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199화 (200/220)

199화 순례자의 밤

첫날의 전투가 끝났다.

해가 떠오른 직후 요르문간드의 습격으로 시작된 전투는 해가 지면서 중지되었다.

전투가 끝나고 어둠이 내려앉자, 낮에 온 황야를 울렸던 함성과 비명이 한낱 꿈이었던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고요했다.

하지만 비릿한 피 냄새와 화약 냄새는 여전히 곳곳을 맴돌고 있었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내일부터는 전선이 더 넓어지겠군.”

클라이드는 알마티 북쪽 장벽 너머에 있는 닐스의 대장함을 바라보고 있었다.

북쪽에는 단 두 척의 플루톤만 남아 있었다.

총 다섯 척의 순양함 중 한 척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전투가 끝난 뒤 동쪽과 서쪽으로 각각 한 척의 순양함이 재배치되었다.

“그렇겠지. 내일 전투부터는 꽤 힘들어질 거야.”

태일 역시 클라이드와 나란히 서서 센트럴 진영을 살폈다.

“아마 공성전이 펼쳐지겠지.”

첫날, 모든 전투는 알마티 외부에서 치러졌다.

그러나 이제 전선은 북쪽과 동쪽, 서쪽까지 확장되었다.

사실상 도시가 포위되면서, 알마티 측에서는 공세에 나설 수 없게 되었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동쪽 성벽은 어쩌자고 무너뜨린 거지?”

“메타휴먼들이 머무를 공간을 개발하기 위해서 무너뜨렸을 거야.”

알마티 동부 숲 지역은 이제 거주 구역으로 변해 있었고, 길목의 성벽은 사라진 상태였다.

“제정신이 아니군. 이 중요한 시기에 제 손으로 성벽을 허물다니.”

클라이드의 냉소 섞인 반응에 태일은 가만히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아마 날이 밝으면 제일 중요한 격전지는 성벽이 사라진 동쪽 전선이 될 것이다.

한편, 태일이 담배에 불을 붙이지 않자 클라이드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아직도 금연 중인가 보지?”

“그래.”

타탁!

바로 그때, 닐스의 대장선 뒤편으로 거대한 불꽃이 피어올랐다.

태일의 뒤에 서서 경계 어린 시선으로 클라이드를 노려보던 제니가 깜짝 놀란 눈으로 거세게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저건 대체……?”

“시신을 태우는 거겠지.”

역시 피어오르는 불길을 확인한 클라이드가 담담히 대답했다.

전투가 끝난 직후, 센트럴 병력은 요르문간드의 시체와 더불어 사망한 병사들의 시신을 수습해 전장 뒤편으로 옮겼다.

그리고 해가 완전히 사라진 지금, 화장을 시작한 것이다.

그 와중에 센트럴 진영 쪽에서 묘한 피리 소리와 함께 속삭임과 같은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그 소리는 마치 노래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고, 주문을 외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기분 나빠.”

제니는 눈살을 찌푸리며 불만을 터뜨렸지만, 클라이드는 별다른 감흥이 없는 듯 중얼거릴 뿐이었다.

“현실에 좌절하면 종교에 빠져드는 법이지.”

“저 사람들, 이쪽 구역 사람들은 아닌 거 같은데. 어디에서 온 거지?”

“남부에서 온 거야. 얼마 전까지 나도 저 사람들과 함께 있었지.”

제니가 꽤 놀란 얼굴로 클라이드를 바라보았다.

혁명군 시절부터 알아 왔던 클라이드는 순례자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태일 역시 꽤 놀란 눈으로 성벽 아래 순례자들을 살폈다.

“저렇게나 많이 온 건가.”

성벽 아래에는 횃불이나, 등불을 든 순례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다니며 황무지 곳곳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검은 후드를 걸친 무리, 얼굴에 분칠을 한 채 하얀 옷을 갖춰 입은 무리, 식물 뿌리와 나뭇잎 따위로 만들어진 외투를 입은 무리까지.

누군가는 정체 모를 가루를 뿌렸고, 또 누군가는 피가 채 식지 않은 자리에 무릎을 꿇은 채 기도문을 외웠다.

눈물을 흘리며 조용히 노래하는 사제의 모습도 보였다.

센트럴 군단의 화장 현장에도 그들이 있을 것이다.

“이해할 수 없어. 이런 전쟁터에 저런 녀석들이 대체 뭐 하러…….”

“쉿.”

태일은 물고 있던 담배를 뱉어 낸 뒤, 제니의 말을 막았다.

태일의 시선은 성벽에 늘어선 알마티 시민들에게 향해 있었다.

전장에 직접 나섰던 메타휴먼들부터 참전하진 않았으되 전투 현장을 직접 목격한 경계병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홀린 듯한 표정으로 순례자들의 의식을 바라보고 있었다.

적어도 알마티 시민들에게 그 의식은 신성한 의미를 지니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 센트럴 진영의 병사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바로 그때, 뒤쪽에서 발소리와 함께 루키우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루 사이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네. 내일부터 벌어질 전투에서는 더 많이 죽을지도 모르지.”

“…시장님.”

루키우스는 보니와 함께 성벽 위로 올라온 참이었다.

“저런 의식으로 잠시나마 평온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도 의미가 있지 않겠나.”

루키우스와 보니의 시선은 센트럴 군단 뒤편의 불꽃에 향해 있었다.

바로 그곳에서 한때 루키우스의 아들이었던 요르문간드의 화장이 이뤄지고 있을 것이다.

루키우스의 얼굴에는 슬픔과 더불어 안타까움이 스며 있었다.

태일 역시 얼마간 말없이 어둠 속에서 펼쳐지는 의식들을 지켜보았다.

어둠 속에 피어오르는 연기는 마치 망자들의 넋이 하늘로 승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몇 분이 지난 뒤, 태일은 고요함 속에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클라이드, 어째서 알마티에 온 거지?”

동생을 찾은 뒤, 세상을 유람하겠다며 떠난 클라이드.

그러나 보니와 클라이드는 결국 다시 알마티로 돌아왔다.

“왜? 널 배신했던 주제에 다시 얼굴을 들이미는 게 좀 뻔뻔한가?”

“아니,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진심이었다.

클라이드, 세이드, 닐스를 비롯한 동료들의 배신은 결국 그들의 리더였던 태일, 자신의 부족함 때문이었다.

각자의 욕망을 이해하지 못했고, 이상에 휩쓸려 무모한 시도를 계속했다.

동료들에게조차 이해받지 못한 신념을 홀로 고집했으니, 비극적인 최후는 실로 당연했다.

“동생을 찾았으니 이런 전쟁터에 다시 발을 들일 이유는 없잖아.”

“바토리 일족의 리더였던 마녀를 만났어.”

투명한 피부, 붉은 입술을 가진 능력자 일족.

센트럴을 도와 역사시대의 막을 내렸지만, 결국 센트럴에 의해 사라져 버린 일족.

보니와 클라이드는 그런 바토리 일족의 후예였다.

“복수라도 하겠다는 건가?”

“아니. 일족을 위해 그렇게까지 할 의리는 없어. 다만, 그 불쌍한 여자를 보면서 깨달았을 뿐이야.”

클라이드는 이름을 말하지 않았지만, 태일은 그 불쌍한 여자가 ‘메데이아’임을 알았다.

통제가 풀린 요르문간드의 존재는 곧 메데이아의 죽음을 의미했다.

“바토리의 핏줄을 이은 이상, 우리는 센트럴과 공존할 수 없어.”

“…….”

“바토리 일족의 아이들을 잡아들여 실험실에 처넣었던 놈들이야. 그나마 살아남은 일족은 테러 분자로 취급해 추격했지.”

미지의 땅으로 여겨지는 순례자의 땅에서 만난 메데이아를 보며 클라이드는 깨달았다.

대륙 어디에 숨어도 그 원한과 증오의 연쇄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메데이아는 언젠가 클라이드에게 넌지시 경고했다.

‘네 동생을 잘 보살피렴. 센트럴은 결코 네 동생의 능력을 포기하지 않을 거란다.’

순식간에 거대한 군대를 양산해 낼 정도의 능력을 지닌 보니.

센트럴은 그런 보니를 결코 그냥 두지 않을 게 분명했다.

“도망칠 수 없다면, 싸워야지.”

클라이드의 대답을 들은 태일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무수한 별들이 쏟아질 것처럼 빛나고 있었다.

* * *

동쪽 성벽 터.

한때 굳건히 서 있던 동쪽 성벽을 일부를 허문 뒤, 그 자리에는 기념 삼아 관문만을 남겨두었다.

탱크는 그런 관문 앞에 서서 거대한 요새처럼 버티고 선 순양함 플루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랫동안 지하 쓰레기장에서 살아왔던 알마티 메타휴먼들은 이제야 비로소 알마티 동부의 그들만의 주거지를 얻었다.

그러나 내일이면 바로 그 주거지가 전장으로 변해 버릴 것이다.

“걱정되냐?”

카심이 그런 탱크의 옆에 걸터앉아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탱크는 그런 카심의 말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괜찮을 거다. 이겨 낼 수 있을 거야. 우리들의 땅이니 반드시 지켜 내야지.”

카심은 메타휴먼들의 마음을 그 누구보다 깊이 이해했고, 족집게처럼 속마음을 집어내곤 했다.

오랜 시간 함께해 왔으니 이젠 사소한 몸짓만으로도 생각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리라.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카심도 탱크의 고민을 눈치채지 못했다.

사실 지금 탱크는 내일의 전쟁을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탱크가 떠올리고 있는 것은 이 순간까지도 성벽 주위를 허수아비처럼 흔들림 없이 지켜서고 있는 강철 인형들이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보니라는 여자아이의 능력이라고 했다.

순양함의 부속품들을 사용해 순식간에 강철 인형들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들은 거침없이 센트럴 병사들을 향해 달려들었고, 몸이 부서지는 와중에도 전진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인형들을 처음 본 뒤부터 탱크는 고민에 빠졌다.

‘우리들이 저것들과 정말 다른 걸까?’

생명 따위 없는 단순 병기.

그저 주인의 명령에 따라 움직일 뿐인 로봇.

그러나 그건 탱크를 비롯한 메타휴먼들도 마찬가지 아니었던가.

처음 드림코퍼레이션의 상표를 달고 세상에 ‘발매’된 뒤, 수년간 메타휴먼들은 인간의 명령을 충실히 따랐다.

위험천만한 현장에 가장 먼저 투입되었고, 그 노동의 대가는 모조리 주인에게 빼앗겼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메타휴먼은 아픔과 두려움을 느꼈고, 감정을 자각했다.

이후 권리를 요구했고, 인간의 손에 파괴되거나 버려졌다.

인간들에게 메타휴먼은 낮에 보았던 철제 인형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어쩌면 인간들의 말이 옳은지도 모르지. 내가 느끼는 그 모든 것은 그저 인간을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한 건지도 몰라.’

무엇으로 자신의 영혼을 입증할 수 있을까?

어떻게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인간의 것과 같다고 증명할 수 있을까?

보니의 인형들과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당연히 다르지.”

뒤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탱크의 고개가 돌아갔다.

“어, 자네……?”

카심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이쪽으로 다가오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붉은 눈동자에 기계 팔.

그럼에도 더없이 인간과 같은 형태를 유지한 로보티안 ‘프랑켄’.

그가 탱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여긴 어쩐 일인가? 안 그래도 자네와 이야기를 해 보고 싶었는데.”

카심이 반갑게 손을 들어 보였지만, 프랑켄은 살짝 고개만 숙여 인사한 뒤 탱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네 고민은 무의미해. 네가 느끼는 모든 건 진짜야. 넌 살아 있다. 바로 여기에.”

탱크의 붉은 눈동자가 프랑켄을 빤히 응시했다.

“대체 무슨…? 아, 설마……!”

카심이 놀란 눈으로 프랑켄을 바라보았다.

“자네, 메타휴먼들의 생각을 모두 알 수 있는 건가?”

“…저 역시 그들 중 일부이니까요.”

성대를 잃고, 목소리가 망가져 버렸어도 메타휴먼의 감정과 고민은 프랑켄에게 전달되었다.

전투가 끝난 뒤부터 프랑켄은 알마티의 메타휴먼들 이야기를 꼼꼼히 들었다.

그들의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고민과 걱정까지.

“탱크, 넌 인간이야.”

“인…간.”

망가져 버린 탱크의 음성 장치에서 띄엄띄엄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래, 그저 인간을 모사해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인간 그 자체라고.”

프랑켄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그 사실을 증명해 주는 사람을 만났어. 그러니 내 말을 믿어도 돼.”

그리고 잠시 뒤, 프랑켄의 뒤쪽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말이 맞아요. 여러분은 모두 틀림없는 인간이에요.”

어둠 속에서 조차 한눈에 띌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다가왔다.

그런 여인의 뒤로는 익숙한 얼굴의 남녀가 뒤따르고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카심 씨.”

“제, 제인!?”

제인 브레드필드와 변호사 레이를 알아본 카심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대체 언제 알마티로 들어온 거냐? 대체 어떻게!?”

“실은 방금 도착했어요. 저도 어떻게 된 영문인지…….”

제인이 목소리를 낮춘 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한편, 탱크와 프랑켄을 번갈아 바라보던 여인이 뒤돌아서며 카심을 바라보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카심 씨. 전 ‘한세연’이라고 해요.”

그 와중에 어딘가에서 작지만 선명하게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째깍. 째깍. 째깍.

다름 아닌 시계의 초침 소리였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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