌과의 만남은 아니었을까 하는.
썩 즐기는 방식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거짓에는 거짓으로 대응하는 것이 상책이기에.
아무리 진실을 호소해봐야 의심의 눈초리는 공고한 법이다.
다른 의심으로 관심을 환기시키는 것이 차라리 유효했다.
물론 이건 그저 계기일 뿐.
명분을 지워본들 습관적인 괴롭힘은 남게 마련이다.
그를 해소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따로 있었다.
순진한 이아리는 내 거짓말의 이유도 모른 채 웃고 있다.
그저 믿고 맡겨두자는 생각도 있으리라.
하지만 친구 아닌 여덟 명의 동급생들과 함께하는 식사 자리가 어색해서 다른 쪽에는 신경을 못 쓰는 느낌이 컸다.
“아리야. 삼촌이 약속 없이 와서 놀랐어?”
“어? 어…… 네.”
“가끔 이런 날도 있어야지. 친구들하고 같이 밥 먹고 학원 가. 아저씨는 너희 밥 사주고 아버지 뵈러 갈 거야.”
아리가 눈으로 묻는다.
왜 그런 거짓말을 하는 거냐고.
거기에 다 대답하지 않은 채, 나는 동급생들을 돌아봤다.
여덟 명이다.
이아리의 표정을 보면 이 안에 주동자 그룹은 없다.
개중 다섯이 같은 반, 셋은 다른 반이지만 초등학교를 같이 나온 동창이라고 했다.
그들을 당장 이아리의 사람으로 만드는 일은 몹시 어렵다.
그렇지만 내 사람으로 만드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애들아, 반가워. 아저씨 소개 좀 할까?”
“알아요!”
“꼰마!”
“꼰대, 마스터!”
세 명은 알고 다섯 명은 모른다.
하지만 날 본 적 없는 아이들조차 친구들이 알아보는 유명인이기에 호기심을 품고 있다.
선망과 동경으로 발전하기에 딱 좋은 감정.
그 지점이 내가 공략해야 할 포인트였다.
유명인이 부르면 밥 같이 먹으러 나올 정도의 방관자들이 ‘투명인간’ 괴롭힘에 동참하는 이유는, 두 가지일 것이다.
첫째는 자신도 따돌림의 대상이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둘째는, 왕따와 노는 것보다 가해자들과 노는 게 더 유익하다고 생각해버리는 본능.
그 첫 번째는 해소하는 게 어렵지 않다.
이아리를 포함해 아홉 명이나 되는 머릿수.
이 정도면 주동자 그룹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아홉만 해도 여자아이들 소그룹으로는 다수에 해당하니까.
그러니 핵심은 두 번째였다.
따돌림을 당하는 약자와 노는 건 재밌지도 않고 자신에게 도움도 안 될 거라고 생각하는, 무의식적 본능.
그 부분을 변화시켜야 한다.
그래야 아리에게 학교 내에서 그녀를 지지해줄 여덟 명의 지원군이 생길 터였다.
타인의 판단을 교정한다는 건 극히 어려운 일이다.
무수한 스키마(과거 경험들을 통한 반응체계)로 완성된 인지도식을 어떻게 말 몇 마디로 바꾸겠는가.
최고의 상담사가 다회의 상담을 통해서 라포를 형성한다 해도 쉽지 않다.
가해자들을 대상으로 한 집단상담에서 실패 사례가 많은 게 그런 까닭이었다.
그렇지만 관점을 조금만 바꾸면 일은 쉬워진다.
내가 이아리의 연관인으로서 관계하면 된다.
92의 ‘관계’와 72의 ‘외모’를 가진 아저씨가 그녀들의 안으로 들어가 경험을 조작한다면, 바꿀 수 있다.
내 개입으로 아이들의 스키마 자체가 갱신될 테니까.
“아저씨 방송 하는 거 본 사람은 없지?”
“유튭에서 하이라이트!”
“아저씨 진짜 사십칠 살이에요?”
“BJ준태랑 친해요?”
“연예인들도 알아요?”
“하하. 마흔일곱 맞고, 태준…… 준태랑은 몇 번 얼굴 봤지. 연예인들은 아직은 몰라. 그런데 조만간 보게 될 거야.”
“누구요?”
“왜요?”
“누군지는 아직 모르는데, 조만간 프리TV에서 VR로 상담하는 프로젝트를 하거든. 거기서 연예인들 여러 명 불러서 몇 주 동안 상담 해주는 거야. 너희 혹시 VR 있는 사람?”
“VR…….”
“없는데.”
“그렇구나. 다음에 프리월드 한번 견학할래? 거기서 아저씨가 말하면 VR 체험관 쓰게 해줄 텐데. 방송 끝나면 연예인들한테 싸인도 받아줄게. 아저씨가 거기 부장님 출신이니까.”
“올!”
“그럼 VR도 줘요?”
“흠. 이번 프로젝트 체험인단 신청하면 줄 수도 있지? 그러면 아저씨가 말해서 너희들 뽑아달라고 할 수도 있고. 물론 그만큼 열심히 SNS에 올려줘야 돼. 기브앤테이크, 알지?”
“올…….”
1차적인 유인책은 실리적 이득이다.
‘밥 사주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는 관용적인 어구처럼,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게 이득을 주는 사람에게 끌린다.
고급 레스토랑에, 연예인 싸인에, VR 기기까지 더해진다면.
그때는 무의식 수준에서 이아리와의 관계가 유익하다는 강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 무의식이 습관적인 따돌림에 제동을 걸어주리라.
“근데, 왜 해줘요? 아리랑 안 친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식적인 수준의 거부감은 남는다.
이아리 본인과의 거리는 여전하니까.
여기에 대고 친해지라고 강요하면 역효과만 나온다.
설득은 언제나 작은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꼭 친해야 뭘 해주나. 너희 잘 모르는구나? 아저씨가 퍼주는 거 좋아해. 아리랑 친하게 지내라고 해주는 거 아니니까 그런 거 신경 쓰지 마. 아리 공부해야지? 친구 필요 없지?”
“힝…….”
“또 이런다. 알았어 알았어. 얘들아, 아저씨는 아리가 공부나 열심히 했으면 좋겠는데, 얘는 친구들 만나는 게 좋은 모양이야. 가끔 아저씨가 부르면 밥이나 같이 먹을래?”
“아…… 네!”
“히히. 아저씨 그럼 용돈도 줄 거예요?”
“아이고! 야, 아저씨 털어먹으려고? 돈으로 주는 건 김영란법에 걸려서 안 돼.”
“아닌데! 그거 뭔지 알거든요?”
“음. 아는구나. 이런. 그러면…… 돈은 좀 그렇고, 이따 올리브영 갈래? 3만원 안에서 선물 정도는 사줄게. 됐지?”
“아싸!”
“진짜예요! 안 가면 안 돼요!”
사춘기 아이들 특유의 겉만 건드리는 대화다.
웃으며 장난치고 있지만, 그걸 오롯이 믿어선 안 된다.
무작정 퍼주려고 하면 중2 아이들이라도 의심한다.
오히려 한 발 빼서 장난스러운 욕심을 자극해야, 이득을 위해 이아리에게 잘 보여야 되겠다는 사고를 함양할 수 있다.
그렇게 완성되는 것이 가짜 친구.
진실성은 없지만, 우선은 곁에서 그녀를 변호해줄 호위대다.
그 자체로 큰 의미는 없을 것이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 접근한 아이들이니.
진짜 친구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고, 오히려 나중에 배신감을 안겨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모든 인간관계의 시작 아니겠는가.
단순노출효과(mere exposure effect)는 인간이 친해지는 기본적인 기작.
평생 한 명만 얻어도 성공이라는 진짜 친구를 남기기 위해서는, 물리적인 거리나 사회 속 일치감이나 서로의 이득에 의해 자주 만나며 형성되는 가짜 친구 단계가 필수다.
이아리가 쉽게 따돌림의 타겟이 된 건, 누구에게나 있는 그 가짜 친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가짜 친구는 적어도 문제의 해결책이 된다.
여덟 명이나 되는 인물이 단숨에 피해자의 곁에 선다면.
그때 피해자는 더 이상 약자가 아니게 되어, 주동자들로서도 불편한 기류를 감수해가며 괴롭힐 이유가 없어진다.
아마 새로운 약자를 찾아가겠지.
아니면 그들이 새로운 타겟이 될 수도 있겠고.
거기에 2차 유인책이 또 있다.
아저씨라곤 하지만, 내 ‘화술’은 83.
아마 이제는 인기 개그맨들과도 비길 법한 수준이리라.
“그래서 아저씨가 BJ준태한테 그 얘길 해준 거야. 너 진짜 세나 좋아하는 거 맞냐. 단지 합방에서 케미 좋으니까 호감으로 발전한 거라고 착각하는 건 아니냐. 그랬더니 가슴을 펴면서 이러는 거야. 전 세나를 사랑합니다! 진짜로요!”
“올, 우와.”
“멋있다.”
“준태 실물도 잘생겼어요?”
“잘생겼지. 보면 깜짝 놀랄걸?”
“아저씨보다 더요?”
“난 아무것도 아니야. 준태는 얼굴에서 막 빛이 나.”
“와…… 보고 싶다.”
“아저씨 부러워요!”
“하하. 준태처럼 잘생긴 남편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된다? 공부를 열심히 해야 되겠지?”
“아…… 틀내.”
“이노옴. 특니 딱딱 보여줘? 아저씨 이거 뺀다?”
“아하하하! 진짜 틀니예요?”
“아니지. 너희 SNS에 꼰마 이빨 틀니다 이런 얘기 쓰지 마라. 아저씨 진짜 상처받아요. 봐, 이게 어떻게 틀니야?”
이미 준태가 방송에서 스스로 밝힌 썰이지만, 아이들에게 연애담처럼 흥미진진한 요소가 또 없다.
그런 것들을 적당한 유머와 결부해 풀어준다.
식사를 마치고 올리브영 매장에 들어갈 때쯤에는, 여덟 명이 전부 내 옆에서 팔짱을 끼려고 애를 쓰게 됐다.
단순노출효과가 친밀관계 형성의 주요인이긴 하지만, 그것으로 끝은 아니다.
‘좋은 행동 특성’이라 불리는 감각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좋은 기억을 심어줘야 한다.
이아리와 함께 나를 만났을 때의 기억이 밝고 즐거울수록, 소녀들은 이아리에게도 무의식 수준에서 호감을 품게 된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진짜 친구가 돼줄 수도 있겠지.
거기까지 진행하는 데 투자된 자금은 겨우 40만원이었다.
지수의 한 달 용돈.
그 돈으로 이아리에게 교내의 지원군 여덟 명이 생겨났다.
이토록 쉬운 일인데.
이것만으로도 지옥 같던 학교생활에 숨통이 트일 텐데.
나는 대체 어디에 갇혀 있었던 걸까.
내가 갇혀 있던 건 규정인가, 그렇지 않으면 마음인가.
상담사의 윤리규정은 분명 반드시 지켜져야 할 규범이다.
그렇지만 그건 NBSC가 없는 현실세계의 규범.
내가 그 규정에 매달려 이아리의 주변에서 눈을 떼었던 건, 정말 원칙주의자로서의 윤리의식이었던가.
그게 아니면 혹시……
그녀가 남이기에, 내 딸이 아니기에, 스스로 견뎌내야 하는 거라고 쉽게 생각했을 뿐은 아니었던가.
아이들을 모두 떠나보낸 뒤, 이아리는 말했다.
“아저씨…….”
“삼촌이야, 아리야. 정말로 너희 집 가서 인사드릴 거야. 아리한테 친구들 만들어주기 위해서 어떤 거짓말을 했는지, 앞으로 또 어떤 거짓말들을 할 건지.”
“응…… 근데요 삼촌. 친구들…… 가짜잖아요?”
약간은 냉담한 목소리.
날 향한 감정은 아니다.
지금껏 따돌림의 피해를 모른 척하고 있다가, 내 개입으로 순식간에 태도를 바꾼 친구들을 향한 의심이었다.
그녀가 아니라 날 보고 다가온 친구들이기에, 순진한 이 아이조차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래. 거짓말로 만든 가짜 친구들이야. 그렇지만 평생 가짜는 아닐 거야. 누구에게나 계기가 필요해. 계기 없이는 어떤 사람도 변하지 않아. 저 아이들도 마찬가지야. 변화할 기회를 줘야 해. 아리한테 못되게 굴었던 아이들이라서 밉지만, 아저씨는 저 애들에게도 기회를 주고 싶어. 이제라도 반성하고 아리의 진짜 친구가 될 수 있는 기회. 그 행운을 선택할 기회가 없었잖아. 그게 저 아이들을 가해자로 만들었어.”
변명이다.
피해자를 외면하고 있는 내 딸애를 위한 변명.
그렇지만 그것조차 없다면, 상담사라는 직업은 얼마나 슬픈 존재인가.
범죄를 심판하는 것이 경찰이고 피해자를 위로하는 것이 약물이라면, 도대체 NBSC는 왜 내게 상담사를 권했단 말인가.
“아저씨는 여기까지밖에 할 수 없어. 앞으로 저 가짜 친구들이 아리 옆을 지켜주게 만드는 거. 딱 거기까지가 아저씨가 아리한테 해줄 수 있는 일이야. 그 뒤는 아리가 선택해야 돼. 저 아이들을 용서하고 진짜 친구로 만들지, 그렇지 않으면 학창시절에 잠깐 스쳐가는 가짜 친구로 둘지.”
“……용서해야 되는 거예요?”
“어떻게 해야 된다는 법은 없어. 네가 선택하면 돼.”
차로 집까지 이동하는 내내, 아리는 말없이 머리를 꼬았다.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스무 바퀴나 꼬였다.
그 뒤에야 그녀는 기어를 쥔 내 오른손을 붙잡았다.
“용서하면, 진짜 친구 돼줄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그럴 수도 있는 거예요?”
“그럼. 부모님끼리 친해서 친해진 애들이 나중에 평생친구가 되기도 하거든. 그런 것처럼, 저 아이들도 오래 친구로 지내다보면 아리가 너무 좋아질 거야. 아리는 좋은 애니까.”
“……그럼, 용서할래요. 진짜 친구 했으면 좋겠어…….”
이아리의 작은 손이 내 오른손을 꼭 쥔다.
그 온기를 기억하며, 나는 그녀의 부모님을 만났다.
아리와의 첫 만남과 그간 진행한 상담의 경과와 오늘 설득한 친구들에 대해 설명하고, 이후의 플랜을 설명했다.
아리의 모친은 끝내 눈물을 보였다.
“흑…… 고맙습니다…….”
“어흠. 마흔일곱이라고요?”
나보다 두 살이 더 많다는 아리의 부친이 묻는 말.
도저히 못 믿겠다는 투여서, 주민등록증을 꺼내 보여줬다.
“당황스러우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믿어도 되는 사람인지 의심스러우시겠죠. 하지만 실천으로 증명하겠습니다. 제게도 중학교 1학년 딸이 있습니다. 아리가 행복해지지 않는다면, 저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아니, 그런 얘기는 아니고. 난 그냥…… 고마워요. 우린 애들 일은 애들끼리 해결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학교 선생들도 폭행이나 갈취 같은 뚜렷한 사건이 없다고……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만 했거든요. 애가 자살까지 생각했는데도, 그냥 조용히 넘어가야 된다고…….”
“학교 쪽에서는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상담사 선생님은…… 이렇게 하셨네요.”
“비밀입니다. 원래는 해선 안 되는 일이에요.”
“해선 안 되는 일……을 해줘서, 고맙습니다.”
고개를 깊이 숙인 피해자의 아버지.
그를 보며, 나는 또 상담사를 생각했다.
상담사는 경찰이 아니다.
우리는 심판하지 않는다.
할 수 있는 건, 범죄를 비난하는 일이 아니다.
그 범죄가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하는 일이다.
범죄를 저지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지 않아도 스스로를 유지할 수 있게끔 마음을 움직여주는 일.
NBSC의 상담사인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윤리규정은 응원해주지 않을 길을, 나 스스로 정했다.
그럼으로써 간신히 용서할 수 있었다.
딸을 위해 이아리의 고통에서 눈을 돌렸던 나를.
원룸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봄비가 내렸다.
그것들이 마치 방망이처럼 차의 상판을 두드렸다.
그 모두를 한없이 신중하게 들었다.
어느 하나도 놓치지 않도록.
어느 한 사람의 마음조차 쉽게 재단하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