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170화 (171/220)

170화 운명 (1)

“Avatar#9492 재생이 완료되었습니다.”

코르지의 귓가에 착용한 이어폰을 통해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의 기나긴 이야기와 더불어 의뢰를 입력해 둔 마지막 아바타가 마침내 재생을 마쳤다.

꽤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침내 태일이 코르지의 제안을 들은 것이다.

끝까지 인내심을 갖고 자신의 이야기를 모두 들었을까?

과연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였을까?

다시금 목소리가 들려온다.

“녹화된 내용을 들으시겠습니까?”

“아니. 전부 삭제해.”

“삭제되면 복구가 불가합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래.”

“Avatar#9492에 관한 모든 기록이 삭제됩니다.”

가만히 한숨을 내쉰다.

마음 같아서는 녹화된 내용을 당장에라도 듣고 싶었다.

꽤 수다스럽게 늘어놓은 이야기를 태일이 과연 어떤 표정으로 들었을까?

과연 자신의 의뢰를 받아들였을까?

하지만…….

“대표님, 실례합니다.”

군복을 착용한 젊은 장교가 코르지 옆으로 뚜벅뚜벅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실내이건만 야만스럽게도 군화를 신은 그대로였다.

의도된 모욕일 것이다.

“조금 전, 알 수 없는 통신이 수신되었다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확인을 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공손한 부탁이었지만, 코르지 본인에게 거부권 따위는 없었다.

거절하더라도 장교는 기어코 코르지의 통신 장비를 전부 압수해 살필 것이다.

그게 장교의 임무였다.

코르지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자신의 귀에 끼고 있던 이어폰을 빼 건넸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내 모든 통신기기를 자네들에게 맡기는 게 어떤가?”

“예?”

장교가 꽤 놀란 표정으로 코르지를 바라보았다.

“…진심이십니까?

한사코 고집을 부리며 통신 장비를 몸 곳곳에 숨긴 코르지가 갑자기 순순히 모든 것을 내놓겠다고 하니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자네들, 이 늙은이를 하루에 수십 번씩 귀찮게 하지 않았는가. 심지어 시답잖은 문자까지 세세히 감시하면서 말이야.”

실제로 코르지에게 오는 통신들은 전부 흔하디흔한 광고와 대출 안내 따위의 시답잖은 것들에 불과했다.

그런 내용들을 일일이 살펴야 하는 군인들 역시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대표님, 이건 감시가 아닌 보호의 일환으로…….”

“그러니 가져가게. 내 통신 장비 다 가져가서 중요한 것만 내게 전달해 주면 될 일 아닌가.”

“…….”

장교는 코르지의 눈치를 살피더니 슬쩍 뒤로 물러났다.

그러고는 무전을 통해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보고했다.

그러더니 잠시 뒤, 다시금 코르지에게 다가와 그럴듯하게 경례를 해 보였다.

“대표님의 협조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입에 발린 말을 하는군. 이왕 감사한 김에 화장실에 설치해 둔 카메라만이라도 치워 주게. 죄수에게도 사생활이라는 게 있지 않나?”

“죄수라니요,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잠시 망설이던 장교가 공손한 어투로 말했다.

“하지만 상부에 요청을 드려 허가가 떨어지는 즉시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하겠습니다.”

“고맙군.”

며칠간의 골칫거리를 해결한 장교는 조금 전 감시망에 잡힌, ‘시답잖은 통신 신호’ 따위 어느새 잊어버린 듯 밝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보다 연회는 내일이라고 했나?”

“네. 맞습니다, 대표님.”

8월 29일, 전승기념일.

마침내 센트럴 오더가 발동했고, 그 직후 군과 집정부가 쿠데타 세력에 의해 무너졌다.

센트럴 오더로 정신없는 와중에 조용히 진행된 쿠데타였고, 그래서 성공적으로 치러진 반역이었다.

그로부터 약 한 달이 지난 지금, 50구역 연합의 붕괴 소식과 함께 아크는 연회 자리를 마련했다.

코르지를 비롯한 정치인들은 물론, 각 구역의 의원과 캐피탈 클럽의 주요 회원들까지 모두 초청을 받았다.

이제 바로 내일, 재력과 권력, 혹은 기타 재능으로 이름을 떨친 대륙의 대표자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꽤… 재미있겠군.”

“새롭게 태어나는 센트럴을 위해 담당자들이 준비를 많이 했다고 합니다. 틀림없이 즐거우실 겁니다.”

장교를 힐끗 바라본 코르지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아바타의 발동이 단 하루만 늦었다면, 코르지에게는 그 어떤 희망도 없었을 것이다.

* * *

연회장은 꽤 호화롭게 꾸며져 있었다.

맛난 음식과 고급 와인들, 일류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우아한 음악.

턱시도와 드레스를 갖춰 입은 유력가들이 고고한 얼굴로 서로 잔을 맞부딪치며 수다를 떨고 있다.

“의회를 공격한 놈들이 제로 구역까지 숨어들었다죠? 어휴,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뭡니까.”

“군에서 놈들을 잡기 위해 수색하는 모양이니, 곧 잡히겠지요.”

“물론입니다.”

이 자리에 있는 관료들은 테러리스트에 대한 소문을 들은 뒤, 군의 ‘보호’ 제안에 너무도 쉽게 서명해 버렸다.

그렇게 모인 서명들이 정당성을 부여했고, 쿠데타를 완성시켰다.

이 연회는 쿠데타의 성공에 제 스스로 기여한 바보들을 위해 마련된 자리인 셈이었다.

코르지는 그런 자들과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치밀 정도였지만, 애써 표정을 숨겼다.

그러고는 연회장 곳곳을 조용히 살폈다.

연회장이란 어떤 장소인가.

정치인들에게 있어 연회는 그저 먹고 마시는 공간이 아니다.

정말 중요한 협상은 연회장에서 농담처럼 오가기 마련이고, 정치적 동맹과 파벌은 바로 이 자리에서 도드라졌다.

정치 판도를 읽기 위해 연회장만큼 좋은 장소도 없었다.

그리고 바로 지금, 코르지는 연회장 전체에 미묘하게 흐르는 긴장감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연회장에 군인들이 많습니다그려. 아무리 경호를 위해서라지만…….”

“테러를 막기 위해서라지 않습니까. 어쩔 수 없지요.”

덜떨어진 몇몇 의원들은 한 달 전, 전승기념일에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그러나 아무리 눈치가 무딘 이들도 연회장의 분위기 가운데 이상함을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연회장 곳곳에 배치된 군인들.

“허허, 에이프럴 장군은 보이지 않는군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프레드 장군도 오늘 연회에 참석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한창 바쁘시겠지요.”

군부 장성들의 부재.

그것들은 전부 불길한 징조였다.

그 와중에 눈치 빠른 관료들이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의회 재건에 시간이 꽤 걸린다는군요. 그 테러리스트들을 얼른 잡아야 할 텐데 말입니다.”

“군에서 우릴 지켜 준다니, 그나마 다행이지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군의 이번 대처는 꽤 기민했어요.”

기회주의자들은 군인들의 눈치를 슬슬 살피며 은근슬쩍 아부를 떨기 시작했다.

그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이 연회가 누구의 승리를 뜻하는지, 그리고 누구에게 잘 보여야 하는지.

군부가 모든 것을 장악했다.

코르지는 지팡이를 쥔 채 가만히 연회장을 누볐다.

매번 한마디라도 더 건네려 애쓰던 자들이 오늘만큼은 슬슬 자신의 눈을 피하고 있다.

연회장을 돌아다니는 내내 누구 하나 먼저 다가와 인사를 건네는 이가 없었다.

‘코르지 브레드필드’, 그 이름이 상징하던 권력은 이미 사라져 버렸다.

이번 연회는 그 사실을 더없이 명백히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장면을 만들어 낸 인물은 다름 아닌 코르지, 자신이었다.

센트럴 오더의 의결을 이끈 자도, 그렇게 군부에 막대한 권한을 부여한 자도 바로 본인 아니었던가.

“…피곤하군.”

코르지는 천천히 의회 구석진 곳에 놓인 의자에 다가가 앉았다.

허탈감과 무력감으로 인해 제대로 서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대표님, 괜찮으십니까?”

줄곧 곁에서 경호하던, 아니, 감시하던 장교가 코르지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이 늙은이 때문에 자네가 고생이 많군.”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코르지의 감시를 맡은 젊은 장교는 꽤 좋은 사람이었다.

상부의 명령에 따라 코르지의 집에 군홧발로 들이닥쳐 그의 모든 것을 감시하고 통제했지만, 장교는 그 모든 과정에 나름의 죄책감을 느끼는 듯 보였다.

그런 인물을 코르지에게 투입한 것은 나름의 배려였는지도 모른다.

“내 조금 지쳐서 여기서 좀 쉬려 하는데… 자네도 연회를 좀 즐기는 게 어떤가? 아까부터 젊은 여인들이 자네한테 눈길을 보내던데.”

“제 임무는 대표님의 보호입니다.”

“자네가 몇 분 눈을 뗀다 해서 누가 뭐라고 하겠나?”

“…….”

평소라면 장성조차 되지 못한 하급 장교 따위가 들어올 수 없는 공간.

경호 임무를 맡은 하급 장교들은 비싼 음식과 술을 마시며 마치 자신들이 연회의 주인인 것처럼 행세하고 있었다.

“술이 달군. 이봐, 이거 한 병 더 가져와 봐!”

“호오, 아가씨. 어느 가문에서 오셨소? 딱 보니 내 이상형인데 말이야.”

콧대 높은 센트럴의 유력가 중 누구 하나 하급 장교들의 그런 만행을 막지 못했다.

그럴수록 장교들의 행패는 더욱 심해졌다.

“계속 대표님 곁을 지키고 있겠습니다. 그러니 안심하고 쉬십시오.”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코르지를 담당한 장교는 의연한 태도로 곁을 지키고 섰다.

행패를 부리는 동료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저는 저런 작자들과 다릅니다.”

“그래, 고맙군.”

코르지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며 지팡이에 몸을 기댔다.

그렇게 잠시 쉬던 중, 옆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표님, 이렇게 뵙게 되는군요!”

“…유키 의원.”

제인과 혼담이 오가며 어쩌면 사위가 되었을지도 몰랐을 사내.

의사당에 있었으나 아무런 상처 없이 빠져나온 사내.

유키가 미소를 지으며 코르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무사해 보여서 다행이군. 얼마 전까지 실종 상태라고 들었네만.”

“운 좋게 살아남았습니다만, 한동안 몸을 감추고 있었지요.”

“…그랬군.”

유키는 꽤 오랫동안 자신의 야심을 숨긴 채 한량처럼 살아왔다.

그러나 적어도 코르지는 유키의 진정한 모습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 교활하고 뛰어난 정치인이다.

“자네가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다는 뜻이겠군.”

코르지의 의미심장한 한마디에 유키의 표정이 일순간 차갑게 변했다.

그러나 금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대표님이십니다.”

“아크 군과는 언제부터 친해진 건가?”

“실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목숨을 잃을 뻔한 그날, 아크의 손을 잡았죠.”

“그 친구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면서도 그 손을 잡은 건가?”

“알았기에 기쁜 마음으로 잡은 겁니다.”

“유키 의원…….”

“대표님께서는 존경받아 마땅한 분입니다. 하지만 정치가와 유력가 대부분은… 아시다시피 그저 배부른 돼지들일 뿐이지요.”

유키의 발언은 무례하고 위험했다.

그러나 유키는 멈추지 않고 손을 들어 연회장을 가리켰다.

“그래요, 이 자리에서 벌벌 떨고 있는 저 멍청이들 말입니다.”

코르지는 그런 유키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평온하게 물었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에서 전부 치워 버릴 생각인가?”

유키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진 바로 그 순간, 연회장 앞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모두 잠시만 주목해 주십시오.”

연회장의 유력가들은 물론, 행패를 부리던 장교들까지도 자세를 바로 한 채 연회장 전면 무대를 바라보았다.

그와 함께 턱시도를 차려입은 사내가 연회장 앞문 쪽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젊은 군 장성들을 대동한 채 너무 가볍지도, 너무 무겁지도 않은 발걸음으로 무대 위에 오르는 사내.

그는 다름 아닌 드림 코퍼레이션의 후계자, 아크 탈로스였다.

“이 자리를 주최해 주신 캐피탈 클럽의 대표님을 모시겠습니다. 모두 박수로 환영해 주시기 바랍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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