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D―Day (1)
동이 터 온다.
어둡던 황무지에 빛이 내리쬐었다.
붉게 타오르기 시작한 황무지 멀리에서 마치 전쟁터의 북과 나팔 소리를 연상케 하는 엔진 소리가 울려왔다.
거센 바람과 함께 흙먼지가 이는 가운데, 다섯 척의 거대한 순양함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
쿵… 쿵… 쿵… 쿵…….
거대 순양함 ‘플루톤’, 멀쩡한 도시를 하루아침에 파멸시킬 수 있는 악마의 병기.
한때, 수십 개의 제국을 멸망시키고 역사시대를 끝내 버렸던 최종 병기였다.
역사시대의 기록이 지워진 현재까지도 플루톤에 대한 두려움만큼은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아니, 어쩌면 센트럴에서 의도적으로 남겨 둔 공포인지도 몰랐다.
알마티 장벽 위에 올라선 이들은 하나같이 굳은 얼굴로 태양과 함께 나타난 함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플루톤 다섯 척이 빛 속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알마티 장벽을 앞두고 마침내 멈춰 선다.
키릭… 키리리릭…….
곧이어 순양함의 날개가 천천히 접히며 거대한 접시 형태로 변형되었다.
그 와중에 수십 대의 전투기와 수천 대의 무인 드론이 편대를 형성하여 플루톤 주변을 호위하고 있었다.
다섯 척 중 먼저 착륙을 시작한 함선은 가장 거대한 규모의 대장함이었다.
회의실에 모여앉아 홀로그램을 통해 순양함의 면면을 살피던 각 구역 대표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당당하게 알마티와 동맹을 선언한 멜리사조차도 주먹을 움켜쥔 채 몸을 떨고 있었다.
“이건 미친 짓이야. 저런 놈들을 상대로 이길 수 있을 리 없잖아.”
“저만한 성채가 하늘을 난다니…….”
그래, 그건 차라리 비행선이라기보다 성채나 요새라는 표현이 더 적합했다.
각 구역의 대표자들조차 대부분 순양함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물론 소문으로야 들어 보았지만, 막상 눈으로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위압감이었다.
“다섯 척이나 되는군.”
“함선마다 전투기나 폭격기를 수십 대씩 갖추고 있다더군요.”
“그게 말이 됩니까? 과장이겠지요. 함선에 또 다른 함선을 싣는다니…….”
“거짓이 아니오.”
13구역 대표자 조니 카일이 입을 열었다.
“내가 직접 보았지.”
대표자들 모두의 시선이 조니에게 집중되었다.
“지금 알마티 앞에 나타난 군단의 지휘관은 닐스 레오나드일 거요.”
13구역은 닐스가 이끄는 군단에 의해 붕괴되었고, 그날 조니는 13구역에 있었다.
그렇기에 조니는 플루톤의 힘을, 닐스의 잔인함을 누구보다 생생하게 증언할 수 있었다.
전투가 시작되었던 날,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원거리 포격과 함께 13구역 곳곳에 불길이 일었다.
이어지는 정밀 타격으로 인해 도시의 주요 기반 시설이 초토화되었다.
방어 시설은 물론 무기고, LAPD 주둔지, 발전소, 공장 등이 차례로 무력화되었다.
그즈음, 파괴력에 놀란 조니는 13구역의 즉시 항복을 선언했다.
“닐스 레오나드, 그 악마놈에게는 자비라는 게 없소.”
닐스는 항복 의사를 철저히 무시했다.
도시 기반 시설이 무력화된 직후, 무인 드론 수천 기와 폭격기가 13구역 상공을 날며 무차별 폭격을 가했다.
민간인과 군인을 가리지 않았고, 학교와 병원까지도 폭격의 대상이 되었다.
살아 숨 쉬는 존재라면 그 무엇이든 드론의 표적이 되었다.
“내 아들은 아홉 살이었다오. 무인 드론의 9mm 탄이 이마를… 꿰뚫었지. 난 테오에게 아무 일도 없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어요. 내가 지켜 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조니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어 아내가 당했소. 지하실로 도망치기 위해 내 뒤를 따라 달리다가 몸이 불길에 휩싸였지. 내 아내 율리아는… 끔찍한 비명과 함께 죽어 갔소.”
의원들은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했다.
아이도, 여자도, 노인도 가리지 않았다.
13구역은 그렇게 완벽하게 파괴되었다.
항복을 선언하고도, 13구역은 잿더미로 변해 버렸던 것이다.
“닐스 레오나드, 그가 온 이상 죽거나, 싸우거나… 둘 중 하나요.”
곧이어 몇몇 대표자들이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하지만 난 떠나겠소.”
“나 역시 구역으로 되돌아가 이곳의 이야기를 전하도록 하지.”
안도의 설득으로 인해 전날 떠난 피난선에 올라타는 대신 자리에 남은 이들이었다.
겁 많은 그들을 붙잡은 것은 체면이었다.
하지만 당장 눈앞에 나타난 순양함과 조니의 증언은 잠시나마 가졌던 용기를 꺾기에 충분했다.
알마티에 남아 있다간 허무하게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앞섰을 것이다.
물론 당사자들은 한사코 자신이 겁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겠지만.
“얼른 우리 구역 시민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겠소.”
이럴 때 ‘시민’은 좋은 핑계가 된다.
그렇게 몇몇 대표자들이 황급히 자리를 떠나려 하는 순간, 안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미 수천 기의 무인 드론이 알마티 주변을 날고 있습니다.”
회의실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알마티와 주변의 상황을 구현한 홀로그램에 고정되었다.
과연 안도의 말처럼 점처럼 보이는 무인 드론들이 도시를 포위하듯 산개해 뿔뿔이 흩어지고 있었다.
“현 시간부로 어설프게 도시를 빠져나가려 했다가는 자칫 격추당하거나 닐스에게 포로로 잡히겠지요.”
안도의 한마디에 당장이라도 알마티를 떠나려던 대표자들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설마, 지금 우리가 갇혔다는 건가?”
“안도, 알마티에 며칠만 더 남아 살펴보자고 했던 건 당신이오!”
안도는 거칠게 항의하는 대표자들의 면면을 보며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능력한 겁쟁이들 같으니.’
이런 자들이 각 구역의 대표자 행세를 했으니,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도 모른다.
센트럴이 만든 구조에 그저 순응하며 오로지 자신들의 안위와 권력만을 살폈고, 그랬기에 센트럴은 너무나 쉽게 대륙을 쥐고 흔들 수 있었다.
대륙을 위험에 빠뜨린 주범은 닐스의 군단이 아니라 무능한 구역 대표자들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안도는 인내심을 갖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9구역에서 스텔스 비공정 몇 척을 조달해 왔습니다. 무인 드론의 카메라 따위에 잡히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런 물건이 있다면 지금 당장 내주게! 우린 당장 여길 떠나야겠으니.”
“그럴 수는 없습니다.”
안도가 자리에서 일어나 핏대를 올리는 18구역 대표자 앞으로 다가갔다.
겁먹은 18구역 대표자는 지긋한 나이의 노회한 정치가였다.
평소 여유로운 웃음을 띠며 신사인 척 행세하던 그가 이처럼 위급하고 중요한 상황에 이르러 제 밑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선배님, 우리의 행동은 수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지요. 왜인지 아십니까? 우리가 누군가를 대표하고, 무언가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안도 군, 감히 지금 나를 가르치려 드는 건가!?”
“비공정이 발동하는 순간, 알마티 시민들과 병사들이 보게 되겠지요. 다른 구역의 권력자들이 허겁지겁 도망가는 모습을 말입니다. 노약자와 여인들을 모조리 버려둔 채 말이죠.”
“도망이라니! 도망이 아니오! 난 어디까지나 내 의무를 다하기 위해……!”
비열한 핑계.
“맞소! 난 지원군이라도 파견할 수 있도록 구역민들을 설득할 생각이오!”
뻔한 거짓말.
안도는 치밀어 오는 구역질을 애써 참아내며 담담히 말했다.
“다행히 통신은 아직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그거면 충분할 겁니다. 9구역 스텔스기를 내어 드릴 수는 없으니, 탈출하시려거든 각자의 비행정을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할 말을 잃은 대표자들이 입을 다문 채 안도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적어도 더는 스텔스 비공정을 내놓으라 억지를 부리지 않았다.
제 목숨이 아까워 발악하는 와중에도 제 체면 때문에 도망을 도망이라 말할 수 없는 자들.
정치가란 그런 자들이다.
‘역겹군.’
안도 애슈턴은 이마에 손을 갖다 댄 채 다시 홀로그램 쪽을 바라보았다.
착륙을 마친 다섯 척의 순양함으로부터 수백 대의 전차와 장비들이 줄지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알마티 북쪽 장벽 위, 외부를 감시할 수 있는 초소에 카심과 안드레이, 바르코가 나란히 서 있었다.
“어렵게 됐어.”
착륙한 순양함 다섯 척이 날개를 숨기고 거대한 성채처럼 내려앉은 가운데, 오랫동안 전장에 동원되지 않았던 전차와 포격대가 빠른 속도로 배치되고 있었다.
카심이 눈살을 찌푸리며 늘어서기 시작한 전차와 포격대의 규모를 가늠했다.
배치된 병사의 규모만 해도 도시 자경단, LAPD, 메타휴먼의 수십 배에 이르는 규모였다.
“저렇게까지 한다니…….”
순양함 다섯 척이라면 곧장 알마티 장벽을 넘어 포격을 시작해도 될 정도의 전력이다.
그러나 센트럴 군단은 착륙 후 요새를 구축하고 병력을 배치했다.
“알마티를 확실히 없애겠다는 뜻이겠죠.”
바르코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의 가슴에는 자신의 소속, 알마티 LAPD를 상징하는 독수리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바르코, 자네는 센트럴에서 파견하고 임명한 LAPD잖나. 자네와 자네 부하들은 지금이라도 도시를 빠져나간다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르네.”
“당신들이 지하에서 기어 올라온 날, 저와 제 부하들은 당신들에게 협조했습니다. 서장을 살해한 자들에게 협조했으니 저희도 더는 LAPD라 할 수 없죠.”
카심의 옆에 서 있던 안드레이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모든 책임을 우리 같은 ‘반란군’에게 돌리면 되잖아. 안 그래? 강제로 동원됐다고 증언하면 살려 줄지도 모르지.”
“그렇게 어설픈 수에 넘어갈 리가.”
“호오, 저쪽 사령관이 받아 주기만 한다면 살려 달라고 빌어 볼 용의는 있다는 뜻인가?”
안드레이가 계속해서 이죽거리자, 바르코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나도, 내 부하들도 침략자 놈들에게 무릎 꿇을 생각은 없어.”
“호오… 용기 있는 발언이야.”
“농담은 그쯤 해 둬, 안드레이.”
바르코는 무겁게 한숨을 내쉰 뒤, 다시금 센트럴 군단의 진영을 바라보았다.
알마티를 파괴하러 온 침략자.
한때는 자신 역시 저들과 같은 센트럴 소속 치안경찰(LAPD)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센트럴 경찰이기 이전에 48구역 알마티의 주민이었다.
지난 두 달 동안 자경단, LAPD, 메타휴먼 할 것 없이 단 하나의 목표 아래 힘을 뭉쳤다.
‘알마티를 재건하자.’
자경단은 메타휴먼을 상대로 벌어지는 테러 사건을 앞장서 막았고, LAPD는 지하 도시 주민들이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을 수배했다.
메타휴먼은 온갖 공사 현장에 앞장서며 자신들의 가치를 증명했다.
물론 처음에는 곳곳에서 갈등이 발생했다.
자경단과 LAPD는 사소한 권한을 두고 사사건건 부딪쳤으며, 메타휴먼에 대한 주민들의 차별은 멈추지 않았다.
매일같이 곳곳에서 테러나 패싸움이 벌어졌고, 쉴 새 없이 사건이 터졌다.
메타휴먼들을 비호했던 카심마저 테러리스트의 표적이 되어 목숨이 위태로웠을 정도였다.
그러나 루키우스의 지휘 아래 모두가 함께 장벽을 고쳤고, 새로운 개척지를 만들었으며, 지하 주민들에게 새로운 주거지가 마련되었다.
장인들은 공방을 다시 가동하며 도시에 필요한 도구들을 공급했고, 문을 닫아걸었던 주민들이 거리 밖으로 나왔다.
메타휴먼들은 어느새 도시에 필수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여전히 메타휴먼에 대한 증오심을 숨기지 않는 이들도 있었지만, 적어도 이전처럼 거리 한복판에서 테러가 자행되지는 않았다.
알마티 재건은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고, 그 가운데 주변 구역의 지원이 이어졌다.
한편, 재건 과정에서 카심과 안드레이, 바르코 등 알마티 주민들은 무언가를 공유하게 되었다.
첫째는 알마티의 미래에 대한 희망이었고. 둘째는 함께 도시를 재건하는 이들과의 동료 의식이었다.
이젠 바르코에게도 알마티는 친구들이 머무르는 안식처였고, 고향이었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지.”
“뭘 좀 아는군, 짭새.”
안드레이가 바토리의 담담한 말에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바로 그때, 카심이 눈을 가늘게 뜨며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잠깐, 저쪽… 뭔가 이상한데?”
알마티 동쪽에서 북쪽으로 넓게 드리워진 수풀, 그곳에서 묘한 먼지가 일고 있었다.
알마티 동쪽.
태일과 제니는 조금 전부터 동쪽 수풀에서 관찰된 움직임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오빠……!”
“그래, 보고 있어.”
동쪽에서 똬리를 튼 채 쉬고 있던 거대한 뱀, 요르문간드.
놈이 천천히 북쪽으로 미끄러지듯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먼지가 일고, 수풀에 약간의 소요를 일으켰지만, 놈의 거대한 몸집을 생각한다면 믿기 힘들 정도로 은밀한 움직임이었다.
“대체 뭘 어쩌려는 거지?”
요르문간드가 다가가는 북쪽 방향, 그곳에는 센트럴 군단이 있었다.
“제니, 가서 시장님을 불러와.”
“그럴 것 없네.”
뒤쪽에서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루키우스가 천천히 다가왔다.
“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네.”
루키우스의 시선이 장 베르코프, 아니, 요르문간드에게 집중되었다.
과연 그 뱀이 장 베르코프인지, 아니면 장을 잡아먹은 괴물일 뿐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그 뱀이 알마티를 침략한 적들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시장님…….”
“난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게.”
루키우스는 지금 요르문간드를 바라보며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처음 요르문간드가 상처투성이의 모습으로 알마티에 나타났을 때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잠시 루키우스를 바라보던 태일은 곧 시선을 돌려 알마티 장벽 입구 쪽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 루키우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투 중 저 뱀이 방해된다면, 자네 손으로 숨통을 끊어 버리게. 알마티를… 지켜 주게.”
태일은 천천히 장벽 아래로 발걸음을 옮기며 조용히 대답했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장이 알마티에 돌아온 이유를 태일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