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
15장 - 상담사의 도전 (2)
시간에 쫓겨 ‘외모’를 72로 만든 일은 상당한 무리수였다.
그걸 100으로 만들 순 없었기에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생방송이 진행되고 있는 시점이었으니까.
그렇기에 몸을 돌린 상태에서 말없이 레벨업을 진행했다.
바로 방송을 끊을 수 없어서, 긴장하며 돌아봐야 했고.
「헐 꼰마오빠」
「뭐야 왜 얼굴에서 빛남 ㄷㄷ」
「꼰마형님 5초메이크업 실화??」
“5초메이크업이 뭐…… 어? 어…… 어?”
“어흠. 도세나님, 왜 그러시죠?”
“……방금 뭐 하셨어요? 되게 얼굴이……?”
“음. 좀 창백해졌지요? 혈액순환이 안 돼서.”
“아니 그런 게 아닌데? 어, 뭐지? 어…… 잘생겼어요.”
“면전에서 그러지 마세요. 후원금 안 돌려줍니다.”
“그게 아니구요…… 뭐지……?”
천만다행이었던 건, 55에서 65로 높아졌을 때처럼 형태적인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았다는 점이었다.
본판을 갈아엎는 ‘환골탈태’는 이미 끝났다는 거겠지.
72로 향상된 외모의 변화는 아기 피부와 티 없이 맑아진 흰자 등 매우 디테일한 부분에 국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척 보기에도 변화가 느껴지는 것이다.
사람의 눈이란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정보를 받아들이는 모양.
다만 마술이 아니고서야 생방송 중에 성형을 할 수 있을 리 없으니, 혈액순환이 안 됐다는 변명이 그럭저럭 먹혀들었다.
다만 도세나에게는 그게 다른 의미로 먹혀들었던 것 같다.
훈훈하게 방송을 마친 직후, 그녀가 내 옷소매를 쥐었다.
“저기요…… 꼰마님.”
“아, 예. 데려다드릴게요. 원래 그러려고 했어요.”
“엥? 형님, 제가 제가! 제가 데려다드릴게요!”
“어, 그럴래?”
“예압! 세나님, 저 드라이브 하고 싶어서 그러는데! 집 앞까지 15분컷으로 모시겠습니다!”
도세나는 진대수를 외면한 채 나만 바라봤다.
그리고 정말 당황스러운 제안을 꺼냈다.
“있잖아요…… 혹시…… 모델로 해도 될까요?”
“모델이라고요? 무슨……?”
“저, 웹툰 모델요.”
“……절요? 어, 제 외견을 웹툰 캐릭터로요?”
“네! 지금 좀 영감이…… 그러니까…… 아, 저거 있구나!”
황금색 칠판에 다가선 도세나가 그림을 그려나간다.
도화지나 타블렛이 아닌데도 순식간에 캐릭터가 완성됐다.
칠판 위에 그려진 박대민의 모습은……
“우와, 진짜 똑같아요! 완전 꽃중년이네요?”
“……김 선생님. 한 교수님께 연락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아까 전화 기다리겠다고 하셨는데, 전 도세나님과 잠깐.”
“아, 네 네. 여기서 통화할게요.”
이후 도세나의 앞에 서서 웹툰 기획안을 들었다.
열성적인 어조로 아이돌 기획팀장이 된 미중년을 소개한다.
그 이야기 속에서, 나는 웹툰 플롯의 내용보다 도세나의 내면 쪽에 집중했다.
과연 지금의 의욕이 장기적인 것일지에 대해서.
괴롭게만 느껴졌다던 차기작 기획을 스스로 나서서 이끌어나가는 태도다.
그 자체는 분명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긍정적 반응.
하지만 단순히 방송 직후의 조증일지도 몰랐다.
지속적으로 되새겨질 진짜 원동력인 것인지, 지금 확인해둘 필요가 있어 보였다.
그런 측면에서, 지금 내게는 100의 ‘진단’이 있다.
기존의 수치는 71.
무려 29나 상승한 결과고, NBSC가 줄 수 있는 최대치에 해당하니, 상당히 신뢰도 높은 평가가 나올 터였다.
적어도 내가 선입견 없이 바라볼 수만 있다면.
그랬는데, 그게 내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가만히 도세나의 얼굴을 바라보는 과정 내내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으로 시각을 갖게 된 아기처럼, 보지 못했던 무수한 변화들을 느끼게 됐다.
무언가 새로운 걸 보게 된 것이 아니다.
늘 보아왔던 얼굴에서 다른 것들이 보였다.
설명이 이어지면서는 목소리에서도 그게 느껴졌다.
“그래서 이분이, 아가씨 캐릭터를 딸처럼 아끼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아가씨가 마음에 병이 있어요. 대인기피증이에요. 그러니까…… 음…… 아! 사람을 무서워해요. 그런데 아닌 척 괜찮은 척 그렇게 사는데, 이분한테는 그게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오디션 프로에 출전하는데…… 어떨까요?”
“예. 재밌을 것 같네요.”
“아! 진짜요?”
“그렇지만 아저씨인 제 기준에서 그런 거고, 다른 독자들에게 어떻게 보일지는 잘 모르겠네요. 웹툰이라는 게 아무래도 소년소녀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되지 않습니까?”
“괜찮아요. 아니, 어…… 괜찮을 거예요.”
“저만 재밌게 읽어준다면 괜찮은 겁니까?”
“아, 아뇨? 다 재밌게 읽어주셔야죠. 열심히 그릴 거예요.”
폭이 넓어진 음역. 느슨하게 흩어지는 말꼬리. 황급하게 빨라졌다가 웅얼웅얼 느려지는 말투.
볼에 가만히 자리잡은 홍조. 말하는 내내 자꾸 아래를 향하는 눈꼬리. 살짝 치켜떠 바라보는 시선.
눈을 낮춰 신체 전반을 보면 또 다른 것들이 보였다.
평소보다 조금 더 빠르게 들이쉬는 숨결.
2초에 한 번씩 움츠리는 어깨.
배 앞쪽에 마주잡은 채 꼬물거리는 양손.
그 모든 신호들은 누구든지 느낄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사소한 신호에서 유의미한 결론을 도출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다.
이른바 콜드리딩(cold reading)이라 불리는 기술.
100의 ‘진단’은 나를 그 직관의 영역으로 데려가고 있었다.
홍조의 설렘, 음역의 열의, 어깨의 인정욕, 숨결의 조급함-
마치 사랑에 빠진 소녀 같은 표현들이지만, 정신적인 뮤즈를 만난 작가의 달뜬 열정을 암시할 수도 있다.
도세나는 근원적인 창작의 충동에 휩싸여 있는 듯했다.
일반적으로 독심술이라고 하면 근거가 없는 신비.
그렇지만 내 ‘진단’은 그와 달랐다.
잠깐 그 직관을 되새겨보자, 이미 내게 갖고 있던 호의가 ‘외모’의 향상이란 비현실적 전개 속에서 어떤 계시처럼 발전하지 않았을까 하는 판단이 섰다.
도세나의 입장에선 이런 상황이었으리라.
그저 팬으로서 얼굴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에 신청한 상담.
거기서 불가능할 게 뻔한 일을 진심으로 외치는 상담사를 보게 됐다.
그 바보 같은 마음에 고마움을 느끼던 찰나, 한순간 상담사의 얼굴에서 빛이 나며 몹시 훈훈해 보이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귀인 오류가 발생하기 쉽다.
내 ‘외모’가 실제로 7 상승한 탓이지만,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5초 사이의 변화를 현실의 변화로 믿기가 어려우니.
자연히 자신의 감정이 콩깍지를 만들었으리라고 판단하게 된다.
그런 감각을 느끼게 만든 사람이 운명적이고 소중한 존재라고 믿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 뇌의 착오가 이른바 ‘흔들다리 효과’의 원리다.
신체적 변화를 감정의 발현으로 오인하는 것.
그로써 나는 도세나의 경애를 받게 되었다.
다만, 내가 아내밖에 모르는 유부남임이 잘 알려져 있으니, 생각이 남녀관계보단 캐릭터 모델 쪽으로 치달았으리라…….
물론 그 모든 판단들은 확신할 수 없는 문제다.
아직도 한참 부족한 학식이 100의 ‘진단’으로도 커버할 수 없는 착각을 일으켰을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나는 독심술사가 아니다.
상담사는 내담자가 스스로 요청하지 않은 일에 어떤 심리학적 평가도 내려선 안 된다.
그렇지만 일단 긍정적인 추동인 건 명백해 보였다.
경애의 대상이 나라는 점에서 당황스러운 마음이 크지만, 저 경애가 유지되는 한은 결코 삶을 놓지 않을 테니까.
내가 존경스러운 어른의 모습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생각한 순간, 어깨 위로 산이 내려앉았다.
도세나는 이제 나만을 바라보고 있다.
세상의 급류 속에서 마지막으로 붙잡은 지푸라기가, NBSC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모자란 아저씨였다.
내가 걸음을 멈추는 순간 홍수가 그녀를 휩쓸 것이다.
나는, 결코 멈춰서선 안 된다.
“음. 정말 재밌을 것 같네요. 마음껏 원하시는 대로 그려주세요. 아, 김 선생님 통화 끝나셨네요. 가죠.”
“아…… 네. 가요, 가요.”
“세나님! 제가 에스코트 하겠습니다. 가방 주시라굽쇼.”
희희낙락 도세나를 이끄는 대수에게서 이상한 점이 보였다.
연신 도세나 쪽을 돌아보지만, 그 시선은 흔들렸고, 자주 깜빡거렸으며, 눈웃음이 거의 없었다.
단순히 미인을 상대하느라 긴장한 탓일 수도 있겠으나, 그렇게 보기에는 말하는 내용이 턱없이 자연스러웠다.
그 부분을 확인하기 위해 슬쩍 질문을 건네봤다.
“대수야. 은진이는 또 합방 계획 없을까?”
“엥? 은진이요? 우리 은진이가 마침…… 흠 흠. 몰라요 전.”
도세나를 언급할 때와 송은진을 언급할 때의 차이.
단지 친밀도의 격차가 아닌 무언가가 ‘진단’됐다.
송은진을 입에 담자마자 잔뜩 풀어진 대수의 얼굴에서, 나는 짧은 순간 강한 애정을 느꼈다.
도세나를 향한 치근거림은 그저 연기에 불과할지도…….
“너, 이따 술 한 잔 할래?”
“엥? 올. 근데 저 늦을 수도 있는데? 그쵸 세나님?”
“네? 왜요? 차 막힐 시간도 아닌데.”
“……농담입니다. 오케이요, 형님. 15분컷 찍고 올게요.”
저 녀석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푼수데기 같은 연기의 이면에 자리한 속내는 뭘까.
함께 일하면서도 그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첫 초대석 게스트로 도세나를 고른 진짜 이유에 대해서도.
그 고민 속에서 김지연의 집으로 차를 몰던 중.
NBSC가 준 에픽퀘스트의 의미를 알게 됐다.
「민차장 : 대민 씨. 밤늦게 미안한데 이용덕 씨랑 좀 풀 방법이 없을까요? 이제 같이 모델로 활동할 사인데…….」
그걸 보곤 곧바로 전화를 걸어야 했다.
[아, 대민 씨. 이거 참…… 늦은 시각에 미안합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같이 모델로 활동할 사이라고요?”
[그렇게 됐습니다. 아무래도 이쪽 계통에서 제일 유명한 의사잖아요? 러브콜은 계속 넣고 있는 중이었고, 오늘 계약서 도장 찍고 갔어요. 상담심리 박대민, 정신과 이용덕, 임상심리 조명기, 이렇게 3톱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용덕과 풀 방법이 없겠냐고 물어보신 뜻은요?”
[예. 아직 못 보셨겠죠. 오늘 방송 진행하시는 동안에 SNS로 이런저런 소릴 한 모양입니다. 저렇게 심각한 증상을 방송에서 다루는 것만 해도 참 끔찍한 일인데, 그 내용이 상담자의 자기만족은 아니었냐, 환자를 도구처럼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었냐, 이런 식으로 몇 개를 썼단 말이죠.]
……그쪽에서 먼저 걸어온 싸움이었나.
NBSC가 그 상황을 인지하고 첫 번째 관문으로 이용덕을 상정한 듯했다.
인터페이스가 현세의 인간관계를 관조하고 퀘스트를 준다는 건 기이하게 느껴지지만, 실제로 기이한 초능력이 맞으니.
“무슨 내용인지 대충 알겠네요. 그렇지만 전문의로서 할 수 있는 범주에서 했던 얘기들 같고, 거기에 불만은 없습니다. 모델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염려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게, 또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번에 시범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어요. 계약서에도 간단히 적어뒀었는데.]
“그렇습니까?”
[읽어보지도 않으셨구만. 아무튼 모델들이 단체로 연예인 상담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연예인이라고 해봤자 그렇게 유명한 사람들은 못 불렀지만, 어쨌든 그 팬들이 구경하러 올 수 있게요. 야심차게 준비한 VR 스튜디오도 소개할 겸 그렇게 가는 거죠.]
360도 카메라가 설치된 VR 스튜디오.
그곳에서 연예인을 상대로 모델들이 각자의 관점에서 상담을 진행해, 그 내용을 VR로 경험하게 한다는 얘기였다.
대부분은 그저 연예인의 옆모습이나 관찰하리라.
그렇지만 그들이 상담을 경험하는 과정을 보며, 정신건강 상담에 대한 거리낌을 일부 해소할 수 있을 듯했다.
“그렇군요. 그렇다고 하면…… 이용덕 입장에서는 센터에 집착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세 명이니까요.”
[어? 역시 바로 아시네요. 맞습니다. 메인모델이기도 하고 화제성도 있는 우리 BJ를 센터에 세우기로 한 건데, 이용덕은 그걸 자존심 상하는 일로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계약에도 난항이 있었던 건데…… 이 사람이 일단 계약을 해놓고도 계속 SNS로 공격하는 걸 보면, 아직도 포기하지 않은 건가 싶고 그러네요. 이런 식으로 이슈전에 승리하면 자기가 메인모델로 변경될 수 있지 않나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그 사람도 인지도로는 상당하니까.]
그런 식의 전략적인 공격이었구나.
‘진단’이 향상된 덕분인지, 이용덕의 속내가 쉬이 짐작됐다.
물론 그 역시 당장 속단할 일은 아니겠지만.
“알겠습니다. 미리 접촉해서 좀 풀어보겠습니다.”
[아, 예. 그렇게 해주세요.]
전화를 끊고 나자 김지연이 득달같이 질문했다.
“무슨 얘기예요? 이용덕 교수는 왜요?”
“예…… SNS로 이번 생방송을 저격한 모양입니다.”
“앗. 아, 그 사람 진짜. 그러려니 하세요. 관종 끼 넘치는 분이잖아요. 어? 그런데 그러면, 모델이라는 건 무슨 얘기?”
간결하게 프리월드의 새 프로젝트에 대해 설명해줬더니, 신이 나서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맙소사 맙소사! 이용덕 제치고 메인모델? 우와! 최고예요!”
“그 의사가 그 정도로 유명합니까?”
“당연하죠? 방송 많이 나가서 말 잘하는 정신과 의사로 유명하잖아요? 사실은 자기 본분 넘어가서 상담까지 해버리는 게 꼴불견인데, 보통은 잘 모르니까요. 그 외에도 연예인들 진료한 걸로 기사도 많이 나갔고요. 왜, 그 TOX 멤버 한 명도 인생의 멘토로 생각하는 선생님이라고 그랬잖아요?”
“……그건 굉장히 드문 일 아닙니까?”
“그렇죠. 이쪽 분야에서 상담을 받았다는 것 자체가 대놓고 말하기 어려운 일인데, 최근에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는 게 실감되는 부분이죠. 어쨌든 치료도 잘된 모양이죠.”
“실력도 있는 의사겠군요.”
“아주 엉망은 아닐 거예요. 관종 끼만 아니었어도…….”
이용덕은 복합적인 인물인 듯했다.
상대적으로 몹시 짧은 정신과의 진료시간만으로 아이돌에게 멘토로 인정받을 만큼의 실력을 갖춘 의사.
그렇지만 SNS에서는 관심의 중심에 서고자 갖은 모략도 서슴지 않는다.
그 내면에는 과연 어떤 복잡한 추동이 자리해 있을까.
“그렇군요. 어쨌든…… 김 선생님, 오늘 고생이 많으셨어요. 그리고 대수 녀석은 내가 아주 혼쭐을 내겠습니다.”
“하하하. 안 그러셔도 돼요. 나쁜 분은 아닌 것 같고.”
“그렇습니까?”
“네. 내담자로 온 도세나님한테 수작부리는 철없는 분인 줄 알았는데, 방송 시작하고 나서는 모니터랑 선생님 얼굴만 번갈아 보시던데요? 나름대로 분위기 푸는 방식이었나봐요.”
쉽게 울컥하지만, 김지연은 한효준이 인정한 수제자.
그 와중에 진대수의 내면까지 체크했던 모양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집에 데려다주지 못하게 제지를 했겠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리고 페이 말인데요.”
“네? 아, 됐어요. 안 받는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런데 오늘 후원금이 너무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거 다 기부하실 거면서? 그리고 후원금 많이 들어온 건 선생님이 상담을 잘하셔서 그런 거죠. 제가 뭘 했다고.”
“아뇨. 내가 보기엔 이래도 겁이 많습니다. 곁에 믿을 만한 전문가가 없었다면, 절대 그렇게 지르지 못했을 거예요. 나도 그게 해선 안 되는 이야기라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감사드리는 겁니다. 내 독단을 이해해주셔서.”
김지연은 즉답하지 않은 채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조수석 쪽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요. 사실은 진대수 씨 그분이 진짜 미웠어요.”
“예? 아, 예. 이해합니다.”
“직업윤리 그런 쪽이 아니라요. 아빠가 우울증이었거든요.”
“……예.”
“돌아가신 것도 그것 때문이고…….”
“예. 더 얘기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해했습니다.”
“하하. 그런 얘기 아닌데요? 그냥…… 처음 저희 상담소 오셨을 때는, 그랬어요. 선생님이 저희 아빠랑 겹쳐 보였어요. 그래서 더 울컥해서, 상담사 처지도 잊어버렸고요. 그랬는데 지금은 반대가 됐네요. 선생님이셨다면 어땠을까 생각하게 돼요. 나도 아빠한테 그렇게 말해줄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심리학과 수석이라고 나대고 다녔으면서, 왜 제일 소중한 사람한테는 마음 단단히 먹으라는 얘기밖에 못 했던 걸까.”
김지연은 돌아보지 않고 내내 창밖만 바라봤다.
그렇지만 그 얼굴을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100의 ‘진단’이 그녀의 미어지는 마음을 분석한다…….
“……아무튼요, 잘하셨어요. 심리학 선배로서 드리는 말씀은 아니고요. 그 부분은 전 얘기 안 할게요. 내일 교수님한테 잔뜩 혼나실 테니까. 그렇지만…… 그냥, 저는 그래요. 저는 좋았어요. 말도 안 되는 그 진심이, 고마웠어요.”
김지연을 바래다주고 돌아온 원룸 인근.
호프집에서 마주한 진대수는, 늘 그랬듯 잔뜩 들떠 있었다.
“야, 진짜 말도 안 되는 일 아닙니까? 우리 세나님 어떻게 그렇게 예쁘지? 제가 형님 아저씨돌로 만들어서 여성팬 확보하려고 애쓰긴 했는데, 저런 여팬은 솔직히 유니콘이거든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죠. 이쁘고 착한데 심지어 큰손이라니! 완전 최고죠. 근데 열혈 친목은 좀 조심해야 되겠어요. 세나님 얼굴 본 딴 열혈들이 껄떡댈 수 있으니까.”
말 참 빠르게 하는 녀석이다.
따발총으로 떠들다 잠시 말을 멈춘 진대수를 바라봤다.
그 마음이 얼핏 보이는 것도 같았다.
“대수야. 너, 도세나님 사연 다 보고 고른 거지?”
“엥? 안 봤다니까요? 제가 방송에서 거짓말 했겠습니까?”
“나한테까지 거짓말 할 거야? 사실대로 말해라, 대수야.”
그림처럼 깔끔하던 미소가 멎는다.
그 안의 연약한 청년이, 멋쩍은 듯 머리를 긁었다.
“아…… 아시네. 죄송함다.”
“왜 그랬어? 위험할 줄 몰라서 그런 거야? 리스크가 커야 얻는 것도 많으리라고 생각해서, 화제성을 위해 쓴 카드야?”
“아뇨! 아뇨…… 제가 그렇게 싸가지가 없진 않은데요…….”
“그러면 뭐야. 왜 그 친구를 불러들였어. 당장 입원시켜도 모자랄 고위험군 자살미수자를, 왜 끌어들였어.”
계속된 추궁에 미치겠다는 듯 머리를 헝크는 대수.
그렇지만 결국은 진짜 이유를 이야기했다.
“아니…… 진짜 자살할 것 같잖아요.”
“안 뽑아주면 자살하겠다고 메일에 쓰여 있었어?”
“아뇨. 그런 건 아닌데…… 그냥 제 판단이 그랬어요. 이 사람 지금 삶의 위안이 형님밖에 없구나. 진짜 뭐 하나만 어긋나도 마음이 절벽 끝에 서겠구나. 그게 너무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그냥 놔두기가…… 안 된다는 거 알지만 그래도…… 형님이라면, 하실 수 있을 것 같다 싶기도 하고…….”
“그래서, 도세나의 인생과 내 상담사 인생을 함께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도 있는 그런 흉계를 저지른 거야? 그랬어?”
“……죄송함다. 정말…… 죄송합니다.”
“잘했다. 계속 그렇게 해.”
대수는 눈을 크게 뜨며 날 올려다봤다.
그리고 잠시 후에, 우는 것처럼 웃었다.
“씨…… 쫄았잖아요. 형님…… 연기 좀 하시네. 킁.”
겉과 속이 다르고 하는 짓이 엉망진창인 내 디렉터.
날 지나치게 믿기에 턱없이 끔찍한 짓까지 저지르고 만다.
덕분에 하마터면 지울 수 없는 비극을 만들 뻔했다.
하지만 그 과한 기대가, 나를 한걸음 더 나아가게 만들었다.
인간 박대민은 사실 겁이 많다.
어렸을 때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지만, 언젠가부터 만사에 패기보다는 두려움이 앞서곤 했다.
이용덕과의 대면 역시 아직은 무섭기만 한 일이다.
죽음까지 생각하는 내담자란, 도망치고 싶은 공포였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나아가야지.
두려움을 이겨내고 모든 괴로움에 마주해야지.
이용덕이 무슨 욕을 한다 해도 상관없다.
나는 NBSC의 상담사.
내 적은 의사나 임상심리사가 아닌 이 사회의 어둠이다.
그러니, 그저 그 어둠 속을 걸어갈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