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164화 (165/220)

164화 격동하는 대륙 (7)

“기란, 지금 당장 이거 풀어.”

카렌은 이를 악문 채 기란을 노려보았다.

늘 그림자처럼 모습을 숨긴 채 카렌을 호위하는 1급 경호원 기란. 그러나 기란은 온몸이 꽁꽁 묶인 카렌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

“기란!”

“안 됩니다, 아가씨.”

센트럴의 전투순양함 플루톤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기란은 연막을 터뜨리고는 주변 연합 병력을 솜씨 좋게 기절시켰다.

그러고는 카렌을 미리 준비해 숨겨 둔 PAV에 태웠다.

“이러지 마, 제발.”

카렌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을 태운 PAV는 스텔스 모드로 공중에 떠올랐다.

PAV가 전장에서 벗어날 때 즈음, 플루톤의 포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바깥에서 굉음과 함께 어마어마한 불길이 인다. 처절한 비명과 함께 시꺼먼 연기가 피어올랐다.

카렌은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마구 몸부림쳤지만, 기란의 포박을 풀 수는 없었다.

“난 연합의 대표야, 기란! 저들을 조직한 게 바로 나란 말이야.”

기란은 십 년도 넘는 시간 동안 카렌의 호위 임무를 수행해 왔다.

아크를 비롯해 수많은 유력가들이 막대한 연봉을 제안하며 스카우트하려 했지만, 기란은 끝까지 카렌의 곁에 남았다.

그런 기란이 주인인 카렌의 지시마저 무시한 채 이런 일을 벌이는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

“아가씨의 안전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기란!”

“승산 없는 전투입니다.”

“그건 아직 모르는 일이야. 일단 후퇴해서 전열을 재정비하면……!”

“죄송합니다.”

전투순양함이 뜬 이상 연합군에 희망 따윈 없다. 기란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지금과 같은 도망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기란에게는 연합의 승패도, 대륙의 미래도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카렌을 제외한 다른 이들의 생사는 아무래도 좋다.

오로지 카렌을 안전하게 경호하는 것, 그 한 가지만이 기란의 목표였다.

오히려 이 순간, 기란에게 신경 쓰이는 것은 지상에서 죽어 가는 연합 병사들이 아니라 분노 어린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는 카렌이었다.

“용서하십시오, 아가씨.”

지금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자신의 행동을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연합군이 전멸하고 나면, 50구역이 잿더미가 되고 나면 결국 깨달을 것이다.

카렌 홀로 바꿀 수 있는 세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어느새 카렌은 고함을 지르지도, 몸부림치지도 않았다.

대신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 안전 때문이라고 했지?”

“네, 아가씨. 그러니 부디…….”

“지금부터 내가 위험해지는 건 전부 너 때문이야, 기란.”

“…아가씨.”

포박이 풀리는 순간, 자해라도 하겠다는 뜻일까?

카렌의 협박과도 같은 말에 기란은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카렌의 눈을 마주하지 못한 채 바깥으로 시선을 돌려 버린다.

불길이 오르는 지상, 그곳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저곳은 사지(死地)다.

쿠구구구…….

채 전장을 완전히 벗어나기도 전, PAV가 갑자기 불안하게 흔들거리며 휘청였다.

‘엔진 이상인가?’

당황한 기란이 조종석 쪽을 바라보았다.

스스스스…….

“저건……?”

조종석 쪽에서 초록빛의 무언가가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정체불명의 생물은 곧이어 수십 갈래로 갈라져 조종석 곳곳으로 파고들었다.

그 모습을 본 기란이 황급히 달려가려는 순간, 기란의 몸이 균형을 잃고 거세게 휘청였다.

“윽!”

곧이어 아래쪽을 바라본 기란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발밑에서, 비행체의 철판 바닥에서 초록빛의 넝쿨이 터무니없이 빠른 속도로 자라나 자신의 발목을 휘감고 있었다.

비단 바닥뿐만이 아니었다. 조종대에서, 벽면에서, 카렌이 포박된 의자 다리에서 식물들이 자라나며 온 기체를 감싸기 시작했다.

파각! 퍽!

우악스럽게 뿌리를 내린 식물로 인해 철판의 틈이 벌어지고, 의자 다리가 부러진다.

PAV는 이제 당장에라도 추락할 듯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식물을 키워 내는, 신과 같은 능력.

온갖 능력자들에 대한 소문이 도는 뒷세계에서조차 그런 소문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능력자가 PAV를 공격하고 있다.

기란은 검은 날의 단검을 빼 들어 역수로 잡고는 카렌 쪽을 바라보았다.

“아가씨!!”

카렌을 지켜야 한다.

자신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더라도 카렌만큼은 반드시 살려서 탈출시켜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카렌의 눈을 들여다보는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던 온갖 생각들이 별안간 사라졌다.

“아가…씨?”

고개를 들어 올린 카렌이 가만히 기란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카렌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지금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는 카렌이 아니다.

“하필 이런 상황에서 날 깨우다니…….”

툭!

카렌의 몸을 묶고 있던 줄이 끊어진다.

자유로운 몸이 된 카렌이 태연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흔들리는 PAV 내부에서도 그녀는 조금의 흔들림 없이 서 있다. 아니, 어느새 피어오른 나무줄기들이 그녀의 다리를 단단히 붙잡아 지탱하고 있었다.

카렌이 가만히 고개를 돌려 연기에 뒤덮인 자상과 포격을 퍼붓고 있는 플루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니. 이런 상황이라서 날 깨운 거구나.”

카렌이 천천히 몸을 움직이자 발밑의 넝쿨들이 그녀의 발길을 따라 자라난다.

그녀가 투명한 창에 손을 가져다 대자 주변에 무수한 꽃들이 피어났다.

기란은 그 믿을 수 없는 광경에 그저 숨을 멈추고 있었다.

그러다가 카렌을 향해, 아니, 카렌의 모습을 한 여인을 향해 물었다.

“당신, 대체… 누구지?”

그러자 여인이 다시 고개를 돌려 기란을 바라보았다.

“지금 중요한 건 고작 그런 게 아니야.”

목소리는 더없이 잔잔했지만, 그녀로부터 느껴지는 압박감이 기란을 무겁게 짓눌렀다.

“일단 저 사람들부터 구해야겠어. 그러기 위해 날 깨운 것일 테니까.”

“아가씨는… 어떻게 된 거지?”

“카렌이라면 걱정할 필요 없어. 지금은 얌전히 잠들어 있으니까. 그 아이가 날 깨웠거든.”

“…….”

인격의 분리? 애당초 카렌의 정신 안에 다른 인격이 잠들어 있던 걸까?

아니, 그럴 리는 없다. 카렌은 지금껏 다른 인격을 내보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카렌의 눈동자는…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그녀는 카렌이 아니다.

“카렌이 널 해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어. 나 역시 너에게 손을 대고 싶은 마음은 없어. 그러니 날 방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어느새 PAV는 흔들림을 멈춘 채 조용히 지상에 착륙하고 있었다.

그사이, 플루톤의 포격이 잦아들었다.

* * *

사방에서 레지스탕스 대원들이 죽어 간다.

눈을 뜨기조차 힘들 만큼 매캐한 연기와 폐를 타고 들어오는 열기, 고막을 찢어 버릴 듯한 굉음까지.

도영은 그 지옥의 한가운데에서 악마와도 같은 플루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얌전히 바나 지키고 있는 건데…….’

만약 이곳에 오지 않았더라면, 손님 없는 레미제라블에서 그저 시간이나 죽이고 있었을 것이다. 밤이 되면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고급 와인을 빼 마시다 잠들었겠지.

그러다 아침 일찍 교대를 위해 바에 출근한 지은이 호되게 등짝을 후려치면, 그제야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나는 것이다.

‘지은이 녀석, 잘하고 있으려나?’

어리바리하던 신입 지은은 어느새 제법 뛰어난 바텐더가 되어 있었고, 그녀의 칵테일은 50구역 주민들에게도 꽤 인기가 좋았다.

문득 이곳으로 떠나올 적 도영을 붙잡으며 말리던 지은의 얼굴이 떠오른다.

“이젠 레지스탕스가 아니라 바텐더라고 했잖아?! 근데 왜 오빠가 가야 하는 건데? 어?!”

눈물콧물 흘리며 뜯어말리던 지은에게 도영은 짐짓 가볍게 말했다.

“무책임한 사장을 다시 데려올 테니, 그때까지 바를 잘 지키고 있어. 잠시 갔다가 금세 멀쩡히 돌아올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지난번에도 죽을 뻔했잖아! 이제 더 이상 그런 거 하지 말고, 여기 있자, 응?”

“그래. 그땐 너랑 사장 덕분에 살았지.”

의원 암살에 참여했을 당시, 도영은 이미 한번 죽은 목숨이었다. 당시 그를 구한 이가 바로 지은과 태일이었다.

“그래서 내가 사장을 찾으러 가는 거야. 사장만 찾으면 곧장 돌아올 거야. 전혀 위험하지 않아. 빨리 돌아오겠다고 약속할게.”

“거짓말!!”

지은은 마지막 순간까지 도영의 옷소매를 붙잡고 늘어졌지만, 도영은 결국 연합을 따라 이곳까지 왔다.

그렇게 고집을 부려 여기까지 왔더니, 결국 이 꼴이다.

덜덜 떨리는 다리에 애써 힘을 주어 몸을 일으켰다. 복부에서 솟아 나온 피가 다리를 타고 흘러내린다.

철컥!

조악한 소총을 꺼내 어깨에 견착하고는 그대로 허공의 플루톤을 겨누었다.

딸칵, 탕!!

총성이 울렸지만, 사방의 요란한 포성에 묻혀 제대로 들리지조차 않는다.

당연하게도 그렇게 쏘아진 한 발의 총탄이 플루톤을 격추시키는 기적 따위 일어나지 않았다.

“하아… 하아……. 쿨럭!”

다시금 한쪽 무릎을 꿇고 주저앉은 그때, 플루톤의 포격이 멈추었다.

포격이 중지된 막간, 주변을 둘러보았다.

레지스탕스 대원들은 이미 대부분 숨이 끊어져 있고, 중상을 입은 생존자들이 신음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 와중에 도영은 쇠 파편이 깊숙이 박혀 든 자신의 복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당장 죽을 정도의 상처는 아니었지만, 통증으로 인해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남은 총알은 아직 열아홉 발.

포격이 멈추었으니, 이제 지상군이 투입될 것이다. 적어도 소지한 총알은 모두 사용하고 가야겠지.

그렇게 총을 고쳐 잡은 순간, 누군가가 도영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잠깐.”

주름진 손이 도영의 눈에 들어왔다. 피로 물든 손은 조그맣게 떨리고 있었다.

“자네의 상처는… 그리 깊지 않아. 아직 살 수 있네.”

고개를 들어 올리니, 하얀 늑대 가면이 도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장님?!”

“쿨럭!”

하얀 늑대가 거세게 기침하며 휘청거린다.

그와 함께 하얀 늑대의 옆구리에서 검붉은 피가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나왔다.

“대장!!”

늘 곁을 지키던 부관이 고함을 지르며 하얀 늑대를 부축했다.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대장. 제발……!”

부관이 떨리는 목소리로 주저앉은 하얀 늑대의 옆구리에 손을 가져다 댔다.

츠츠츠…….

부관의 손끝에서 하얀빛이 뿜어져 나온다.

그의 능력 덕분에 하얀 늑대의 찢어진 피부가 일부 수복되었지만, 쏟아져 흐르는 피를 완전히 막아 내진 못했다. 게다가 상처는 옆구리뿐만이 아니었다.

파편들은 그의 왼 어깨와 복부, 허벅지에 박혀 들었으며, 근육과 내장기관을 찢어발겼다.

무릎을 꿇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던 하얀 늑대가 가만히 부관의 손목을 붙잡았다.

“국빈아, 이만하면… 됐다.”

“대장!!”

“난 됐으니까, 이 친구를 살려. 너라면… 할 수… 있지?”

“대장!!”

부관이 절규했지만, 하얀 늑대는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가면을 벗었다.

그의 눈을 본 부관이 이를 악문 채 상처에서 손을 떼었다. 그러고는 곧장 도영의 복부 치료를 시작했다.

한편, 도영은 가면을 벗은 노인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시장의 쌀집을 운영하던 노인.

시장 사람들 모두 그가 레지스탕스 대장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그가 가면을 벗고 있을 때만큼은 모두가 그를 평범한 이웃으로, 쌀집 주인으로 대했다.

그는 가격 흥정에 능한 주인이었으며, 차를 대접하기 좋아하는 소탈한 노인이었다.

“긴… 시간이었구나.”

노인은 가만히 중얼거리며 사방에 널브러진 시신들을 둘러보았다.

“대장…….”

하얀 늑대가 손을 뻗어 도영의 손을 붙잡았다.

“미안…했다.”

하얀 늑대는 충혈된 눈으로 도영에게 사과했다.

“사지인 줄 알면서도 너를… 보냈지.”

의원 암살 작전에 도영을 참여시킨 이는 바로 하얀 늑대였다.

“제가 원한 거였어요.”

그러나 그 제안에 응한 이는 다름 아닌 도영 자신이었다.

“네 아버지는… 대장은… 좋은 사람이었다.”

노인은 자신이 평생 쓰던 가면을 도영에게 건넸다.

그러고는 도영이 쥐고 있는 소총으로 시선을 돌렸다.

“총을 내게… 주겠나.”

노인이 무엇을 하려는지 깨달은 도영이 고개를 저었다.

그를 남겨 둔 채, 적 앞에 남겨 둔 채 살아 도망칠 수는 없다.

“자네는… 젊어. 하지만 이 늙은이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라네.”

“대장…….”

한편, 부관은 하얀 늑대의 지시에 따라 도영의 복부 상처 치료를 거의 마친 상태였다.

“가게.”

부관이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도영을 일으켜 세웠다.

통증은 여전했지만, 아까와 달리 어느 정도는 움직일 수 있었다.

“총을… 줘.”

노인은 도영의 소총 개머리판을 붙잡은 채 다시 한번 중얼거렸고, 도영은 결국 열아홉 발의 탄환이 남은 소총에서 손을 떼고 말았다.

“꼭 살아서 돌아가게.”

레지스탕스 대장이었던 사내는 죽음을 앞둔 이 순간, 50구역의 해방을 부르짖거나 센트럴에 대한 분노를 터뜨리지 않았다.

그저 도영에게 살아서 돌아가라는 말, 그뿐이었다.

그 순간, 사방에서 총소리가 들려온다.

탕! 탕탕!!

그나마 숨이 붙어 있던 생존자들이 곳곳에서 죽어 나갔다.

노인은 도영의 총을 고쳐 잡고 적이 몰려오는 안개 속을 겨누었다.

도영이 하얀 늑대를 향해 뭔가 대답하려 했지만, 부관이 머뭇거리는 그를 뒤로 잡아끌었다.

“가야 해. 대장의 뜻에 따라…….”

부관의 얼굴은 이미 눈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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