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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178화 (179/220)

178화 대혼돈의 대륙 (3)

“순양함 상황은?”

“오늘 오전에 창고와 함실의 정비까지 마쳤다고 합니다.”

“고작?”

닐스 레오나드의 날카로운 시선에 보고 중이던 부관이 움찔거렸다.

털 없는 호랑이라 불리는 닐스의 얼굴이 마치 힘을 모으듯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곧이어 광기 어린 목소리가 임시 회의실로 사용 중인 소형 구축함 전체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자그마치 순양함이야, 순양함! 그 물건을 한 달째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단 말이야! 그런데 이제야 겨우 창고랑 함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분명 완벽한 승리가 눈앞에 있었다.

기습적인 순양함의 폭격으로 연합 병력은 혼란에 빠져 뿔뿔이 흩어졌다.

지상군까지 파견하면서 사실상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주었다.

작전이 완료될 즈음, 닐스는 득의양양하게 상부에 연합 몰살이라는 승전 보고까지 마쳤다.

그러나 바로 그 무렵, 일이 터졌다.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대지, 순양함 밑에서 갑자기 솟아오른 무언가.

“고작 나무야, 나무!”

처음에는 작은 묘목이었다.

그러나 묘목은 순식간에 터무니없는 속도로 몸집을 키워 갔다.

순식간에 수백 년은 된 고목처럼 온 사방으로 줄기가 뻗어 나가고, 굵기 또한 터무니없이 굵어졌다.

그러더니 나중에는 아예 세상에 존재할 리 없는 수준의 크기로 커졌다.

나무줄기는 순양함의 날개를 휘감았고, 엔진 구동부를 파고들었으며, 조종실까지 뒤덮었다.

도끼나 칼로 베어도 다시 새로운 가지가 돋아났고, 불태워도 금세 다른 줄기가 몸집을 키워 집요하게 순양함을 공격했다.

순양함을 친친 옭아맨 마당에 소이탄처럼 위험한 무기를 사용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순양함은 거대한 나무에 휘감긴 채 무려 한 달 동안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저 순양함에 실려 있던 소형 구축함들만 간신히 운용할 뿐이었다.

“나무 때문에 순양함을 구동하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되냐는 말이야!!”

“다행히 나무의 성장이 멈췄습니다. 한창 나뭇가지와 뿌리를 들어내고 있으니, 곧 다시 가동할 수 있을 겁니다.”

부관은 걱정 어린 눈으로 창밖, 나뭇가지로 마구 뒤엉켜 매달린 순양함을 바라보았다.

지난주에야 비로소 나무의 성장, 아니, 움직임이 멈추면서 빠른 속도로 시들어 갔다.

병력들이 총투입되어 마른 나뭇가지들을 열심히 쳐 내고 있지만, 엔진 구동부와 날개가 모조리 파손된 가운데 재가동까지는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었다.

“그 능력이 뭔지 아직도 못 찾았나?”

“모든 아카이브를 뒤져 보았지만, 그런 능력에 대한 정보는 없습니다. 애당초 살아 있는 나무를 길러 낼 수 있다는 게 도무지…….”

“이런 한심한 놈들 같으니!”

닐스가 고함을 내지르며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나?! 그럼 그게 자연스럽게 성장한 나무였다는 거야? 상부에는 대체 뭐라고 보고를 해야 하냔 말이야!”

보고한들 대체 누가 믿을까.

나무 한 그루가 갑자기 자라나서 순양함을 휘감는 바람에 꼼짝 못 하고 있다는, 이 기막힌 사실을 말이다.

아마 닐스 자신도 직접 경험하지 않았다면 결코 믿지 못했을 것이다.

“근처 수색병까지 전부 작업에 투입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음 주까지 순양함 발동이 가능하게 만들란 말이야!!”

전투가 끝나고 한 달도 넘는 시간이 흘렀다.

영문 모를 순양함 손실을 도무지 보고할 수 없던 닐스는 잔당 소탕이라는 명목으로 멈춰 선 순양함 근처에 눌러 앉았다.

순양함을 버리고 갈 수도, 무작정 시간을 죽일 수도 없는 가운데, 상황은 점차 악화되었다.

순양함에 실려 있던 소형 구축함들의 연료와 식량은 거의 바닥을 드러냈고, 근처 구역에서는 지원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이 망할 자식들은 왜 아무도 지원을 보내지 않는 거야?! 어?”

“그게 아무래도… 지난번 전투에서 피해가 크다는 걸 구실로…….”

“그건 제 놈들이 보낸 부대가 오합지졸이었으니까 그런 거잖아!”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결과적으로 닐스는 화력지원 없이 각 구역에서 모아 보낸 병력을 총알받이로 내세운 꼴이었다.

그러니 구역 관리자들이 선뜻 추가 병력이나 물자 지원에 나설 리 만무했다.

하지만 부관은 결코 그 사실을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일단 백련 님이 직접 각 구역을 돌고 있으니, 곧 소식이 올 겁니다.”

“‘백련 님’? 웃기고 앉았다! 뭔 놈의 존칭이야!”

지원 요청에 대한 구역들의 시큰둥한 답변을 받은 뒤, 닐스는 백련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고는 수시로 그의 정강이를 발로 찼다.

”따지고 보면 그 망할 놈 때문에 구역들 심사가 뒤틀린 거 아니야!”

백련이 구역 병력을 총알받이로 세우려 한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결정을 내리고 적극적으로 지시한 인물은 닐스 자신이었다.

심지어 백련의 작전이 뛰어나다며 ‘선생’이라 존칭까지 붙이지 않았던가.

물론 이번에도 부관은 그런 사실을 결코 들먹일 수 없었다.

“어찌 되었든 빨리 순양함부터 정상화시켜! 순양함만 발동할 수 있다면, 제까짓 놈들이 지금처럼 우리한테 개길 수 있겠어?”

“네. 병력을 추가 투입하겠습니다.”

드디어 지옥 같은 보고가 끝났음에 안도하며 황급히 대답하는 바로 그 순간.

갑자기 누군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사, 사령관님, 큰일 났습니다!!”

순간, 부관의 등에서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닐스가 가장 싫어하는 건 허둥대는 병사다.

“이 새끼가!!”

아니나 다를까, 닐스가 집어 던진 철제 장식품이 곧장 문을 열고 들어온 병사를 향해 날아갔다.

“으와아아악!”

“이 새끼가 돌았나? 야, 너 뭐야! 어?”

“사, 상병 권욱! 죄, 죄송합니다!”

부관은 딱한 얼굴로 새파랗게 질린 상병을 바라보았다.

딱 봐도 들어가기를 꺼린 장교가 애먼 하급 병사를 들여보낸 모양이었다.

“야, 내가 늘 말했지. 군인한테 제일 중요한 게 뭐라고 했어? 어?”

“그, 그게…….”

“가오, 이 새끼야. 가오!! 폼으로 살고, 폼으로 죽는 게 군인이라고 했잖아!”

권욱 상병은 사시나무 떨듯 온몸을 벌벌 떨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 급한 일이 있어서 그만…….”

“하, 저 어린놈의 새끼가!”

“진정하십시오, 사령관님. 제가 따끔히 일러두겠습니다.”

부관은 급히 닐스를 뜯어말리며 완전히 얼어붙은 상병을 바라보았다.

“권 상병, 급한 일이 뭔지 말해.”

“네, 넵!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리들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 순간, 닐스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뭐?”

“그게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리들이…….”

“규모는?”

“대, 대략 수천 명 정도 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무장한 상태인가?”

상병은 긴장한 와중에도 나름 빠르게 대답했다.

“드론 정찰에 따르면 무기를 든 이들도 있지만, 대개 도검류나 구식 화기로 무장하고 있다고 합니다.”

거짓말같이 침착성을 되찾은 닐스가 부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작업에 투입된 병력 중 3개 중대 무장해서 집결시켜.”

“네, 알겠습니다!”

“거기 너, 상병.”

“네, 넵!”

“그놈들 영상 확보된 거 있나?”

“지금 바로 전송드리겠습니다!”

닐스의 얼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떠올라 있었다.

센트럴 전체에 채 열 기가 넘지 않는 순양함. 그중 한 대를 잃는다는 것은 전투에서의 승리로 덮을 수 없는 중대 과실이다.

특히 그저 잃는 게 아니라 탈취당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자신의 목을 걸어야 할 수도 있었다.

“빨리빨리 움직여!”

* * *

“난 이런 황량함이 싫구나. 역시 정글이 좋았어.”

메데이아의 어깨를 감싼 뱀 역시 혀를 날름거리며 고개를 위아래로 흔든다.

메데이아는 자신을 따르는 신도들을 비롯해 수천 명의 무리와 함께 49구역 황무지를 통과하고 있었다.

수십 대의 지프 차량과 트럭이 동원되었지만, 대부분의 신도는 걸음으로 뒤따랐다.

메데이아는 그들에게 따를 것을 지시하지 않았지만, 그녀를 여신으로 추앙하는 신도들은 기꺼이 메데이아를 따랐다.

가장 선두에 위치한 메데이아의 차량.

프랑켄이 운전대를 잡은 가운데, 보니와 클라이드가 함께 타고 있었다.

“아무래도 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건 맞는 모양입니다.”

시체 썩는 냄새가 공기 중에 뒤섞여 있다.

심각한 부상을 당한 채 사망한 이들의 시신 역시 차창 밖으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간신히 목숨을 건져 도망쳤으나, 결국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죽어 간 이들이었다.

뒤따르는 신도들은 그런 시신들에 제각기 의식을 치러 주었다.

메데이아는 그런 장면이 마음에 드는 듯 아련하게 바라보았다.

“전투란 멋진 것이지. 추억이 떠오르는구나.”

“난 싫어. 냄새가 고약하단 말이야.”

뒷좌석, 메데이아의 옆에 앉은 보니가 눈살을 찌푸리며 근처 시신으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조수석의 클라이드 역시 굳이 시체가 곳곳에 널브러진 공간을 지나쳐 가는 게 못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특히 보니가 따라온 게 걸리는지, 연신 뒷좌석을 살폈다.

“전투가 끝난 지 꽤 된 거 같은데, 굳이 여기까지 온 이유가 있나?”

“좋은 질문이야, 클라이드. 전투는 끝났지만, 가장 중요한 전리품은 현장에 남아 있단다.”

“전리품?”

“뭐랄까, 아주 비싸고 유용한 물건이지.”

메데이아는 어깨의 뱀을 쓰다듬으며 가만히 중얼거렸다.

“이번 기회에 소울을 충분히 손에 넣었으면 좋겠구나. 아무래도 몸이 예전 같지 않으니…….”

그동안 모은 소울로 백 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20대의 젊음과 힘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소울이 제대로 모이지 않았다. 아니, 모아 둔 소울 에너지마저 천천히 빠져나가고 있었다.

지금은 기껏 알마티에서 탄생시킨 요르문간드마저 통제에 따르지 않을 정도로 메데이아의 힘은 약해진 상태였다.

“나도 나이가 든 걸까? 아니면 무슨 이변이라도 생긴 걸까?”

메데이아가 홀로 음울하게 중얼거리던 중, 보니가 눈동자를 굴리며 바라보았다.

“언니, 왜 그래? 몸이 안 좋아?”

“아니. 괜찮단다, 보니.”

메데이아는 우아하게 웃으며 그런 보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보니와 클라이드는 오래전 잃어버린 아들과 딸을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이젠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까마득한 과거, 메데이아 역시 강하고 늠름한 남편을 만나 결혼했고, 남매를 낳았다.

시간이 흐르며 남편의 얼굴은 더 이상 기억나지 않지만, 잃어버린 남매의 얼굴만큼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살려 줘, 엄마!”

지금까지도 아이들의 비명이 생생했다.

센트럴은 바토리 일족을 배신했고, 남편을 살해했으며, 남매를 끌고 가 버렸다.

메데이아의 모든 것을 앗아 갔다.

그때부터였다.

그날부로 메데이아는 센트럴을 완전히 부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타인의 소울을 빼앗아 악착같이 살아남았고, 몇 차례나 재물을 바쳐 요르문간드를 부활시켰다.

악마를 처단하기 위해 자신이 악마가 되었다.

“긴 시간이었지. 정말 긴 싸움이었어.”

그러나 메데이아는 이제 자신이 한계에 이르렀음을 알았다.

원래의 수명대로라면 이미 오래전 끊어졌어야 할 목숨이니, 순리대로 흘러가는 것이리라.

“하지만 순순히 끝내 줄 수야 없는 노릇이지.”

센트럴 역시 한계에 이른 것은 마찬가지였다.

착취와 폭력으로 점철된 센트럴 역시 이제 곧 무너진다.

메데이아에게는 그 최후를 지켜볼 권리가 있었다.

“어, 저건 뭐지? 나무인가?”

보니의 천진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래, 나무로구나. 그리고 그 위에 있는 저 물건이야말로…….”

최강의 전투 기함, 플루톤.

“곧 내 것이 될 전리품이란다.”

메데이아의 몸에서 검은 뱀의 그림자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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