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162화 (163/220)

162화 격동하는 대륙 (5)

“‘겁을 먹었다’라…….”

마치 과시라도 하듯 꾸며 놓은 고급 텐트와 S급 경호원들.

언뜻 센트럴의 습격에 대비하기 위한 조치처럼 보였지만, 사실 50구역 지도자들이 경계하는 이는 바로 알렉세이 딘이었다.

지난 전투에서 이들은 딘의 기계병단과 소울웨폰이 가진 힘을 똑똑히 목격했다.

만약 딘의 기계병단이 가진 힘을 몰랐다면, 딘이 소울웨폰의 제작자로 유명한 사막여우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과연 이들이 협상 테이블에 나오긴 했을까?

피식 웃으며 턱을 팔에 괴었다.

“그래, 제대로 봤네. 다들 겁을 먹고 있어.”

텐트 안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딘을 바라보는 몇몇 시선에는 짜증과 경멸, 멸시가 뒤섞여 있었다.

특히 레지스탕스 노인은 가면으로 표정을 숨기고 있음에도 적대감이 번연히 드러날 정도였다.

그러나 그건 그저 딘의 말 때문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경호원을 비롯한 몇몇 인간들은 딘에 대한 적의를 숨기지 않았다.

붉은 눈동자.

아마 모든 증오의 뿌리는 바로 거기에 있을 것이다.

‘그 녀석들도 이런 시선에 매일같이 노출되었겠지.’

딘은 가이와 50구역 메타휴먼들을 떠올리며 가만히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들은 바로 며칠 전, 저마다 심각한 상처를 입은 채 딘을 찾아왔다.

카렌이 딘을 달래려는 듯 급히 말했다.

“딘, 전투가 두려운 건 당연한 일이에요. 여기 있는 모두가, 심지어 저도 당연히 느끼는 감정이죠. 하지만…….”

“전투 말고.”

그러나 딘은 카렌의 말을 끊었다.

“우리들이 두려운 건 앞쪽이 아니라 뒤쪽이야. 등 뒤 말이야.”

“그게 무슨……!”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카렌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조용히 되물었다.

그러나 카렌은 정말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꽤 똑똑한 여자라고 들었는데.”

이곳에 오기 직전, 딘은 센트럴의 인트라넷에 잠입해 여러 정보를 얻어 냈다.

센트럴 집정부와 의회는 물론, 기업들까지도 인트라넷을 사용했기에 주요 인사에 대한 정보와 평판들을 쉽사리 얻어 낼 수 있었다.

카렌은 뛰어난 경영자였다. 많은 이들이 그녀의 외모에 매료되었으며, 재력과 능력을 탐냈다.

심지어 센트럴에 반기를 든 이 순간에도 그녀에게는 여전히 많은 팬들이 남아 있었다.

“…헛소문이군.”

그녀는 평생을 양지에서 살아왔기에 음지를 알지 못한다.

혐오와 뒤틀린 이기심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이봐요, 지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빙빙 돌리지 말고, 똑바로 말해요!”

카렌이 눈살을 찌푸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딘은 그런 카렌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메타휴먼들의 피해는 단지 눈앞의 적들 때문이 아니야.”

“메타휴먼들이 최전방에 선 걸 탓하는 거라면, 그건 가이가 자원한 거예요. 오해라고요.”

카렌은 연합의 실질적 지도자였다. 그러나 그녀는 정작 연합 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가이는 전투 중 마피아 셋에게 집단 린치를 당했어.”

“…….”

카렌이 놀란 표정으로 자켄을 돌아본다.

그러나 정작 자켄은 딘의 말을 듣고도 그리 놀라지 않았다.

“다른 친구는 레지스탕스들에 의해 머리가 깨졌지.”

“증거는 있나?”

레지스탕스의 늙은이는 조용하지만 무거운 목소리로 딘에게 반문했다. 그러나 정작 그 역시 딘의 말이 사실임을 알 것이다.

“들어 보니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던데. 아닌가? 49구역까지 오는 내내 테러 행위가 있었고, 온갖 차별과 핍박을 받았다지?”

“그건 우리도 해결을 위해 노력해 왔네. 설득하고, 지시를 내려서…….”

“하!”

딘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설득? 지시? 아군에 총구를 겨눈 반란군 새끼한테 지시를 내려? 지금 장난해?”

딘이 거칠게 책상을 내려치며 고함을 내질렀다.

“그래, 당신들이 보기에 우리는 사람이 아니겠지. 붉은 눈깔을 가진 녀석들은 죄다 노예나 기계 같은 거잖아? 어디, 말해 봐. 당신들 눈에 나도 그렇게 보이나? 내가 화를 내는 것도 그저 인간을 흉내 내는 것처럼 보여?”

그때껏 잠자코 있던 강필이 딘을 진정시키려는 듯 손을 들어 올렸다.

“이봐, 그건 오해야. 지금 우리는 당신과 협상하기 위해 여기 앉아 있는 거라고. 대화 상대로 여기지 않았다면 애당초 여기까지 나오지도 않았을 거야.”

“그야 지금 당신들에게는 내 힘이 필요하니까.”

사납게 몰아붙이는 딘의 말에 그 누구도 제대로 대꾸하지 못했다.

딘은 등을 의자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들, 가이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언제 깨달았지?”

전투가 끝난 뒤, 가이를 비롯한 메타휴먼들은 연합에 복귀하지 않았다.

메타휴먼을 이끄는 지도부들의 집단 실종.

연합의 한 축이 무너질 만한 사건이었다.

“왜 찾지 않았지?”

그러나 연합 대표라는 자들은 며칠이 지나도록 가이를 비롯한 실종자들을 찾지 않았다.

자신들의 승리를 자축했을 뿐, 최전선에 선 메타휴먼들의 희생에 신경을 기울인 이는 없었다.

도리어 반겼는지도 모른다.

마피아들은 한낱 메타휴먼 따위가 자신들의 대장과 동등하게 행세한다는 사실에 분노했고, 레지스탕스 조직원들은 애당초 메타휴먼을 동료라 받아들이지도 않았으니까.

50구역 메타휴먼들은 그로부터 수일에 걸쳐 연합을 집단 탈출했다.

그들이 찾은 곳은 다름 아닌 셸터였다.

이제 연합에 메타휴먼은 없다.

“50구역 메타휴먼들은 더 이상 당신들과 함께 싸우지 않을 거야.”

딘은 마치 선언하듯 단호히 말했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이지.”

딘의 선언이 끝나자마자 깜짝 놀란 카렌이 납득할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말도 안 돼요! 우린 메타휴먼들만을 표적으로 하겠다는 센트럴의 제안도 거절했다고요. 이건 당신들의 전쟁이기도 해요!”

“마치 우리를 위해 대신 싸워 주고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군.”

딘의 비아냥에 카렌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애당초 이들에게 메타휴먼은 동원의 대상일 뿐이었다. 단 한 번도 동료였던 적이 없다.

“물론 센트럴 녀석들이 우릴 공격해 온다면 물러서지 않을 생각이야. 하지만 그렇다 해서 우리가 당신 편이라는 뜻은 아니지.”

적의 적은 아군이 아니다.

말로는 딘의 결정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카렌이 딘을 노려보며 차갑게 물었다.

“처음부터 협상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선언을 하러 온 건가요? 그래서 우리를 보자마자 경호원들의 복장에 대해 괜한 시비나 걸고 승리를 부정하면서……”

“그래서야.”

“뭐라고요?”

“당신에겐 경호원들의 어려움 따위 너무나도 작은 일이지. 전투 중 희생된 메타휴먼들 역시 불가피한 일이었을 뿐이고. 안 그런가?”

더위로 인해 와이셔츠가 축축이 젖은 경호원들, 전투 중 죽거나 다친 메타휴먼들.

카렌은 센트럴과 맞서기 위해 연합을 이끄는 리더였고, 따라서 그처럼 사소한 일에 일일이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래, 그건 너무나도 작은 일이었다.

“그래서 우린 당신과 함께 싸울 수 없어.”

카렌은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미끄러지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딘의 말을 부정하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건 전부 사실이었으니까.

딘은 애당초 그 어떤 결론도 내리지 않은 상태로 이곳에 왔다. 그러나 결국 딘의 결정을 이끌어 낸 이는 다름 아닌 카렌 본인이었다.

“더 할 얘기가 없다면, 난 이만 가 봐야겠어.”

딘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하얀 늑대가 조용히 묻는다.

“센트럴이 우리들을 무너뜨리고 나면, 자네들은 무사할 것 같은가?”

협박과도 같은 얘기였지만, 정작 말투는 일종의 호소처럼 들리기도 했다.

“붉은 눈깔을 가진 내 입장에서 볼 때, 당신들이나 센트럴이나 다를 게 별로 없어. 아니, 오히려 당신들이 더 위험하지. 적어도 센트럴은 아군인 척하면서 뒤통수를 치진 않았으니까.”

협상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텐트 밖으로 나오니 모래바람이 거세게 불어온다.

한순간에 모래를 흠뻑 뒤집어쓴 딘이 긴 소매로 얼굴을 가리면서 눈으로 라비를 찾았다.

“우와앗!”

“아아! 눈에 모래 들어간 거 같아!”

“헹, 그러니까 나처럼 고글을 쓰고 왔어야지.”

라비가 함박웃음을 띤 채 앨리스, 지우와 왁자지껄 떠들어 대고 있다.

라비가 그처럼 즐겁게 웃는 걸 본 건 처음이었다.

“어이, 라비!”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딘의 목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하긴 포트리스에는 라비와 놀아 줄 만한 친구가 없었다. 친구 하나 없는 포트리스에서 깡통 로봇들과 장난을 치는 게 고작이었다.

“라비, 이만 돌아…….”

라비를 다시금 부르려던 딘이 말을 멈추었다.

정말 라비를 데려가도 괜찮을까?

라비에게 그편이 더 행복할까?

라비는 이네사를 도와 의료 기구를 수리하거나 장 영감과 함께 의뢰받은 바이크 장비를 제작했다. 고작 10대에 불과한 그녀에게 어울리는 일들은 아니다.

이네사는 물론, 기계병단 녀석들과 깡통 로봇들까지도 유쾌한 라비를 좋아했지만, 또래 친구와 같은 존재가 되어 줄 수는 없었다.

결국 딘은 들어 올린 손을 내리고는 조용히 뒤돌아섰다.

* * *

백련이 부채를 부치며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원형 광장처럼 된 기관실에는 군인들이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도열해 있었다.

도열한 군인들은 한 명, 한 명이 일개 중대를 이끄는 장교급이지만, 군기가 바짝 선 상태로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흐흠, 흠…….”

괜스레 헛기침을 내며 장교들로부터 시선을 돌린다.

그 와중에 백련의 바로 옆, 중앙 테이블에서 자그마한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탁, 탁…….

거구의 대머리사내가 기관실 중앙에 떠오른 지형도를 보며 테이블 모서리를 규칙적으로 두드리고 있었다.

사내의 견장에는 장군을 의미하는 별 세 개가 박음질되어 있다.

얼어붙은 듯 서 있는 장교들의 상관이자, 이번 전쟁의 총사령관인 ‘닐스 레오나드’였다.

꽤 오랫동안 지형도를 응시하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백련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에 백련은 저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선생, 어찌 보시오?”

“무엇…을 말입니까?”

웬만해서 긴장하는 법이 없는 백련조차도 닐스 앞에서만큼은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사령관에 임명된 지 단 1년 만에 서대륙 아홉 개 구역의 레지스탕스들을 모조리 소탕하고, 센트럴 군 내부 반란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장군 두 사람을 숙청해 버린 미치광이 도살자.

대륙민들은 물론, 군인들까지도 그를 ‘털 없는 호랑이[無毛虎]’라 부르며 두려워했다.

그동안 서대륙의 치안을 총괄해 온 그를 동부로 파견한다는 것은 이 지역을 초토화하겠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았다.

“선생이 보기에 지금 당장 병력을 움직여도 괜찮겠느냐, 이 말이오.”

고작 며칠 전만 해도 닐스는 백련을 벌레 보듯 하며 멸시했다. 그러나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선생’이라 부르며 의견을 묻고 있었다.

“솔직히 놈들에게 처음 한 번은 져 줘야 한다고 했을 때, 당장 선생의 머리통을 날려 버릴까 고민했지.”

닐스의 험악한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

그러나 백련은 그의 말이 농담이 아님을 알기에 도무지 마주 웃어 줄 수 없었다. 실제로 당시 닐스는 정말 백련의 머리에 총을 쏠 기세였다.

‘난 그저 아크, 그 새끼의 말만 옮긴 것뿐이라고…….’

백련은 속으로만 끙끙 앓으며 거듭 닐스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거나 말거나 닐스는 제법 신이 난 듯 껄껄 웃으며 떠들어 대고 있었다.

“어쨌든 정말 선생 말처럼 되었어. 뭐,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말이야.”

전투를 시작하기도 전부터 계급이니 지휘권이니 들먹이며 시비를 거는 지역 방위군에게 넌더리가 난 닐스는 센트럴 본대의 투입을 최소화했고, 그 결과 전초전은 완벽히 패배했다.

“…솔직히 지역 방위군이 그렇게나 쓰레기일 줄은 몰랐단 말이지.”

첫 패배 직후, 닐스는 책임을 묻는다는 명목 아래 각 구역 지휘관들의 머리를 날려 버렸고, 그들의 병력을 고스란히 자신의 부대에 편입시켰다.

그 방식이 어찌나 잔혹하고 과감했는지, 살인에 이골이 난 백련조차도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사실 제아무리 사령관이라 해도 소속이 다른 지휘관의 살해는 명백한 월권이었다. 그러나 닐스는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그 모든 것이 용서될 것임을 잘 알고 있었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지역 일대의 지휘권을 모두 빼앗아 버렸다.

그러나 지난 일주일 사이 닐스가 얻어 낸 이득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선생 말처럼 놈들이 저희끼리 분열한 게 확실한 거 같소.”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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