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158화 (159/220)

158화 격동하는 대륙 (1)

대륙 남부.

버려진 신전과 이름 모를 동식물들로 가득한 미지의 땅.

먼 과거, 인류는 그 땅에 도시를 만들었고, 신전을 세웠으며, 아름다운 문화를 꽃피웠다.

그러나 그 거대한 문명은 지난 백여 년에 걸쳐 쇠퇴했고, 센트럴 집정부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인해 마침내 완전히 파괴되었다.

하지만 그게 정말 ‘파괴’였을까?

인간이 떠나고 난 뒤, 나무들은 뿌리를 깊게 내렸다.

오염된 강이 깨끗해졌고, 물고기들이 돌아왔다.

곤충들이 알을 깠고, 그 곤충들을 먹이로 하는 새들이 날아들었으며, 온갖 동물들이 정글을 누비기 시작했다.

부서진 신전, 남겨진 철로 등 인간이 남겨 둔 흔적들은 넝쿨과 나무뿌리 따위로 휘감겼고, 버려진 건축물에는 동물들이 머물렀다.

어쩌면 남부 대륙은 그저 땅의 주인이 바뀌었을 뿐인지도 몰랐다.

여하간 인간의 손에서 멀어진 남부 지역은 그처럼 신비로운 느낌을 풍겼고, 그로 인해 순례자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그렇게 찾아온 순례자들 대부분은 정글 속에서 허무하게 목숨을 잃었다.

‘…독사에게 물렸나 보군.’

프랑켄은 아직 부패가 진행되지 않은 시신의 이빨 자국과 핏자국을 보고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나이는 50대 정도 되었을까? 소지품을 보니 약간의 빵과 염주처럼 보이는 종교 물품 몇 개가 전부였다.

제법 오랫동안 길을 잃고 정글 안을 헤맨 듯 작게 쪼개 놓은 빵 조각에 곰팡이가 피기 시작한 상태였다.

가방에 열매도 몇 개 들어 있지만, 대부분 떫거나 써서 먹기조차 힘든 것들이었다.

준비한 식량도 충분하지 못했고, 정글 속에서 먹을 것을 조달할 생존 능력도 없었다.

독사에 물리지 않았더라도 오래 버티지는 못했을 것이다.

특히 순례자를 괴롭힌 것은 아마 목이 타는 갈증이었을 테지.

소지품에서 쓸 만한 것은 사실상 없었다.

프랑켄은 빈손으로 몸을 일으킨 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는 아직인가…….’

프랑켄은 벌써 한 달도 넘는 시간 동안 대륙 남부를 누비고 있었다.

그사이 비가 온 것은 고작 한두 번뿐이었다.

착륙 장소가 마땅치 않아 철로가 끊어진 늪지대 근처에 다빈치를 숨겨 두었고, 탐사 장비를 갖춘 뒤 정글로 진입해 들어왔다.

나름의 준비를 했지만, 한 달이 넘도록 정글을 헤맨다는 것은 꽤 고된 일이었다.

운 좋게 강을 만난 날이면 깨끗한 강물로 목을 축이고, 낚시로 식량을 조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프랑켄 역시 목마름과 배고픔, 그리고 고독감으로 점차 지쳐 가고 있었다.

가만히 한숨을 쉬며 손에 쥐고 있던 소총을 바라본다.

소총에는 ‘Nox―Franken’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발터와 막야가 전해 준 물건은 스스로 ‘보니’라 말하는 소녀의 몸속에 아직 녹스가 남아 있다는 증거였다.

‘녹스, 넌 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오로지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떠나온 길이었다.

아마 이곳에 왔다가 허무하게 목숨을 잃은 순례자 또한 그만큼 절실했을 것이다.

다시 고개를 내려 순례자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순례자의 시신을 묻어 주고 길을 떠난 지 사흘이 지났다.

사실 사흘이 지난 게 맞는지 확실치 않았다.

그저 해가 뜨는 것을 세 번 보았으니 그러려니 하는 것일 뿐이다.

지난 사흘 사이 부서진 신전을 지나쳤고, 버려진 물통이나 낫 따위 도구들을 발견했다.

그렇게 사람의 흔적을 따라 걸은 끝에 마침내 수풀 속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발견했다.

급히 발걸음을 재촉했고, 마침내 수십 채의 집들이 지어진 작은 마을을 발견할 수 있었다.

펼쳐진 정글이 그 자체로 울타리의 역할을 해 주기에 마을 주변에 딱히 울타리나 장벽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숨을 가다듬고는 조심스럽게 마을 안에 들어선다.

집 몇 채의 굴뚝에서 연기가 오르고 있었지만,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마을에 들어서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위화감이 들 정도로 조용했다.

‘분명 사람이 사는 마을이다.’

누군가가 밟고 지나간 듯 부자연스럽게 눌린 풀의 모습이 보인다.

방금까지 사람이 있던 흔적이다.

결국 지금의 고요함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어디선가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움직이지 마라.”

철컥.

주변 수풀 속에서 총구들이 튀어나온다.

“환영까지 기대하지 않았습니다만… 이건 좀 당황스럽군요.”

상대방과 싸울 의사가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가만히 양손을 들어 올린다.

그러나 상대는 여전히 총구를 거두지 않았다.

“팔다리를 보니 평범한 인간은 아니군.”

“…….”

프랑켄은 말없이 자신의 팔과 다리를 바라보았다.

원래의 신체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 뒤로도 기계 팔과 기계 다리를 몇 차례나 갈아 끼웠다.

상대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온다.

“베타(Beta)인가?”

프랑켄은 처음 듣는 단어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나 그 질문은 프랑켄에게 던진 게 아닌 듯 다른 쪽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동자가 붉군. 베타가 맞아.”

웅성거림과 함께 숨어 있던 자들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

약 스무 명가량의 남녀가 저마다 구식 카빈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만한 무장도 48구역 펑크 라이더들에 비하면 자못 대단한 것이었지만, 허름한 옷차림과 정비되지 않은 소총을 보니 전투에 그리 익숙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정작 무장을 했으면서도 프랑켄에게 두려움을 느끼는 듯 손을 떨고 있다.

프랑켄은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말했다.

“누구에게도 해를 끼칠 마음은 없습니다.”

“그건 모를 일이지.”

주민들은 쉽게 경계를 풀지 않았다.

그 와중에 한 남자가 목소리를 높인다.

“네 주인은 어디 있지?”

“주인?”

프랑켄이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무례한 질문을 던진 남자를 쏘아보았다.

프랑켄과 눈이 마주친 남자가 흠칫하며 총을 치켜들었고, 다른 주민들 역시 슬쩍 한 걸음씩 물러섰다.

“주인 같은 건 없습니다. 난 그저 내 친구를 찾아왔을 뿐이에요.”

“베타가 주인도 없이 여기까지 찾아왔다니.”

“친구를 찾으러 왔다고? 베타가?”

이들은 메타휴먼을 베타라 부르는 모양이었다.

명칭이야 어찌 되었든 프랑켄에 대해 가진 편견은 정글 바깥쪽과 거의 다를 바 없었다.

익숙한 일이기에 프랑켄은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름은 녹… 아니, ‘보니’입니다. 작은 여자아이인데, ‘클라이드’라는 오빠와 함께 다니죠.”

주민들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이도 있었다.

주민들은 분명 보니와 클라이드라는 이름에 반응하고 있었다.

“혹시 당신들… 두 사람을 아는 겁니까?”

바로 그때, 주민들 속에서 나이가 많아 보이는 백발노인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손에는 소총 대신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노인의 왼쪽 눈은 눈동자까지도 하얗게 변해 있다. 그는 남은 한쪽 눈으로 프랑켄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자네, 그 소녀와 친구라고 했나?”

“네, 맞습니다. 혹시…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글쎄, 적어도 누구인지는 알지.”

노인이 가만히 고개를 젓더니 주민들을 향해 말했다.

“다들 총을 거두게.”

프랑켄을 집에 들인 이는 마을의 사제라고 했다.

사제의 지시에 주민 모두 따르는 것을 보니, 일종의 촌장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듯 보였다.

노인의 집 곳곳에는 오래전 사라진 종교의 표식들이 걸려 있었고, 정체 모를 책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이 마을의 주민들 역시 성지를 순례하기 위해 왔다가 이곳에 정착한 사람들이네. 이곳에서 순례자들에게 식수와 먹을 것을 대접하고, 우린 그들에게 믿음의 징표를 대가로 받지.”

순례자들은 저마다 각기 다른 믿음을 가진 채 대륙 남부를 찾는다.

유일신을 믿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다신교를 믿는 이들이 있고, 이미 죽은 조상신을 찾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사제는 그 모든 믿음을 존중했으며, 그들이 내준 징표들을 수집했다.

징표는 귀한 재료로 만들어진 신의 조각상에서부터 고대어로 쓰여진 서적, 묘한 무늬가 새겨진 팔찌나 반지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 또한 다양했다.

“믿음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것이야. 나는 순례자들이 가진 믿음을 연구하기 위해 이곳, 쉼터에 왔다네.”

노인은 찬찬히 말하며 차 한 잔을 프랑켄 앞에 대접했다.

“쉼터…라고 하셨습니까?”

쉼터라기에는 분위기가 지나치게 삼엄했다.

방문객을 향해 다짜고짜 소총을 겨누지 않았던가.

프랑켄이 마을에 들어온 뒤에도 주민들은 줄곧 긴장한 표정이었다.

“얼마 전까지는 순례자들이 쉬어 갈 수 있는 신전과 쉼터들이 여럿 있었다네. 이 마을 역시 그중 하나였지. 하지만 지금은 대부분이 파괴되었어.”

“…….”

“사악한 마녀와 불길한 남매가 숲에 들어온 뒤부터였지.”

“남매…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그 남매 중 한 아이의 이름이 바로 ‘보니’라네. 자네가 찾는 바로 그 아이겠지.”

사제의 말에 프랑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마녀는 순례자들이 주로 찾는 성지(聖地)들을 차례로 찾아 사제들의 복종을 받아 냈다네. 때로는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또 때로는 피를 보면서 본인이 성지의 주인임을 자처했지.”

각기 다른 믿음을 갖는 순례자들이 찾아오는 만큼 숲속에는 몇 개의 성지들이 있었다.

성지에 도착한 순례자들은 사제가 되어 성지들을 수호한다. 그렇게 성지를 지키는 사제들은 일종의 자경단이 되어 나름의 세력을 형성했다.

그들은 센트럴에 맞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는 레지스탕스이기도 했고, 정글의 자원을 노리고 진입해 오는 대륙 기업들을 막아선 민병대이기도 했다. 또 때로는 종교적 믿음의 차이를 이유로 서로를 향해 무기를 겨누는 광신도이기도 했다.

그러나 각기 다른 믿음들은 강력한 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강력한 마녀와 요사스러운 뱀, 그리고 그녀를 따르는 남매. 그들은 사제들을 너무나도 간단하게 제압했다.

“고작 한 달이야.”

노인이 덤덤하게 차를 우렸다.

“한 달 만에 성지들이 모조리 무너졌다네. 서로 다른 종교를 믿던 사제들이 이젠 그녀를 ‘성모(聖母)’나 ‘현신(現神)’이라 부르며 숭배하지.”

그러나 노인은 여전히 그녀를 ‘마녀’라 불렀다.

즉, 이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믿지 않는다.

노인이 차를 한 모금 들이켜고는 프랑켄을 바라보았다.

“자네는 ‘베타’지. 붉은 눈을 가진 인공 인간. 신의 뜻을 거스르고 인간의 의지로 만들어진 생명체. 여기서는 그런 이들을 베타라 부른다네.”

“…….”

당연하게도 결코 우호적인 뜻이 아니다.

‘신의 뜻을 거스른 생명체’. 그러니 주민들이 그처럼 적대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노인은 그런 프랑켄을 자신의 앞에 앉혀 두고 차까지 대접했다.

노인은 어느새 의미심장한 눈으로 프랑켄을 바라보고 있었다.

“베타는 센트럴에서 만들어져 센트럴의 의지를 반영하는 존재라네.”

엄밀히 말해 메타휴먼은 센트럴이 아니라 드림 코퍼레이션에서 생산된다. 또한 프랑켄과 같은 로보티안들은 나름의 의지를 지닌다.

그러나 프랑켄은 굳이 그런 문제에 대해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편견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그런 설명 따위 아무런 힘이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노인의 편견은 전혀 엉뚱한 결론을 도출해 냈다.

“자네가 왔으니, 이젠 마녀도 오래 살지는 못하겠군.”

아무래도 노인은 프랑켄을 히트맨이라 오해한 모양이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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