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대혼돈의 대륙 (4)
“이쪽 세계에서도 49구역은 너저분하군.”
대머리의 사내가 눈살을 찌푸리며 불만스럽게 중얼거린다.
사내는 센트럴 군복 차림이었으며, 견장에는 장군만이 달 수 있는 별들이 달려 있었다.
그러나 정작 눈에 띄는 것은 사내가 쥐고 있는 물건이었다.
군복을 입었으되 총기 대신 승려가 들고 다닐 법한, 2미터 크기의 거대한 석장을 들고 있다.
그런 그의 모습은 언뜻 보기에도 기괴했다.
탁, 탁…….
석장은 사내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황량한 대지와 부딪쳐 둔탁한 소리를 냈다.
“진절머리가 나는 땅이야.”
“그… 이쪽 세계라고 하시면……?”
사내의 옆에서 함께 걷던 백련이 힐끔거리며 조심스레 묻는다.
“네 질문에 굳이 대답해야 하나?”
“시, 실례했습니다.”
사내가 차갑게 쏘아붙이자 백련은 곧장 입을 다물었다.
49구역에서 사이비 교주이자 용병대장으로 군림하며 온갖 패악질을 저질러 온 백련이다.
그러나 그런 백련조차도 사내 앞에서는 설설 길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석장을 든 사내는 사령관 닐스의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젠장, 내가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건가?’
닐스는 지금 발이 묶인 순양함 근처에서 부대를 지휘하고 있다. 바로 며칠 전에도 닐스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고 쫓겨나다시피 빠져나오지 않았던가.
그러나 아크가 보낸 ‘새로운 사령관’은 분명 닐스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백련이 슬슬 눈치를 살피던 찰나, 닐스가 멀리 보이는 형체를 보고 잠시 멈춰 섰다.
“저쪽인가?”
“아, 네! 저기 보이는 괴물 나무 쪽입니다.”
“그 녀석도 이쪽 세계에 보내졌나 보군.”
“예? 혹시 저 나무를 길러 낸 게 어떤 능력인지 아십니까?”
“…….”
깜짝 놀란 백련이 물었지만, 닐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이렇게 그냥 가는 건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이미 닐스 장군이… 그러니까 그… 가짜가 부대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가짜가 아니겠지. 녀석은 또 다른 나야.”
백련은 닐스의 얼굴로 도인처럼 구는 사내에게 도무지 적응할 수 없었다.
“어, 어쨌든 그냥 간다고 해서 순순히 군권을 넘겨줄 사람이 아닙니다! 분명 사령관님과 저를 죽이려 할 겁니다.”
“나를 죽인다고?”
닐스가 잠시 걸음을 멈춰 백련을 바라보았다.
땅을 짚고 있던 석장이 미세하게 진동한다.
구구구구…….
그러고는 곧이어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지표면 전체가 위아래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쩌적, 쩌저저적!
대지 곳곳이 갈라지며, 사방에 거대한 틈새를 만들었다.
백련은 그런 지진 속에서 휘청이며 겁에 질린 얼굴로 닐스를 바라보았다.
‘말도 안 돼……!’
온몸의 감각이 경고하고 있었다.
자신의 힘 따위는 닐스의 압도적인 능력에 비하면 어린애 장난 정도에 불과하다.
“다, 당신… 당신은 대체 누굽니까? 대체 누구이시기에……!”
백련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무릎을 꿇은 채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잠시 뒤, 대지의 진동이 거짓말처럼 멈추었다.
“닐스 레오나드.”
닐스가 자신의 이름을 말한 뒤,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그 이름에는 여러 수식어가 달려야 했다.
혁명군 간부 ‘닐스 레오나드’.
그는 오랜 시간 동안 49구역에서 혁명군들과 부대끼며 지냈다.
태일과 클라이드, 세이드, 알렉세이 딘, 세연 등 센트럴을 위협한 수배자들과 함께였다.
그러나 닐스는 단 한 번도 그들의 동료였던 적이 없다.
첩보부원 ‘닐스 레오나드’.
그게 바로 그의 숨겨진 신분이었다.
센트럴 토벌군과 전투를 치르던 때에도, 태일을 습격했을 당시에도 닐스는 줄곧 센트럴의 첩보부원이었다.
태일이 사라지고 약 몇 시간이 지난 뒤.
“알렉세이 딘과 한세연을 비롯한 주요 수배범들은 모두 체포되었다.”
첩보부 대장은 붉은 언덕에 서서 담담히 말했다.
“고생 많았다.”
“…….”
혁명군이 괴멸된 시점에서 첩자 닐스의 임무는 끝이 났다.
더는 혁명군도, 첩자도 아니었다.
분명 그랬을 터다.
그러나 첩보부 대장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코드명 닐스, 네 임무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이미 부상이 큽니다.”
결국 혁명군은 괴멸되었지만, 치명상을 입은 닐스 역시 그저 죽음을 기다리는 신세였다.
“이런 몸으로는 그 어떤 임무도 해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대장은 영문 모를 소리를 이어 갔다.
“넌 새로운 세계에서 새롭게 태어날 거다.”
“대체 무슨…….”
“그리고 그곳에서도 너의 임무는 이어진다.”
줄곧 검은 가면을 쓰고 있던 대장이 천천히 자신의 가면을 벗었다.
늘 신분을 감추고 있던 그가 처음으로 자신의 맨얼굴을 닐스에게 보인다.
“기억해라, 닐스. 모든 임무는 센트럴의 영광과 우리들의 영생을 위한 것이다.”
대장의 말을 끝으로 닐스의 의식이 멀어져 갔다.
그 와중에도 문득 의문이 들었다.
‘영생(永生)?’
그게 자신의 목적이었던가?
적어도 닐스는 영원한 삶을 꿈꾼 적이 없었다.
다시 깨어났을 때 닐스의 몸뚱어리는 정체 모를 캡슐 안에 담겨 있었다.
자신이 어떻게 아직 살아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몸에는 조금의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액체가 담긴 캡슐 안에서 자유롭게 숨을 쉬고, 팔다리를 움직일 수도 있었다.
다만, 끊임없이 잠이 밀려왔다.
결국 다시금 눈을 감고 잠에 빠진 지 수일.
[감마 단계가 해제됩니다. 코드네임 NA. 10… 9… 8… 7…….]
정체불명의 목소리에 이어 갑자기 캡슐의 문이 열렸다.
“여기는…….”
낡디낡은 창고.
한 켠에는 딘이 만들어 준 소울웨폰 석장과 센트럴 군복 등이 놓여 있었다.
그렇게 비틀거리며 캡슐 밖으로 걸어 나오자 그의 앞에 대장이 나타났다. 아니, 정확히는 그의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깨어났나?”
“대장…….”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 닐스.”
대장은 닐스를 처음 보는 듯한 태도로 인사를 건넸다. 아니, 말투를 듣자 곧 알 수 있었다.
그는 대장과 같은 얼굴을 했으되 대장이 아니다.
“표정을 보니 내 얼굴이 당신 기억 속 누군가와 닮은 모양이지?”
“여기가… 어딥니까?”
“당신이 살던 곳과는 다른 세계야. 그래, ‘베타테스트’를 위한 세계라고나 할까?”
센트럴이 있고, 50개의 구역이 존재하는 세계. 그러나 혁명군은 존재하지 않는 세계.
소울을 얻어 내기 위한, 발전소로 계획된 세계.
황당하기까지 한 이야기이지만, 닐스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다만, 닐스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임무뿐이었다.
“제가 맡게 될 임무가 뭡니까?”
“일단 이쪽 세계에 빨리 익숙해지도록 해.”
대장의 얼굴을 한 사내는 ‘아크 탈로스’라고 했다.
“당신은 군단을 이끌게 될 거야.”
센트럴 지휘관 ‘닐스 레오나드’.
닐스의 새로운 신분이었다.
“일단 군복 주머니에 넣어 둔 렌즈부터 착용하도록 해. 지금의 눈으로는 곤란하니까.”
닐스의 눈동자는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 * *
“모두 집결했나?”
“네, 사령관님. 상대 동향을 살피기 위해 파견된 수색병을 제외한 나머지 병력 전부를 모았습니다.”
“대륙 남부에서 기어 나온 녀석들이라고 했던가?”
“예. 수색병들이 전해 온 정보에 따르면, 무리 대부분이 사제들이라고 합니다. 시신들을 보며 이상한 의식 같은 걸 하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습니다.”
“사이비들이 갑자기 뭐 하러 여길 나타난 거지?”
“거기까진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만, 반드시 적이라고 확신하기는 어렵습니다.”
부관은 닐스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남쪽에서 나타난 사이비 무리는 일종의 제사를 지내며 망자들을 애도했다.
향을 피우는가 하면 씨를 뿌리기도 했고, 영문 모를 기도문을 읊기도 했다.
적어도 싸움을 앞둔 부대의 모습은 아니었다.
어쩌면 수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현장을 수습하고 나름의 종교 행위를 하기 위해 여기까지 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령관님, 순양함 재건 작업이 시급합니다. 일단 하던 작업은 계속하게 하는 게…….”
“아니. 전원 무장 상태 점검하고 참호 정비해.”
닐스는 부관의 말을 끊으며 지시를 내렸다.
상대의 정체를 확인하고 다소 긴장을 늦춘 부관과 달리 닐스의 얼굴에는 시종일관 팽팽한 긴장감이 떠올라 있었다.
‘무언가 불안해. 예감이 좋지 않다.’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본능적인 불안감이 가시지 않았다.
바로 그때.
“사령관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뒤쪽에 있던 하급 군관이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그를 본 부관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꾸짖었다.
“감히 하사관 따위가 어딜 나서!”
“기다려.”
닐스가 그런 부관을 막으며 하사관과 그의 뒤에 선 이들을 훑었다.
부관이 하사관을 경계하며 싫어하는 이유는 그의 계급 때문이 아니었다.
선두에 선 하사관과 그가 이끄는 부대는 모두의 두려움을 사는 이레귤러다.
더구나 상당수는 센트럴에 의해 멸족당한 바토리 일족의 후예들이었다.
닐스는 그들이 배척받는 이유가 강력한 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오히려 그들을 곁에 두었다.
“뭔가 느껴지는 게 있나?”
“네. 조금 전 두 곳에서 거대한 소울의 흐름이 관측되었습니다.”
“두 곳?”
“네. 하나는 남쪽, 사제들의 무리 쪽이고…….”
하사관의 시선이 서쪽으로 돌아간다.
“다른 하나는 저쪽입니다.”
그의 고개가 돌아간 바로 그 방향에서 두 사람이 부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정지! 정지하라!”
포병대 장교가 서쪽에서 다가오는 두 사람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는 군사작전 지역이다! 더 다가온다면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그리고 잠시 뒤, 흙먼지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쏘지 마시오! 센트럴 소속이오!”
어딘지 익숙한 목소리에 장교를 비롯한 모두가 겨누었던 총구를 내렸다.
며칠 전, 다른 구역에서 지원군을 요청하겠다며 떠난 백련, 그의 목소리였다.
백련을 확인한 닐스가 이를 갈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저 사이비 자식, 지원 병력을 데려오라고 했더니, 저 꼴로 나타난 건가?”
웬 덩치 큰 군복 차림 사내와 함께 서 있을 뿐, 그밖에 다른 인원은 보이지 않았다.
“닐스 사령관님과 따로 나눌 이야기가 있다! 센트럴에서의 전언이 있어!”
“…….”
“이쪽에서 기다리겠다!”
듣고 있던 닐스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지금 저거, 나더러 직접 제 놈 앞까지 오라는 거지?”
“당장 이곳으로 와서 직접 보고드리라고 전하겠습니다.”
부관이 급히 대꾸했지만, 닐스가 그런 부관을 막았다.
“아니, 됐어. 내게 따로 할 말이 있는 모양인데…….”
떨거지 용병이자 사이비 교주인 이레귤러 백련.
그런 자를 자신에게 보낸 아크의 의도가 무엇일까.
‘날 믿지 못한다는 거겠지.’
지난 수년간 아크는 닐스에게 금전적, 정치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그 덕분에 닐스는 누구보다 빠른 승진을 거듭했다.
그 때문에 군 상부에서는 닐스를 ‘아크의 사냥개’라며 쑥덕거렸다.
그러나 닐스는 센트럴 오더를 기회로 삼아 상부를 모조리 정리했고, 센트럴 군 지휘권을 사실상 움켜쥐었다.
마침내 센트럴의 최고 지휘관이 된 것이다.
이제 아크는 지금껏 해 온 지원에 대한 계산서를 들이밀 게 분명했다.
“부관, 잠시 백련 저놈을 만나고 올 테니, 그사이 부대 전열을 정비하도록.”
“사령관님께서 직접 말씀이십니까?!”
“그래.”
부관은 각오를 굳힌 듯 굳은 닐스의 얼굴 바라본 뒤,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닐스가 그런 표정을 지을 때는 그 누구의 조언도 따르지 않았다.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곧이어 닐스의 시선이 이레귤러 하사관 쪽으로 향했다.
“9중대에게 나의 호위를 맡기지.”
“…알겠습니다.”
부관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고작 30명으로 편성된 9중대는 부관을 비롯한 군단 장교들에게 배척받는 존재였다.
중대라는 명칭이 어울리지 않는 소규모에 오로지 이레귤러만으로 구성된 집단.
9중대는 그저 불안정하고 위험한 집단처럼 보였다.
그러나 부관을 비롯한 부하들은 9중대의 진정한 힘을 알지 못했다.
9중대는 요인 암살, 적진 교란 등 음지에서 활약했고, 그로 인해 닐스는 연전연승을 거둘 수 있었다.
이젠 이 특수부대가 백련과 아크를 파묻어 버릴 것이다.
‘아크, 네놈이 날 이용한 게 아니라 내가 널 이용한 거다.’
닐스의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