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진없는 상담사-21화 (21/200)

# 21

8장 - 목마른 상담사 (2)

11시에 방송을 마치고, 대수와 20분간 회의를 진행한 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선희 대리에게 연락했다.

[어! 박 부장님!]

“어, 우 대리- 아니지. 선희 씨.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전화했어.”

[네? 뭐가요?]

“뭐긴. 배너 말이야. 거기 올라간 덕분에 오늘 새 시청자가 많이 와줬어. 미안해. 나 때문에 무리했던 거지? 겨우 이틀 전에 만들어진 방송국 올려줄 자리가 아니었을 텐데.”

[……에이, 참. 그런 얘기 하려고 전화하셨어요? 네 시간 방송 하시고 피곤하시지도 않아요?]

“나야 뭐. 아니, 시간이 너무 늦었구나. 미안해, 선희 씨.”

[괜찮아요. 그리고 부장님, 저 이제 말단 사원 아니거든요? 라이브 배너 하나쯤은 재량으로 넣을 수 있어요. 그리고 고마워하실 일도 아니고요. 실검스타한테 이 정도 대우는 해드려야지! 누가 알아요? 좀 푸시해드리면 실검 또 올라가실지.]

말은 그렇게 하지만, 가망 없는 일임을 알고 있을 터였다.

다시 실검에 오르는 건 불가능하다.

톱스타들만큼은 아니지만 BJ들도 기본 검색량이 꽤 되니까.

“그래 그래. 그럼 고맙지도 미안하지도 않고, 다음에 성희랑 해서 소고기나, 아니면 참치회? 그런 거 한번 살게.”

[와! 저 참치회 좋…… 음. 그건 뭐 그때 생각해봐요.]

참치회를 좋아하지만 내 주머니 걱정을 해주는 모양이다.

그건 아마 오늘 방송을 봤기 때문이겠지.

처음부터는 아니고 퇴근한 이후부터 봤겠지만, 별사탕 수익을 기부하지 못해 안달 나 있다는 사실은 알게 됐으리라.

관련해서 옛 팀원들에게서도 많은 연락을 받았다.

개중 명현수 과장은 기부가 좋은 일이긴 하지만 수익 추이를 살펴보고 난 뒤에 정해도 늦지 않다고 설득했고.

송성희 대리는 아빠 짱 멋있어요 그런 소리들을 썼고.

그리고 특이하게도 민원식 차장이 또 문자를 보냈는데……

선한 사회를 위해 노력하시는 모습에 감명 받았다는 소리를 해서 황당해졌다.

이 사람은 갑자기 왜 내게 싹싹하게 구는 걸까.

70의 ‘진단’으로도 이해하기 어려워, 이번에도 씹었다.

그렇게 집에 돌아간 게 11시 30분쯤.

늦은 시각이지만, 아내도 딸도 잠들어 있을 시간은 아니다.

두 사람은 TV 앞에 앉은 채 눈인사를 건넸다.

곁으로 다가가니 딸애가 호기심에 찬 얼굴로 물었다.

“아빠 아빠, 걔 상담소 가?”

“어? 아, 아리아리? 그래, 내일 한번 가보려고.”

“히히. 웃기다.”

“그래? 뭐가?”

“아니 그냥. 우리 반에도 그런 찐따 있는데.”

“너어! 애들 따돌리고 그러는 거 아냐.”

아내가 옆에서 한 소리 하지만, 지수는 기죽지 않았다.

“아 내가 하는 거 아니거든? 애들이 걍 피하는 거야.”

“어쨌든 친구가 곤란에 처해 있는 건데, 모른 척하면 돼?”

“친구 아니거든? 찐따랑 내가 왜 친구야.”

“얘가 얘가! 너 그런 식으로-”

“여보. 괜찮아. 지수 나쁜 애 아니잖아.”

“어휴. 애 버릇 나빠져. 당신은 사람이 너무 좋아서 탈이야.”

그 말에는 큰 어폐가 있다.

사람이 너무 좋은 걸로 말하자면, 오히려 아내 쪽이니.

유복한 집안의 셋째 딸로 자라난 아내다.

곳간에서 인심 나온단 말이 있듯이, 그 시절 부잣집 아이들만 모인 사립 여중고에서 그녀는 좋은 기억만 쌓았다 했다.

그런 게 없는 요즘 애들의 문제는 이해하기 어려우리라.

그에 비해 나는, 아주 좋은 사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지수의 말 쪽에도 충분히 공감이 되니까.

내가 가해자나 피해자의 입장에 서본 적은 없지만, 흔하디흔한 공립 중고교에서 그런 일을 자주 목격한 바 있다.

경험을 통해서 확신하는 것이다.

한번 형성된 따돌림의 흐름을 개인이 돌릴 수는 없다.

연민을 느끼거나 영웅심에 도취돼 나서본들, 오히려 그 자신이 따돌림의 타겟이 될 뿐이다.

……사실 나는 몇 차례 영웅이 된 적이 있었다.

피해자였던 아이가 자신감을 갖도록 돕고 가해자들에게 유대감을 주입시켜, 학급의 왕따 문제를 해소했었다.

그건 정말 보람찬 기억.

몇 번이고 돌이켜 흐뭇해했던, 삶의 가장 멋진 순간들.

그러나 그건 아마도 높은 ‘관계’ 능력치의 소산일 터였다.

사실은 벼랑 위 외줄타기처럼 위험천만한 도전이었으리라.

내 딸에게 무모한 일을 강요하고 싶지는 않았다.

지수 학급에 따돌림 당하는 아이가 있다는 말을 듣고……

나는, 솔직히 그랬다.

그게 내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한심한 마음이다.

주변의 방관이 가해와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저 내 아이가 안전하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상반된 마음으로 멍하니 딸애를 바라봤다.

“……아빠 왜 보는데?”

“어? 아, 아니야.”

“아빠도 나 혼낼 거야?”

“하하. 지수가 그 친구를 괴롭혔다고 하면 혼냈겠지.”

“나 안 괴롭혔어.”

“그래. 그거면 됐어.”

“진짜야. 걍 무시만 하는 거야. 애가 찐따라서 막 이상하게 하고 다닌다니까? 그래도 욕 안 하고 그냥 있었어.”

“그래. 우리 지수, 착하네.”

“……아 짜증나. 나 잘 거야.”

지수가 방으로 들어간 뒤에야 얼떨떨하게 고개를 돌렸다.

아내가 한숨을 내쉬며 내 무릎에 손을 얹더라.

“여보. 내가 왜 당신한테 혼내는 역 안 맡기는지 알아?”

“어, 내가 집에 있는 시간이 짧았으니까, 그 시간이나마 지수랑 잘 지냈으면 싶었던 거잖아?”

“아냐. 그 얼굴 때문이야. 잘못은 애가 했는데 자기가 더 우울해하고 있으니 원……. 당신, 지수가 친구 뺨 때려서 학폭위 열린 날 기억나? 그때 나 아파서 당신이 반차 냈잖아. 그날 지수가 집에 와서 엉엉 울더라.”

물론 그날은 기억한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애 초등학교에 갔던 날이니.

그렇지만 지수가 울었다는 건 금시초문이었다.

“그랬어? 내가 혼을 못 냈던 것 같은데. 그때 지수가 아마 가족사진 보여줬다가 ‘너네 아빠 웃기게 생겼다’는 말 듣고 그랬을 거야. 그걸 내가 어떻게 혼내겠어.”

“……혼내지도 않았는데 애가 혼자 혼이 났지. 자주 보지도 못하는 바쁜 아빠가 학교 와서 무릎 꿇고 싹싹 빌었는데, 집에 데려다주는 내내 혼은 안 내고 아빠가 미안하다 이 소리만 했으니까. 인간아, 혼을 내. 그래야 애가 안심을 하지.”

“혼을 내는데, 안심을 한다고?”

“그래. 그게 애들이 아는 세상이잖아. 혼나야 되는 상황인데 부모가 혼을 안 내면, 거기서 오히려 괴리감을 느끼는 거야. 나한테 대고 아빠가 나 싫어해 그러면서 얼마나 울었는데.”

아, 그런 뜻인가.

예상한 반응이 나오지 않자 버림받을까 두려워했다는 얘기.

지금에 이르러선 그 마음을 얼추 알 것도 같았다.

“방금도 그런 거였구나. 혼나기 싫지만 혼나고 싶었던.”

“그래. 그러니까 가서 혼내고 와.”

“그래도…… 혼낼 일은 아닌데.”

“그럼 가서 확실하게 설명을 해주든가. 왜 말을 안 해?”

“어…… 내가 가면, 문 열어줄까?”

“당연하지. 빨리 안 가?”

내 아내는 참 현명하다.

굳게 닫힌 성문 같던 방문은 쉽게 열렸고, 보란 듯이 팔짱 끼고 서 있는 모습이지만, 딸애의 눈매는 유순했다.

“왜. 나 잘 거야.”

“지수야. 아빠가 솔직하게 얘기할게. 아빠는, 괴롭힘 당하는 애들을 내버려두는 지수가 나쁘다고 생각했어.”

“……아니, 나 잘못한 거 아니거든? 애들 다-”

“그리고 아빠는, 지수가 그렇게 해줘서 너무 고마워. 따돌림 당하지 않아줘서 너무 고마워. 내 딸이 슬픈 일 겪지 않아서 행복해. 그래서 뭐라고 말을 못 한 거야. 부끄러워서. 남들은 어떻게 되든 우리 지수만 생각했던 게 부끄러워서.”

“……뭐라는 거야. 아빠 짜증나.”

어색함과 불편함이 뒤섞인 얼굴의 한 꺼풀 아래.

딸의 마음에 안도감과 행복감이 깃드는 것이 보였다.

그 직후에 효과음이 들렸는데……

일단은 대화부터 마무리해야지.

“그냥, 걔 괴롭히는 애들한테, 나중에 아빠 방송 보라고 말해줄래? 아니다. 그냥 아빠가 다음에 피자 사서 갈게.”

“아 진짜? 피자 어떤 피자?”

“친구들이 어떤 거 좋아할까?”

“와규 스테이크 씨푸드…… 아니, 그냥 비싼 걸로 다 사줘.”

아빠가 사온 피자로 친구들한테 콧대 세울 생각에 들뜬 아이를 침대에 눕혀놓고, 방을 나서며 생각했다.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은 내 아내와 내 딸.

그들에게 힘든 일을 강요하고 싶지는 않다.

치사하고 비겁하더라도 평생 행복하게만 살았으면 좋겠다.

그러니 정의롭고 당당하되 고된 일은, 내가 해야 한다.

그간 아내가 착한 마음도 내리누르고 혼내는 역을 맡아왔듯, 나 역시 상담사로서 두 사람의 세상을 바꿔줘야 한다.

그렇게 다짐하는 내게 아내가 씩 웃어 보였다.

“당신, 이제 진짜 아빠 같네.”

“어? 장인어른?”

“뭐? 아니, 뭔 소리야. 그게 아니라 잘했다고. 좋은 아빠야, 당신. 바쁠 때는 몰랐지만.”

바쁜 것도 바쁜 것이었지만, 좋은 아빠도 아니었을 것이다.

NBSC를 통해서 그간 20의 ‘진단’과 10의 ‘화술’을 올렸다.

그 이전의 박대민이었다면, 딸애의 마음을 이해하지도, 그 불안감을 해소해주지도 못했을 터였다.

그러니 지금도 해야 할 일은 명백하다.

나는 눈을 돌려 상태창을 확인했다.

「 성명 : 박대민 / 성별 : 남 / 연령 : 47

직업 : 상담사 Lv.6 (10/10)

관계 : 82 / 진단 : 70 / 화술 : 70 / 외모 : 65

‘경청은 상담사를 성장시켜요’ (94289/100000)

‘더욱 많은 내담자를 만나봐요’ (15821/16000)

‘내담자를 행복하게 해주세요’ (200/210) 」

내담자 퀘스트가 네 차례나 완수된 건, 진대수 덕분.

아마 ‘실검스타’나 ‘꼰대마스터’ 같은 자극적인 표현에 끌려서 들어왔을 그들이, 감사하게도 이내 내담자로 전환됐다.

메인배너에 올라가지 못했더라면 단번에 4천이 넘는 내담자가 증가하진 않았을 터였다.

거기에 방금 딸애와의 대화로 행복 퀘스트의 달성치가 200이 됐다.

거기서도 4exp를 벌게 된 셈.

다시금 레벨업을 하거나 새 기술을 살 수 있는 시점이다.

그 행복 퀘스트가 지수 이전까지 199에 이르렀던 건……

그건 정말 의외였다.

아리아리의 상담을 마치고 상담소 방문 일정을 얘기하는 사이에만, 무려 열다섯 명이 행복해졌으니.

상당히 민감한 고민이었다.

그렇기에 그저 듣기만 하고 어떤 대책도 세우지 못했다.

내 돈으로 상담소에 데려가겠다고 공지하긴 했지만, 가해자가 바뀌지 않는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랴.

나는 분명 거기서 다운이 쭉쭉 늘어나리라 확신했었다.

그랬는데……

보람이 야방 때를 제외하면 가장 높은 달성률이 나왔다.

당시에는 정말 당황했지만, 지금은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됐던 거겠지.

어쩌면 아리아리와 비슷한 처지를 경험했던 시청자들이 있었을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도 내 선택이 그릇되지는 않았던 덕분이리라.

인터넷 유머 게시물처럼 조폭들을 끌고 가 가해자들을 겁주지 않는 이상, 왕따는 외인이 해결해줄 수 없는 문제다.

시청자들도 그 점을 알기에 내 대응에 호응해줬을 것이다.

해결하겠답시고 나서기보다는 그저 공감해주는 것.

어쩌면 꼰대도 마스터도 나서지 않은 그 상담이야말로, 그간 내가 해왔던 말들 중 가장 적절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거기에 머무르고 싶지는 않다.

잘 들어주는 것까지가 상담사의 역할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보다 현실적인 대책을 도출해내고 싶다.

학교라는 정글에 딸을 보내야 하는 아빠로서.

그렇기에 exp의 사용은 잠시 미뤄두기로 했다.

내일 나는 진짜 상담을 견학하게 된다.

그를 통해서 내가 어떻게 성장해야 할지 확인해볼 셈이다.

잘 보고 고민하면 분명 알 수 있으리라.

그 사람은, 분명 좋은 상담사 같았으니까.

*

아리아리는 강동구에 사는 중학교 2학년생이었다.

딸애보다 조금 큰 키에 피부가 새하얀 아이.

다른 학생들에게 들킬까 중간지점쯤으로 불러냈던 건데……

그 본명을 듣고는 얼이 빠지고 말았다.

“너…… 이름을 닉네임에 넣었던 거야?”

“네에!”

“‘아리아리’를 보고 누군가 너인 걸 알아봤으면 어떡해?”

“아…… 에? 아…… 어떡해…….”

‘이아리’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웅얼거린다.

한숨을 참으며 어깨를 토닥여줬다.

“괜찮아. 아저씨가 다음 방송에서 다른 이름을 진짜 이름처럼 소개할게. 혹시 본 친구가 있더라도 아니었구나 할 거야.”

“아 진짜요? 와…… 아저씨 멋있어요!”

“고맙다. 자, 이쪽으로 타. 가면서 간식 좀 먹고 갈까?”

“아 네! 간식 간식!”

좋게 말하면 순박한 아이였다.

그러고 싶진 않지만, 나쁘게 말하자면, 생각이 없는 아이고.

자기 이름을 닉네임으로 달고서도 별 걱정을 하지 않았던 점도 그렇고, 낯선 BJ를 쉽게 믿고 따라오는 점도 그렇고.

천진난만하고 순진무구한 아이였다.

어쩌면 그게 이아리의 고난을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른들에겐 환영받을 만한 성격이지만, 또래들 사이에선 그게 아닐 테니.

여학생들의 학교생활이란 ‘소규모 그룹으로 무리 짓는 일’로 정의된다고 한다.

남학생들은 인원을 채워야 하는 스포츠나 게임 등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대다수가 주류 그룹을 이루는 반면, 상대적으로 정적인 여학생들 사이에선 그럴 이유가 없는 것.

그렇기에 그룹 구성원은 서너 명 정도가 되고, 초반에 거기 끼지 못한 아이가 일차적으로 따돌림의 대상이 된다고 했다.

하지만 정말 심한 따돌림은 주로 그룹 안에서 비롯된다고.

그런 의미에서 이아리는 걸려들기 쉬운 타겟이었다.

예쁘장한 얼굴은 초면에 호감을 주기 쉽다.

그러나 밝지만 눈치 없는 성격은, 예민한 시기의 동급생들을 저도 모르게 상처 입혀 적으로 만들기 쉬울 터였다.

그게 결코 이아리의 잘못은 아니다.

조금만 여유를 갖고 바라본다면 좋은 아이인 게 명백하니.

아이들로부터 소통의 시간을 앗아간 현대사회야말로 만악의 근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아니, 아니지. 오늘 나는 상담사가 아니다.

NBSC의 ‘진단’은 잊고, 진짜 상담을 배워야 한다.

사전에 선입견을 만들어서야 학습이 어려울 터였다.

그렇기에 다른 얘기 없이 역 앞 분식집으로 가서 신나게 먹고 떠든 뒤, 마포구의 ‘연 심리상담연구소’로 향했다.

그곳이야말로 박대민의 노후 도전이 시작된 장소.

생애 처음으로 김지연이라는 상담심리사를 만나고, 그 직후에 NBSC를 얻어 새로운 길을 걷게 됐다.

그래서 첫 수련의 예약 역시 그곳에 잡아뒀다.

사실은, 처음에는 의심도 했던 바 있다.

어쩌면 그녀가 내게 뭔가를 심어준 게 아닐까 하고.

하지만 그렇게 보기엔 첫 만남 당시의 인상이 선명했다.

아이돌그룹 HIT와 선대인(先大人)을 이야기하며 눈물짓던 그녀가 비밀스런 초능력자일 것 같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다른 계기가 있었던 거겠지.

단지 처음으로 ‘내담자의 입장’을 경험한 이곳에서 그것이 드러났을 뿐인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며 이아리가 탄 조수석 문을 열어줬다.

“아저씨가 미리 약속하는 건데, 오늘 상담 진행하면서 들은 얘기들은 아저씨 혼자만 알고 평생 얘기하지 않을게. 실력이 부족해서 다른 분께 맡기지만, 아저씨도 마음만은 상담사야. 비밀유지는 철저하게 할게. 맹세할게.”

“헤헤, 네에.”

“그리고 여기 들어가면, 일단은 아저씨 조카라고 하자. 안 그러면 상담사 언니가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잖아?”

“네에. 인제 들어가요?”

“그래…… 그러자.”

그런 이야기는, 사실 할 필요가 없었다.

상담소에 들어서자마자 리셉션 직원과 뭔가를 논의하고 있던 김지연 상담사와 마주쳤다.

그리고 다른 설명을 하기도 전에 그녀가 날 잡아끌었다.

“박대민 씨, 진짜 오셨네요? 뭐예요 진짜.”

“예? 왜 그러시는지……? 상담 예약하고 왔을 뿐입니다.”

“에이. 꼰마님이시잖아요. 아직도 모를 줄 아셨어요?”

설마 그녀가 인방을 시청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기에 몹시 당황했는데, 거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방송에서 저희 상담소 추천하셨다면서요? 내담자 한 분이 인방도 보시는데, 아마 제 상담 못 믿고 이런저런 상담 방송도 보고 하셨던 것 같은데, 꼰마님 얘기 해주시더라고요. 궁금해서 방송 찾아보게 됐어요. 그랬는데 박대민 씨였죠.”

“아…… 그랬군요. 불편을 드렸다면 미안해요.”

“불편이 아니라, 왜 그러셨어요? 상담사시면서 내담을.”

“……제가 상담사는 못 됩니다. 당시엔 전혀 아니었고요.”

“네? 어…… 잘하시던데요? 배우신 거잖아요?”

“처음부터 보지 못하셨군요. 전에 상담해주셨던 대로, 은퇴 뒤에 다른 진로를 찾았을 뿐입니다. 상담은 독학이에요.”

“독학사(독학학위제 학사)요?”

“아니요, 아직 독학만 하고 있습니다. 학점은행제를 이용해 학사 학위를 따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김지연은 믿어도 되나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스운 일이지만, 그 반응에 안도감이 들었다.

내가 방송에서 진행한 상담들이 상담사들의 규범에 크게 어긋나지는 않았다는 방증이기에.

그리고 김지연이 곧 풋 웃었다.

“뭐야…… 괜히 긴장했네요. 전 또, 교수님이 저 테스트하려고 보내신 자객이셨나 했어요.”

“자객이요?”

“아, 그냥 저희끼리 하는 얘기예요. 저희 교수님이 좀 까다로우셔서 제자 개원하면 지인 분 보내곤 하시거든요. 하긴 뭐, 이젠 박사과정인데 또 그러시진 않겠지. 죄송해요.”

이해하기 어려운 문화였지만, 교수들은 원래 독특한 법이다.

그리고 김지연 역시 내 입장에서는 독특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니까…… 정말 그냥 상담 받으러 오셨다는 거구나. 그렇죠? 안쓰러운 시청자 데리고, 바쁜 시간 쪼개서.”

“바쁘진 않습니다. 네 시간 방송이 전부라서요.”

“그러세요? 참. 얼굴만 동안이신 줄 알았는데, 마음까지.”

“예?”

“어…… 멋져지셨다고요. 동심으로 돌아가신 것 같아요.”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김지연은 조금 서글프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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