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150화 (151/220)

150화 램 (2)

달아나듯 할아버지의 저택을 떠나온 지 약 한 달이 지났다.

똑똑.

“누구세요?”

똑똑똑.

달조차 뜨지 않은 밤에 누군가 안도의 집 문을 두드렸다.

“대체 이 밤에 누가…….”

문 앞에는 장 집사가 검은 망토를 쓴 채 서 있었다.

“도련님, 조금 전, 주인님께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

다짜고짜 집을 찾아와 그가 내뱉은 첫마디에 안도는 놀란 나머지 얼마간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한 달 전 그날이 할아버지를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그러나 안도는 그날 할아버지를 보지 않은 채 발걸음을 돌렸다.

“…편하게 가셨나요?”

“네. 저와 아가씨가 임종을 지켰습니다. 주인님께서는 편안히 잠들 듯 떠나셨습니다.”

“램이… 할아버님의 곁을 지켰군요.”

“많이 우셨지만, 지금은 괜찮습니다.”

할아버지는 어릴 적 부모를 잃은 램의 보호자였고,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그런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것은 램에게 큰 충격일 터였다.

한편, 놀란 마음이 진정되자 문득 이상함이 느껴졌다.

장 집사는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직후, 굳이 9구역 외진 곳까지 자신을 찾아왔다.

“아버지께서 이 소식을 알고 계신가요?”

“…주인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직후, 곧바로 도련님을 찾아왔습니다.”

장 집사의 말에 안도의 표정이 굳어졌다.

큰아버지가 오래전 세상을 떠났고, 램은 아직 성인이 되지 못했다. 즉, 원래대로라면 안도의 아버지인 해리 애슈턴이 가주 자리를 이어받아야 한다.

그러나 장 집사는 아버지가 아닌 자신을 먼저 찾아왔다.

“할아버지께서 제게 따로 남기신 유언이라도 있는 건가요?”

“여기… 유언장입니다.”

장 집사는 무거운 얼굴로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던 서류를 조심스럽게 건네주었다.

일단 서류를 받아 들었지만, 안도는 자신이 봉인을 풀어도 될지 잠시 망설였다.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유언장을 펼친다.

무미건조한 문구로 가득한 유언장.

그러나 그 문구들로 인해 수많은 이들의 운명이 바뀐다.

오래지 않아 안도는 장 집사가 어째서 곧장 자신을 찾아왔는지 이해했다.

“말도… 안 돼.”

유언장에는 할아버지의 모든 지분을 해리 애슈턴이 아닌, 안도 애슈턴에게… 즉, 자신에게 넘긴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유언장대로라면 할아버지의 지분을 그대로 물려받은 자신이 가장 많은 지분을 갖게 되고, 램이 그다음 가는 지분을 지니며, 아버지는 세 번째가 된다.

“이건 말도 안 돼요.”

가주란 가문의 지분을 가장 많이 가진 존재를 뜻한다.

즉, 할아버지는 차기 가주 자리를 아들이 아닌 손자에게 넘긴 것이다.

그러나 정작 유언장을 확인한 안도가 느낀 감정은 기쁨이 아닌 당혹감이었다.

“아버지도, 램도 아닌 나를?”

안도는 유언장을 움켜쥔 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주인님의 결정입니다.”

“아버지가 경호 조직을 움직일지도 몰라요.”

자신의 저택에 은거해 버린 아버지이지만, 그 곁을 지키는 경호팀은 평범하지 않다.

그는 사실상 민간군사기업(PMC) 수준이라 알려진 BW의 S급 경호팀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 정도 무력 조직을 지닌 아버지가 램을 비밀리에 해하기라도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직계혈족이 없는 램이 죽게 될 경우, 램의 자산은 센트럴 상속법에 따라 모조리 그녀의 삼촌인 해리 애슈턴에게 넘어가게 된다.

그렇게 되면 아버지 해리는 애슈턴 가 최대 지분을 갖게 된다.

“할아버지는 어째서 이런 결정을 내리신 거죠?”

치밀하고 계산적인 가주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가문에서 절대권력을 행사했던 가주가 마지막 순간에 이렇게나 허술하게 램을 방치할 리 없었다.

안도의 물음에 장 집사는 꽤 오랫동안 침묵했다. 그러다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작은 주인님께서는 절대 램 아가씨를 해치지 못합니다.”

“장 집사도 아버지가 정신병에 걸렸다고 말하려는 건가요?”

저택 2층에 틀어박혀 바깥으로 나오지 않는 아버지.

사병 수준의 경호팀을 고용하고 있었지만, 그의 현재 삶은 사실상 금치산자에 가까웠다.

“…조금 더 정확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작은 주인님께서는 아무것도 하실 수 없습니다. 도련님께서 허락하시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그게 무슨 뜻이죠?”

이해하기 힘든 장 집사의 말에 안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오래전, 알마티에서 형들을 살해하고, 심지어 아버지까지 밀어낸 뒤 회사를 집어삼킨 남자가 있었지요.”

“갑자기 그게 무슨……?”

“주인님께서는 그 일을 알고 계셨기에 가까스로 차남의 폭주를 막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장남을 이미 잃으신 뒤였죠.”

“지금 아버지가 큰아버지를… 살해했다고 말하는 건가요?”

유언장을 쥔 안도의 손이 걷잡을 수 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그러셨을 리 없어요. 불가능해.”

분명 한때 아버지는 사람들의 의심을 받았다.

애당초 너무나도 부자연스러운 화재 사고였고, 석연찮은 부분이 많았다.

큰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후계자의 자리를 물려받을 게 분명한 아버지는 가장 유력한 용의자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런 의심은 완전히 사라졌다.

큰아버지의 죽음 직후, 아버지가 이상하게 변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마치 누군가 자신을 살해하러 올 거라 여기기라도 하듯, 밖으로 나가는 일조차 없었다.

“2층에는 올라가실 수 없습니다.”

BW 경호원들은 아들인 자신조차 아버지가 머무르는 2층에 올라오지 못하게 막았다.

“어머니가 아프세요. 아버지께서는 어디 계시죠?”

“2층에 계십니다. 가까운 시일 내에 모시고 내려가겠습니다.”

“어머니를 보는데 왜 경호원이 필요한 거죠? 그냥 내려오면 되잖아요. 제가 직접 가서 말씀드리겠어요.”

“죄송하지만 들여보내 드릴 수 없습니다.”

“비켜서요, 당장.”

“저희는 오로지 고용인의 지시만을 듣습니다.”

“…….”

아버지는 어머니가 병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어머니의 방을 찾지 않았고, 장례식장에서조차 경호원들을 가까이 대동하고 있었다.

창백해진 얼굴의 아버지는 단 한마디의 말조차 없었다.

“아버지는… 겁이 많으세요. 그런 일을 저지르셨을 리 없어요.”

그저 겁이 많은 수준이 아니다. 그건 지독하고도 끔찍한 정신병이었다.

“아버지는 큰아버지의 죽음으로 그 누구보다 충격을 받았어요. 장 집사님도 알잖아요.”

그러나 안도의 말을 들은 장 집사는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장남의 죽음 직후, 주인님께서는 모든 증거를 손에 넣으셨습니다. 그렇게 진실을 깨달으신 뒤, 차남이 고용한 히트맨은 물론, 차남과 연계된 경호 회사까지 모조리 처리하셨죠.”

아버지가 고용한 히트맨과 경호 회사.

대체 지금 장 집사가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동안 작은 주인님의 곁을 지킨 경호원들은 모두 주인님이 배치한 인력입니다. 작은 주인님에 대한 감시를 지시받았지요.”

“뭐라고?!”

안도는 놀란 나머지 뒷걸음질 치고 말았다.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여 가족마저 멀리한 아버지.

어머니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한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증오했고, 성인이 되어 오래지 않아 9구역 외곽으로 도망 나왔다.

“아버지가 감시를 받고 있었다고? 할아버님에게?”

“…….”

“아버지의 곁을 지키던 이들이 사실은 간수였다는 거예요?”

“네, 맞습니다.”

해리 애슈턴은 죄수였다.

자신의 형을 살해했고, 그 사실을 발각당해 십 년도 넘는 세월 동안 가주에 의해 처벌을 받았다.

할아버지는 BW의 경쟁 업체인 거대 경호 업체를 세상에서 지워 버릴 정도로 분노했으나, 정작 일을 의뢰한 해리 애슈턴만큼은 살려 두었다.

그러고 나서 자신의 손으로 직접 그를 처벌했다.

해리의 자산을 동결했고, 상시 감시 상태로 저택에 구금해 두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가문의 치부와 그에 대한 처벌은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심지어 해리의 아들인 안도에게조차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왜 그렇게까지 한 거죠?”

안도의 목소리가 떨렸다.

“차라리 죽이지그랬어요. 차라리… 감옥에 집어넣었어야죠.”

그것은 차라리 죽음만도 못한 형벌이었다.

죽어 가는 아내의 곁을 지키지 못했고, 아들과 멀어졌으며, 본인은 감금 상태에 놓였다.

방에서조차 오롯이 혼자일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아들에게 보이기 싫었을 것이다. 아니, 애당초 선택이 가능하긴 했을까?

“작은 주인님 역시 가족이기에 주인님께서는 그런 선택을 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족은 서로를 지켜 주는 거란다.”

어째서 가족을 지켜야 하는가. 아니, 지킨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건 적어도 ‘사랑’과 무관했다.

가문의 존속이자 가문의 명예 때문이었을 것이다.

해리의 허물이 사교계에 드러난다면, 영원히 가족의 치부로 남는다.

완벽한 공동체로 남아야 할 애슈턴 ‘가족’에게 그런 일은 결코 벌어져서는 안 되었다.

“작은 주인님에 대한 처분권은 이제 도련님에게 있습니다.”

지금의 해리 애슈턴에게는 램을 암살할 만한 힘조차 없었다.

가주가 허락하지 않는 이상은 그에게 자유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할아버지가 안도에게 남긴 첫 번째 숙제는 바로 아버지 해리 애슈턴에 대한 처분이었다.

“미쳤군요.”

“도련님…….”

“할아버지도, 당신도 전부 미쳤어.”

가족이기에 아들을 가두어 두고 징벌했다고?

가족이기에 지켜야 하는 거라고?

미친 소리다.

“할아버지가 처벌한 이는 아버지뿐만이 아니에요.”

“도련님…….”

“할아버지는 나도 함께 처벌한 겁니다.”

구역질이 치밀었다.

가슴에서 불길이 치솟는 듯했다.

“애슈턴 가문의 가주로서 첫 번째 지시를 내리도록 하죠.”

“네, 주인님. 지시를 받습니다.”

“현 시간부로 아버지를, 해리 애슈턴을 해방하세요. 그의 자유를 얽매고 있던 BW와의 계약은 해지하도록 하겠습니다. 모든 권리를 되돌리세요.”

“도련님, 그건……!”

“이견은 받지 않겠어요.”

“…….”

“두 번째, 가주 회의는 내일입니다. 내일 모두의 앞에서 이 유언장을 공개하도록 하겠어요.”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장 집사는 그저 가만히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평생 후회할 결정은 그처럼 충동적으로 내려졌다.

* * *

“그 명령을 내린 뒤, 무슨 일이 벌어졌을 거 같습니까?”

파가각!

안도가 맥주 캔을 우그러뜨리며 눈을 치켜떴다.

그러나 태일은 아무런 대답 없이 가만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오랜 구금에서 해방된 그날 밤, 아버지는 곧장 BW의 사장을 만났습니다. 그 자리에서 자신이 가진 애슈턴 가 지분 일부를 BW에 넘겨 버렸죠.”

해리는 십 년도 넘는 세월 동안 자신을 구금하고 감시해 온 경호원들을, 아니, 사병 조직을 그 자리에서 고용했다.

뒤늦게 그 사실을 전해 들은 안도는 그제야 자신이 무슨 일을 벌였는지 깨달았다.

“장 집사에게 램을 탈출시키도록 지시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그뿐이었습니다.”

“정말 그것뿐이었나?”

“그 짧은 시간에 아버지의 폭주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습니다.”

“LAPD가 있을 텐데.”

아무리 BW라 해도 치안 조직의 힘을 빌린다면 제멋대로 날뛸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가문의 치부가 세상에 알려진다.

“…….”

“LAPD의 힘을 빌리지 않았군.”

결국 안도 역시 자신의 할아버지가 그랬듯 가족을 지켰다.

“당시 내린 결정을… 후회합니다, 진심으로.”

BW를 손에 넣은 해리는 과거 행한 일을 반복했다.

“두 시간 뒤, 할아버지의 저택에서 불길이 피어올랐습니다.”

가주의 시신은 전소되어 찾을 수 없었다.

장 집사를 비롯한 가문 사람들은 시신으로 발견되었고, 램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웃긴 이야기이지요. 제가 이 손으로 짐승을 풀어준 겁니다.”

해리 애슈턴이 원하는 것은 가주의 자리가 아닌 복수였다.

자유의 몸이 된 해리는 브레드필드 가에 자신이 가진 애슈턴 가 지분을 모두 넘겼고, 보수당 의원으로 거듭났다.

“아버지는 애슈턴 가를 증오합니다. 코르지 브레드필드는 그 증오심을 부추겨 복고주의자들의 선두에 아버지를 세웠죠.”

복고주의자들은 광기로 가득하던 금욕의 시대를 그리워했다.

강력한 군사력과 율법으로 무장한 초기 센트럴 집정부. 그런 정치 체제야말로 복고주의자들의 이상이었고, 이상을 위해 가장 먼저 없애야 할 조직은 다름 아닌 캐피탈 클럽이었다.

그 선두에 한때 캐피탈 클럽의 한자리를 노린 해리 애슈턴을 세운 것이다.

“전 제가 풀어놓은 짐승을 막기 위해 정치를 시작했습니다. 이제 그 짐승은 전 대륙을 전쟁터로 만들려 하고 있죠.”

이야기가 모두 끝났을 무렵, 탁자 위 맥주 캔은 어느새 수십 개에 이르렀다. 그러나 두 사람은 조금도 취하지 않은 상태였다.

“안도, 궁금한 게 있는데…….”

안도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떠올랐던 이름.

“램의 본명, ‘라비 애슈턴’이 아닌가?”

“그걸 어떻게……?”

깜짝 놀란 안도가 태일을 멍하니 바라본다.

“49구역 장 영감은 장 집사와 무슨 관계지?”

“장 집사님의 동생…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만났어. 49구역에서.”

라비 애슈턴과 장 영감.

두 사람은 지금 알렉세이 딘과 함께 있다.

태일은 놀란 표정의 안도를 보며 조용히 말했다.

“잠시 눈이라도 붙여 두는 게 좋겠어. 오래지 않아 의회에 도착할 테니.”

아무래도 중요한 일을 앞두고 과음을 한 듯싶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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