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
11장 - 상담사와 대학 (3)
지도교수의 스타일을 분류한 인터넷 짤이 있다.
원래는 해외에서 유행한 카툰인데, 번역본의 퀄리티가 좋아 대학원생들을 중심으로 널리 퍼졌다고 한다.
그 분류는 총 9종으로, 달변가, 노예 주인, 반쯤 신, 통제광, 과학 오타쿠, 느긋한, 사이코, 구멍가게 주인, 떠오르는 별.
월요일이 되어 아침 일찍 찾아간 서울대에서, 나는 한효준이 개중 어디에 해당하는지 파악하려 애썼다.
그리고 실패했다.
한효준 교수는 그 모두에 해당됐으며 또 그 모두에 해당하지 않았다.
달변가인 동시에 명성으로는 신계의 존재고, 소탈해 보이면서도 뭔가를 시킬 때는 노예 부리듯이 했고, 느긋한 일면에도 불구하고 통제광처럼 모든 것을 파악하려 했다.
그래도 굳이 하나로 정의하자면……
사이코 같았다.
아무한테나 그런 건 아니겠지만.
“정신과 의사와 임상심리전문가, 상담심리사의 차이는?”
“정신과 의사는 병리의 진료와 약물 처방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진료과정이 짧고 단순해 심리 문제의 근원을 해결해주는 곳은 못 됩니다. 임상심리전문가는 마찬가지로 병원에서 만날 수 있으며, 주로 심리평가와 심리치료를 수행합니다. 문제행동이 있다고 진단될 때 추천할 수 있습니다. 상담심리사의 경우 좀 더 폭넓게 심리상담과 심리교육을 진행합니다. 평온한 환경에서 자신을 드러내게 함으로써 왜곡된 인지를 직면하게 만듭니다. 주로대인관계나 가족역동 속의 자존감 문제, 조직생활, 부부 갈등에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래? 진로 얘기는 왜 빼나?”
“그건, 더없이 조심해야 하는 분야라고 생각해서입니다. 청소년들의 경우 교내 진로상담센터나 청소년센터를 이용할 수 있으니 주력으로 두지 않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걸 왜 자네가 판단하나! 자네가 심리학회장이야?”
“……죄송합니다.”
약간의 사견이 들어갔다는 이유로 소리를 지르는가 하면.
“그런데 애들 진로 얘기 나온 건 터치했잖아? 왜 그랬나?”
“진로 그 자체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고민이라는 심리 속에서 사고의 진행과정을 파악해 맥을 짚어줬을 뿐입니다. 메타인지가 중요하다고 봤습니다.”
“흠. 맥을 짚었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오동통인가 하는 유저가 기상학 쪽을 파고 싶다고 했을 때 아이의 진로에 관심이 없는 부모와의 가족역동을 파헤친 것처럼?”
“파헤친 건 아니고…….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나치게 무관심하고 수더분한 부모와 통계가 더없이 중요한 기상학. 그 관계에서 부모를 무시하는 심리를 느꼈습니다.”
“채팅으로? 무슨 무당도 아니고…… 아무튼 그랬는데?”
“핵심은 그쪽이라고 봤습니다. 기상학자를 꿈꾸면서도 은연중에 불안감을 내비치는 게, 어쩌면 봉합되지 않은 가족과의 갈등 때문일지도 모르겠다고. 그래서 그 상처를 보듬어주려 애썼습니다. 다행히도 좋은 반응이 있었고요.”
“반응 얘기는 하지 마. 우연히 얻어걸린 걸로 평생 우려먹고 살 건가? 부정적 전이가 일어났으면 어쩔 뻔했어? 애가 자네를 더 이상 신뢰하지 못하게 됐으면, 어쩌려고 했냐고.”
“죄송합니다. 유념하겠습니다.”
“그런데 참…… 흐흐, 반응이 좋긴 했지? 다행이야. 계속 쪽지는 주고받고 있는 거지?”
“물론입니다.”
“좋아. 그렇게 해. 아니, 그렇게 하지 말고 그렇게 해.”
이해 못 할 변덕으로 혼자서 씩 웃기도 하고.
“어제 보니까 보육원 애들한테 스마트폰을 사줬나봐?”
“아…… 그 채팅도 보셨습니까?”
“일요일이라 느긋하게 쭉 훑어봤지. 난 교회 안 나가거든.”
“무교십니까?”
“내 종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기분이 어땠냐고.”
“……미안했습니다.”
“스마트폰을 주고 오는데, 미안했다?”
“고작 그것밖에 해줄 수 없어서요. 제 딸에겐 매주 10만원씩 용돈을 주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아이돌 앨범이 나오면 좀 더 주기도 하고요. 그런데 그 애들에겐, 부모가 아니니…….”
“아, 울지 말고 말해.”
“안 울었습니다.”
“얼굴이 울 것 같잖아. 그런 얼굴 보기 싫어. 아무튼, 애들이 귀찮게 굴진 않던가? 그 왜, 달라붙어서 뭐 사달라고…….”
“제가 그쪽으로는 잘 끊는 편이어서요.”
“그 얼굴로? 허허.”
그렇게 희한하다는 듯이 쳐다보며 웃기도 하고.
그때에는 마침 잘됐다 싶어서 넌지시 말을 꺼내봤다.
“교수님. 원생들과 함께 봉사활동을 나가보시면 어떨까요?”
“애들이랑? 허, 그런 귀찮은 짓을 왜 하나? 그럴 시간에 연구 하나라도 더 해야지. 애들도 아니고 말이야.”
“방금 애들이라고 부르셨잖습니까. 심리학과 진학한 것도 성적에 맞춰서 오는 경우가 많다고 하고, 대학원에 들어와 막연히 꿈꿔왔던 이상과 다른 현실을 마주해 고민하게 된 친구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경우라면 교수님과 함께 재능기부를 하며 동기부여에서 이점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흠…… 그래? 그냥 자네가 아끼는 애들한테 형 누나 만들어주고 싶은 거 아니고?”
“그야, 겸사겸사…….”
“허, 솔직하네. 흠. 나쁠 건 없겠어. 프로젝트만 정리가 되면 한번 추진해보지. 지금 진행하는 건이 꽤 중요해서…….”
속으로만 쾌재를 부르며 고개를 꾸벅여 보였다.
연구실로 이동하던 중에는, 사적인 질문을 하나 받았다.
“기부 말인데, 어디로 할 생각인가? 액수가 많이 쌓였잖아?”
“고민 중입니다. 우선은 보육원 후원에 집중할 생각입니다.”
“또 스마트폰 뿌리게?”
“그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요금이야 대납해주면 그만이긴 하지만, 발달심리 측면의 지도 없이 물품만 준다면 바람직한 반응이 나오리라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면?”
“사회에 진출하는 아이들에게 지원될 장학후원을 하고 싶은데, 고민이 많습니다. 규모와 실정에 맞게 조사해서 적절한 금액을 후원해야 하고, 그걸 잘 사용하는지 확인해야 하는데, 제가 여력이 없어서요. 공부에 집중해야 될 때라.”
“그렇지.”
“그래서 자선단체를 알아보는 중인데-”
“그런 데는 하지 마. 다 엉망이야. 믿을 데가 하나 없어.”
데인 적이라도 있는 건지 편협한 반응이었다.
다 그렇진 않을 거라고 믿지만, 일단은 되물어봤다.
“그럼 어떡합니까?”
“흠. 하나 만들지 그래?”
“예?”
“자네가 재단을 하나 차려. 그래서 깔끔하게 관리를 해.”
“방금 믿을 놈 하나 없다고…….”
“왜, 세금 세탁하게? 그렇게 치졸한 사람 같진 않은데.”
당황스럽긴 하지만 일리 있는 이야기였다.
정말 내가 재단을 만들어, 저소득층이나 갓 사회에 진출한 보육원 아이들을 고용해 자선사업을 한다면.
이중의 후원 효과가 나오는 동시에 리스크도 적다.
어떤 형태로 후원을 하든 공제가 될 거고.
어쩌면 최고의 해결책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재단다운 재단을 만들려면 거금이 필요한데, 그걸 위해서 돈을 모으려면 당장 약속한 기부를 할 수 없으니.
그래도 조언에 감사하는 의미에서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안 듣는 눈친데? 아무튼 믿고 쓸 만한 놈이 필요하면 말해. 교양 듣는 졸업반 애들 중에 괜찮은 애들 봐놨어.”
“아까 믿을 놈 하나 없다고…….”
“내 눈은 믿어도 돼. 자네 스카웃한 거 보면 모르나?”
물론 대단한 안목이라고는 생각한다.
인터넷 상담사로 활약하고 있는 나라곤 해도, 거기서 가능성을 보고 연구실에 받아준다는 게 어찌 쉬운 일이랴.
학과장이라 해도 주변에서 좋은 소리를 못 들을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 불러 부탁하는 공을 들인 것이다.
NBSC를 통해 무한한 가능성을 갖게 된 나를.
저서와 논문들의 높은 수준까지 포함해서, 안목 하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한효준이라는 교수는 믿을 만한 인물일까?
안목은 믿더라도 마음 쪽은 믿기가 어려웠다.
똑똑한 사람일수록 꿍꿍이가 많은 법이니.
그런 생각의 와중, 마침내 한효준이 연구실 문을 열었다.
“교수님! 벌써 나오셨습……?”
벌떡 일어나서 인사하던 원생의 눈이 날 보고 동그래진다.
토요일에 교수실에서 마주쳤던 김태민으로, 동 학부에서부터 쭉 올라왔다는 박사 2학기.
연구실 최고참으로서 랩장(Lab長)을 맡고 있다 했다.
그 외에도 네 명의 원생이 얼빠진 채 일어선다.
한효준이 타인을 데려오는 게 무척 드문 일인 모양이었다.
“인사들 해. 오늘부터 출근할 인턴, 박대민 선생이야.”
“아, 예?”
“특채야. 내가 스카웃했어. 당분간은 청강만 할 거고.”
“아…… 예. 저, 어디 해외에서 공부하시던 분인가요?”
“글쎄. 그런가?”
사정 뻔히 아는 한효준이 날 돌아본다.
어쩌자고 이렇게 대충 소개하는 건지 모르겠다.
혹시라도 박탈감을 주면 어떡하려고.
“안녕하십니까, 박대민입니다. 기업에서 퇴사해 심리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지도편달 부탁드립니다.”
“아…… 그러면 저, 과 선배님이십니까?”
“본교 컴퓨터공학부 출신입니다.”
“예? 어…… 와, 도움 되겠다.”
김태민이 의외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아시겠지만 우리가 통계가 진짜 중요하거든요. 지금까지는 선배들이 해왔던 폼에 맞춰서 좀 주먹구구식으로 해왔는데, 그런 걸 좀 도와주시면 훨씬 일이 수월해질 것 같은데.”
“아, 예.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한번 해보겠습니다.”
“기본부터 가르쳐야죠. 여기가 데이터사이언스 하는 덴가.”
그에 비해 여성 원생 한 명의 태도가 복잡했다.
혐오나 경멸은 없지만, 잔뜩 꺼리는 느낌.
교수실에서 본 사진과 매치해보면 그녀가 박혜진일 터였다.
이화여대 석사 뒤에 넘어온 박사 3학기랬지.
“열심히 하겠습니다.”
“반갑습니다. 우지현이에요.”
“태민 쌤이랑 성함이 비슷하신데요? 반가워요.”
“와우. 미남 분이 오셔서 분위기가 확 사네요. 반갑습니다.”
박혜진 옆자리의 여학생이 석사 1학기 우지현.
김태민 옆자리의 여학생은 석사 2학기 이현희.
그 옆의 능글맞은 남학생은 석사 3학기 송창호.
거기에 박사 1학기인 김지연을 포함해 박사 셋 석사 셋이 상담심리 랩의 현 구성원이며, 하반기에 석사 한 명을 더 뽑을 예정이라고 했다.
나야 곁다리로 들어가는 셈이지만, 결과적으로 2학기부터는 상담심리 전공 하나에 여덟 명이 매달리게 되는 셈.
지도교수인 한효준의 명성이 다시 한번 실감됐다.
그의 장난꾸러기 같은 면모 역시도.
“다들 반겨줘서 고마운데, 말들 조심해. 열 살 차이야.”
“흐엑? 진짭니까? 30대 후반이시라고요?”
송창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한효준 역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랑.”
“……예?”
“올해 마흔일곱이라고. 그래도 마인드가 젊으니까-”
“예에!?”
“하핫! 놀라기는. 다른 얘기는 알아서들 해. 이따 수업 들어가기 전까지 각자 하던 거 대민 씨한테 소개 좀 해주고.”
이후 김태민 분파에 둘러싸여서 각종 질문을 받아야 했다.
피부관리를 어떻게 했냐는 둥, 혹시 배우 했었냐는 둥.
프리TV 보는 사람이 없는 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다.
“세상에…… 말도 안 된다 진짜. 젊었을 땐 얼마나 잘생기셨던 거예요? 완전 날아다니셨겠다. 지금도 30대 초반 같은데.”
그렇게 중얼거리는 이현희에게 답해줄 말이 없었다.
사실 젊었을 때부터 일에 치여서 엉망이었는데.
생각만 한 채 어색하게 웃어주며, 연구실의 분위기를 살피기 위해 애썼다.
10평 이상의 제법 큰 공간의 센터에 긴 테이블이 있고, 김태민파가 좌측에, 박혜진파가 우측에 자리잡았다.
벽과 창의 구조를 보면 방 두 개를 합친 듯했다.
심리학 분야가 자연과학적인 연구도 일부 포함하고 있어 독립연구실이 많은 추세라곤 하지만, 규모가 과하다.
무수한 전문서적이 꽂힌 벽면의 서재들만 봐도.
한효준의 연구실적이 아니었다면 당장 방 빼야 했으리라.
그러나 원생들의 분위기는 그 명성에 어울리지 않았다.
김태민이 학부 출신인 송창호와 이현희를 데리고 주도를 하지만, 박혜진과 우지현은 호응하지 않는 모습.
척 보기에도 뭔가 문제가 있어 보였다.
개인적인 불화가 연구에 미치는 영향도 금세 알 수 있었다.
현행 프로젝트를 설명해주는 동안에 벌써 트러블이 보였다.
박사과정 선임들 중 김태민이 질적 연구를, 박혜진이 양적 연구를 주도한다고 했는데, 물과 기름처럼 섞이질 않았다.
“보세요. 여기서 이렇게 진행된 인터뷰들인데, 이걸 창호가 전반적으로 검수하고 설문 데이터랑 비교를 하는 겁니다.”
“거기서 자꾸 편향이 발생하고 있고요.”
“……지금 박 쌤한테 설명해드리는 중이잖아, 혜진아.”
“이름으로 부르지 말아줄래요, 김 쌤?”
“예 예. 방금 혜진 쌤이 얘기한 대로 이런 종류의 인터뷰 분석에는 연구자의 주관이 개입돼서 편향이 발생하기 쉬워요. 그런 문제들을 해소하기 위해서 질문 단계에서도 교수님 검수를 받았고, 이렇게 해석 때에도 가능한 기준에 맞춰서 진행을 하고 있죠. 창호가 그런 걸 정말 잘해요.”
“하핫. 대민 쌤, 제가 잘 알려드릴게요.”
“그리고 현희는 현장에서 아주 스페셜리스트고요.”
“에이…… 뭘 또 그렇게까지. 대민 쌤, 전 다음에 같이 나가게 되면 설명드릴게요. 여기서 말씀드리긴 어려워서.”
그런 상황을 보며 날 반기는 김태민파를 이해하게 됐다.
박혜진의 태클 때문에 지체되는 과정을, 컴공인인 내 솜씨를 활용해서 우회하려고 하는 느낌.
그렇지만 바로 그 부분에서 의혹이 생겼다.
박혜진이 임상심리학 석사로 넘어온 타대 출신, 우지현이 통계학과에서 넘어온 타과 출신이다.
나와 동질감이 큰 건 우지현 쪽일 터.
그런데 오히려 김태민이 날 반기고 박혜진이 꺼리고 있다.
단지 자대와 타대 출신의 갈등만이 아닌 듯했다.
대체 뭘까.
누군가가 학식이 부족해서 무시당하는 것 같진 않은데, 어째서 서로를 포용하지 못하는 걸까.
그 생각 중에 김지연이 출근했다.
상담 스케줄로 늦었으니 커피를 사오겠다며, 날 이끌었다.
웃는 얼굴 아래에 다소 수심이 엿보였다.
“후후. 여길 같이 걷고 있으니까 기분이 묘한데요? 환영해요, 박대민 선생님. 우리 랩 분위기는 어떤 것 같아요?”
“프로젝트의 핵심인 두 선임연구원이 대립각을 세우고 있더군요. 거기에 석사과정들 역시 동조하는 눈치고요.”
“와…… 바로 아시는구나.”
“왜 이렇게 된 건지요?”
“음, 그러게요. 꽤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 기조긴 해요. 저 같은 경우에는 석사 시작부터 수련이랑 병행해서 랩 분위기는 잘 모르겠어요. 다들 입을 꾹 닫고 있기도 하고.”
그 부분이 문제였구나.
아무래도 한효준이 적임자를 뽑은 것 같다.
“그랬군요. 이 상아탑에서 파벌이 갈렸다길래, 어떤 학문적인 관점의 차이 때문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는데.”
“어, 시작은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요. 하지만 결국은 감정싸움이죠. 이성적인 문제로 애들처럼 그럴 사람들은…… 휴. 변명하는 게 더 부끄럽네요. 혹시 실망하셨어요?”
“아뇨.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추천해주신 김 선생님이나 받아주신 한 교수님을 실망시키지 않을 수 있게 돼서요.”
“정말……요? 그렇게 바로 확신이 드세요? 골이 꽤 깊어요. 지현이는 몰라도, 다른 사람들은 앙금 있는 상태로 좁은 공간에서 계속 부딪쳤을 텐데, 감정이 얼마나 많이 쌓였겠어요? 그래서 저나 교수님이나 두 손 두 발 다 든 건데.”
“예. 하지만 저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난 주말의 방송을 통해 10 이상의 exp를 확보했지만, 이 연구실의 문제를 파악한 뒤에 사용하고자 아껴뒀다.
그렇지만 그럴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정문의 일침]이 깊은 골을 잇는 댐이 될 테니.
그게 참 묘한 기술이다.
비록 한 사람에 한해 한 번밖에 사용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지만, 그 한 번만큼은 반드시 대화의 계기를 마련해준다.
마음속 비밀을 이끌어내기에는 최적.
그걸 해소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또 다른 문제지만, 일단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는 데에는 이만 한 기술이 또 없었다.
“어느 정도 신뢰가 형성되면, 제가 알아내겠습니다. 그때 교수님과 논의해서 해소법을 찾아가면 될 것 같네요.”
“와…… 선생님은 참, 대단하세요. 방금 막 오셨을 뿐인데.”
“몇 안 되는 장기입니다. 그리고- 아. 시간이.”
“아, 벌써 이렇게 됐네. 수업 들어가셔야 되죠? 인지심리학? 교수님 커피 하나 사가세요. 어, 조교 것도. 저거랑 저거.”
김지연 덕에 교수와 조교가 좋아하는 커피를 들고 간 교실.
수업 2분전인 그곳에서, 나는 연예인이 되었다.
“어, 와, 와아! 꼰마!”
“응? 어, 어? 와 뭐야!”
“헐 대박!”
“진짜……? 레알?”
최대한 관심을 안 끌고자 뒷문으로 들어갔는데, 순식간에 전원이 돌아보며 하나같이 눈을 크게 떴다.
내가 아직 이럴 정도로 유명해진 상황은 아닌데.
이건 아마……
심리학과라서 그런 걸까?
“안녕하세요, 학생 여러분. 박대민이라고 합니다. 오늘부터 청강하게 됐습니다.”
“와! 미쳐 미쳐! 꼰마님! 저 완전 팬이에요!”
빠르게 주위를 둘러싼 학생들 사이.
빨간 머리를 올백으로 넘긴 스타일리시한 남학생 하나가, 내 손을 붙잡고 마구 흔들기 시작했다.
“아, 예. 고마워요. 반가워요.”
“와, 실화냐고 뭐냐고……! 저 준범장이에요!”
“아. 기억합니다. 종종 후원도 하셨던.”
“헐! 기억해주셨어! 영광입니다! 와 대박! 제가 애들한테 형님 다 전파시켰어요. 여기 애들 인제 다 형님 팬이거-”
“왜들 이렇게 소란스러운 거야?”
앞문으로 들어온 남자가 탁자를 두드리며 목소리를 높인다.
3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젊은 외모.
인지심리학 교수인 오기철일 터였다.
첫날부터 수업분위기를 망쳐 죄송한 심경이었는데,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어라? 내 형태 재인(pattern recognition)에 문제가 생긴 건가? 거기 혹시 꼰마님 아닙니까?”
……인지심리학 교수다운 인사였다.
때 아닌 대학생활이 참 파란만장할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