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진없는 상담사-43화 (43/200)

# 43

16장 - 복수의 용서 (2)

[아저씨!]

이아리의 목소리는 밝았다.

귀찮게 굴지 않겠다면서 하교길에 한 번씩만 전화하는 아이지만, 점심에 건 내 전화를 받는 속도가 무척이나 빨랐다.

“그래, 아리야. 주변에 듣는 친구들은 없어?”

[응. 나 혼자 있어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삼촌이라고 부를까? 혹시라도 친구들이 오해하면 안 되잖아.”

[아…… 삼촌!]

“하하. 아리 오늘 공부 잘했어?”

[아니요…….]

“그랬구나. 친구들이랑은 얘기 많이 했어?”

[아니요……. 아직 친구 없어요.]

아직……이라고 말하기에도 적절치 않을지 모르겠다.

한번 따돌림의 대상으로 규정된 이상, 이 학교에 다니는 이상 누군가가 먼저 다가와주는 일은 없으리라.

전학을 간다 하더라도 멀리 가지 않는 한 소문이 날 터.

이아리는 그저 버티고 견뎌내는 일로 남은 학창시절을 채울지도 모른다.

“애들이, 요즘도 많이 괴롭혀?”

[헤헤. 아니요? 요즘 괜찮아요. 삼촌 생각하니까.]

“……괴롭히긴 하는데, 견디고 있다는 말이구나.”

[아…… 응…….]

많은 사람들이 따돌림 피해자들에게 스스로 변하라 말한다.

그와는 관점이 다르긴 하지만, 나 역시 이아리의 내적 강화를 지원하려 애썼다.

그로써 교우관계가 나아지리라 믿은 까닭은 아니었다.

그저 지속되는 고통 속에서 스스로를 지킬 수 있길 바랐다.

딱 거기까지다.

이미 시작된 따돌림은 개인이 바꿀 수 없다.

힘을 기르거나 영악해져서 다른 아이들을 괴롭히는 입장으로 관계를 역전하지 않는 이상, 악의 순환은 계속된다.

그렇기에 나는 이용덕 앞에서 무력해졌다.

내가 바꿔주지 않은 세상을 떠올렸기에.

이아리의 어두운 세상에서는 도망쳤으면서, 오직 악플이라는 문제에서만 세상을 바꾸겠다 외친 이중성 때문에.

현실의 폭력이란 말을 듣자마자 이아리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녀에게 해줬던 내 모든 말들이 부끄러워졌다.

나는 감히 방망이를 논해서는 안 되는 인물이었다.

따돌림 피해자를 돕지 않은 딸의 마음에 동조했다.

이아리의 입장 쪽을 더 연민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녀의 세상을 바꿔주겠다고 외치지는 못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딸부터 바꿔야 할 테니까.

그 아이를 위험에 노출시켜야 할 테니까.

악플과 따돌림은 사실 구분되는 문제가 아니다.

대응하지 못할 상대를 괴롭힌다는 공통점이 있으니.

현실에서 누군가를 괴롭히는 이들은 웹상에서도 쉽게 사이버불링을 저지르곤 한다.

이아리 역시 ‘애스크’의 루머로 고생했다고 했다.

모두가 ㅋㅋ거리며 그녀의 고통을 즐겼다고 했다.

그러니, 비겁한 것이다.

나나 내 가족이 가해한 적 없는 악플은 마음껏 비난했다.

그러나 내 아이가 가해를 방관하고 있는 따돌림 앞에서는, 세상이 아닌 이아리를 바꾸려 들었다.

이 얼마나 치졸하고 한심한 이중성인가…….

“아리야.”

[응, 삼촌! 히히.]

“……삼촌이라고 부르는 거, 좋아?”

[응…… 좋아요!]

“그래, 그럼. 앞으로도 삼촌이라고 불러. 아저씨가 아리 삼촌 해줄게. 평생 아리 삼촌 할게.”

[우와? 진짜요? 삼촌이라고 해도 돼요?]

“당연하지. 피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아저씨는 아리 삼촌이야. 그렇게 하자.”

[헤헤. 좋아요. 삼촌 생겼네…… 히히.]

마음의 지지자가 특별한 어휘로 연결되었다는 생각에 즐거워하고 있음이, 100의 ‘진단’을 통해 해석됐다.

이 연대는 분명 소녀에게 큰 힘이 되어주리라.

마치 ‘아리업’을 통해 수천의 지지자를 얻었을 때처럼.

하지만…… 그뿐인 것이다.

어떤 지지를 받는다 해도 그녀의 학창시절은 어두운 터널.

마음과는 다른 무언가가 필요했다.

이아리의 세상을 바꿔주기 위해서.

“아리야. 삼촌이 아리한테 친구들을 만들어주고 싶어.”

[응? 친구 소개해줄 거예요?]

“그런 거야. 다들 아리한테 잘해주려고 애쓰게 만들고 싶어. 그게 당장은 진심이 아닐지라도, 그걸 보면 아리를 괴롭히던 애들이 더는 함부로 행동하지 못할 테니까.”

[어…… 응?]

“그러니까, 삼촌 믿어줄래? 한번만 삼촌 믿어줄래?”

[응! 헤헤.]

짧은 고민도 없이 나온 대답.

그 밝은 목소리에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액셀을 밟았다.

두 번째 허락을 얻기 위해서.

*

교수실에 방문했을 때, 한효준은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인사도 대강 받고 다시 재생 버튼을 누르더라.

그 기기에서 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불가능할지도 모를 일들을 향해 꾸준히 정진하겠습니다. 그러니…… 지켜봐주십쇼. 누구도 환자가 아닐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화면 속 내가 강단에서 내려서자, 한효준이 고개를 들었다.

“이런, 못난.”

“……죄송합니다.”

“그런 소리 듣자고 한 말이 아니야. 왜 이랬나?”

“예……?”

“왜 놔줬어? 당장 후려칠 게 여럿 있어 보이는데?”

“이용덕 교수 말씀이십니까? 아닙니다. 충분히 일리 있는 의견이었고, 전문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렇기야 하지만, 말이란 게 아 다르고 어 다른 건데? 조금만 비틀어도 그 뺀질거리는 얼굴에서 눈물 쏙 뺄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초면에 면박 주려고 강단 위로 불러낸 놈인데 밉지도 않았어? 제 꾀에 넘어간 자를 왜 풀어줘? 이미 자네 방송 본 악플러들이 효과를 증명해줬잖나? 대놓고 욕한 게 아니라 중화 기전을 유도했던 것임을!”

고마운 평가지만, 민망한 이야기였다.

“결과가 행동을 정당화해주지 않는다는 것은, 교수님께서 해주신 말씀이 아닙니까.”

“아니…… 그야…….”

“의도치 않은 행운이었습니다. 악플러들을 매도하던 때의 저는, 분명 제 방송을 보게 될 악플러들을 고려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정말 그들을 감화시키고자 했다면 더 깊이 고민했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지 못했던 건 상담사로서 실수였지요. 그 점을 이용덕의 지적으로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는 분명 훌륭한 의사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한효준은 입을 벌린 채로 눈만 끔뻑거렸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허탈한 듯 고개를 흔들었다.

“이런, 이런. 내가 훔친 것이 선녀의 날개옷이었구만.”

“……제가 선녀라는 말씀이십니까?”

“선남이라고 하면 이상하잖나. 선남선녀 그런 말도 있기야 하더라마는. 아무튼…… 참…… 기분이 더럽구만.”

“저, 이용덕과 잘 풀라고 말씀하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렇기는 한데, 그것과 짜증은 별개야. 이 못된 자가 주제도 모르고 내 제자를 괴롭히려 들었지 않냔 말이야.”

내가 당한 일을 자신이 당한 것처럼 생각하는 마음.

그건 분명 애정이었다.

감사의 염을 담아 고개를 숙여 보였다.

“제가 부족해서 누를 끼칠 뻔했습니다. 이후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흥. 선녀의 입장이야 잘 알겠다만, 앞으로는 내 입장도 생각하도록 해. 이용덕이 노리는 건 자네가 아니니까. 애초에 없는 꼬투리를 잡으려 하니 자승자박이 된 거야. 그자라고 자네 방송 보면서 아무것도 못 느꼈겠나?”

그건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였다.

비전문가인 내 무리수에 분개한 것임에 당연하다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니.

“이용덕 교수와 악연이 있으십니까?”

“악연은 무슨. 속 좁은 인간이 꿍해 있을 뿐이지.”

“어떤 일 때문이었는지요?”

“별일 아니야. 임상 레지던트 시절에 좀 얽힌 적이 있어. 내가 상담심리학 박사까지 따고 임상심리를 뒤늦게 공부하다보니, 이용덕이 벌써 펠로우였단 말이야. 그래서 그쪽과도 협진을 한 적이 있었지. 기분 더러운 일 아닌가. 새파란 꼬맹이가 오더 내린 케이스를 떠안게 되다니.”

새파란 꼬맹이라고 하기엔 고작 두 살 차이다.

드높은 한효준의 자의식에는 그것도 큰 격차겠지만.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 하고 처방 무시해버렸어. 내 방식대로 심리상담을 진행해서 치료하는 데 성공했지. 그랬더니 씩씩대며 찾아와서는…… 흥.”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졌다.

펠로우 전문의와 임상심리 레지던트 사이의 알력이라고 하면 당연히 전자 쪽이 우위겠지만, 한효준의 경우 그때 이미 몇 편의 이상심리 논문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던 입장.

오히려 무게추가 후자에 쏠렸으리라.

“앙금으로 남아 있을 만도 하군요.”

“그렇겠지. 주제도 모르는 놈 아닌가? 내 이름값이 무서워서 감히 덤비지 못하고 있다가, 자네가 내 제자임을 알게 돼서 옳다구나 한 게 분명해. 하는 짓이 정말 꼴같잖아. 강연에 자네 보내면서도 속은 부글부글 끓었어.”

“하지만…… 괜한 적을 만드셨다는 생각은 듭니다.”

“그걸 모르겠나! 원칙적으로는 안 될 일이었지. 그렇지만 한 사람의 미래가 걸린 일이 아닌가. 어린 펠로우가 자신감만 넘쳐서는 도저히 가망 없는 오더를 내리는데, 그걸 어떻게 다 받아주겠나? 차라리 내가 원한을 사는 게 낫지.”

참 좋은 사람이다.

내담자에게 있어선 축복 같은 인물.

제자가 된 내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용덕에게는, 거대한 억압이었으리라.

“저 역시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가 제 내담자에게 의아한 처방을 내린다면, 주저 없이 들이받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제가 본 그는 신념이 있는 의사였습니다.”

“허이고. 정신과 의사 생각은 그리 하면서 듣는 스승 생각은 안 해주는군. 이래서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지 말랬지.”

“하하.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지요?”

“뺀질뺀질 웃기는! 그건 됐고, 오늘이 아리아리 회기인가?”

“아, 예. 이아리라고 합니다.”

“알아. 하지만 말하지 마. 내 내담자가 아니잖나. 스승에게도 비밀보호의 원칙은 지키도록 해.”

“예, 죄송합니다.”

한효준은 무슨 생각에 잠겼는지 핸드폰과 내 얼굴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리고 잠시 후에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허. 설마, 이용덕에게 배웠다고 말한 게?”

“엇.”

“아리아리의 가해자들을 감화시킬 셈인가? 그러니까, 이용덕 놈이 자네 논파해보겠다고 끌어온 브레넌 페이퍼에서 왕따 가해자들의 심리 쪽으로 해소법을 찾아낸 게야?”

“찾아냈다기보다는, 거기에 대해서 여쭤보고 싶었습니다.”

“허허…… 이런 자를 봤나. 전쟁터에서 칼을 휘두르다가 대장간 노인네 잘 지내는지 염려할 자로구만. 어떻게 그 순간에 생각이 다른 쪽으로 향하는 게야?”

“하하…….”

이용덕은 말했다.

사회가 방망이를 휘두르고 있고, 개개인은 그 방망이를 쳐내는 과정에서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게 된다고.

책임을 지나치게 외부로 귀인한다는 비판이 나올 수는 있겠지만, 아주 틀린 말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악플이나 왕따 등의 불링(bullying)에서는 특히.

“저는 아리아리 내담자를 안쓰럽게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 가해자들에 대해서는 제대로 마주보지 않았지요. 부끄럽게도 도망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는 안 됐던 건데…….”

“그래, 그래. 이용덕은 자네를 무너뜨리려고 칼을 휘두르는데, 자네는 대장간 생각을 하고 있었겠지.”

“……예. 일반적으로 왕따 가해자들의 마음은 세 입장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는 힘과 스릴 추구의 욕구입니다. 억압된 환경 속에서 약자를 발견했을 때,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 그들에게 못된 장난을 치게 됩니다. 이들이 왕따 가해의 시초인 주동자들이 되겠지요.”

“대체로 그렇지. 둘째는?”

“접촉과 소속의 욕구입니다. 아이들은 주류에 소속되길 간절히 바라죠. 무리 내에서 인정받는 친구들과 어울리고자 합니다. 이들이 주동자를 지원하는 조력자가 됩니다.”

“그렇지. 거기까지는 당연한데, 셋째는 뭔가?”

“폭력의 행사를 방관하는 평범한 아이들. 이들이야말로 절대다수인 동시에 상황을 악화시키는 핵심입니다. 집단의 자정작용을 저해하기 때문입니다. 거친 악플에 낄낄거리며 동조하는 이들과…… 같습니다.”

딸애의 얼굴을 떠올리며 말한다.

그 아이 역시 방관자.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다수 중 하나일 뿐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범죄의 동조와 다를 바 없는 일이었다.

심각한 악플러들은 극소수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정말 극소수의 정신병자여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무시당한다면, 그 문제가 사회적으로 대두될 리 없다.

연예 기사의 댓글란을 보면 터무니없는 날조와 추측성 댓글에 수천수만 개의 ‘좋아요’가 달린다.

그들 역시 피해자의 고통을 배가시키는 악플러일 터였다.

사안에 따라 수십만도 넘길 그 동조자들.

이용덕이 내게 그 절대다수를 상기시켰다.

과연 그들 모두가 악의로 가득한 존재일까

당장 치료를 받아야 하는 방망이의 소유자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오히려 정반대로, 부적합한 자에게 변화를 촉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자신을 정의라고 착각하는 인물들이다.

악플러들을 악마로 규정해본들 그들은 반성하지 않는다.

자신이 하는 짓이 악플이 아닌 정의라고 믿기에.

“도세나 내담자는 말했습니다. 터무니없는 악플들도 처음에는 웃어넘겼다고요. 그렇지만 거기에 좋아요가 계속 달려서 베스트 댓글에 올라온 순간, 이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날 미워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아찔해졌다고 합니다. 그때부터는 가까운 사람들이 위로해줘도 위안이 되지 않았다고요.”

“흠…… 그래. 그렇겠지. 매슬로의 5대욕구 중 4단계로군. 자기존중욕구를 무너뜨리는 평판의 변동이야. 그러면 3단계의 소속욕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울 수도 있지.”

“예. 아리아리를 괴롭히는 시선들 역시 그쪽일 겁니다. 거칠게 괴롭히는 소수의 아이들이야 무시하면 그만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동조해서, 쟤가 뭔가 잘못을 했겠지, 못 어울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 이렇게 판단해버리는 시선들은 정말 견디기 어려운 것입니다. 가족이 아무리 지지해준다고 해도 그 앞에서는 무력할 따름입니다.”

“그래. 그렇지. 모든 인간은 사회 속에서 존중받기를 그 무엇보다 갈망하니까. 그 기본적인 욕구가 악의적인 말들로 무너지기 시작하면,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견딜 수 없어.”

이아리는 강한 아이였다.

자아분화수준도 높고 기본적으로 낙천적이어서, 어지간한 괴롭힘 정도는 스스로 극복할 수 있는 강골이었다.

그런 아이조차도 고사리손에 커터칼을 쥐었다.

그 폭력을 어떻게 소수의 범죄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 다수를 바꾸려고 합니다. 방망이를 휘두르는 주동자들이 아닌 대다수의 아이들. 상대적으로 감화가 쉬운 동시에, 수효로서 주동자들을 압박할 수 있는 존재들. 그 아이들을 제 편으로 만들고자 합니다.”

“좋아. 거기까진 적절하게 분석한 것 같구만. 하지만 중요한 건 방법이야. 이 심각한 사안에 어리숙한 수단을 써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잖나?”

“예, 그래서 제가 생각을 해봤습니다만……”

5분 정도 설명을 이어간 끝에, 한효준이 혀를 찼다.

“쯧. 슈퍼바이저(상담 수련 시 지도·감독 역할을 맡는 선배 상담사) 입장에서 들어줄 수 없는 말이로구만. 상담사가 무슨 해결사인가? 그렇게까지 나서는 건 과해. 진짜 삼촌이라도 된 줄 아는 게야? 부작용이 나오면 어떡하려고?”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자네라면, 할 수 있을 것도 같고.”

“……그렇습니까?”

“웃기는.”

한효준은 의자를 돌려 창밖을 돌아봤다.

무수한 서적과 논문에 거의 덮여 있어 바깥이 거의 보이지 않지만, 햇살은 그 틈새로도 스며들고 있다.

“상담사는…… 참 무력한 직종이야. 약을 처방하는 의사도 아니고, 법으로 심판하는 경찰도 아니고, 그저 내담자와 대면하는 사람이지. 윤리강령이 그걸 강제하고 있어. 그 이상의 어떤 일도 시도하지 못하게끔 제지하고 있어. 당연한 일이야. 멍청한 신참들이 함부로 나서서 상황을 악화시켜서는 안 되니까. 그렇지만 나는…… 그 한계가 마음에 들지 않아.”

“상담에서는 원칙을 고수하시지 않습니까?”

“나야, 그래야지. 나야 내담자 한 명 상대하는 것도 벅차니까. 하지만 자네라면…… 내가 본 박대민이라면, 할 수 있어. 책임은 모두 내가 지겠네. 걸어가. 그곳으로 가.”

숱이 적은 백발이 햇살 속에 하늘거린다.

돌아보지 않는 뒷모습에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렇게 교수실을 벗어나며, 나는 상담사를 생각했다.

상담사는 그저 내담자의 변화만을 독려한다.

친밀관계를 맺거나 행동교정을 강요하는 것은 금기.

그 주변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렇다.

상담사는 내담자의 주변과도 관계를 맺어선 안 된다.

그렇지만, 분명히 그것이 필요할 때가 있다.

강령이라는 규정 안에서는 무엇도 해소되지 않을 때가.

그때마다 상담사는 갈림길 위에 서게 된다.

내담자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며 가슴을 부여잡게 된다.

선인들의 집단지성을 따를 것인가.

그게 아니면, 자신의 개인적인 판단을 믿을 것인가.

한효준은 내게서 그 부담을 덜어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렇기에 스승으로서 책임을 지겠다고 말한 것.

하지만 이것마저 그에게 기대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아직 내 슈퍼바이저가 아니다.

스승의 자문을 받았을 뿐, 전진도 책임도 내 몫이었다.

*

강동구의 한설중학교 앞에 차를 댄다.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리자, 아이들의 시선이 내게 쏟아졌다.

“헐 꼰마!”

“꼬마?”

“꼰마다. 야 야, 너 꼰마 몰라?”

“모르는데…… 잘생겼다. 연예인이야?”

알아본 아이들과 호기심에 찬 아이들이 기웃거린다.

아직은 어정쩡한 거리감.

신경 안 쓰고 제 갈 길 가는 아이들도 많았다.

이럴 때는, 기술이 필요하다.

「 [인자한 웃음]을 사용합니다

[차분한 음성]을 사용합니다

[아련한 눈빛]을 사용합니다 」

“얘들아, 안녕? 혹시 여기 이아리 친구 있니?”

“어?”

“와…….”

“저, 저요! 저 이아리…… 같은 반인데요.”

호기심 때문인지 한 아이가 나섰다.

그렇지만 조심스럽게나마 ‘친구’라는 단어를 부정한다.

그 간극이야말로 소녀가 처해 있는 어둠이리라.

나는 상담사다.

내담자의 개인적인 관계에 어떤 영향도 끼쳐선 안 된다.

그렇지만 나는……

“아저씨가 아리 삼촌이야. 아리랑 같이 아웃백 갈 건데, 같이 갈래?”

“어…….”

“야 야, 간다 그래. BJ야.”

“어?”

“실검 올라간 BJ라니까? 사진 찍어서 SNS 올리게.”

그렇게 몇몇 소녀들을 꼬드기길 5분쯤.

마침내 내 주위로 아이들의 원이 형성됐다.

그리고, 이아리가 나를 발견했다.

“어…… 어? 어?”

“아리야! 삼촌 왔다! 친구들이랑 아웃백 가자!”

“어어?”

나는, 92의 ‘관계’와 72의 ‘외모’로 신인BJ 랭킹 1위에 올라 있는 유명인.

가짜 친구들이라면 얼마든지 만들어줄 수 있다.

그리고 그 복수의 지원군이 그녀의 곁에 서게만 만든다면, 악의의 주동자들조차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리라.

그렇게 이아리의 세상에 개입했다.

나는, 이아리의 삼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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