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157화 (158/220)

157화 붕괴 (3)

첫 번째 기억.

8월 29일, 센트럴 승전기념일.

50구역 골목은 여느 지역과 달리 제법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고작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피아들은 승전기념일마다 고아들을 가둬 놓고 성인식을 치르게 했다. 서로를 죽고 죽이게 했으며, 그 끔찍한 의식 가운데 가게들은 전부 문을 닫았다.

그러나 혁명군이 50구역을 통치하게 되면서 마피아들은 모조리 사라졌으며, 더는 그런 야만이 존재하지 않았다.

“난 여전히 이게 맞는 건지 모르겠어.”

“뭐가?”

세이드는 길거리를 누비는 이들을 곁눈질하며 살피고 있었다.

“너무 경계를 늦췄어.”

“도리어 치안이 마비되는 건 다른 구역이잖아?”

의도적으로 전 대륙의 치안을 마비시킨 전승기념일, 그 어떤 죄악도 공식적으로 처벌받지 않는 이날만큼은 전 대륙에서 온갖 범죄들이 자행된다.

그러나 혁명군들은 평소와 같이 도시의 치안을 유지했으며, 가게들은 물론, 열차와 비행장까지 평소처럼 운영했다.

그 덕분에 평소보다 훨씬 많은 대륙민들이 50구역에 밀려 들어왔고, 거리의 상점들은 때 아닌 활황을 누리고 있었다.

“다른 구역이 마비된 덕분에 여기로 온갖 놈들이 몰려들고 있지. 혁명군에 합류하기 위해 왔다느니, 피난을 왔다느니 그럴듯한 말을 늘어놓고 있지만, 어떻게 믿겠어?”

“…….”

“분명 센트럴에서 보낸 히트맨이나 첩자가 끼어 있을 거라고.”

“세이드, 그렇다고 우리가 센트럴 놈들의 승전일을 같이 기념할 수는 없잖아? 아무 일 없을 테니, 너무 걱정할 거 없… 윽!”

퍽!

말을 마치기도 전에 모자를 깊게 눌러쓴 소년 하나가 달려오더니 나와 부딪쳤다.

그 바람에 내 몸이 살짝 휘청거렸지만, 정작 와서 들이받은 녀석은 요란스럽게 나가떨어졌다.

“아!! 아, 아파!”

그렇게 엄살을 피우던 녀석은 곧장 일어나 이쪽을 쏘아보았다.

“이봐, 길 한가운데서 뭐 하는 거야!”

“와서 들이받은 건 너 같은데.”

“앞으로 눈 똑바로 뜨고 다녀!”

소년은 벌떡 일어나 나를 향해 쏘아붙이더니, 고개를 빳빳이 들고 골목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잠깐.”

“뭐, 뭐야?!”

소년은 당황한 듯 목소리를 높이며 버둥거렸다.

어느새 세이드가 소년의 뒷덜미를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무슨 짓이야? 이, 이거 안 놔?!”

“보아하니 이 근처에 사는 녀석은 아니군. 그렇지?”

만약 이 근처 주민이라면 나와 세이드를 모를 리 없다. 그리고 세이드를 안다면, 결코 그가 보는 앞에서 이런 ‘작업’을 벌이진 못했을 것이다.

“빌어먹을, 아저씨가 무슨 상관이야?”

“하아…….”

세이드는 꽥꽥 소리를 지르는 소년의 발버둥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나를 바라보았다.

“아무 일 없을 거라고? 이런데도?”

그러나 난 어색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서투른 소매치기범일 뿐이야.”

사실 너무 어설픈 솜씨였다.

보란 듯이 부딪쳐 지갑을 빼 가는 건 고전적인데다 효과적이지도 못하다.

더구나 이 거리에서 숨어 보았자 마음만 먹는다면 금세 찾아낼 것이다.

“이, 이거 놔!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세이드는 발버둥치는 녀석의 가슴팍에 불쑥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너무나 간단히 지갑을 빼내 나에게 던져 주었다.

“얼치기 소매치기범만 들어왔으면 다행이지. 안 그래?”

세이드는 잡고 있던 소년의 목덜미를 놓아주며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바로 그 순간, 녀석이 눌러쓰고 있던 모자가 벗겨지며 꽤 긴 머리칼이 드러난다.

어라? 저 녀석, 여자였던가?

풀려난 녀석이 뒤돌아서서 세이드를 노려보았다.

세이드는 아직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모르는 듯 무심한 얼굴로 소년, 아니, 소녀를 내려다본다.

“이번만큼은 봐줄 테니까 다시는 눈에 띄지… 어?”

긴 머리칼과 훤히 드러난 소녀의 얼굴에 잠시 당황하는 찰나.

뻑!

아래쪽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

세이드가 가만히 고개를 내려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흐, 어… 어…….”

소녀의 발차기가 영 좋지 못한 곳을 직격했다.

“아이고, 저런…….”

“저걸 어째?”

거리에서 이 모습을 보고 있던 남자들이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심지어 나까지도.

그러나 정작 일격을 가한 소녀는 얼굴이 벌게진 채 화가 나 있었다.

“이… 이… 변태 새끼가!!”

소녀는 세이드가 헤집은 가슴팍 옷을 여미며 고함을 질러 댔고, 통증 때문에 주저앉아 버린 세이드의 얼굴에 침까지 뱉은 채 골목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손을 가슴팍에 집어넣은 그 순간까지도, 아니, 손을 빼내고 난 뒤에도 세이드는 몰랐던 게 분명했다.

“…….”

“괘… 괜찮아?”

입만 뻐끔거리는 세이드에게 천천히 다가가 어깨를 톡톡, 두드려 주었다.

“약속할게. 저 애는 내가 반드시 잡아 주지. 부대 전체를 동원해서라도…….”

“끄…… 으…… 으…….”

나중에야 알았지만, 소매치기 소녀의 이름은 ‘제니’라고 했다.

* * *

두 번째 기억.

포트리스 훈련장.

“하아… 하아…….”

임시로 만들어진 오브젝트들은 산산이 부서졌고, 공간 전체를 감싼 막에도 금이 가 있다.

아마 이 모습을 본다면 딘이 난리법석을 피우겠군.

가쁜 숨을 몰아쉬는 세이드 앞으로 천천히 다가간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딘의 표정을 떠올린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반쯤 무릎 꿇은 세이드 앞으로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괜찮아?”

“…….”

숨을 헐떡이던 녀석은 어떻게든 자존심이라도 챙기겠다는 듯 나의 손을 잡지 않은 채 자신의 힘으로 일어난다.

세이드는 그런 녀석이었다.

“마지막 공격, 대단했어.”

“놀리는 거냐?”

“그럴 리가.”

“…흥, 그래 봐야 넌 멀쩡히 서 있잖아. 안 그래?”

세이드는 입가의 피를 소매로 닦아 낸 뒤, 푹 꺼진 땅에 침을 탁 뱉었다.

멀쩡?

세이드의 고개가 돌아간 짧은 틈에 내 몸뚱어리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러나 녀석이 보기 직전, 애써 몸을 다잡았다.

분명 나와 세이드의 몸뚱어리 모두 의체(義體)에 불과하건만, 모든 통증과 부상만큼은 놀랄 만치 생생하다.

마지막 순간 부러진 팔과 다리에는 거의 감각이 없고, 갈비뼈가 부러졌는지 숨 쉴 때마다 통증이 심했다.

그래도 자존심이 있지, 세이드에게 부상을 들키고 싶진 않았다. 그렇기에 애써 의연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쯤하고 나가자.”

“다음번엔 다를 거야.”

“그래, 나도 알아.”

비로소 결투가 끝난 것에 안도하고 있었지만, 마지막까지 세이드는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결투를 종료하고 캡슐 밖으로 나가는 순간, 결투 중 상처는 모두 사라진다. 아니, 전투를 치른 몸뚱어리 자체가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결투의 경험과 기억만큼은 그대로 남았다.

“…위험했어.”

가만히 중얼거리고 있던 찰나, 캡슐을 빠져나오자마자 제니가 폴짝거리며 달려온다.

그러고는 세이드를 향해 마구 손가락질했다.

“오~ 패배자!”

“망할 꼬맹이가……!”

세이드가 이를 갈며 눈을 부릅떴지만, 제니는 혀를 쏙 내밀 뿐이었다.

“아저씨, 아저씨는 그렇게 매번 깨지면서도 왜 자꾸 태일 오빠한테 싸움을 걸어?”

“…….”

세이드가 사납게 눈을 부라렸지만, 제니는 조금도 겁을 먹지 않았다. 도리어 깐족거리며 세이드를 놀리는 데만 열중할 뿐이었다.

제니는 어째서인지 다른 대원들과 달리 세이드에게 스스럼이 없고, 늘 장난을 걸곤 했다.

그리고 세이드는 강렬했던 첫만남 때문인지, 제니에게 유난히 약한 모습을 보였다.

“다음번에는 내가 이길 거다.”

“태일 오빠, 저 말이 벌써 몇 번째더라? 내가 스무 번까지는 세다가 포기했는데!”

“…….”

세이드는 더 말할 가치도 없다는 듯 빠른 걸음으로 결투장을 빠져나갔다.

“아저씨, 삐친 거야? 에이, 아니지? 오빠가 너무 센 거지, 아저씨가 약한 게 아니야. 그러니까 너무 상처받지 마!”

제니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약 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제니, 그만 놀려.”

“놀리다니? 난 아저씨를 위로하는 거야, 오빠. 저렇게 만날 지는 거 봐. 얼마나 불쌍해?”

그 순간, 세이드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세이드의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혹시 그 주먹으로 꿀밤을 먹이는 건 아닐까 생각한 찰나, 세이드가 뒤돌아서며 고함을 빽! 질렀다.

“왜 난 아저씨고 쟤는 오빠야?! 어?”

제니는 그런 세이드를 보고 낄낄거리며 웃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원래 잘생기면 오빠야.”

세이드는 애꿎은 나만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난 그저 어깨만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왜? 내 탓은 아니잖아?”

“…….”

* * *

세 번째 기억.

레미제라블.

나는 어두운 바에 홀로 앉아 있었다.

꽤 오랫동안 세연을 기다렸지만, 그녀는 오지 않았다.

“쿨럭!”

울컥 피를 토한 뒤, 떨리는 손으로 칵테일을 따랐다.

갈비뼈 두 대가 나갔고, 허벅지와 어깨에 총탄이 박혀 있다.

똑똑.

어둠 속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온다.

손을 멈추고 가만히 문 쪽을 바라보았다.

세연, 그녀일까?

아니, 그녀라면 노크를 할 리는 없겠지.

그렇다면 놈들이 나를 끝장내러 온 걸까?

[배신자들이 다크 웹을 통해서 히트맨들을 최소 스무 팀 이상 동원했어. 이 벌레 같은 새끼들이!]

고작 몇 분 전, 알렉세이 딘에게 배신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들었다.

[도망쳐, 지금 당장. 네 능력이면 충분히 빠져나올 수 있잖아!]

도망칠 수 없었다.

배신자들은 50구역 주민들을 인질 삼아 나를 불러냈다.

방공망과 경보 장치가 모조리 마비된 상황에서 내가 도망친다면, 남겨진 50구역 주민들은 반드시 모조리 살해당할 것이다.

배신자들 역시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알 것이다.

여기까지 이르는 동안 수많은 히트맨들이 나를 노렸다.

온몸이 망가졌고, 마지막까지 내 곁을 지키던 동료들이 하나둘 죽어 갔다.

그리고 마침내 붉은 언덕 아래, 레미제라블에 이르렀다.

모든 것이 시작된 장소.

끼이익…….

문고리가 돌아간다.

파칫.

손가락 끝에서 미세한 스파크가 튀었다.

힘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적어도 히트맨 몇 놈은 더 데려갈 수 있을 것이다.

철컥.

문이 열렸다.

그러나 정작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건 키 작은 소녀였다.

“제니?”

“오빠…….”

가만히 문 쪽을 향해 겨누었던 손을 내린다.

“괜찮아?”

“미성년자는 이런 곳에 오는 거 아니야.”

“어제가 내 생일이었거든? 이제 나도 성인이야.”

“…그래, 생일 축하한다.”

“어제였다니까.”

“쿨럭!”

“…오빠!”

“가까이… 오지 마.”

제니의 등장은 한 사람의 배신을 의미한다.

제니는 늘 한 사람만을 졸졸 따라다녔으니까.

50구역 레미제라블까지 도달하는 동안 동료라 믿어 온 녀석들의 얼굴을 차례로 떠올렸다.

강우, 권혁, 진영, 베인 형제, 세이든, 클라이드…….

누가 배신자일까? 누가 이런 일을 벌인 걸까?

그리고 이젠 알았다.

“세이드가… 일을 벌였구나.”

“어떻게든 말리려고 했어. 하지만… 아저씨가 듣질 않아. 도저히.”

“괜찮아.”

난 씁쓸하게 중얼거리며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제니의 탓이 아니다. 제니가 막을 수 있는 일 역시 아니다.

가장 강력한 주력 부대를 이끌던 세이드가 돌아섰다면, 방법은 없다.

“클라이드도 오빠를 기다리고 있어.”

가만히 한숨을 내쉬며 불 꺼진 방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붉은 언덕에서 기다리는 녀석들이 누구인지 알게 되자 허탈한 웃음만 나왔다.

이렇게 모든 게 끝나는구나.

“혹시 세연이는 어디에 있는지 알아?”

“…모르겠어. 덩어리 녀석들이 언니를 쫓고 있어.”

베인 형제, 두 사람 역시 돌아섰다.

“그 둘로는 부족할 텐데.”

“싸우려는 게 아니라고 했어. 그저 오빠를 설득할 생각이라고만… 했어.”

“풋.”

웃음을 터뜨리자, 입가에 피가 새어 나온다.

순진하긴.

어둠 속이기에 제니에게는 지금 나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녀석들은 처음부터 날 죽일 생각이었다. 내가 자신들의 설득에 응하지 않을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오빠, 아저씨가 날 보냈어.”

“…….”

“그냥 도망치라고 했어. 50구역 주민들을 자신의 손으로 몰살시키는 일 따위 없을 거라고 약속했어. 대신, 대신 그 ‘열쇠’라는 것만 넘기면…….”

“제니.”

“부탁이야, 오빠. 제발 그만둬. 열쇠 따위 넘겨 버리고 떠나.”

“그건 안 돼.”

“세연 언니가 설득했어도 그렇게 고집을 부렸을까?”

“…….”

“아저씨도, 오빠도 언제나 고집이 너무 세. 그래도 오빠는 세연 언니 말만큼은 듣겠지?”

제니의 목소리는 순간 너무나도 슬프게 들렸다.

그러나 곧 발을 구르며 애써 밝게 외쳤다.

“처음 만났을 때 조금만 더 세게 차 줄 걸 그랬어.”

“후후후… 그건 좀 심한데.”

이런 상황에서도 웃음이 나온다.

“바깥에 히트맨들이 잔뜩 깔려 있어.”

“그렇겠지.”

“바 뒤쪽에 숨겨 둔 비밀 통로가 있어. 그건 아저씨조차도 모르는 길이니까… 거길 통하면 안전하게 언덕에 오를 수 있을 거야. 그 길은…….”

“…그 통로는 나도 알고 있어. 고맙다.”

잠시 동안의 침묵이 이어졌다.

“난 같이 안 갈 거야. 오빠랑 아저씨가 싸우는 건 정말 보기 싫거든. 대신 시간을 벌어 줄게.”

어둠 속에서 제니를 바라본다.

어느새 제니는 소형 리볼버를 꺼내 들고 있었다.

한때 소매치기에 불과했던 소녀는 세이드에게 훈련을 받으며 꽤 솜씨 좋은 사격수가 되었다.

아무리 그래도 노련한 히트맨들의 상대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난 그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어.”

이미 알고 있었다.

제니 역시 죽음을 각오했음을.

알면서도 난 멈추지 않았다.

배신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붉은 언덕으로 향했다.

통로 뒤편에 들려오는 무수한 총소리도 무시한 채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날, 제니를 버려 두고 떠난 대가를 이제야 치른다.

제니가 내 몸뚱어리에 찔러 넣은 칼은 그래서 막을 수 없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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