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새벽 열차 (3)
“과연. 마음에 듭니다.”
안도가 눈을 빛내며 태일을 바라보았다.
“그래요, 그렇게 모든 걸 의심하세요. 당신 앞에 선 저까지도.”
안도가 품에서 작은 수첩 형태의 패드를 꺼내 보였다.
패드 위에 손가락을 올리자, 검은 화면에서 홀로그램으로 글씨들이 떠오른다.
「안도 애슈턴. #001, 24세, O형, District 9.」
「신분 확인 완료. [NineD Cops].」
「시스템 로그인 완료.」
「…….」
메시지들이 연달아 떠올랐지만, 안도가 패드를 내리자 홀로그램은 금세 꺼져 버렸다.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청년당의 당수이자 9구역 캐피탈 클럽 지부장을 맡고 있는 ‘안도 애슈턴’입니다.”
청년당과 캐피탈 클럽.
고작 24세에 불과한 청년이 정치와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개의 지위를 갖고 있었다.
‘저렇게 젊은 사람이…….’
안도는 다시금 손을 내밀었고, 이번에는 태일도 그의 손을 맞잡았다.
그 모습을 본 카츠미가 검 손잡이에서 손을 내리자, 민호와 페이진 역시 무기를 내려놓았다.
“신태일이다. 50구역 레미제라블이라는 술집의 사장이야.”
“…….”
줄곧 여유로운 듯 보이던 안도의 얼굴 근육이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태일의 말이 진담인지 농담인지 살피는 것 같았다.
“재미있는… 분이시군요.”
물론 당황한 건 안도뿐만이 아니었다.
“레미제라블 사장이라… 그래, 틀린 말은 아니지.”
“하여튼 제정신이 아니야, 저 인간도.”
“동감.”
태일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 알 수 없는 인간이었다.
“뒤에 계신 분들은 50구역에서부터 함께 오신 겁니까?”
“아, 소개하지. 이쪽은 카츠미와 페이진. 마피…….”
“사업가예요.”
카츠미가 태일의 말을 황급히 가로막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아무리 사람들에게 마피아라 불린다 해도 자신을 마피아라고 소개하지는 않는다.
“아, 그렇군요. 반갑습니다.”
이어 민호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안도의 앞으로 다가서며 손을 내밀었다.
“민호라고 합니다. 레지스탕스에서 활동하고 있죠.”
민호의 소개에 카츠미와 페이진은 뜨악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레지스탕스가 어떤 조직인가. 센트럴 입장에서 가장 위험한 반정부 범죄 세력이다.
지금 민호는 센트럴 유력가 앞에서 ‘저는 흉악 범죄자입니다’라고 선언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안도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태일의 소개에 비하면 훨씬 평범하다고 여기는 듯 여유롭게 민호의 손을 맞잡았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민호 씨.”
한편, 안도를 따라온 두 사내는 인사가 오가는 동안에도 객실 문 앞에 굳건히 버티고 서 있었다.
“대단한 건 아니지만, 여러분을 위해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민호의 말이 끝나자 승무원이 상자들을 들고 들어온다. 출발 직후 카트를 밀고 들어온 바로 그 승무원이었다.
“헤에, 당신이 준비해 둔 메타휴먼이었나?”
페이진이 히죽 웃으며 묻자, 안도가 빙긋 웃어 보였다.
“여러분을 편히 모시기 위해 지원했죠.”
곧이어 태일을 비롯한 네 사람에게 상자가 하나씩 건네졌다.
“뜯어 보시죠. 이번에 내 회사에서 새롭게 출시한 물건입니다.”
상자 안에는 조금 전 안도가 내보인 것과 비슷한 수첩 형태 패드가 들어 있었다.
때마침 하이퍼루프 창밖 홀로그램의 미녀가 같은 모양의 기계를 든 채 활짝 웃고 있다.
「새로운 인연을 찾고 있나요? 데이트할 장소를 찾고 있나요? 더 많은 걸 알고 싶으신가요?
그저 작은 수첩 하나면 모든 게 가능하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NineD Note22, 새로운 세상과 당신을 연결해 줄게요.
지금 당장 만나 보세요!」
카츠미가 패드를 들어 올리자 홀로그램으로 글씨가 떠오른다.
「새로운 세상과 당신을 연결해 주는 NineD Note22.」
「 당신에 대해 알려 주세요.」
“호오! 이거, 신기한데? 난 페이진. 50구역에서 왔어.”
페이진은 호탕하게 웃으며 목소리를 높였지만, 태일과 민호는 곧장 기계를 꺼 버렸다.
“우리가 이걸 사용해야 할 이유가 있나?”
“그저 선물일 뿐입니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이름과 정보를 묻는 기기의 용도를 모를 리 없었다.
이 기계를 사용한다면 감시용 센서를 상시 달고 다니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오오! 당주, 이거 봐. 신기한데?! 혈액형이랑 생일만 말해도 오늘의 운세를 알려 준다고.”
“…….”
카츠미는 해맑게 기뻐하는 페이진을 보며 정말 이런 인간을 믿어도 괜찮을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런 페이진의 모습을 본 안도가 빙긋 웃으며 빈자리에 앉았다.
“센트럴까지 함께 가시죠. 나눌 얘기가 꽤 많습니다.”
안도의 말이 끝날 때 즈음, 하이퍼루프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9구역은 하이퍼루프의 속도로도 완전히 벗어나기까지 한 시간이 넘게 걸릴 정도로 넓은 도시였다.
“9구역 안으로 모시지 못해 아쉽군요. 정말이지 멋진 도시거든요.”
“아아, 창밖으로 보기에도 그렇더라고. 정말 좋은 곳 같았어.”
페이진이 패드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감탄사를 늘어놓았다.
패드에서 연신 ‘뿅뿅’거리는 정체불명의 기계음이 들려왔고, 페이진은 바삐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었다.
“으으, 아깝다. 이제 한 몫밖에 안 남았네.”
태일은 그런 페이진을 무시한 채 안도를 바라보았다.
“의결이 내일이라고 들었는데, 뭔가 계획이 있나?”
“흠, 의회 의석은 총 300석. 거부권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120표 이상을 획득해야 합니다. 즉, 120표가 확보되어야 센트럴 오더를 막을 수 있죠.”
단 300명의 의원이 대륙의 운명을 결정한다.
“의원 중 23명… 아니, 24명은 내일 의결에 참석하지 못할 겁니다.”
의결에 참석하지 못하는 의원들.
그 안에 내포된 의미는 분명 암살 혹은 그와 비슷한 어떤 조치였다.
안도의 말투는 무미건조하지만, 도리어 그렇기에 더욱 으스스하게 느껴졌다.
“우리가 확보한 청년당 표는 총 89표. 앞으로 31표 이상이 더 필요합니다.”
“많이 부족하군.”
“…그렇죠.”
안도가 한숨을 내쉬며 등을 기댔다.
“지금 이 순간에도 동지들이 표를 하나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설득에 나서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고 있죠.”
“최선이라…….”
단 한 표가 부족해 거부권이 좌절되고 센트럴 오더가 발동된다면, 그건 사실상 표를 전혀 얻지 못한 것과 다르지 않다.
“솔직히 전 제인에게 더 쉽고 빠른 방법을 제안했습니다.”
“쉽고 빠른 방법?”
“제인에게 당신의 능력과 활약에 대해서는 이미 들었거든요.”
안도가 몸을 숙이더니, 태일을 바라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전 당신에게 보수당 의원 몇의 암살을 요청하려 했습니다.”
“……,”
안도의 눈동자에 희번덕거렸고, 웃음기 없는 얼굴에 언뜻 광기가 떠올랐다.
그러나 곧 빙긋 웃어 보이며 몸을 다시 뒤로 기댔다.
“그래요. 이미 예상하셨겠지만, 제인이 펄쩍 뛰더군요.”
그 와중에 안도의 주머니에서 ‘띠릭’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실례합니다.”
기기를 꺼내 화면을 보던 안도가 자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내일 의회에는 스물다섯 자리가 빌 겁니다. 우리 쪽 표는 88표. 32표가 더 필요하겠군요.”
한 명의 죽음.
안도는 지금 그 죽음을 표의 개수로 계산하고 있었다.
“의원들은 전부 어디에 있지?”
“각자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있습니다. 히트맨들은 아마 현상금이 걸린 의원들의 목을 노리고 있을 테지요.”
“지저분하군.”
민호가 구역질난다는 듯 차갑게 쏘아붙였다.
의회와 표결 등 법적인 절차와 시스템이 존재하지만, 그 뒤로 암살과 타협 따위의 불법적인 행위가 만연하다. 그게 바로 센트럴의 민낯이었다.
민호가 차갑게 쏘아붙이자, 안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인정했다.
“그렇죠, 지저분한 현실이죠.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
“하지만 레지스탕스라면 아실 텐데요. 결국 힘이 없으면 명분 따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민호는 안도를 무섭게 노려보았지만, 별달리 대꾸하지 못했다.
태일은 다소 피곤해 보이는 안도와 시종일관 경계를 유지하고 있는 그의 경호원들을 보며 안도의 상황을 짐작했다.
“당신도 안전한 상황은 아니군.”
“지난 열두 시간 동안 히트맨 일곱 명이 제 목숨을 노렸죠.”
안도는 청년당의 의원, 그것도 무려 당수(黨首)다.
그런 안도의 목에 걸린 현상금 역시 적지 않을 것이다.
자신을 노리던 암살자에 대해 얘기하고 있건만, 안도의 말투는 너무도 담담했다.
의결을 앞두고 보수당과 청년당의 갈등이 극단으로 치달은 가운데, 센트럴의 히트맨들은 역대 없던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의원들을 노린 암살과 테러가 계속되고, 경호원들이 그런 히트맨들에 맞섰다.
그렇게 잠시 침묵이 이어지던 가운데…….
“아, 젠장! 아깝다. 아깝게 졌어.”
페이진이 짜증을 내며 패드를 내려놓았다.
‘Game over’라는 글자가 떠오른다.
“페이진, 당신 정말……!”
도무지 진지함이라고는 없는 모습을 보며 카츠미가 눈살을 찌푸리는 찰나, 페이진이 갑자기 손을 들어 올렸다.
“잠깐, 잠깐만 기다려 봐. 이봐, 이 열차 속도가 얼마나 되지?”
“글쎄요, 시속 1300킬로미터 정도는 될 겁니다.”
안도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대답한다.
“그럼… 새가 이 열차와 같은 속도로 나는 게 가능한가?”
“그게 무슨……!”
쾅!!
별안간 하이퍼루프의 차체가 요란하게 흔들리며 굉음이 들려왔다.
그와 함께 하이퍼루프에 비상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삐이이이이!!
“비상 상황이 발생하여 긴급 정차합니다. 다소 흔들릴 수 있으니, 승객분들께서는 착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방송음과 함께 하이퍼루프의 속도가 줄어들기 시작한다.
그 와중에 태일의 눈에 창문 양쪽으로 비행하는 독수리 한 쌍이 보였다.
“저 녀석들은……!”
49구역에서 전투를 벌일 당시, 백련을 구조한 바로 그들이었다.
하이퍼루프의 속도가 줄어들자 독수리들이 높이 비상하며 날개를 거세게 휘저었다.
그와 함께 거대한 바람이 형성되어 하이퍼루프의 터널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휘이이이이잉!
거대한 바람과 함께 철로 터널을 둘러싼 막이 찢겨 나간다.
진공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하이퍼루프이기에 철로의 파괴는 치명적이었다.
알렉세이 딘은 그런 하이퍼루프의 약점을 잘 알고 있기에 구닥다리 수레라며 무시하곤 했다.
아니나 다를까, 속도가 줄어들던 하이퍼루프가 아예 완전히 멈춰 섰다.
“이런!”
줄곧 평정심을 유지하던 안도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내일까지 센트럴에 들어가려면 시간이……!”
이 와중에도 안도가 걱정하는 것은 오로지 의결뿐이었다.
경호원 둘이 급히 그런 안도에게 다가왔다.
“의원님, 열차 안은 위험합니다. 당장 탈출해야 합니다.”
“저희가 길을 열겠습니다.”
“난 괜찮으니까, 빨리 다른 열차나 PAV를 수배해. 당장!”
안도가 다급히 외치는 그 순간.
쾅!!
거대한 굉음과 함께 하이퍼루프의 천장이 종잇장처럼 통째로 뜯겨 나갔다.
하이퍼루프는 엄청난 속력을 견뎌 내야 하기에 엄청난 강도를 지닌 소재로 제작된다. 그러나 독수리들의 능력은 차체를 너무나 쉽게 뜯어 버렸다.
파츠츠츠츠!
태일의 온몸에서 푸른 전류가 뿜어져 나와 공간 전체에 필드를 형성했고, 민호와 페이진, 카츠미 역시 저마다 무기를 빼 들었다.
곧이어 하이퍼루프 객실 안으로 두 마리의 독수리가 유유히 내려왔다.
“감히!!”
그 모습을 본 경호원 하나가 고함을 내지르며 냅다 앞으로 짓쳐 나갔다.
어느새 시뻘건 불꽃이 경호원의 주먹을 글러브처럼 감쌌고, 등 뒤로 추진체와 같은 불꽃이 치솟아 올랐다.
콰아아아아!!
눈 깜짝할 사이에 바로 앞까지 닿은 경호원의 주먹이 곧장 독수리의 몸뚱어리를 향했다.
그러나 그의 주먹이 독수리에게 닿기 바로 직전, 거대한 회오리바람이 일며 독수리들과 경호원의 몸이 감춰졌다.
“다들…….”
태일이 회오리바람을 노려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하이퍼루프 바깥까지 필드를 펼친 가운데, 자기장 필드를 통해 사방의 소울들이 감지된다.
“도망쳐.”
최소 스물 이상.
강력한 능력자들이 일제히 이곳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함정이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