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혁명가, 세상을 박살내다 (1)
“결국, 이렇게 됐네.”
센트럴 사령부와 아크의 메타휴먼들은 이미 궤멸되었다.
그러나 광기는 알마티 쪽 메타휴먼들과 이레귤러들을 향했다.
보니와 프랑켄은 순양함으로 변형된 포트리스 조종실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보니…….”
“코카서스 놈들, 지금 자신들이 어떤 상황인지 알고 있을까?”
보니와 프랑켄은 이미 셸터의 함대를 이용해 센트럴 순양함들을 모조리 파괴했고, 포대와 전차들 역시 전부 무력화시켰다.
이 전쟁터에 포트리스를 막을 수 있는 억지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이온캐논 한 발이면 충분해.’
단 한 발이면 메타휴먼을 향해 달려드는 광신도들을 모조리 증발시킬 수 있다.
오빠의 죽음을 모욕하는 쓰레기들을 단번에 해치워 버릴 수 있다.
— 어쩔 생각이지?
통신기를 통해 알마티의 수비를 맡은 강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글쎄. 고민 중이야.”
당장이라도 전쟁을 끝낼 수 있다.
단 한 마디면 곧장 이온캐논이 발사될 것이다.
— 자네들은 개입하지 말게.
강필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우리가 왜 그래야 하지?”
— 너무나도 오랫동안 축적된 차별과 편견이네. 자네들이 그 엄청난 화력을 동원해 전투를 끝낸다 해도, 결국 다시 이런 일이 벌어질 거네.
프랑켄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코카서스는 서장님 같은 능력자들도 적대하고 있습니다.”
— 알고 있네.
“우리들, 곧 기능이 정지될 거야.”
보니의 목소리가 조그맣게 떨렸다.
보니와 프랑켄은 물론 알렉세이 딘조차도 붉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포트리스도 기능이 멈추겠지.”
포트리스는 애당초 그렇게 설계된 기체였다.
조종할 사람이 사라진다면, 포트리스는 다시금 멤브레인 속에 감춰진 채 잠들 것이다.
“코카서스를 세상에서 지워 버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프랑켄이 말을 끝맺었다.
— 프랑켄, 메타휴먼들을 파괴하고 있는 자들이 전부 코카서스는 아니라네. 그들 중에는 바로 어제까지 우리와 함께 싸우던 녀석들도 포함되어 있지.
“…….”
— 강력한 힘으로, 파괴 행위로 모든 갈등을 억누르려 한다면, 그건 곧 또 다른 센트럴에 불과해.
보니와 프랑켄은 물끄러미 조종대 홀로그램 위의 선택지들을 바라보았다.
단번에 전쟁을 끝낼 수 있는 선택지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러나 둘은 결국 그 선택을 하지 못했다.
— 전 대륙에 협상장의 대화 내용을 전송했네. 내일쯤이면 12개 구역에서 병력과 함께 협상단이 도착하겠지. 어렵고 힘들겠지만, 대화와 타협을 통해서 해결해야 하네.
“서장님은 경찰보다 정치에 더 어울리시는 거 같습니다.”
프랑켄의 말에 강필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 질 나쁜 농담이군, 프랑켄. 힘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다가 모든 걸 망친 적이 있을 뿐이야.
프랑켄 역시 강필이 겪은 일을 잘 알고 있었다.
강필은 무모하게 50구역을 통제하려 했고, 그 결과 50구역 LAPD가 사실상 붕괴했다.
“서장님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 고맙네.
“…협상이 길어지는 모양인데.”
보니의 목소리에 프랑켄의 시선이 협상장 쪽으로 향했다.
협상장 외부에서는 실드 때문에 내부를 확인할 수 없다.
협상장으로부터의 통신은 이미 끊어진 지 오래였다.
바로 그때, 프랑켄의 눈에 묘한 광경이 비쳤다.
“저건……?”
전쟁터 한복판, 성직자의 복장을 갖춰 입은 노인이 나무 지팡이를 든 채 천천히 협상장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보니를 만나기 위해 대륙 남부에 갔을 때 만났던 바로 그 노인이었다.
* * *
협상장 안에서는 흉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알마티 측 협상단 다섯 명 중 한 명이 사망했고, 두 명이 배신했다.
협상장의 실드는 그 어떤 충격으로도 깨지지 않으며, 오로지 내부에서만 부술 수 있다.
즉, 이 안에서 그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외부에서는 개입할 수 없었다.
“이거야 원.”
아크가 준비해 온 메타휴먼들은 이미 괴멸되었다.
센트럴 병사들 역시 전부 돌아섰다.
실드가 해제된다면 모든 병력이 아크와 닐스를 노릴 것이다.
아크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설마, 너희가 이겼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전까지 겉으로나마 예의를 차리던 아크가 마침내 본모습을 드러내며 히죽 웃어 보였다.
“한심해. 정말 한심하다고, 너희들. 나의 제안은 말이지, 너희에게 더없는 혜택이야.”
아크의 곁을 지키고 선 닐스 이외에 나머지 모두가 싸늘한 시선으로 그런 아크를 노려보고 있었다.
“신태일, 당신은 알잖아? 이 대륙이 얼마나 낙후되었는지 말이야.”
“…….”
“닐스, 네 입으로 말해 봐. 저 밖의 인간들이 쥐고 있는 무기가, 이 대륙의 문명이 얼마나 구시대적인지 말이야.”
장전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권총과 기능 고장이 잦은 소총, 투박하기 이를 데 없는 납탄.
낡아빠진 기차와 삐걱거리는 바이크, 잡음 섞인 통신망.
그 모든 것들은 태일이 살던 대륙에 비해 최소 수십 년 이상 뒤처져 있었다.
“아니, 두 사람도 진짜 ‘기술’이 뭔지 몰라. 정말 압도적인 힘이 뭔지 모른다고. 그래, 누나는 알지? 직접 경험했으니까.”
아크가 세연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씩 웃어 보였다.
세연은 경멸 섞인 눈으로 그런 아크를 노려볼 뿐이었다.
“그만.”
태일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아크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그와 동시에 닐스가 아크의 앞에 서서 태일을 막아섰다.
“이쪽 세계는 그냥 내버려 둬.”
“내버려 두라고?”
아크가 킬킬거리며 웃더니 독기에 찬 눈으로 태일을 노려보았다.
“신태일, 당신은 여전히 아무것도 몰라. 혁명군이니, 뭐니 하며 우리에게 맞설 때부터 그랬지. 당신의 적이 얼마나 엄청난 자들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어.”
태일은 아크가 독기 어린 말을 쏟아 내는 와중에 주머니 속에서 담배를 꺼내 들었다.
결정을 망설일 때, 마음을 정하지 못했을 때 태일은 담배를 물곤 했다.
“우리의 손으로 부순 세계가 몇 개나 되는지 알아?”
어째서인지 아크의 목소리가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에 섞인 건 두려움, 아니, 공포였다.
“그 세계로부터 모은 에너지가 얼마나 엄청난 규모인지 감히 너희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아크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중얼거리는 사이, 발밑에서 검은 무언가가 뿜어져 나왔다.
그와 함께 닐스의 주변으로 흙모래가 몰려들고 있었다.
“이, 이런……!”
둘의 폭주를 눈치챈 유키와 렌야가 뒷걸음질 치며 뒤로 물러났다.
한편, 태일과 알렉세이 딘, 그리고 세연은 도리어 앞으로 나섰다.
“조심하게!”
“시장님, 뒤로 물러서세요. 위험합니다.”
안도가 루키우스를 뒤로 잡아끌었고, 마침내 협상장 한가운데 다섯의 능력자가 대치했다.
“난 당신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그렇게 뛰어난 능력을 지녔으면서 왜 그렇게 미련하게 굴지?”
아크가 눈을 치켜뜨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의 주먹 끝에서 검은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밖을 봐. 이 와중에도 선동당하는 꼴을 보란 말이야.”
협상장 바깥에서는 ‘인간을 위하여, 대륙을 위하여’라는 구호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저 인형에 불과한 녀석들을 화풀이로 때려 부수고 있을 뿐이야.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저 두려워하고, 혐오하는 거지.”
파스스스…….
검게 피어오른 안개가 순식간에 협상장 전체를 감쌌다.
“누가 자신들을 진정으로 위하는지조차 알지 못한단 말이야. 저런 자들에게는 그저 제때 사료만 주면 충분해.”
“할 말은 다 했나?”
태일은 어둠 속에서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뚜벅, 뚜벅.
“크르르르륵!!”
어둠 속에서 흙으로 빚어진 사자들이 태일을 향해 덮쳐 온다.
그러나 태일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온몸에 스파크를 휘감았다.
뚜벅, 뚜벅, 뚜벅.
스파크의 불빛이 어둠을 밝히는 가운데 온 사방에서 넝쿨이 피어올라 사자들의 몸을 감싼다.
“크라아아!!”
파사사삭!!
넝쿨에 휘감긴 모래 사자들은 금세 형태를 잃은 채 우그러졌고, 그 자리에 하얀 꽃이 피어올랐다.
한편, 후방에서는 돌과 나뭇가지들로 간이 방벽이 제작되고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방벽들은 각각 루키우스와 안도, 유키와 렌야를 보호했다.
태일은 딘과 세연에게 뒤를 맡긴 채 아크를 향해 걸어 나갔다.
째깍, 째깍.
아크의 귓가에 회중시계의 초침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닐스는 어둠과 빛이 교차하는 가운데 긴장 어린 눈으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이건… 쉽지 않겠어.’
태일뿐 아니라 알렉세이 딘과 세연까지 있다.
번개의 소울을 다루는 태일.
제작자의 능력을 지닌 알렉세이 딘.
갖가지 식물을 키워 내는 세연.
혁명군 활동 당시 같은 간부였지만, 그 세 사람만큼은 다른 차원에 있는 인물들이었다.
거대한 소울 에너지를 손에 넣었다 해도, 그 셋을 상대한다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심지어 조금 전부터 커널의 파괴로 인해 체내에 축적되어 있던 소울에너지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딘과 세연만큼은 닐스에 비해 현저히 적은 양의 에너지를 갖고 있을 게 분명했다.
‘시간을 끌어야 해.’
파츠츠츠츠!
“크읏!”
닐스는 황급히 뒷걸음질 치며 다리 밑으로 뱀처럼 다가오는 넝쿨을 피했다.
그 사이, 닐스는 모래 사자들을 만들어 넝쿨의 시작점, 세연을 추적했다.
파삭, 파사사삭!!
그러나 온 사방에서 기척이 느껴졌고, 닐스는 다시금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닐스, 사실 난 꽤 일찍부터 알고 있었어.”
온 사방에서 세연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네가 첩자라는 사실도, 결국 우리를 배신할 거라는 사실도.”
닐스는 입술을 깨물며 곳곳에 피어나는 묘목들을 흙모래로 덮어 버렸다.
휘둘려서는 안 된다.
시간을 더 끌어야 한다.
“그래도 너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어. 네가 어떤 경위로 혁명군에 들어왔든, 너 자신은 우리와 함께하고 싶어 했으니까.”
“…개소리하지 마!”
닐스가 더는 참지 못하고 고함을 내질렀다.
더는 세연의 말을 듣고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고함을 지른 직후, 닐스의 팔과 다리에서 웬 식물이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닐스의 몸뚱어리에 자리 잡은 식물은 금세 싹을 틔웠고, 곧이어 꽃을 피워 냈다.
순식간에 만개한 꽃에서는 색색의 꽃잎이 휘날렸다.
“끄아아아아!!”
닐스는 석장을 휘두르며 주변에 환상처럼 피어난 꽃잎들을 마구 쳐 냈다.
흙모래가 닐스의 몸을 중심으로 회전하면서 방벽을 만들어 냈지만, 그 방벽 틈새에서도 꽃은 기어코 뿌리를 내려 균열을 만들었다.
파사사사…….
자그마한 꽃들이, 연약한 넝쿨들이, 이제 막 피어난 묘목들이 닐스가 만든 흙사자와 방벽들을 연달아 부수었다.
흙모래로 뒤덮어도, 모래 속에 파묻어도 식물들은 기어코 푸른 싹을 틔워 냈고, 닐스의 주변을 겹겹이 감쌌다.
“멈춰, 멈추란 말이야!!”
닐스는 이성을 잃은 채 석장을 마구 휘둘렀다.
그러나 닐스는 점차 꽃가루와 향에 취했고, 몸이 마비되어 굳어 가기 시작했다.
‘나의 에너지가……!’
식물을 피워 내는 세연의 힘은 본질적으로 메타휴먼의 기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결국 쉴 새 없이 피어나 뿌리내리는 식물들은 닐스의 에너지를 이용해 제 몸집을 키워 간다.
즉, 사방에서 피어나는 꽃들은 닐스의 에너지를 먹고 자라나는 것들이었다.
에너지가 빠른 속도로 깎여 나가고 있음을 깨달은 닐스가 발악하며 고함을 내질렀다.
“아직 아니야. 아직 끝나지 않았단 말이야!”
우우우우우우웅!!
108마리의 악마를 상징하는 닐스의 석장, 지심이 묘한 울음소리를 내며 실드 바깥에 넘쳐흐르는 피와 살, 뼈를 끌어들였다.
붉게 물든 흙이 사방에 피어난 꽃과 나무들을 짓뭉개며 닐스의 몸을 감싼다.
줄곧 닐스의 주변을 뒤덮었던 식물들이 일제히 사라져 버린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쩌적!
손에 쥐고 있던 지심에 미세한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닐스, 소울웨폰은 네 에너지를 먹이 삼는 악마야.”
닐스의 귓가에 딘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지금의 네게는 더 이상 악마를 붙들어 둘 힘이 남아 있지 않아.”
쩌저저적!!
지심 곳곳으로 균열이 번져 갔고, 마침내 완전히 부서져 사방으로 흩어졌다.
비단 지심뿐만이 아니었다.
“아, 아니야. 이건……!!”
퍼석!
닐스의 손 역시 모래로 변해 천천히 부서져 가고 있었다.
손에서 팔로, 팔에서 어깨로, 어깨에서 가슴, 배, 목으로…….
그렇게 닐스의 몸 전체가 모래로 변해 갔고,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나, 나는… 나는……!!!”
그저 살고 싶었을 뿐이다.
센트럴의 개로 키워져 센트럴을 위해 살았을 뿐이다.
혁명군을 배신한 것 역시 살기 위한 선택이었다.
한때 혁명군과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지만, 결국 두려움을 극복할 수 없었다.
“너희들은…….”
아크의 말이 맞다.
마더랜드의 센트럴은, 몇 개의 세계를 파멸시킨 센트럴은 이미 ‘신’이었다.
“…결코 이길 수 없어.”
그 말을 끝으로 닐스의 몸이 완전히 부스러져 먼지로 변해 버렸다.
* * *
“드디어 모든 게 끝나 가는군.”
이고르는 협상장 실드 앞에 멈춰 서서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기나긴 시간 동안 수백 개의 세계를 떠돌아다녔다.
그저 자그마한 가능성이라도 찾기 위한 여정이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헤맸을까?
기나긴 여정 끝에 이고르는 결국 그 ‘가능성’이라는 것을 찾아냈다.
지금껏 그 희망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이곳에 이르렀다.
그토록 원하고 원했던 순간이건만, 이고르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너무도… 많은 죄를 지었구나.”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아니, 이 순간에도 죽어 나가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은 몇몇 인간들의 오만함 때문이었다.
이고르는 이제 그 잘못을 되돌리기 위해, 망가진 세계를 복구하기 위해 알마티 전쟁터를 찾아왔다.
“이번만큼은 전과 같은 실수를 하지 않아야겠지.”
마침내 마음을 굳힌 이고르가 지팡이를 치켜들어 실드에 갖다 댔다.
치지지지…….
굳건히 닫혀 있던 실드에 지팡이가 닿자 미세한 떨림과 함께 자그마한 구멍이 생겨났다.
이고르는 그 틈새를 통해 협상장 안으로 발을 들였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