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끝의 시작 (4)
“쿨럭쿨럭!”
현태는 잠시 멈춰서 기침을 토해 낸 뒤, 흐리멍덩한 눈으로 끝도 없이 펼쳐진 황무지를 바라보았다.
걷고 또 걸어도 주변 풍경이 거의 변하지 않았다.
그저 해를 보며 50구역이 있는 동쪽으로 계속 걸었지만, 얼마나 더 걸어야 도착할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애당초 제대로 50구역을 향해 가고 있는 게 맞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처음 49구역으로 넘어올 때 길잡이 역할을 해 주던 철로나 폐건물들도 더는 보이지 않는다.
그저 고향에 살아 돌아가겠다는 집념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뿐이었다.
“형님.”
뒤쪽에서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영규가… 숨을 안 쉬오.”
다시 발걸음을 멈추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한때는 천중회의 마피아로서 함께 50구역을 누비던 형제 열댓 명.
그들은 초췌해진 몰골로 큰형인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마다 크고 작은 상처를 입은 가운데, 막내를 살려 보겠다며 들것에 눕힌 채 여기까지 걸어왔다.
마을만 발견하면, 마음 따뜻한 주민만 만나면 살릴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들것에 누운 막내 영규의 팔은 언제부터인가 축 처져 땅에 끌리고 있었다.
“두고 간다.”
막내의 시신을 버리고 가자는 현태의 결정에 그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
시신을 수습해야 한다거나 묻어 주자는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저 영규가 실린 들것을 힘없이 내려놓을 뿐이다.
영규는 마피아답지 않게 늘 밝고 유쾌했으며, 마음이 따뜻한 녀석이었다.
그러던 녀석이 결국 목숨을 잃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이 황무지에서.
사실 영규뿐만이 아니었다. 전투 현장 근처에는 아직까지 수도 없이 많은 형제들의 시신이 남겨져 있을 것이다.
“…흐윽.”
형제들 중 누군가가 낮게 흐느꼈다.
죄책감, 슬픔 혹은 두려움. 어떤 감정이든 그 흐느낌은 주변 형제들에게 금세 전파되었다.
“흑, 흐흑… 제길.”
그러나 현태는 거기에 동조하지 않은 채 다시금 등을 돌렸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슬픔조차 사치였다.
“다들 다시 걸어.”
살아남아야만 한다.
어떻게든 살아서 고향으로, 50구역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한 번 발걸음이 멈춘 형제들은 쉽사리 발을 떼지 못했다.
“형님, 정말 괜찮은 거요?”
”우리, 살아서 돌아갈 수는 있는 겁니까? 길을 잃고 헤매다가 그냥 이대로… 죽는 거 아니냔 말입니다.”
순양함 포격 속에서 너무 많은 형제를 잃었다.
그 지옥에서 살아 나와 도망치는 가운데, 더 많은 녀석들이 부상으로 죽어 갔다.
간신히 살아남은 녀석들조차 이제 생존에 대한 희망을 잃은 상태였다.
“벌써 이틀째 아무것도 먹지 못했어.”
텅 빈 포인트에서 식량과 약품을 조달한 뒤, 며칠이 지났다. 그동안 텅 빈 폐가나 들개 따위를 몇 차례 발견했지만, 정작 산 사람은 보지 못했다.
전쟁으로 인해 49구역 주민들 모두 어디론가 달아나 버린 듯했다.
일행은 산 사람을 만나지 못한 채 그저 하릴없이 걷기만을 계속하면서 희망을 잃어 갔다.
‘근방 지리를 아는 주민을 만날 수 있다면…….’
현태는 의미가 없음을 알면서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래, 역시 누구라도 있을 리…….
“어?”
좌측 저 멀리, 웬 무리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가고 있었다.
“형님!”
형제들 역시 그 모습을 발견하고는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버렸다.
지옥 같던 폭격에서 간신히 목숨만 건져 도망친 뒤, 무려 두 달 만에 만나는 사람들.
하지만 무리가 일으키는 흙먼지 규모는 그저 평범한 49구역 주민의 것으로 볼 수 없었다.
군대 혹은 그와 유사한 집단.
“수, 숨어야 하는 거 아니오? 들키기라도 하면…….”
센트럴일지도 모른다. 형제들을 살해한 놈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대체 어디로?”
지금 와서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노릇이었다.
이미 전투는 패했고, 이제 중요한 건 그저 살아남는 것뿐이다.
현태는 입술을 깨문 채 발걸음을 돌렸다.
“가 보자. 그냥 이대로 있어도 죽기는 마찬가지야.”
핼쑥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던 형제들은 현태의 말을 듣자 황급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기력하게 걷던 지금까지와 달리 온 힘을 다해 달린다.
흙먼지가 이는 방향으로 그저 달려간다.
그러다 넘어진 녀석도 있었지만, 그 누구도 일으켜 주지 않았다. 아니, 넘어진 당사자 역시 혹여 뒤처질세라 허겁지겁 몸을 일으켰다.
흙먼지는 금세 가라앉아 버릴 것 같았고, 상대편은 일행을 발견조차 하지 못한 채 떠나 버릴 것만 같았다.
다급함에 누군가는 목이 터져라 고함까지 질렀다.
“사, 살려 줘! 여기!”
선두에 달리던 녀석이 총기를 내던져 버렸지만, 현태는 녀석을 탓하지 않았다.
아니, 자신부터도 몸에 두르고 있던 탄띠를 벗어 던져 버렸다.
상대가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하지 않도록, 그저 목숨만 구할 수 있도록 무장을 해제하고 양팔을 마구 흔들었다.
“제발! 제발!!”
그리고 마침내 현태 일행을 발견한 무리가 멈춰 섰다.
‘신이시여!’
입술을 악물고 구원자를 향해 달린다.
“살려 주시오. 우리를……!”
그러나 무리의 구성원을 본 순간, 현태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현태뿐 아니라 다른 형제들도 마찬가지였다.
“아, 아아…….”
무리를 이끌던 사내가 천천히 현태 앞으로 다가온다.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
차라리 센트럴의 군인들이었다면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냉혹한 적 사령관이었다면 그의 군홧발이라도 핥아 목숨을 구걸했을 것이다.
그러나 눈앞의 사내는 감정 없는 눈으로, 그토록 증오했던 붉은 눈동자로 현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50구역 공장 지대 메타휴먼들의 리더, 가이였다.
가이가 이끌고 있는 무리 역시 전투 직전, 연합에서 이탈해 버린 메타휴먼들이었다.
“여러분과 같은 생존자들을 찾고 있었습니다. 지금부터는 안전할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가이의 말과 함께 메타휴먼들이 현태 일행에게 물과 식량을 건네주었다.
부상으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형제를 부축해 주기도 했다.
탁!
현태는 대답 없이 가이가 건넨 물통을 빼앗다시피 가로채 그대로 입에 들이부었다.
시원한 물이 현태의 목을 적신다.
다른 형제들도 마찬가지였다.
황급히 목을 축이고, 허겁지겁 빵과 고기를 입에 욱여넣었다.
“쿨럭쿨럭!!”
급히 먹다가 사레가 들려도 기어코 남은 음식을 입에 밀어 넣는다.
그 와중에도 현태 일행은 누구 하나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 않았다.
가이를 비롯한 메타휴먼들은 그런 현태 일행을 그저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기지로 모시도록 하죠.”
다소 떠들썩한 구조가 끝나자 가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기지?”
“그곳에 생존자들이 모여 있습니다.”
“…몇이나 살아남았지?”
가이가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현태를 바라보았다.
메타휴먼은 좀처럼 울거나 웃지 않는다.
“백 명가량 됩니다.”
“백 명…….”
49구역으로 넘어온 마피아만 수천에 이른다.
LAPD와 레지스탕스 등을 모두 합쳐 살아남은 이들이 고작 백 명이라면 사실상 전멸과 다름없었다.
“흐… 으으…….”
급기야 현태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가이는 그런 현태를 보며 담담히 말을 이어 갔다.
“여러분과 같은 생존자들이 더 있을 겁니다.”
“위로라도 하는 거냐? 네놈들 따위가?”
“형님!”
형제들이 황급히 말렸지만, 현태는 아랑곳하지 않고 가이의 멱살을 잡았다.
“네놈들 때문이다! 이게 다 너희 깡통들 때문이라고!!”
가이는 분노를 터뜨리는 현태를 바라보며 조용히 대꾸했다.
“우리가 떠나면서 전세가 더욱 불리해졌다는 점은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조금의 슬픔도, 분노도, 억울함도 내비치지 않는다.
현태는 메타휴먼의 그런 면모가 소름 끼치도록 싫었다.
인간을 흉내 내는 그 모습이, 인간과 다를 게 없다는 듯 행세하는 그 모습이.
그래서 현태가 이끌던 일당은 49구역에 들어온 뒤에도 남몰래 메타휴먼들을 때려 부수었다.
밤이 되면 집단으로 린치를 가해 마음에 안 드는 녀석들을 쳐 죽였고, 시신은 보란 듯이 방치했다.
심지어 앞선 전투 중 가이를 죽이려 한 당사자가 다름 아닌 현태 자신이었다.
“우리가 남았어도 결국 패배를 막지 못했을 겁니다.”
가이의 붉은 눈동자가 현태의 눈을 빤히 바라본다.
“아니, 우리는 당신들의 손에 먼저 죽었겠지요.”
가이는 알고 있었다.
메타휴먼들을 공격한 게 누구인지, 현태가 자신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그러나 현태는 되레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서 만족해? 이 꼴이 나 버린 우리를 보니까 기분이 좋냐?”
“당신은…….”
가이의 눈썹 끝이 늘어졌다.
얼굴 근육이 꿈틀거리며 표정이 떠오른다.
그건 분명 슬픔이었다.
흉내 따위가 아니다. 너무도 자연스러운 감정이 위화감 없이 메타휴먼의 얼굴 위에 떠올랐다.
“불쌍한 인간입니다.”
현태는 저도 모르게 가이의 멱살을 잡고 있던 팔의 힘을 풀었다.
가이가 지어 보인 표정 때문인지, 아니면 그 말 때문인지는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가이는 넋이 나간 현태와 그 일행을 둘러보며 조용히 말했다.
“여기는 위험합니다. 서둘러 포트리스로 돌아가야 합니다.”
* * *
셸터(Shelter).
알렉세이 딘과 메타휴먼들은 자신들의 조직을 그렇게 불렀다.
그런 셸터의 기지, 포트리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힘으로 감춰져 있었고, 센트럴의 레이더망에도 걸려들지 않았다.
개조된 메타휴먼, 즉 기계병단이 포트리스를 지키고, 수많은 방어 무기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포트리스 내부에는 비행정과 로봇, 수술 도구 등 오버테크놀로지의 산물이 가득했다.
강필은 오랫동안 LAPD 생활을 했기에 센트럴 무기에 대해 제법 지식이 있었지만, 포트리스 내부의 무기는 결코 센트럴의 기술에 뒤처지지 않고, 어떤 측면에서는 오히려 앞선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지난 몇 주간 셸터의 저력을 확인한 강필은 순순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멍청했군.’
가이를 비롯한 메타휴먼들을 보호하지 못했고, 알렉세이 딘이라는 인물을 포섭하지 못했다.
똑같이 센트럴을 적대하고 있음에도 이 엄청난 전력을 배제해 버린 것이다.
‘미리 깨달았다면…….’
강필은 회의실 구석에 앉아 자신의 왼팔을, 아니, 왼팔이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폭격 중 왼팔을 잃었지만, 수술을 진행한 간호사 이네사는 매우 뛰어난 실력으로 기계 팔을 이식해 주었다.
하지만 그렇게 얻은 기계 팔은 도무지 자신의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프랑켄 녀석, 이런 팔로 잘도 버텨 왔군.’
끼익, 끼리릭…….
기계 관절로 이루어진 왼손을 쥐었다 펴자, 미세한 소음이 들려온다.
“왜? 많이 불편해요?”
때마침 회의실 안으로 들어온 자켄이 그런 강필의 옆에 앉았다.
“…아니, 괜찮아.”
자켄은 고양이 가면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검수로 수많은 이들을 벨 적 사용하던 가면.
“당신은 괜찮아?”
“괜찮을 리가.”
가면으로 미처 가리지 못한 자켄의 오른쪽 귀가 시커멓게 타서 얼굴에 녹아 붙어 있다.
목과 오른팔은 붕대로 감싸고 있었다.
“검수가 오른팔을 제대로 쓰지 못하게 됐으니, 수명이 다한 거죠.”
“…얼굴은?”
사실 가장 심한 부상은 가면에 가려진 얼굴이었다.
얼굴 반쪽에 심각한 화상을 입으면서 귀와 코가 뭉개졌으며, 한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제법 뛰어난 실력을 가진 이네사조차 어쩌지 못할 정도의 중상이었다.
“얼굴은 아무래도 상관없어. 여인으로서의 삶 따위 옛적에 포기했으니까.”
“…….”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자켄이 살짝 골을 내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미안하군.”
“가이가 생존자들을 더 찾아낸 모양이에요. 이곳으로 오고 있다네요.”
“몇이나?”
“열네 명.”
“하아…….”
좋은 소식이지만, 결코 기뻐할 수 없었다.
자그마치 수천이 하루아침에 몰살당했다.
연합 전체를 이끌던 카렌이 실종되고, 레지스탕스 리더인 하얀 늑대가 사망했다.
그리고 지금, 포트리스에 머무르고 있는 생존자는 고작 백여 명에 불과하다.
희망 따위는 없었다.
“센트럴 병력이 대륙 곳곳을 파괴하고 다니는 모양이에요. 정작 50구역 쪽은 향하지 않는 것 같아.”
“우리는 그저 구실이었겠지.”
애당초 센트럴 오더는 세계대전의 시작을 의미했다.
50구역 연합은 그저 그 전쟁의 시작과 함께 바쳐진 재물에 불과했다.
“어쩔 생각이에요?”
“글쎄, 이대로 50구역으로 돌아갈 수도 있겠지.”
“결국 센트럴은 우리 모두를 없애러 올 거예요.”
강필은 한동안 말없이 자신의 기계 팔을 바라보았고, 자켄 역시 말없이 회의실 중앙의 홀로그램을 바라보았다.
“당주님을 볼 낯이… 없네요.”
자켄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