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165화 (166/220)

165화 격동하는 대륙 (8)

알마티 지하 도시가 폐쇄된 지 약 한 달이 지났다.

몇 개의 쓰레기 배출구를 제외한 지하 통로는 전부 막혔으며, 고급 주택들이 모여 있던 리치 타운 역시 완전히 사라졌다.

시내 곳곳에서 주택 건설을 위한 공사가 한창이었고, 일부 철거된 장벽의 자재가 건설에 활용되었다.

지하 도시 출신과 지상 출신 주민들 사이의 폭력 사태는 여전히 빈번했지만, 자치 경찰이 재편성되면서 그럭저럭 치안이 유지되고 있었다.

근방 숲 지대 역시 빠른 속도로 개발되고 있었으며, 그렇게 마련된 주거지와 방위 시설들은 알마티의 메타휴먼들이 관리할 예정이었다.

메타휴먼에 대한 테러 역시 여전히 벌어지고 있었지만, 몇몇 메타휴먼들을 경찰에 편입하면서 혐오 범죄에 강력하게 대응했다.

“지난 몇 시간 동안 알마티 곳곳을 살펴보았습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재건되고 있더군요. 솔직히 시장님의 능력에 진심으로 감탄했습니다.”

베르코프 가(家)의 주택이던 시청 사무실에 앉은 안도 애슈턴이 루키우스를 보며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9구역의 기업가이자 정치가로 살아온 안도는 알마티의 복구가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안도의 찬사를 들은 베르코프의 표정은 담담했다.

“고맙소. 하지만 그게 어디 나 혼자 한 일이겠습니까?”

알마티에 산재하던 난제들은 분명 차근차근 해결되고 있지만, 그 뒤편에는 초인적 업무량이 있었다.

한 달 사이 루키우스의 얼굴은 눈에 띄게 수척해진 상태였으며, 짙은 피로가 만성적으로 새겨져 있었다. 그건 경찰을 책임진 바르코와 숲 개발을 담당한 카심, 재정을 맡은 마틴 역시 마찬가지였다.

루키우스는 함께 사무실에 배석한 바르코, 카심, 마틴 등 세 사람을 차례로 바라본 뒤, 눈앞 손님들에게 다시금 시선을 돌렸다.

안도 애슈턴의 옆에는 알마티의 은인이라고 할 수 있는 민호, 페이진, 카츠미가 줄지어 앉아 있었다.

“말씀하신 제안에 대해 열심히 고민해 보았습니다.”

루키우스는 안도의 제안을 들은 뒤, 지난 몇 시간 동안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었다.

유혹적이면서도 위험한 제안이었고, 결정을 내리기에 따라 자칫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루키우스는 결론을 내렸다.

“죄송하지만… 거절입니다. 49구역 전투에 참여할 수는 없소.”

루키우스의 확답을 들은 카심과 마틴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반면, 바르코는 다소 안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내부에서도 의견이 많이 갈렸소. 특히 안도 씨가 제안한 9구역의 재정 지원이 지금 우리에게는 절실하다오.”

안도의 제안은 단순했다. 49구역에서 벌어지는 전투에 알마티도 참전할 것.

그 대가로 안도는 알마티의 복구에 필요한 막대한 재정 지원을 약속했다.

카심과 마틴은 안도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카심은 지하 가장 어두운 곳에서 버려진 메타휴먼을 수리하며 살아왔고, 마틴은 부유한 자본가로 오랫동안 알마티의 재정을 책임졌다. 그처럼 상반된 둘이 이번 문제에서만큼은 생각이 일치한 것이다.

카심은 49구역에 집결한 메타휴먼에 대한 지원을 주장했고, 카심은 생색만 내는 참전만으로 안도의 재정 지원을 끌어낼 수 있을 거라고 역설했다.

오로지 경찰을 이끄는 바르코만이 센트럴의 저력과 인력 동원의 문제를 들어 참전을 반대했다.

그리고 오랜 고민 끝에 루키우스는 결국 안도의 제안을 거절했다.

“아쉽군요.”

안도는 예상했다는 듯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카츠미와 페이진은 달랐다.

“어째서죠? 센트럴은 알마티 역시 노리고 있어요.”

“연합은 이미 첫 전투에서 승리하기까지 했어. 알마티에서 조금만 돕는다면…….”

“그래도 완전히 센트럴을 무너뜨리긴 어렵겠지. 솔직히… 첫 전투에서 센트럴이 전력을 쏟았다고 생각되진 않네.”

루키우스가 흥분한 두 사람을 보며 조용히 말했다.

“우린 센트럴과 전면전을 벌일 준비가 되지 않았네.”

“이미 전쟁은 시작됐어요. 알마티가 센트럴 오더에 거부를 표한 이상, 놈들은 분명 알마티를 그냥 두지 않을 거라고요!”

“필요하다면 늦게라도 센트럴 오더에 응할 생각이네.”

생각지도 못한 루키우스의 말에 카츠미와 페이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비단 두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이보게!”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카심과 마틴 역시 깜짝 놀란 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카심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마틴의 얼굴에는 은근한 기대감이 떠올라 있었다.

심지어 바르코마저도 은근히 놀라는 기색이었다.

“그래, 진심이네.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겠지만, 센트럴에 정면으로 맞서는 건 최대한 피할 생각이야.”

그러나 이번에도 안도는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심지어 루키우스의 결정에 동의를 표하기까지 했다.

“…현명한 판단이십니다.”

“이해해 줘서 고맙소.”

카츠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떻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죠? 놈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빤히 알면서!”

센트럴은 알마티 지하 도시 주민들을 몰살시키려는 음모를 꾸몄다.

알마티 혼란을 계기로 알마티의 모든 시설을 자신들의 통제하에 넣으려 했다.

그런데도 지금, 루키우스는 그런 센트럴과 손을 잡을 수 있다 선언한 것이다.

“카츠미, 그만해.”

그러나 분노한 카츠미를 말린 이는 다름 아닌 민호였다.

민호 역시 안도처럼 루키우스의 결정을 예상한 듯 담담한 얼굴이었다.

루키우스는 붉게 달아오른 카츠미를 보며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미안하네. 자네들에게는 그저 미안하다는 말 외에 할 말이 없어.”

안도가 가만히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루키우스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고개를 드십시오, 시장님. 알마티 주민들은 오로지 시장님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시장님께서 이런 판단을 내리는 것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안도 씨.”

“솔직히 전 시장님을 과소평가했습니다. 전 시장님이 이상론자일 거라 생각했거든요.”

지하 도시 주민들을 이끌고 지상의 체제를 전복시킨 남자.

리치 타운을 없애고, 암묵적으로 존재하던 계급을 붕괴시킨 남자.

메타휴먼들을 포섭하고, 장벽을 해체하기 시작한 남자.

안도는 그런 루키우스를 ‘혁명가’라 생각했다. 이상을 위해 현실과 끊임없이 맞서 싸우는 존재, 현실과 타협하기보다 이상을 위해 끊임없이 맞서는 존재가 바로 혁명가 아니던가.

그러나 정작 도시에 들어와 알마티의 상황을 지켜본 안도는 루키우스가 그 누구보다 훌륭한 행정가이자 정치가임을 알았다.

루키우스는 꾸준한 대화와 타협의 과정을 거쳐 반대편을 포섭했고, 주민들의 불만을 능숙하게 조절했을 뿐 아니라 도시 복구를 위해 힘을 모을 수 있는 환경을 구축했다.

그 누구보다 현실에 밝았으며, 세심하게 도시를 복구해 나가고 있었다.

그러니 전쟁에 참여해 달라는 안도의 제안에 응할 수 없었다.

“다음에 다시 뵐 땐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좋겠군요.”

“동감이오.”

안도는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한 뒤, 천천히 방을 나섰다. 그러나 카츠미와 페이진은 루키우스를 사납게 노려본 뒤, 말없이 안도의 뒤를 따랐다.

마지막으로 민호가 방을 나서려는 찰나, 루키우스가 그를 붙잡았다.

“이보게, 태일 군은 같이 오지 않았나?”

“…….”

민호는 말없이 가만히 루키우스의 눈을 바라보았다.

“혹 지난달 의회 테러 사건에서… 무슨 해라도 당한 건 아니겠지?”

비록 안도의 제안을 거절했지만, 루키우스는 그 누구보다 진심으로 연합 측 상황에 공감하고 있었으며, 태일 일행의 도움에 감사하고 있었다.

민호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안도를 차갑게 대할 수 없었다.

“저희도 아직 그의 소식을 알지 못합니다.”

“…그렇군.”

“하지만 살아 있을 겁니다.”

그 누가 감히 태일을 살해할 수 있을까.

그가 그렇게 허무하게 죽어 사라진다는 것 따위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겠지. 아니, 그래야만 하네.”

루키우스가 결연히 말하자 옆에 앉아 있던 카심 역시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마틴과 바르코는 태일에 대해 잘 알지 못했기에 의아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이야기는 잘되셨습니까?”

안도가 비공정으로 돌아오자 목발을 짚은 카를로스가 다가와 조심스럽게 묻는다. 그러나 일행의 어두운 표정을 보자 시무룩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잘 안 되셨군요…….”

“유키 의원에 대한 소식은 아직 없나?”

“방금 시신 몇 구가 더 발견됐다는 기사가 나왔지만, 의원님은 그 명단에 없었습니다.”

“그래, 분명 살아 있을 거야.”

“…….”

카를로스는 의회 테러 이후 줄곧 실종된 유키를 찾고 있었으며, 안도는 그런 카를로스를 보좌관으로 거두었다.

잠시간 침묵이 이어졌다.

안도가 마음을 다잡은 듯 비공정 회의실 원탁 앞에 걸터앉으며 잠긴 목소리로 부탁했다.

“카를로스, 사망자 목록을 알려 주겠나? 내가 직접 읽기에는 좀… 두렵군.”

카를로스는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뒤, 발견된 사망자의 목록을 찬찬히 읊기 시작했다.

“앤드류 의원, 사볼라 보좌관, 하륜 의원…….”

민호와 카츠미, 페이진 역시 원탁에 둘러앉으며 조용히 희생자들의 이름을 경청했다.

길게 이어진 목록 안에는 청년당의 간사였던 엔비를 비롯해 수십 명의 의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해리 의원님의 시신 역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카를로스의 마지막 한마디에 안도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평생을 원망하고, 심지어 증오했던 아버지.

가족에게 버림받은 채 외롭게 살았고, 그 와중에 남몰래 뒤에서 안도를 도왔다.

오해를 사면서도 안도의 실수를 바로잡았고, 아들을 위해 첩자로 행동하는 것조차 망설이지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해리는 자신의 형제를 살해한 인간이자, 할아버지의 시신을 잿더미로 만든 패륜아였다. 가문의 그 누구도 해리를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오로지 단 한 사람, 안도 자신만을 제외하고.

“안도 씨, 괜찮습니까?”

민호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네, 괜찮습니다.”

자세를 바로 한 안도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건 의사당 내부까지 수색이 진행되었다는 뜻이겠죠. 아직껏 발견되지 않은 이들은 생존해 있다고 보아야 할 겁니다.”

명단에 유키 의원은 물론, 태일의 이름 역시 없었다.

이어 카를로스가 안도에게 단단히 봉인된 서류 봉투를 건넸다.

“의원님, BW에서 테러리스트들의 정보를 보내왔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서류에 집중되었다.

긴장된 얼굴로 봉투의 봉인을 푼 안도가 가만히 서류를 꺼냈다.

그러고는 가만히 서류의 내용을 읽어 내려간다.

그 와중에 안도의 표정이 점차 차갑게 굳어갔다.

“……의원님?”

“뭐라고 써 있지? 대체 그 녀석들, 누구야?”

안도의 얼굴은 어느새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안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메타휴먼의 생산 정보는 법에 따라 매월 공시됩니다. 식별 번호가 1년간 보관되죠. 물론 로보티안법의 제정 이후 큰 의미가 없어졌지만, 어쨌든 공시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다소 뜬금없는 안도의 설명에 민호, 카츠미, 페이진, 카를로스 모두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지난 4월, 드림 코퍼레이션은 공시 의무를 위반했습니다. 메타휴먼의 도난 때문이라고 발표했지만, 누구도 믿는 사람은 없었죠. 물론 크게 신경 쓰는 사람들 역시 별로 없었습니다.”

“지금 그 얘기를 하는 건 설마…….”

“네. 당시 의원을 습격한 테러리스트들은 당시 사라진 메타휴먼들입니다.”

안도의 말이 끝난 뒤,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메타휴먼을 제작한 드림 코퍼레이션, 그리고 석연찮은 이유로 갑자기 사라져 버린 신규 메타휴먼들. 그런 메타휴먼들이 몇 달 뒤 갑자기 나타나 의회를 날려 버린 것이다.

“집정부에서도 이미 이 정보는 손에 넣었을 겁니다. 아니, 이미 며칠 전에 진상을 파악했겠죠.”

BW가 대륙에서 손꼽히는 기업이라 해도 집정부의 정보력을 넘어설 리 없다.

그러나 지금껏 집정부에서는 드림 코퍼레이션을 조사하거나 테러리스트들을 수배하지도 않았다.

“집정부까지 선이 닿아 있다는 거군.”

“…그렇게 보아야겠죠.”

바로 그때였다.

원탁 한가운데 홀로그램에 붉은 글씨가 떠올랐다.

[속보].

“아, 뭔가 정보가 올라온 모양입니다!”

카를로스가 다급히 일어나 홀로그램의 버튼을 누르자, 한 문장이 떠올랐다.

[동부 반란군 괴멸].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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