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12장 - 상담사와 조직생활 (2)
“부장님 지나가시고 나면 애들이, 박바람 휘날리며, 이럽니다. 노래 있잖습니까. 그걸 개사해서 흥얼거리는 거예요.”
봄마다 들리는 유행가다.
정해진은 나를 본 부하직원들이 그 노래를 불렀다고 했다.
“왜 그랬던 거야?”
“훈훈해서요.”
“내가, 훈남은 아니었지 않아?”
“하핫. 그런 훈훈함이 아니라, 이런 겁니다. 부장님은 직급상 저희한테 좀 먼 존재시잖습니까?”
그야 입사 21년차 부장이었다.
창업공신으로서 임원들과 함께 회사의 기틀을 다졌고, 만년부장이라지만 정규직 중 가장 긴 연차를 가진 상사.
실무진 입장에서는 멀게만 느껴졌을 터였다.
“그런 분이 매번 인사하는 애들한테 꾸벅 목인사 해주시고, 표정 안 좋은 친구 있으면 먼저 다가가서 무슨 일 있냐고 물어봐주시고. 그런 것들이 참 훈훈했습니다. 처음에는요.”
“처음에……라면?”
“저도 이제 입사 11년차잖습니까? 해년마다 조금씩 더 많은 게 보이더라고요. 제일 신기했던 건, 이사님들이었습니다.”
“이사님들? 그분들이 왜?”
“내려오시면, 항상 미래기획팀만 가시니까.”
이상하게 이사들이 자주 들렀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어쨌든 나와는 동아리 선후배 사이인 까닭.
업무를 챙기는 것도 아니고 그저 수다를 떨고 가곤 했다.
“그분들이야, 그냥 일상 얘기 하러 들른 거였지.”
“그렇겠지만, 다른 데는 들르지도 않으세요. 솔직히 제휴사업팀 정말 중요한 부서 아닙니까? 그런데도 이사님들 내려온 기억은 손에 꼽혀요. 하실 말씀 있으시면 팀장님을 호출하시죠. 혹시 포상할 게 있거나 할 때만 이벤트성으로 오시고. 그런데 어째설까요? 방송지원팀 미팅 있어서 6층 올라가면, 두 번에 한 번 꼴로 이사님들 봤습니다. 지원팀 말고 미래기획팀 쪽에서요. 부장님이랑 하하 웃으면서 무슨 얘기들을 그렇게 재밌게 하시더라고요. 특히 상무님. 6층에서 열 몇 번은 뵀습니다. 회사고 뭐고 늘 골프만 생각하시는 그분이 말이죠.”
“……정 과장, 그런 말은 조심해서 해야지.”
“하하. 부장님, 상무님한테 이르진 말아주십쇼. 물어보셔서 대답해드린 거잖아요?”
정말 이를 거라고 생각해서 하는 말 같진 않았다.
그저 내 장단에 맞춰주고 있는 느낌.
내가 상무보다 자기를 더 배려해주리라 확신하는 듯했다.
“그리고 다음으로 신기했던 건, 소문들이었습니다.”
“소문들?”
“우리 대표실이 방음이 잘 되진 않잖아요? 대표님 목소리가 좀 크시기도 하고. 그 안에서 나누는 대화가 거의 퍼집니다.”
“퍼진다고?”
“비서들이 종종 얘기를 하나봐요. 친한 사람끼리만 떠드는 거겠지만, 회사가 좀 좁습니까? 이제 대리 달 때쯤부터 그런 말들도 종종 듣게 됐는데…… 부장님 8층 올라가실 때마다 기대하게 되더라고요.”
“기대하게 되다니?”
“백이면 백 대표님 호통이 나왔으니까요.”
비서들이 그런 얘기를 퍼뜨렸구나.
내가 욕먹고 오는 걸 대리급까지 알고 있을 정도였다니.
민망한 마음에 눈 둘 곳을 찾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실세 얘기를 하다가 왜 호통 이야기로 옮아간 걸까?
“정 과장. 그 호통이 어땠다는 거야?”
“좀, 감동이었습니다.”
“……감동이라니? 대체 뭐가?”
“그게 15년도였나요. 유 차장님 옷 벗을 뻔했던 그때요.”
“옷 벗을 뻔했던? 그런 일이 있었나?”
“벌써 잊으셨습니까? 왜, 대표님이 부장님 멱살 잡으셨던.”
“멱살…… 아, 그때. 그런 적이 있었지. 하지만 유 차장이랑은 무관한 일이었어. 그저 내가 조율을 제대로 못해서 일이 틀어졌던 거라, 대표님께 꾸중을 들었던 거지.”
“와.”
정해진은 멍한 얼굴로 입을 벌렸다.
바다를 처음 본 사람 같은 표정이었다.
“아니…… 와. 진짜 부장님은…… 찐이시네요.”
“찐이라니. 진짜배기라고?”
“아,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물론 관리직이랑 실무자 사이에서 책임소재의 견해차가 생기기도 하지만…… 저희는 그랬습니다. 유 차장님 작별인사 준비하고 있었어요.”
“대체 왜?”
“그렇잖습니까? MBC예요. 공중파예요. 거기 파일럿 예능에 우리 프리TV 밀어넣는 기획이었고, 진짜 백번천번 주의해도 모자란 미팅이었잖습니까. 거기서 유 차장님이 메인작가 심기를 건드린 겁니다. 그래서 엎어진 거라고 공공연히 얘기 나오고 있었고, 책임자 안 자르면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죠. 그때 미팅 참석하지도 않았던 부장님이 커버 안 쳐주셨다면요. 애초에 대표님은 부장님 호출도 안 하셨던 상황이잖습니까?”
내 입장에서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애초에 내가 주관하지 않았던 게 실수였다.
유 차장, 유보원은 그때 당시 7년차 신참 과장.
그런 친구에게 중요한 미팅을 맡겨놓고 미리 주의사항도 제대로 알려주지 못한 건 분명 직무방기였고, 당연히 내가 대표실에 불려가야 옳다고 봤다.
그래서 얼굴이 붉어진 대표와 마주섰다.
나 역시 약간 화가 나 있었다.
멋도 모르는 현장책임자만 호출하고 날 부르지 않은 게, 내게는 팀장의 존재가치를 무시하는 행동처럼 느껴졌다.
그렇기에 보원이 앞을 막아선 채 내가 해결하겠노라고 소리를 쳐댔다.
“그건, 그저 내 알고리즘에 맞게 행동했을 뿐이야.”
“하핫. 맞다. 우리 공대 부장님, 알고리즘 참 좋아하시죠?”
“으, 음.”
“그런데 그게요…… 저희한테는 버그였습니다. 저희 같은 사람들한테는 그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어요. 말이 안 되잖습니까. 애초에 대표가 마음속에 책임자 규명해놓고 과장만 불렀는데, 그걸 부장이 따라가서 대신 멱살 잡힌다?”
“애초에 내 책임이었다니까 그러네.”
“그러니까요. 그렇게 생각하시잖아요. 좋은 사람 컴플렉스도 아니고 원래 들이받기 좋아하는 분도 아니시면서, 이런 문제에선 잘릴 각오까지 하고 혼자 다 짊어지셨잖아요.”
“아니…….”
“그리고 결국 해결을 하셨죠. 어떻게 또 거기 작가님을 만나셔가지고 며칠 만에 CP까지 참여하는 미팅 잡으셨고. 그 공로가 고스란히 유 차장님한테 가서, 나중에 미디어팀 팀장 다시는 데 고과로 들어갔고. 이건 뭐…… 하하.”
웃는 정해진을 보며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나로선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었는데.
그걸 받아들인 방향이 내 의도와는 전혀 달랐던 모양이다.
정해진은 내가 가만히 생각을 정리하게 두지도 않았다.
“마지막으로, 대표님이 신기했습니다.”
“대표님…….”
“그 정도로 날을 세우는 부하직원은, 사실 좀 껄끄럽잖습니까. 그것도 말단 사원들부터 이사진까지 다 좋아하는 사람. 그래서 대표님 부재시에 기획팀 PT 열리면 이사님들이 무조건 통과 외치셨잖습니까. 거기다 지원2팀장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회사 업무 전체에 빠삭하셨고요.”
지원2팀이 멸칭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내 노력을 인정해준 이야기였던 건가.
“그래서 생각해본 겁니다. 혹시 큰 문제 터져서 경영인 갈자는 말이 나왔을 때, 주주들이 외부 인사 생각하겠습니까? 업계 선구자로서 시장을 개척했는데, 새로 수혈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분명히 내부 승진…… 아마 이사진이 추천하는 사람이 우선되겠죠. 그 사람이 현직 임원이든 아니든 말입니다. 그러니 제가 대표였으면 당장 잘랐…… 죄송합니다.”
“아, 아냐. 괜찮아. 얘기해봐.”
“……저라면 그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못난 머리에 잠깐 들었거든요. 그래서 15년도 그 일 이후에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조용하더라고요. 직원들 사이에서 대표님보다 부장님 파워가 더 센 거 아니냐는 말까지 나오고 있는데, 그걸 모를 리 없는 분이…… 그냥 있더라고요.”
제휴사업팀은, 사람을 만나는 부서다.
회사 외부 사람들을 가장 많이 케어해야 하는 입장.
대인관계엔 흥미가 없지만 일만큼은 에이스급으로 해온 정해진 과장은, 나이는 젊어도 이미 ‘진단’의 고수일 터였다.
그 정해진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진갑수 대표의 혓바늘이었다고.
그가 자신의 약점인 날 보듬어주고 있었던 거라고.
“아, 그렇지. 부장님. 히어로 좋아하시죠?”
“어, 어. 그건 어떻게 알았어?”
“오가다 현수한테 들었습니다. 그때 좀 웃겼습니다. 아, 비웃거나 그런 건 아니고요. 그냥…… 부장님이 히어로잖아요. 저희한테는 부장님이 아이언맨이고, 배트맨이고, 그랬거든요.”
히어로라고.
일에만 몰두해 로봇 소리를 듣던 정해진이 그렇게 말한다.
NBSC도 없던 나를, 영웅이라 생각했었다고.
“부장님. 제가 여기 말고 다른 회사에 다녀본 건 아니고, 여기서 인간관계가 좋지도 않지만, 친구는 있습니다.”
“그야, 당연히 있겠지. 정 과장 사람 좋잖아.”
“하하. 그렇게 봐주시는 분이 부장님 말고는 없었죠. 저는 그냥 일할 땐 일만 하자 이런 마인드였는데, 어느새 팀에서 외톨이가 돼 있더라고요. 아무튼요. 제 친구들도 직장 다니고 해서 가끔 부장님 얘기를 해줬습니다. 애들이 넋을 놓고 듣네요? 그럼 저는 괜히 제 어깨가 치솟아가지고, 신이 나서 또 자랑하고 그러죠. 그러면 화를 냅니다. 자기 목 걸고 부하 커버쳐주는 부장이 세상에 어디 있냐고, MSG가 분명하다고. 그런 분이십니다. 라인 하나 안 타고 이 팀 저 팀 도와주시면서도 팀원들 승진은 또 살뜰하게 챙기셨죠. 다들 기획팀 가고 싶어서 난리였습니다. 그러니까 실세가 아닐 수가 있나요.”
“그건, 실세와는 좀 다른 게 아닐까?”
“같을걸요? 사실상 프리월드 전체가 다 부장님 라인이었어요. 그렇잖습니까. 부장님한테 밉보일 일을 어떻게 하겠어요. 만약에 저 사람한테 미움 받으면, 내가 빌런이 될 것만 같은데. 같은 공간에서 일하고 있다는 게 꿈만 같았는데.”
“제가 지금 그런데! 이게 바로 정해진 이치라는 거겠죠?”
기운을 회복한 진대수가 다시금 이름 드립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번엔 무안해지는 일이 없었다.
정해진도 못 말리겠다는 듯 웃어버리더라.
“하하…… 사람 보는 눈은 있는 친구네요.”
“이거 참. 다들 날 좋게 봐준 모양이야. 민망하네.”
“제가 더 민망합니다. 설마 모르고 계실 줄은 몰랐죠. 의도하고 하신 건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감은 잡으셨을 줄 알았는데. 부장님 혹시 복직시위 얘기도 못 들으셨습니까?”
“……뭐? 이런. 그건 내가 하지 말라고 했는데.”
“예 뭐, 안 하긴 했습니다. 유 차장님이랑 기획팀 사람들이랑 또 몇몇이랑 해서, 점심마다 밥 안 먹고 대표실 앞에 서 있었습니다. 간헐적 단식이죠.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서 있기만 했습니다. 업무시간 아니잖습니까? 그걸 갖고 자를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래서 저도 두 번인가 같이 갔었죠.”
“어휴……. 무슨 일은 없었어? 대표님 성격에…….”
“그냥 신경 끄시던데요? 쯧 하면서 못 본 척하시고.”
……그것도 참 별일이다.
그 사람 성격에 쯧 정도로 끝날 일이 아닌데.
정말로, 그도 일말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던 걸까.
이후 시간이 다 되어 엘리베이터 쪽으로 이동할 때는, 정해진이 내 옆으로 붙어서 작은 소리로 물었다.
“부장님. 민 차장이랑 잘 푸신 거 축하드립니다.”
“음…… 민 차장이랑 나, 정 과장이 보기엔 어땠어?”
“그야, 질투였죠. 자기는 못 하는 걸 하는 사람이 있으니 얼마나 부러웠겠어요. 전에 저 그거 봤는데. 민 차장 유지보수팀에 있을 때 말입니다. 그분이 기강 잡겠다고 애들 모아놓고 잡도리를 하고 있었잖아요? 옆 팀이다보니 구경하고 있었는데, 난장판이더라고요. 자기도 잘한 거 없으면서 그냥 화풀이 하는 거였는지, 애들 다 이런 표정…… 아시죠? 다들 이랬는데, 그때 부장님이 지나가시면서 한마디 하셨습니다.”
“이런. 내가 그랬나? 그럴 땐 끼어들면 안 되는 건데.”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이런 얘기였을 겁니다. 여러분 좀 잘해주지 그러셨어요. 점잖은 민 차장을 화나게 만들다니.”
“아…… 얼핏 기억이 난다.”
“문제는 그 뒤였죠. 딱 그거 한마디 하고 가셨는데, 애들이 바로 군기 들어가지고 죄송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민 차장이 한참 동안 떠들면서 강요했던 걸 겨우 5초? 그 안에 만드셨던 거죠. 그러니 뭐, 얼마나 질투가 났겠습니까?”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정해진의 인사를 받으며, 나는 내가 알지 못했던 회사의 이면을 생각했다.
그저 호구였다고 생각했다.
가족마저 도외시하고 청춘을 바친 회사에서 내쳐진 모자란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큰 인정을 받고 있었다.
어쩌면 스스로에게조차 선입견을 품고 있었던 걸지도.
당연한 일을 하는 것이니 누구에게도 큰 울림을 주지 못하리라고, 나는 내 멋대로 속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진단’을 올린 뒤로도 이 쉬운 진실에 접근하지 못했던 거라면……
그렇게 생각하니 괜히 마음이 짠했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마음이 가는 부하직원들을 챙기느라, 윗사람인 대표와 경력직 차장인 민원식에게는 올바른 시선을 주지 못했다.
처음부터 악한 사람이 어디 있으랴.
그들 역시 흐름에 떠밀려 사고하는 인간일 뿐이었다.
그 진심을 바라보지 못하고 그저 문제행동으로만 간주했다.
나 역시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지만, 상담사로서는 결코 갖지 말아야 할 마음이었다.
그렇게 또 하나의 선입견이 깨지고.
뭐가 그리 신이 나는지 조잘거리는 대수의 목소리 속에서, 나는 다시금 ‘관계’에 대해 생각했다.
82의 ‘관계’가 만든 게 오직 행복만은 아니었다.
내 시선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는, 때로 경외가 생기기도 하고, 때로 질시나 두려움이 생기기도 했다.
그건 능력치와는 무관한 메커니즘.
조직생활 속에서 모두가 겪을 수밖에 없는 인지부조화였다.
어쩌면 연구실의 원생들 역시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흐름 속에서 사고하고, 그 위에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자대와 타대라는 프레임으로 바라본 채로는 알 수 없는 마음들이 그 안에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그걸 그저 [정문의 일침]이라는 치트키로 돌파하려고 한 것은, 상담사로서 얼마나 모자란 발상이었던가.
그런 생각을 하며 6층에 발을 디뎠다.
그리고 한없이 익숙한 복도를 걸었다.
가산동에서 이전한 2013년부터 7년 동안 걸었던 길.
무수한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폐기하며, 수많은 직원들과 만나고 헤어지며 40대를 오롯이 보낸 곳이다.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시선이 모였다.
방송지원팀 사람들이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들이 동시에 허리를 숙여 보였다.
그 인사에 하나씩 답해주며 좀 더 걸어가자, 과거의 박대민에게 집과도 같았던 미래기획팀이 나왔다.
내 팀원들은 슬로건을 들고 있었다.
그새 어떻게 미리 준비를 했는지, 내 프로필사진과 이런저런 응원문구가 적힌 걸 들고 환호성을 보냈다.
그리고 민원식이 팀장실 문을 열었다.
약간은 못마땅하다는 투였지만, 내가 편히 들어올 수 있도록 문고리를 붙잡고 서 있었다.
“고맙습니다.”
“……뭘요. 큼. 계속 그러고들 서 있을 거야? 일들 해!”
민원식의 고함에도 분위기가 어두워지진 않았다.
하지만 정말 업무에 방해가 가면 안 되니, 바로 안으로 들어가 손님으로서 소파에 몸을 앉혔다.
그리고 어색한 표정으로 상석에 앉는 민원식을 바라봤다.
“민 팀장님.”
“음. 그렇게 부르시니까, 좀 이상한데.”
“업무차 만난 자리 아닙니까. 팀장을 팀장이라 불러야지요.”
“……뭐, 그러시든지요. 옆에는?”
“제 디렉터, 진대수라고 합니다. 방송 안팎으로 매니지먼트를 해주고 있는 친구라 동행했습니다.”
“아, 예. 알아서 하시고. 여기 계약서. 한두 번 해본 일도 아니실 테고, 설명은 필요 없겠죠?”
이쪽은 얘기가 빨라서 좋네.
굳이 판교까지 불러놓고 싸인이나 하고 가라는 태도가 우습긴 하지만, 그것 역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팀원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거겠지.
너희가 존경하는 옛 팀장을 이만큼은 배려하고 있다고. 그러니 나 좀 미워하지 말고 팀장으로 인정해달라고.
어차피 세부사항은 현수가 검토했을 게 분명하다.
훑지도 않고 사인한 뒤에, 나는 민원식의 마음을 바라봤다.
“민 팀장님. 일하는 동안, 혹시 내가 많이 미웠습니까?”
“뭐요? 거 뭐, 이런 자리에서 사적인 얘길.”
“그랬다면 미안합니다.”
민원식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리를 떨었다.
그러더니 마주 고개를 숙여 보였다.
“진짜, 사람 불편하게 만드시네. 예, 내가 잘못했습니다.”
“그러시라고 한 게 아닌데. 정말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아 예. 나도 정말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하하.”
“……다 됐으면 나가세요. 그 좋아하는 애들 보고 가시든가.”
“아쉽게도 바로 학교로 가봐야 됩니다.”
“학교……요?”
“예. 전에 얘기했던 건도 있고 해서, 메인모델로서 약력 한 줄 정도는 추가해뒀어요. 6월부터는 서울대 심리학과 석사 과정이라는 문구를 넣어도 될 것 같습니다.”
“예?! 방금…… 뭐라고요? 서울대 심리학과?”
민원식은 몹시 놀랐는지 손발을 함께 떨었다.
지인이라도 있는 건가 싶었는데, 말을 꺼내진 않더라.
굳이 캐묻지 않고 그쯤에서 일어섰다.
팀원들과 일일이 포옹하고 사무실을 나서려던 때에는, 유보원 차장이 복잡한 표정을 한 채 다가섰다.
살 빼겠다고 또 4층에서부터 계단으로 올라왔겠지.
그녀와도 포옹하며 귓속말을 건넸다.
“보원아. 시위 같은 거 하지 말라고 했잖아.”
“……아닌데요? 그냥, 단식이었죠. 시위는 아니고요.”
“하하. 고맙다. 그냥…… 다 고맙다.”
“……제가 더요. 자주 놀러 오세요. 진짜로.”
“그럴 수야 있나. 일로 와야지.”
유 차장은 그걸 거절이라고 받아들였는지 시무룩해졌다.
사실은 그게 아닌데.
이후 미디어팀과는 정말 일할 게 많아서 한 말이었는데.
하지만 그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해주진 않았다.
또 수다스레 형님 최고 간지 좔좔 같은 말을 하는 대수와 1층 로비에 나섰을 무렵.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듯한 진갑수 대표가 보였다.
나를 알아본 건 분명했는데, 말을 걸지는 않더라.
그저 쯧 하고 혀를 찬 뒤에 지나쳐 갔다.
나 역시 굳이 인사를 건네진 않았다.
그 대신 마음속으로만 말했다.
그간 독단적인 욕심쟁이라고 생각해서 미안했다고.
정말 독단적이었던 내 욕심들을 받아줘서, 고마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