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
13장 - 후원을 유도하는 상담사 (3)
“힝…… 형님, 오늘은 백두산 받아주시면 안 돼요?”
장준범이 애교스럽게 내 어깨에 빨간 머리를 기댄다.
나를 서울대 심리학과 학부에 홍보해준 고마운 학생인 동시에, 어제의 ‘설심19 백두산’을 획책한 주범.
그런 이 친구가 이렇게 아이처럼 칭얼대고 있는 건……
“준범 학생. 시험기간인데 왜 이렇게 집중을 못 해?”
“헤헤. 전 지금 팬미팅 중이거든요.”
“학점 관리 열심히 해. 나중에 후회해.”
“아, 꼰머다! 이걸 현실에서 보게 될 줄이야. 히히.”
이렇게 되는 까닭이다.
방송에서 만든 이미지가 현실에 영향을 주고 있었다.
19학번이면 아직은 어른스러워 보이려고 애쓸 나이.
아주 친한 사이가 아니고서야 어리광을 피울 리 없다.
그럼에도 이러는 것은, 내게는 그래도 된다는 인식 때문.
일단 꼰대처럼 말해버리는 캐릭터를 잡았더니, 진심으로 지적을 해도 도리어 호의라고 믿어버리는 친구들이 많았다.
좀 민망하긴 하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26년의 세대차이를 극복할 만큼 잘하고 있다는 뜻이니.
다만 장준범과 36년의 세대차이를 가진 한효준 교수는, 가면을 쓴 채로도 사람의 폐부를 찌를 줄 알았다.
“거기 뒤에 준범이? 내 수업이 많이 재미가 없는 모양이야? 그래서 그렇게 청강생 아저씨랑 수다를 떨고 있는 거지?”
“아, 아뇨…… 죄송합니다…….”
“열심히 해. 지금 배워둔 게 평생 도움이 될 테니까.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이 없어.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 법이야.”
“넵! 집중하겠습니다!”
나와 단둘이 아닐 때 한효준은 생활 속의 상담사가 된다.
그 역시 내 꼰대마스터 캐릭터와 비슷한 가면인데, 천부적인 관찰자가 아닌 이상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정교했다.
그러다보니 2학년 이상심리학 강의에서도 인기만점.
내 존재를 신경 쓰던 19학번들이 금세 집중해서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 집중했다.
오랜 고련으로 만들어냈을 상담사의 탈.
그 모습을 묘한 심정으로 바라봤다.
그 한효준이 수업을 마치자마자 날 강단으로 불러냈다.
“자네, 점심 나랑 같이 하지.”
“엇. 죄송합니다. 제가 학생들과 약속이 있습니다.”
“취소해. 교수 모임이야. 과 교수들끼리 이런저런 쓸데없는 담소를 나누는 자린데, 오늘 자네 얘길 꺼낼 생각이야.”
“……예?”
“후원은 뭐 자네 혼자만 해야 되나? 마음이 맞는 사람들이 있으면 같이 진행할 수도 있는 거지. 안 그래?”
“그렇긴 합니다만, 아직 구체화도 안 된 건인데요. 제가 제대로 기부활동을 할 거라는 보증을 드릴 수 없잖습니까.”
“필요 없어. 내 말이 담보로서 가치가 없을 것 같나?”
“그런 건 아니지만…… 교수님. 제가 돈만 들고 달아나면요?”
“그럴 리 없어. 내가 다른 건 못해도 사람은 잘 봐.”
자기 안목을 철저하게 신뢰하는 인물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렇지 스스로 제자의 담보가 되겠다니.
황당하고도 존경스러운 자기확신이었다.
그렇게 찾아간 동원관 교수식당.
입실해 있던 11인의 교수들이 벌떡 일어서 그를 맞았다.
특히 한효준에게 박사 과정까지 지도받고 교수진에 합류했다는 오기철은, 열렬한 존경의 눈빛으로 의자까지 빼줬다.
다만 덤처럼 뒤를 따른 내 입장은 좀 모호했다.
아직은 오기철 등 네 교수밖에 만나보지 못한 까닭.
만나보지 못한 이들 중 최연장자는, 한효준보다 두 살 아래인 발달심리학 교수 김인영이었다.
“한 선생님, 이 청년은 누구예요? 왜 여기까지……?”
“청년은 무슨. 중년이야.”
“예? 어머, 농담도 잘하셔.”
“정말로. 오 선생보다…… 그래, 박 선생보다 두 살 많아.”
그 말에 시각신경과학 교수 박도원이 눈을 크게 뜬다.
알이 두꺼운 안경을 쓴, 듬성듬성 흰머리가 난 사내.
딱 마흔다섯 정도로 보이는 인물이다.
30대쯤의 외모를 갖게 된 나와는 격차가 컸다.
“아이고. 그러면 이 친구…… 아니, 이분이 그?”
“그래. 전에 말했던 새 제자. 동안에 인턴이라고 해서 대충들 대하지 마. 나도 일부 존경하는 점이 있는 친구니까.”
“선생님께서요? 허허.”
“정말이야. 오늘도 일부러 데리고 나왔어. 자기 나이 반도 안 산 꼬마들이랑 밥 먹으면 답답할 거 아닌가. 여기서 어른들끼리 인생 얘기도 하면 좋지 않겠나 싶어서.”
“어머, 좋은 생각이시네요. 그래도 이렇게 미남일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자리가 다 밝아지는 기분이 드는데요?”
내가 알던 교수 모임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근엄하게 헛기침하면서 떠드는 게 아니라, 오랜만에 만난 고향 선후배끼리 인간적인 대화를 주고받는 느낌.
이후 한동안은 학과 실무에 대한 이야기들이 오갔다.
식사가 시작되어 잠깐 텀이 생긴 뒤에야, 한효준이 본격적으로 후원을 유도하기 시작했다.
“음…… 자네들 혹시 요즘도 기부하고 그러나? 혹시 이제는 나만 하고 있는 건가 싶어서.”
“어머나? 무슨 말씀이에요. 하던 대로 하고 있죠.”
“저도 꾸준히 넣고 있습니다.”
“전 부끄럽지만 좀 줄였어요. 애가 이제 고3이라서요.”
줄였다는 말은 나오지만, 안 한다는 얘기는 없다.
기부 이야기를 나누는 게 생소하지도 않은 눈치.
그 반응에 곧바로 본론이 이어졌다.
“그러면, 뭉치지. 한동안 이 친구 자선사업을 도와주자고.”
“예? IT기업 출신 아니었습니까?”
“그랬는데, 복지 쪽으로 관심이 생겼나봐. 이제부터 매달 5천 이상씩 출연을 해서 자선 재단을 운영하겠다는 거야.”
“어머나…… 그런 돈을 무슨 수로요?”
“인터넷방송을 하고 있어. 사이버 세상에서 부자들 돈을 받아다가 사회적인 일을 하는 거야. 현대판 홍길동인 셈이지.”
“허허. 방송이라는 게 그렇게 쉬운 게 아닐 텐데요?”
“잘하더라고. 봤더니, 한 달이면 우리들 연봉만큼 벌겠던데.”
“어엇…… 정말입니까?”
그럴 가능성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대답을 꺼내지 못했다.
간단한 PT조차 진행하지 않고 대뜸 돈을 모으자고 지시한 것이 너무나 황당했기에.
그렇지만, 김인영 교수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한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 건이니까.”
“저도 같이 하겠습니다.”
“빠질 수 있나요? 같이 하시죠.”
……혹시 다른 교수들의 약점이라도 잡은 건가 싶었다.
아직 어떤 기부를 어떻게 할지도 설명하지 않았고, 심지어 나 스스로 신뢰를 살 만한 증거 하나 보여주지 못했으니.
그렇지만 잠시 후 그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교수들의 표정에는 일말의 불편함도 담겨 있지 않았다.
“마침 잘됐네요. 후원하던 재단이 이제 좀 풍족해져서요.”
“PTSD센터 말이지? 나도 그쪽 정기후원을 돌려야겠어.”
“박대민 씨, 모쪼록 잘 부탁해요. 그야 저희가 모은다고 해봐야 대민 씨 기부하는 금액만큼도 안 모이겠지만요.”
그건 그렇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충격적인 일이다.
정말 이게 먹힐 줄이야.
고작 점심식사 자리에서 서울대 교수 열한 명의 기부 의사를 굳힌다는 게 어떻게 가능한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따져 묻기는 우스운 상황.
식사를 마치고 나가는 길에야 그에 대해 질문할 수 있었다.
“교수님. 대체 저분들이 왜, 뭘 믿고 약속을 해주신 거죠?”
“뭘 믿긴. 날 믿는 거지.”
“세상에 믿을 사람 없다고 말씀하시는 분을요?”
“흥. 제일 최근에 임용된 오 선생이 6년차야. 그간 여러 이야기를 나누면서 학과 이름으로 같이 기부하고 그랬어. 정기후원으로는 각자 뜻이 다르니 알아서들 했지만. 어찌됐건, 기부라는 것도 믿을 만한 사람이랑 하는 게 안심이 되잖나? 그런 의미에서 날 믿고 함께하기로 한 거야. 대단할 게 없어.”
대단할 게 있다.
한두 푼도 아니고 월 20만원 정기후원의 확답을 받아낸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랴.
그 순간 내 눈에는, 한효준이 정말 반신처럼 보였다.
“……뭘 그렇게 쳐다보는 거야? 우습구만, 우스워. 본인은 하루에도 수백만 원씩 갈취하는 주제에, 이걸 보고 놀라다니.”
“예? 아니…… 저야 방송이란 포맷이 있어서 가능했지요.”
“허, 이 교수회의는 뭐 포맷이 아닌가? 역사가 몇 년인데. 아무튼 이건 시작일 뿐이야. 앞으로 교수 회동이나 학회 때마다 얘기하고 다닐 거야. 기업 프로젝트 미팅 때도 넌지시 말 꺼내볼 거고. 그러니까 후원은 신경 쓰지 마. 내가 모아줄 테니까, 자네는 지금 하는 상담에만 집중하도록 해.”
그렇게 말하는 한효준은 기분이 참 좋아 보였다.
세계 심리학계에서도 인정받는다는 석학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주변인의 후원을 유도해 나를 도와주며, 웃고 있다.
헤아릴 수 없이 커다란 내리사랑이었다.
그에 나 역시 마음이 폭신해져 결국 웃고 말았는데……
“하지만 좀 아쉽긴 하구만. 30씩은 받았어야 했는데. 20이라고 하면 다 모아도 220이잖아. 어쩔 수 없이 내가 80을 해야 되겠어. 교수진 체면에, 3만 개는 채워야지.”
“……예? 3만 개면, 별사탕 말씀이십니까?”
“왜. 별사탕으로 후원하면 안 되나? 나름의 재미가 있던데.”
“교수님……? 그쪽은 표기만 후원이고 사실상 상품이라서, 공제가 안 됩니다. 정상적인 루트로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런 건가? 허, 거참. 상술 한번 별나군.”
71의 ‘진단’이 말했다.
저 허를 찔렸다는 듯한 표정은, 멋지게 3만 개의 별을 쏘겠노라는 기대가 무너져 실망하고 있는 이의 얼굴이라고.
그 얼굴 표현은 금세 사라졌다.
하지만 나는, 오후 내내 웃음을 참느라 애써야 했다.
상담소 일을 마치고 뒤늦게 출근한 김지연이 그런 날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박 선생님?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아, 아닙니다. 그냥…… 후후.”
“되게 좋은 일 있으신 것 같은데? 뭐예요? 알려주세요.”
다른 원생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아주 조용히 속삭여줬는데, 김지연이 책상을 두드리며 폭소를 터뜨렸다.
달래서 복도로 나오는 데 애를 먹었다.
“어휴. 갑자기 그렇게 웃으시면 어떡해요? 다들 놀랐겠다.”
“아니, 아하, 흐히…… 너무 웃기잖아요? 아, 교수님 귀여워. 인방에 푹 빠지셨나봐. 은근히 애기 같으시다니까요.”
“교수님께 좀 그런 면이 있나 봅니다. 어떤 부분은 소년기에 아직 멈춰 계신 듯한…….”
“네. 아마 스스로도 인지하고는 있으실 거예요. 드러나지 않게끔 열심히 덮어두고 계셔서, 트러블은 없었지만요.”
“예. 아마 제가 그 이유에 대해서도 들은 것 같습니다.”
“아…… 들으셨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인 듯, 김지연이 시선을 떨어뜨렸다.
“일종의 퇴행(regression)이라고 볼 수 있겠죠. 과거의 망령을 아직 떨쳐내지 못해서, 아이 같은 치기로 도망치려는…….”
“비행공포증과도 연관이 있는 겁니까?”
“……그럴 거예요. 말씀은 안 하셨지만, 부친께서 고위 외교관이셨다고 들었거든요. 아마 비행 중에 어떤…… 음.”
지나치게 깊어졌다고 생각했는지, 말끝을 흐린다.
하지만 그 정도 들으면 충분히 짐작이 됐다.
도망갈 곳 없는 비행기 위에서, 누가 뭐라고 제지하지도 못하는 권력자로부터 말미암은 가정폭력.
소년에게 있어서 그건 얼마만큼이나 끔찍한 침략이었을까.
툭하면 가족역동과 이상심리를 강조하던 게 이해됐다.
스스로가 가정의 역사로 인한 PTSD(트라우마)를 안고 있으니, 가장 먼저 염려되는 게 그쪽일 수밖에.
그런 사람의 진심을 의심했던 나는 참……
“저는…… 그랬어요. 우연히 그런 걸 알고 나니까 너무 슬퍼져서, 교수님한테 애처럼 칭얼거렸죠. 그랬더니 그러시는 거예요? 남의 에고(ego) 파헤칠 시간에 에고에고 앓고 있는 내담자들이나 챙기라고. 그것도 개그라고 참…….”
참, 슬프도록 우스운 사람이었다.
*
「참견쟁이 : 아빠아빠~~ 오늘도 방송 파이팅이에요!」
「참견쟁이 : 저 카페에 자리잡고 이어폰 꼈어요 ㅎㅎ」
「우선희 대리 : 으 부러워..」
「우선희 대리 : 저는 야근중이에요ㅠ 부장님 파이팅!」
프리월드의 예전 동료들은 매일 내 방송을 챙겨보고 있다.
정해진은 업무상 모니터링 하는 거라고 핑계를 댄다는 모양이고, 현수는 팀장 눈치도 안 보고 그냥 켜놓는다고 하고.
그 민원식 차장 역시 어제 잘 봤다는 문자를 보내왔다.
어쩌면 누군가 고민 사연도 보냈을지 모르겠다.
개인 닉네임을 사용하고 있다면 누가 누군지 알 수 없으니.
그래도 설마 후원까지는 하지 않고 있겠지만, 그 마음만으로도 충분히 과분한 지원군이었다.
그에 더해, 처남은 오늘도 장인장모를 모시고 내 방송을 TV에 띄울 생각이라고 했다.
아리 역시 10시에 학원 마치면 방송에 접속할 예정이고.
이제는 스마트폰을 소유하게 된 종위보육원 아이들도, 팬미팅하는 기분으로 수업에 들어온다는 ‘설심’ 학우들도.
집에서는, 세상 가장 사랑스러운 아내와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딸이 생방송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그들을 위해 히어로가 되고자 했다.
그러나 나는 영웅이 아니었고, 오히려 한 걸음 물러선 뒤에야 마음의 지도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은 희미하고 부정확한 자취지만……
좋은 상담방송으로 가는 길을 조금쯤 알 것도 같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은진알통 후원자님. 오늘도 순식간에 접속해주셨네요. 네, 꼰마야놀자 후원자님도 정말 반갑습니다. 양념사탕 후원자님, 어서 오세요. 또 와주셨네요.”
지난 주말 이상의 속도로 빠르게 시청자가 늘어났다.
어제의 ‘효준좌’ 이슈 덕분이겠지.
어쩌면 처음으로 평일 만 명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들과 인사를 나누며 종종 한효준을 떠올렸다.
마음에 새겨진 흉터와 닮은 ‘씬보이’에게 다가선 나를 보고, 학자로서 남은 인생을 걸어보자고 결심한 노교수.
그의 괴팍한 얼굴과 커다란 기대가 마음을 간지럽혔다.
과거 받아보지 못한 상담을 바라본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많은 상처를 받지 않고 자라난 내게는 좀 생소하다.
타인의 회복을 통해서 대리만족을 느끼는 걸까?
그를 통해서, 가슴 안쪽에 살고 있는 작은 소년을 쓰다듬어줄 수 있게 되는 걸까?
그저 피상적으로만 상상할 수 있는 위로.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는 아직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건 ‘진단’을 100까지 올린다 해도 마찬가지겠지.
NBSC가 아닌 박대민 쪽의 한계니까.
그래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좀 더 다가가고 싶다고.
후원자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내 시청자들과 조금 더 인간적으로 가까워져, 그들의 우주를 만나보고 싶다고.
“이제 본격적으로 상담을 시작해보겠습니다. 오늘 첫 번째 사연은…… 이거네요. 귀찮아님.”
맞은편의 진대수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매니저 채팅창에 올려둔 고민 중에 없는 닉네임인 탓.
방송에 내기엔 너무 무거운 이야기였기에 대수가 알아서 커트해놓은 것을, 내가 굳이 스크롤해서 찾아냈다.
“오늘 엄마랑 싸웠어요. 저보고 동생 용돈을 주래요. 엄마아빠가 일을 안 해서 제가 생활비도 다 대고 있는데, 그건 생활비로 써야 되니까 따로 용돈까지 챙겨주라고 하네요. 전 노예인 걸까요. 대학교도 못 가고 공장 들어와서 스무 살 때부터 일만 하다가, 연애 한 번 못 해보고 스물다섯이 됐는데.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요. 살면 뭐 하나 싶어요…….”
「헐..」
「개에바네 부모가멀쩡한데 왜 애가 일함」
「에휴ㅉㅉ 저런부모는 좀 잡아다가 일시켜야됨」
「귀찮아 : ..엄마아빠 욕하지 마세요..」
“다들 스톱. 이 건엔, 여러분의 의견을 여쭤보지 않을게요. 채팅 멈춰주십쇼. 지금은 꼰대도 명언도 잠깐 쉬겠습니다.”
알지 못하는 가정의 알 수 없는 역동이 담긴 사연.
누구도 감히 입을 대선 안 되는 고민이다.
김지연이 한효준의 트라우마를 알고도 모른 척해야 했듯이.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지만……
“그냥 귀찮아님께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채팅으로만 읽었을 뿐이지만, 지쳐버린 마음이 느껴져요. 정확하게 같진 않겠지만 저도 동생과 나이 차가 큰 장남이라서. 버는 족족 집에 모든 돈을 가져다드리다가, 결혼하고 나서야 제 생활을 찾았어요. 그리고 8년 전에 부모님께서 돌아가셨죠. 참 많이 후회했습니다.”
「귀찮아 : 아 그러셨구나..」
「귀찮아 : 저도 더 노력해볼까요..」
“아뇨. 그만해요. 그만두세요. 저는, 세상에서 제일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돌아가신 부모님께선 늘 제게 죄책감을 품고 계셨고, 동생 역시 표현은 안 했지만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었대요. 그랬는데도 폭발하게 됐던 겁니다. 동생 얼굴도 안 보고 산 게 8년…… 그러다 올해 처음으로 다시 만났습니다.”
「귀찮아 : 헐.. 우와..」
“그러니까 노력하지 마세요. 손익을 따지시라는 게 아닙니다. 베푸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귀찮아 : ㅎㅎ 그래도 가족이니까..」
그건 참 순진한 마음.
가족이니까 내가 좀 희생해야지.
가족이니까 술 마시고 때려도 참아야지…….
무수한 가정폭력과 착취의 피해자들이 끝끝내 그 고리를 끊지 못하게 만드는, 세뇌다.
“가족이라고 해도 마찬가집니다. 우리는 영웅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은 그렇게나 강하지 않아요. 운이 좋은 저도 마흔일곱이 돼서야 관계를 회복했는데, 스물다섯 꽃다운 청춘을 가족들을 위해 전부 다 바치면 어떡해요. 그런 거 하지 마세요. 버리세요. 짐 챙겨 나와서 전화번호도 바꿔버려요.”
「귀찮아 : 아.. 근데 너무 나쁜거같아요.. 동생 어린데..」
“귀찮아님. 잘 생각하세요. 귀찮아님이 경제적인 지원을 끊는다면, 그게 미움 받을 일인가요? 지금까지 5년 동안 집안을 지탱해준 사람인데, 가족이 아니게 되나요?”
「귀찮아 : ㅎㅎ 그래도 실망할텐데..」
“실망하게 하세요. 기대게 만들지 마세요. 가족들이 호의를 권리로 오해해서 당신을 영웅으로 치부하게 두지 마세요. 귀찮아님은 아이언맨이 아닙니다. 직장인이라는 갑옷을 벗어놓고 보면, 상처투성이가 된 아이가 거기에 있잖아요.”
「귀찮아 : 음.. 꼰마님말이 맞는거같아요..ㅎㅎ」
[마구니님 별사탕 1000개. 아 띠 유유 눈에서 땀나네.]
흐뭇한 후원이 이어질 것처럼 보였던 순간.
누군가의 키보드가 불을 뿜기 시작했다.
그가 바로, 해선 안 될 상담에 내가 도전할 수 있었던 이유.
「효준한 : 이 사람이 정말..! 자네가 뭐라고 행동을 강요하는 건가! 상담사에게 허락된 건 인커리징이지 최면암시가 아냐! 이렇게 분위기를 몰아가서야 그 사기꾼들과 다를 게 뭐란 말인가? 당장 사과하고 철회해! 스스로 선택하게 해!」
「나왔다」
「기다렸습니다 ㅋㅋㅋㅋ」
「어김없이 참전하는 효준좌ㅋㅋㅋㅋㅋ」
“음,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귀찮아님. 제가 주제넘었네요. 제 얘긴 잊어버리고 알아서 하세요.”
「귀찮아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진짜루요?」
「효준한 : 그렇게 건성으로 말하면 어떡하나! 똑바로 해!」
“아, 귀찮아.”
「효준한 : 뭐!!!!」
“-님. 귀찮아님, 정말이에요. 착한 아이 콤플렉스는 슬픈 만큼 아름다운 얘기죠. 솔직히 말하면 계속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싶어요. 연약한 사람이지만, 보상받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동생의 아이언맨이 되어달라고……. 그러니까 편하게 선택해요. 상처받는 영웅이 되건 솔직한 보통 사람이 되건, 양쪽 모두가 멋지니까.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어떤 선택을 내리시든, 적어도 저는 귀찮아님을 응원하겠습니다. 언제나.”
「귀찮아 : ㅎㅎ 그런얘기 첨들어요.. 고맙습니다.. ㅎㅎㅎ」
「효준한 : ..이런.. 준비하고 있었구만..」
[세이클럽님 별사탕 100개. 아 정말 참 유유. 응원해요.]
[보람찬하루일을님 별사탕 1000개. 응원합니다 흐흐.]
[dosena님 별사탕 5050개. 응원19 백두산 가즈아.]
좀 이상하고 과한 후원도 끼어 있긴 했지만……
유도한 대로 됐다.
작은 우리가 영웅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고작 응원뿐.
딱 거기까지가 내 고민상담소의 한계다.
[귀찮아님 별사탕 100개. 쪼금이지만 기부해요 흐흐.]
그렇지만, 이 응원은 오래 기억될 것이다.
주변의 강요가 아닌 스스로의 자아로 선택할 수 있는 힘.
지쳐 쓰러지려 할 때 돌이켜볼 수 있는 노스탤지어.
나와 효준한과 무수한 후원자들이, 언제고 찾아올 수 있는 쉼터가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